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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보완 수정)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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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중원
댓글 0건 조회 10회 작성일 25-04-18 14:43

본문

아버지와 아들



아들이 고결하게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자신이 먼저 고결해야 한다.
― 플라우투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 김동학은 서울의 명문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 공대를 전체 수석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MIT로 유학을 갔다.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오면 그 즉시 서울대 전기과 교수 자리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무궁무진한 쓰임새를 갖고 있는 최첨단 문명의 이기였던 전기의 전자공학적 원리에 매료되어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기과를 택했던 것이다.
집안에서는 당연히 의대 진학을 주장했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 전 학년 평균 학점이 4.0 만점이었으므로 미국 국무부의 풀브라이트 장학금 수혜자로 선정되어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 “박사 학위를 따고 바로 돌아올 거야, 바로. 돌아온다니까. 그렇지, 바로……. 조금만 기다리라고. 조금만……. 아들 녀석을 잘 키우라고.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하지만 MIT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딴 후에는 벨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 NASA로 옮겨 책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 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고국의 가족들과는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것이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인지 무슨 의료사고인지 소리 소문도 없이 비명횡사했다는 것이다. 아까운 천재가, 천재는 명이 짧다니까.
가족들은 설마 했다. 그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살아있지만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이다. 천재 중의 천재이니까 미국 정부가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특수한 연구에 투입되었고 미국 CIA가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행방불명이 된 기간이 길어지자 가족들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여전히 행방을 알지 못했다. 집안의 가까운 친척인 유력 정치인이 미국 대사관을 통해 FBI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그 곳은 미국의 끝이었다.
막다른 곳. 몹시 더웠고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이 모이고, 지명수배자들이 잠복하는 곳이고, 마약 밀매의 중간 기착지였고, 불법 이민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온 자들이 무한정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임시 소굴이었다.
애리조나 주 노게일스 시.
아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갔다. 그가 유명한 사립 탐정 회사에 의뢰하여 찾아낸 아버지는 멕시코 국경 부근의 작은 도시에서 ‘에드워드 H. 케네스 킴’이라는 긴 이름으로 멕시코 인디언 혈통의 사십 대 초반 흑인 여자와 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붉은 햇살 속에서 그 여자는 맨발로 서 있었다. 그녀는 순수하고 맑은 눈을 가졌지만 몸매가 매우 뚱뚱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그녀는 영어가 매우 서툴렀고 무관심했으며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색 얼굴의 5살쯤 되는 남자 아이가 하나 있다. 그 애는 난생 처음 동양인을 보자 수줍은 듯이 얼굴을 돌렸고 금방 입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도시 외곽 멕시코로 통하는 2차선 도로변에서 구식 주유기 두 대를 설치한 작은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집은 어도비 벽돌로 지은 낡은 판잣집이다. 낡아 빠진 30년대 포드 자동차 한 대가 서 있다. 밀짚모자와 흰 바지를 입은 맨발의 멕시코 남자들 몇 명이 모여 작은 상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캔맥주를 마시거나 어디서든지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대마초를 피우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들이 찾아갔을 때는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으며 (아니면 모른 척했거나) 지난 시절에 대해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난생 처음 보는 아버지 모습인데 보통 키로 170센티미터쯤으로 짐작되지만 뚱뚱하고 통통한 여자의 몸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빼빼 마른 몸이었다. 머리는 한 때는 숱이 많은 검은 머리였을텐데 반쯤 벗겨지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회색 턱수염이 무성하다. 넓은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에는 고단했던 인생 역정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이 두려웠다고 했다.
그는 그때 얼굴을 몹시 찡그렸고 아들이 찾아온 것에 대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무언가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지독한 골초처럼 보였는데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다가 신경질적으로 그냥 던져버리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모든 사실을 철저히 부정했다. “네가 누구라고……?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살고 싶거든 헛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꺼져버리라고. 여기는 험한 곳이지.” 하지만 아들은 물러서지 않고 집요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앨범과 수십 장의 가족사진, 호적등본, 졸업증명서, 대사관의 증명서, 탐정 회사가 조사한 상세한 보고서 앞에 아버지는 마침내 굴복했다.
“그래……. 네가 김필모란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더 이상 부인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아야 한다.”
“뭘…… 말씀인가요?”
“당장…… 떠나거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왜? 또 자식을 낳았나요. 언젠가 그 아이를 내팽개치겠죠.”
“그 아이는 여자가 데리고 온 거다.”
“결혼은 몇 번이나 했나요? 자식은…… 몇 명이나 버렸는가요? 아버지 자격이 있나요? 스스로 비정한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나요?”
“네가 뭘 안다고……? 나는 처음부터 결혼할 자격이 없었어. 그것만은 인정해야겠지. 저 여자는 생명의 은인이니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멀리서 날아온) 할머니와 함께 다시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때 어머니는 오래전에 다른 남자와 재혼한 후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마치고 유학 간 사람이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느냐? 그게 말이 되느냐?
내가 손이 귀한 집에 시집 와서 낳은 외아들인데…… 얼마나 애지중지 키운 아들인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날 속일 수는 없다.
내가 네 애미다.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 …… …… !?”
“서울 공대를 수석 합격하고, 수석 졸업한 MIT 공학 박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거냐?”
“…… …… …… !?”
“너는 네 마누라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난데없이 흑인 여자와 결혼해 살다니……. 네가 떠난 후 우리는 3년 동안이나 그 참혹한 전쟁을 겪었단 말이다. 네 하나 남은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소원이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다오.”
“과거는 묻지 마세요. 나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어쨌거나…… 지긋지긋했지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인걸 깨달은 겁니다.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오랫동안 이렇게 저렇게 헤매다가 결심을 했죠.
다시 말씀드리면……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브레인 워싱을 하여 한국에서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렸지요. 그게 가능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제가 그렇게 믿으면 되는 거예요. 저는 이제 한국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얼굴 모습까지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해야겠죠. 제 인생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거예요. 제가 MIT에서 학위를 땄다든가, 벨연구소나 NAS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는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저는 비겁하게도 유학을 핑계 삼아서 징집을 피했죠. 그리고 나서 미국에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끝까지 도망을 친 거예요.
미국은 무한정 넓으니까 어딘가, 아무 곳으로나 발길 닿는 대로 갔지요. 처음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더 멀리 동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또 남쪽으로…… 그리고 멕시코 국경까지 내려왔지요. 남쪽 끝으로 더 이상 도망칠 때가 없는 곳으로 왔단 말입니다.
한국과 인연은 옛날에 진즉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요. 뭐 무슨 음악을 하고 싶다고. 우물 안 개구리가 가능할까……?”
미국의 푸른 밤. 망각과 부재에 관한 서글픈 드라마.
도시 외곽, 무한정 펼쳐진 황무지에는 밝게 빛나던 저녁 별빛이 점점 사라지며 남은 빛을 뿌리고 이윽고 짙은 어둠이 다가와 대지를 검게 물들인다.

아버지
아버지 김필모 (미국에서 예명은 필립 김)는 1940년대 말쯤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무렵 미국 유학길에 올랐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는 재혼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를 잃을까봐 어머니에게 절대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며 재촉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랫동안 비밀리에 만나고 있던 어떤 남자와 마침내 재혼을 했고 그를 떠났다.
그는 그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주 가출을 했고 마침내 중퇴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버지의 행방불명. 가정 파탄. 어머니의 재혼.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자기혐오증. 무작정 가출. 의지할 데가 없었고 무기력했고 그러나 정서적으로 몹시 민감했다.
나는 정말 혼자이다. 나에게는 갈 곳이 없다. 나는 사랑받고 싶은 거야, 사랑을. 물러설 길이 없다. 아버지가 날 구해줄 거야, 그래도 아버지인데. 틀림없이 구세주인 거지. 수재이고 천재인 아버지라니까.
아버지와의 쓰라린 만남 후에는 오랫동안 뉴욕에서 살았다. 음악 전문학교 작곡과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일년 만에 그만둔 후에는……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는 부스스한 산발에 남루하고 특이한 옷차림으로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음악을 한답시고 통기타를 치며 팝송을 메들리로 흥얼거리고, 가끔 뮤지션 패거리에 묻혀 술집에서 연주를 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돈 한 푼 없는 술주정뱅이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히피들과 어울려 산 것이다.
그들은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기성사회의 관습과 제도, 온갖 형태의 억압에서 해방되고자 하였다. 책임과 의무로 채워진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태양과 같은 정열을 발산했으며 여자를 사랑하였고 히치하이크로 미 대륙을 종단 또는 횡단하는 여행을 하였다.
땟국에 절은 하얀 티셔츠와 째진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터질 듯한 재즈 리듬을 사랑했다. 그들은 돈도 싫고 명예도 싫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겠다고 했다. 늘 구걸한 돈으로 술과 마약에 취했고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뒹굴며 잠을 자기 일쑤였다.
마리화나 환각은 참으로 멋진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꿀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온갖 종류 멋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파노라마가 몽환처럼 흘러갔고, 모든 생각과 논리가 뒤죽박죽으로 엉켰고, 기분이 무척 좋았고, 그러나 악몽이 끔찍하게 계속됐다.
술. 여자. 프리섹스. 피임약. 동성애. 재즈. 로큰롤. 비틀즈. 마약 (대마초, 코카인, L.S.D., 헤로인, 스피드 볼). 27클럽 또는 멍청이 클럽. 자유.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

1960년대 미국의 비트 세대와 히피 운동.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히피 운동의 중심에는 ‘길 위에서’를 쓴 소설가 잭 케루악, 좌익 유대인 동성애자 시인 앨런 긴즈버그와 우익 신교도 동성애자 소설가 윌리엄 S.버로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쓴 소설가 켄 키지, 그리고 유타 주 솔트레레이크 시에서 태어난 주인공 닐 캐시디가 있다. 닐은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지만 비트 세대의 중심 인물이었고 만약 그가 없었다면 비트 세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길 위에서’의 두 번째 초고에서는 딘 포머레이로, 케루악의 사후에 출판된 ‘코디의 환영’에서는 코디 포머레이로, 그리고 출판된 ‘길 위에서’는 딘 모리아티로, 그 뒤에 출판된 ‘달마 부랑자’, ‘절망의 천사들’, ‘빅서Big Sur’에서는 코디 포머레이로 등장한다.
닐은 어린 시절 덴버 시의 우범지대에서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술값을 벌기 위해 거리에서 날마다 구걸을 해야 했고, 14세 때 처음 차를 훔친 후 21세 때까지 500대의 차량 절도와 10번의 체포, 6번의 전과를 기록했으며 소년원에서 15개월을 보냈다. 그는 1945년 겨울 뉴욕으로 왔고 그때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를 만났고 긴즈버그와는 동성애 관계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마약 (마약 판매 혐의로 교도소에서 2년간 복역한 적이 있다.)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길 위에서 운전대를 잡고 미친 듯이 길을 달리는 것이 그가 제일 원했던 것이다. 광란의 폭주. 그리고 낄낄대고 웃으면서 쉼 없이 떠들어대는 것과 연애사건을 그 다음으로 원했다. 여자, 여자, 여자. 그는 이성애자이고 동성애자, 즉 양성애자였고 여자와 세 번씩이나 결혼했고 네 명의 자식도 낳았다. 그는 심오한 인간이었을까, 가장 저질의 사기꾼이었을까, 구제불능의 무법자였을까, 그 당시 평가는 사람마다 달랐다.
케루악은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고 그의 책 ‘길 위에서’가 갑작스럽게 성공하자 자기도취에 빠져서 비트 세대에 적대적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성공 혹은 나이 탓이었을까?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는데, 그들은 그저 좌절하여 히스테리를 부리는 도발자들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원한 외에는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는 녀석들이다.
그러나 시대상은 늘 변한다. 유행과 양식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도래하자 이제는 히피들이 모두 사라지고 여피들이 뉴욕의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은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반듯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맨해튼의 금융기관으로 출근했다.
김필모는 뉴욕에서 철저히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낮에는 금융회사의 구내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밤이면 라이트메탈 밴드의 멤버로 공연을 하였다.
그가 속한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밴드는 빈민가 공동주택과 매음굴, 싸구려 술집, 카페, 도박장, 스트립 클럽이 뒤엉킨 동네인 이스트 빌리지와 그리니치 빌리지, 차이나 타운, 소호 거리의 술집과 클럽을 전전했는데 (그 밴드는 한 번도 뉴욕 남쪽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소방차 색깔 같은 진한 빨간색 긴팔 셔츠에 갈퀴장식이 달린 금속 팔찌를 차고 기타를 치고 가끔 대타로 보컬을 맡았다. 동성애자이고 마약 중독자인 밴드의 리더가 마약의 금단현상 때문에 땀을 흘리고 토하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나올 수 없을 때만 그가 대신했다. 그랬다. 그가 기타를 연주할 때는 신경질적이고 시무룩한 표정에 텁수룩한 턱수염이 나풀거렸다.
하지만 그는 기타 실력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이미 재즈의 특징적 기법인 싱커페이션을 익혔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가락과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제목도 없이 점점 복잡해지는 노랫말과 곡을 쓰기 시작했다.
뉴욕의 히피 소굴이었던 이스트 빌리지 거리에는 마약 밀수업자나 창녀들, 화가, 펑크 로커, 페미니스트, 장래의 혁명가, 게이, 이민자들과 유색 인종들,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이스트 빌리지에서는 펑크록과 뉴 에이브 밴드들의 요람이 되었던 뮤직 클럽 CBGB이 있었다. 그때 전설적 뮤지션들인 필모어 이스트, 키스 자렛, B.B. 킹,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와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시절 한때 그는 마리화나와 벤제드린과 커피를 과다 복용해서 오른쪽 다리에 혈전 정맥염이 생겼고 그게 심장까지 올라와서 심하게 압박을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 마약 중독까지는 가지 않았다. 중독이 될 정도로 마약을 할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음주 소란 때문에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보석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며칠씩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여피 시대가 도래하자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실상은 뉴욕에는 실력깨나 있다고 인정받은 밴드가 발에 채일 정도로 무수히 많았으니 음악계에서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그랬다. 멤버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그 밴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60년대 말쯤인가, 뉴욕에서 만난 동갑내기인 김예진과 일찍부터 이스트 빌리지 11번가에 있는 빈민굴 같은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으나 몇 년 후 헤어졌다.
그녀가 선언했다. “당신과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각자 자기 길을 가자고. 뒤를 돌아보면 안되지.”
그는 그녀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자기혐오증과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몹시 원망했다. 그녀가 떠난 뒤 그의 집은 몹시 더러워지기 시작해서 접시에 먹다말고 남긴 음식찌꺼기와 개수대에 들러붙은 토한 음식물 찌꺼기와 담배꽁초와 빈 맥주병과 더러운 속옷과 광고 전단지와 주사기와 반쯤 째진 앨범 재킷과 바퀴벌레들이 뒤엉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 하치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과 관련해서는 지독한 가난과 숱한 말다툼과 맹렬한 부부싸움,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이스트리버의 회색빛 강물과 그 강을 느릿느릿 거슬러 올라가며 힘겹게 내뱉던 예인선의 기적 소리가 기억에 떠오른다.
그녀는 원래 사진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성공하기 바랐지만 언어적 장벽과 문화적 장벽에 부딪쳐 가정부나 간병인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의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결과물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보헤미안적이고 펑크 문화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 후 거리의 로큰롤 가수였던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유럽 쪽으로 떠났다. 그 후로는 여태껏 소식을 모른다.
필립 김은 또다시 예전처럼 마약과 독한 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절망을 잊기 위해서 그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편의 가사를 쓰고 곡을 썼다. 그가 그때 의식이 돌아오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래들은 어떤 어둡고 깊고 묵직한 메시지가 들어갔고 멜로디에는 음악적 기교보다는 더욱더 인간의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때 만든 음악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발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김예진과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김필모는 귀국하면서 그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뉴욕과 뉴요커에 대한 아름답거나 또는 잊지 못할 쓰라린 추억을 안고 돌아왔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함께 자고 일어나면 밤사이 내린 눈이 언덕처럼 쌓이는 뉴욕의 겨울 같은 추억.
그가 10여 년 만에 통기타를 매고 한국에 돌아와 코드와 선율을 살짝 바꿔서 부른 포크송과 로큰롤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이 흐르는 듯한 달콤하고 섬세한 포크와 로큰롤의 폭발할 듯한 강렬함. 그의 목소리가 사납게 우는 짐승의 포효처럼 시원하게 울려 퍼진다. 후렴구를 가면 갈수록 삑사리가 날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가 그의 엄청난 고음이 터져 나오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렇게까지 갑작스럽게 파장을 일으킬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 인생이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곧 절정에 달할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찬란한 장밋빛 꿈에 부풀어 한국에서 음악인으로서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강력한 자기혐오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은 팝송 번안곡이 거의 전부였다. 그때 쎄시봉에서 조영남, 송창식이나 윤형주, 김세환 등 트윈폴리오는 자기 노래 없이 그런 번안곡이나 불렀던 것이다. 그때 조영남은 자기 스타일로 개조한 ‘딜라일라’를 얼마나 시원하게 불러재꼈는가.
그리고 팝에 목마른 팬들의 환호성이란!?
가수 송창식은 언젠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팝송도 저렇게 부를 수 있구나. 조영남 선배에게서 충격을 받았어요. 제 전공도 팝으로 바꿨죠. 그런데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이크’ 등 다 번안곡이잖아요. 우리가 좋아서 난리가 난 게 아니라 난리를 칠 만한 음악이 없었던 거죠. 원래 한국인은 엿이나 식혜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초콜릿을 들이댄 거죠. 진짜 초콜릿은 만들지 못하고 단지 흉내만 냈어요.

김필모는 장발과 낡고 째진 청바지에 징을 박은 벨트를 하고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의 히피 또는 비트 세대의 원조로 불리였다. 그러나 히피족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미국과 1970년대 한국의 시대상이란? 확연히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국 중산층의 물질주의와 자유주의, 풍요한 생활을 엄혹한 군사정권 하의 한국의 지독하게 가난한 현실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랬으니 한국에서 미국식 히피 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한국에서는 애당초 그런 괴상망측한 비트나 히피는 불가능했다.
그는 싱어송 라이터로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 ‘어느 날 길 위에서’는 공전의 대히트를 하였다.
그 노래는 뉴욕 시절 그녀와 헤어진 후 자신의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서 아버지를 간절히 그리워하며 만든 것이었다.

어느 날 길 위에서

왜 나는 어느 날 낯선 길에 나서는가
어두운 길은 느리고 빠르게 지나갔지
나는 이제 어디쯤 온 건가
아직 갈 길이 멀고 멀지
그래 갈 길이 멀고 멀어
길은 삶이 아닌가
언제나 늙어가고
삶은 어느덧 지나가버리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햇살이 다시 비추네

음 이봐 나는 누구인가
달아난 우리 아버지를 찾아야 한단다
구세주를 구세주를 구세주를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지
나는 그걸 믿지 않았지
실제로 살아있지만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이지
마지막 모습은 언짢았지
그러나 나는 사막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네

그리고 그가 그 무렵 발표했던 ‘다시 거리에서’, ‘일어나라, 일어나’, ‘검은 운동화’, ‘나의 노래, 너의 노래’가 연속 대히트를 쳤다.
하지만 음반이 한참 팔릴 때쯤 기관원들이 음반사에 들이닥쳐 이 음반들을 마스터 테이프와 함께 통째로 압수해버렸다. 그리고 그때 3집까지 발표했던 모든 곡이 금지곡으로 묶여 버렸다. 체제를 전복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불순한 음악이라는 이유였다. 그의 노래는 엄혹한 시절에 자유에 목말라 있던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과 함께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남산 분실로 끌려가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은 후 다시는 그런 종류의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나왔다.
그 수사관이 말했다. “넌…… 인간 쓰레기야. 마약이나 술에 절어 사니까. 그게 예술가의 특권처럼 생각하는데…… 어림없는 수작이야. 네 음악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동물의 울부짖음 소리이지.
소가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그런 소리처럼 들린다고. 네 절규와 포효는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단 말이야. 어쩌겠어?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거나 쥐어짜면 자연스럽지 못하고 틀림없이 언젠가는 네 목소리를 망가뜨리겠지.
여기 오면서 긴 장발 머리를 단정히 묶고 나왔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바로 즉시 짧게 자르라고……
순진한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고 있단 말이야. 알겠어?
무슨 할 말 있으면 해봐. 참작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예술가에게는 자유와 방종이 조금은 필요할 겁니다. 예술을 창작하는 예술가에는 그게 필수적인 요소인 거죠.”
“뭐라고……? 자유와 방종을 들먹인단 말이지? 정말 어불성설이고 궤변 중 궤변이야.”
“궤변이라고요? 너무 지나친 거죠. 저는 그냥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약을 먹은 이유도 음악을 잘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마약 그거 묘해요. 그거 떨어지면 진도가 안 나간다니까요.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 못할 수도 있겠죠? 헛소문이 너무 많아요. 헛소문은 말 그대로 헛소문일 뿐입니다.”
“마약은 어려운 문제야. 내가 감히 마약을 하라 마라 할 수는 없지만 뼈와 이가 상하면서 골병이 드니까…… 조심하라는 말은 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아직은 시기상조라니까.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거든. 여기는 미국이 아니고 한국이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하는 분단 국가란 걸 알아야지.”
“그렇군요.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말이야…… 진심으로 반성문을 써봐.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도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풀어줄게. 나도 한때는 슈베르트 연가곡 ‘Winter Journey’를 엄청 좋아했었지. 그때는 전곡의 가사를 송두리째 달달 외우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네.”
그는 돈을 벌어서 먹고 살기 위해 가수 지망생들에게 기타와 노래를 가르치고, 명동의 음악다방에서 DJ로, 영자신문 교열 기자, 음반회사의 광고부에서 잠깐씩 근무했다. 대개는 상사에게 사소한 이유로 대들고 심하게 싸웠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다. 그는 다시, 어린 시절에는 부모로부터,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기혐오증에 빠졌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음악은 마약과 같은 거여서 한 번 중독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센박과 여린박의 규칙적인 반복과 리듬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빼어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인 것이다.
가끔 싱글앨범을 발표했지만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는 벌써 가요계에서 잊혀진 존재 또는 기피하는 존재였다. 신곡이 나와도 홍보할 창구도 없었고 무대도 없었다. 그는 다시 절망하기 시작했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그리고 목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가 전성기 시절에는 얼굴에 인상을 쓰지 않고 퍼 올리는 초 고음은 멸종된 고대 동물, 육식 공룡의 울부짖음 혹은 철공소의 기계장치에서 나는 굉음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금은 고음은 쇠스랑 긁는 소리로 전락했고 그 크고 풍부한 성량은 거리의 소음이 되어버렸다.
그는 미칠 듯한 불안증에 시달린 나머지 가사도 까먹었다.
목이 불안하니까 입을 한껏 벌려서 입술의 모양을 뒤틀고 혀의 위치를 바꿔서 자꾸 센 소리로 부르고, 힘껏 내질러서 박자의 리듬을 깨는 파격을 시도하며 노래를 세게 하려고 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진짜 짐승이 울부짖는 비명처럼 들렸다.
목이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다. 목을 혹사하다 결국 그 좋았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악기의 연주 감각마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한동안 끊었던 마약과 술에 다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당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마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는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될 대로 되란 기분이었다. 계속적으로 마약과 술과 도박에 빠졌다. 오랜 기간에 걸친 그러한 절제 없는 생활은 그의 목소리를 영구적으로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는 마약 때문에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8번이나 감옥에 들락날락했다. 8번째 구속 당시에는 이미 오래전에 지명수배 중이었지만 쥐새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에 마약 전담 형사들이 ‘쥐새끼’라고 불렸던, 단골 마약 딜러까지 함께 잡혀서 구속됐다.
그는 가수로서 생명이 끝나버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리듬 박자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회복이나 부활은 불가능했다. 그럴수록 그 한없는 고통을 끊기 위해서 더욱 대마초와 필로폰에 의존했다. 얼굴은 피로 때문에 잿빛이 되었고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 무렵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용인의 유명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3년 동안 입원했다.
그 곳을 한밤중 경비가 느슨할 때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갈 곳도 없었고 희망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돈도 한 푼 없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런 소식을 모른다. 물론 세월이 흘렀으니 그를 잊어버렸고 그래서 관심도 없다.

아들이 잘나고 못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맹자)

발라드의 제왕, 김민기
가수 김민기는 지금쯤은 의심의 여지없이 발라드의 제왕이다.
그가 부르는 발라드곡은 서정적이지만 너무 애절하지 않고 잔잔하다. 트로트 형식의 뽕짝 느낌이 전혀 들어있지 않고 재즈적 감성을 더한 현대식 발라드를 부른 것이다. 그래서 구식 발라드를 벗어나서 자기만의 노래를 정립한 것이다.
그의 콘서트는 언제나 소녀 팬과 중년 팬을 망라해서 만원이었다. 세대를 아우르는 두터운 팬층.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정규 앨범과 싱글 앨범. 수백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
언젠가 발라드 가수 이승철이 말했었다.
……콘서트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지루하면 안돼요. 대중은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지루해집니다. 아무리 셀린 디옹이라도 콘서트에 가서 내가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지루해요. 그런 틈을 안 줄 만큼의 레퍼토리를 가지려면 롱런하면서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야 하죠.
……감탄을 주는 노래와 감동을 주는 노래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요. 감탄은 기교적으로 많이 올라가고 관객의 함성을 많이 끌어낼 수 있는 노래죠. 하지만 보컬이 노래는 좀 못하고 음정은 좀 안 맞더라도 가슴으로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그게 감동을 주는 노래예요. 그걸 부르는 사람은 가짜가 없죠. 감탄을 주는 사람은 가짜가 많죠. 존 레넌이 노래를 잘하나요? 독특하잖아요. 그 세계가.
……일류는 자신은 무심하게 부르지만 듣는 이는 감동하고, 이류는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같이 감동하고, 삼류는 부르는 이 저 혼자 감동하지요.
김민기는 매년 전국을 돌며 30번 가까이 콘서트를 하였다. 한 해에 30회 공연으로 엄격히 제한한 것이다. 나머지 시간에는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색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면 먼저 관객들과 말없이 눈인사를 교환한다. 그때 결코 작지 않은 교감이 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관객들은 이 순간에 그에게 신뢰와 격려와 그가 부를 노래에 대한 공감과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때로는 노래를 하면서 눈을 감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관객들이 내뿜는 호흡을 느끼고 흡수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눈에는 슬픔과 격정이 담겨있다. 목소리는 맑고 높고 순수했다. 국악의 3박자 가락과 컨템포러리 리듬 앤 블루스의 세련된 스타일과 재즈 리듬이 약간씩 뒤섞인 발라드는 그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아득하면서도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독창성과 끌림과 중력의 원천이기도 한 가슴을 저미는 노랫말.
꿈과 낭만과 추억과 어떤 갈망이 흐르는 예언적인 소네트.
가수는 공연 무대에서 관객과 마주 보면서 화합하고 소통하여 하나의 음악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는 무대를 일방적으로 장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시공간 속에서 상호 작용을 하며 함께 어울렸다. 그게 라이브 공연의 장점인 것이다.
그는 공연할 때마다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아랫배에 한껏 힘을 주고 스스로를 불사르고 영혼을 쥐어짰다. 때론 그의 삶을 억눌러온 고통과 공포심을 폭발적인 성량으로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 소리에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했다. 그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리가 나왔다. 그는 노래에 그만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했고 노래의 줄거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안개처럼 그를 휘감았고 환호와 박수소리가 부유했다. 공연장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열기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라 라 … 라 라라 라 라… 라 라…… 라…… 라라 라…………
그때 드러머가 마음을 담아 날려 보내는 것처럼 조용히 드럼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의 가수로서 성장과정을 추적해보자.
그는 5살 무렵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과 중학교 1학년까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96년부터이다.) 그 시절 아버지가 사준 베이스 클라리넷을 자주 불지는 않지만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결혼도 하지 않고 만날 술과 마약과 음악에 탐닉하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매몰되어 살았으니 그에게 정성과 관심을 쏟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했지만 결국 2학년 때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가난해서 필수적인 발성 연습과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없었고 레슨을 받을 수가 없었으니 실기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비싼 학비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를 암암리에 지극정성으로 도와줘서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었던 할머니가 오랜 지병으로 앓고 계시다 그 무렵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는 예고 성악과 시절에 처음으로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알았다. 그 무렵 슈베르트의 평온한 음악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스물네 곡으로 이루어진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셀 수 없이 많이 들으며 음악성과 주제, 빌헬름 뮐러의 노랫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며 흉내라도 낼 수 있게 ( 사랑과 이별의 애절한 감정을 목소리에 실을 수 있을까…… 노래의 절정에서 고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 수없이 따라 부르고 불렀다.
그는 언젠가 공연 무대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겨울 나그네 전곡을 독일 예술가곡의 형식으로 부르겠다는 열망을 안고 있었다.

나를 멸시한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먼 길을 돌아다녔다. 여러 해 동안 노래를 불렀다.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고 할 때마다 사랑은 고통이 되었고, 고통을 노래하려고 하면 고통은 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한동안 상거지처럼 살았다. 서울역 대합실과 세종로 지하도에서 몇 년씩이나 노숙을 했다. 그때부터 만성 위장병을 앓았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자주 위장에서 발작적으로 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으며 가끔은 욕지기가 나고 토했다. 그때는 그 형편에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훨씬 나중 일이지만 여러 의사들은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고 그때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일까. 오직 음악만 생각했다. 반 지하 월셋방에 살면서 음식점 주방일, 중국집 배달, 공연장에서 허드렛일, 행사 진행 보조, 공사장의 막노동 등 손에 잡히는 아르바이트는 모두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악보를 더 잘 읽으려고 노력하고, 발성의 기본으로 돌아가 매일 혹독한 연습을 했으며, 기타를 들고 수많은 노래 속에 숨어있는 코드 구조와 리프의 마법을 풀어나갔다.
그는 어떤 곡이건 종류를 불문하고 한 곡도 빠뜨리지 않으며 모든 곡을 조금씩 조금씩 끈질기게 연습했다.
그 무렵 종로의 헌책방과 도서관을 뒤져서 음악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화성학과 발성법, 작곡법, 대위법, 특히 재즈 편곡 등을 배운 것이다.
그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어느 정도 음악성을 인정받아 명동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기 노래는 없이 외국 팝송을 주로 불렀는데 이렇게 해서 앞으로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은 재능도 없고, 전망도 보이지 않는데 그만둬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였다. 불안 강박 편집증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음악가로서 자질을 의심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외국 것만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그녀가 있었다.
두 살 연상이었고 그 당시 신촌 로터리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레코드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 누나가 말했다. “야! 너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해야 하지. 너에게는 음악밖에 없다니까. 그걸 내가 알고 있어.
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심장에 곧장 꽂히니까 죽고 싶을 만큼 진저리를 치게 되는 거야. 네가 공연할 때마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죽어라 박수칠 테니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때부터 자신이 부를 노래의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평생을 이어온 습관이 되었으니 그 메모가 어느덧 수천 개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섬세하고 덧없는 순간에 영적인 현시처럼 악상이 떠오르면 그들 메모 중에서 맞는 것을 골라내서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수정을 하고 수정을 했다. 무한정 되풀이되는 보완 수정이야말로 그의 음악의 핵심 과정이었다.
그때부터 단 하루도 연습을 건너 뛴 날이 없었다. 그의 음악적 생명이었던 손때 묻은 기타는 잠시라도 쉬면 실력이 줄게 된다. 그는 매일 최소한 한두 시간 가량 기타를 풀고 조이고 나서 튕겼고, 가끔 분노와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미친 듯이, 드럼을 두들겼다. 연습용 레퍼토리는 늘 헤비메탈이었다.
그리고 슬프면서도 즐겁고, 즐거우면서도 슬픈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고 싶어서, 서양 음악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동양 음악인 안숙선 명창이 부르는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마당의 심오한 선율을 분해하고 융합해서 새로운 선율을 창조하기 위해 그들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분석했다.
그가 쓰는 곡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이제는 제법 곡 분위기에 맞춰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과 함께 절망감이 동시에 교차한다. 그가 어둠침침한 지하방에서 애써 작곡했던 노래들이 언제쯤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인가? 그러나 그가 만든 노래가 가뭄에 콩 나오듯이 가끔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흘러나올 때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이 짜릿했다.
그 순간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황홀할 때도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실패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과연 성공이란 무엇일까?
싱어송라이터 가수로서 가창력과 작곡 실력을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러면 내가 나를 알아주면 그만일까? 탈출구는? 가장 우울한 경험인 실패가 결국 나를 성장시키고 성공의 밑거름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지 않는가? 하지만 꼭 성공해야만 하는가? 뭘 위해서…… 성공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일시적 환상이고 곧 꺼져버릴 불꽃이거나 곧 지게 될 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언제나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가슴을 먹먹하게 억누르고 무엇보다도 언제나처럼 망설임과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처음에는 홍대역 부근에서 주로 활동하는 3인조 또는 4인조 (리드 기타가 둘이거나 베이스가 둘일 때가 있었다.) 인디밴드에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참여하였다. 그 밴드는 우리 귀에 익은 포크송을 블루스 풍으로 편곡하거나 변주를 하였는데 원곡의 섬세한 선율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기타 선율은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쳐났다.
그들 밴드는 춥고 더럽고 지린내 나는 좁은 지하 공연장에서 오프닝이나 메인 공연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였지만 결과는 항상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그 밴드는 진지한 드러머가 없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드러머가 들락날락하니 서로 간에 호흡이 맞지 않고 자주 음정을 놓쳤다. 그랬으니 멤버 상호 간에 상호 존중과 연대의식, 끈끈한 유대감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 네 탓을 하며 싸우다가 해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타를 치면서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데 한계를 느꼈다. 노래와 연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밴드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했다. 그때쯤 솔로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어렵게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수없이 복사해서 라디오 방송의 DJ나 PD, 음반 제작사에 보냈지만 도대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말했다.
뜨뜻미지근하지. 독창적이지도 않고 흔해빠진 거야. 다른 곡을 대충 베낀 거니까. 나쁘진 않지만 대단하지도 않지.
그가 자비로 낸 앨범 역시 뜨지 못했으니 (그때 스튜디오의 녹음실에서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앨범 계약이나 저작권 계약도 없었고 단독 공연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럭저럭 유명 가수의 공연 때 찬조 출연을 해서 막간을 이용해 한두 곡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가끔 선배들의 음반 녹음에 악기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떤 때는 가끔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는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객석과 호흡이 잘 맞아서 좋았다. 노래와 노래 사이 막간을 이용해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청중들과 소통하다 보면 어느새 청중들이 그의 공연에 동참하였다. 음향시설이 형편없었고 전기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앰프를 절반쯤 꺼야 했지만 말이다.
그랬으니 여전히 생활은 궁핍했고 돈에 쪼들렸다.
그 무렵 나이트클럽 등 야간 업소에서 출연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두세 군데만 뛰어도 수입이 상당해서 당장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무렵에는 소극장 무대와 밤무대로 확연히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대꾸했다. “그런 곳에 갈 수는 없지요. 내 음악은 거기에 맞지 않지요. 그런 델 나가면 제 목소리도, 제 영혼도 망가질 겁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가수는 공연과 음반 활동으로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외국 번안곡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노래에만 집중했다. 그는 참고 견디며 기다렸다. 그는 진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어느 가을날, 어느 서정 시인의 시, ‘가을의 노래’를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때 순수한 시적 힘에 압도되어 눈물이 날 만큼 감탄을 했고 노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는 그가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는데 시적 자아의 언어에 리듬과 뉘앙스가 스며있고 가을의 풍경과 사랑과 연민의 감정과 어두운 순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시는 발라드곡의 리듬 곡조와 가을의 미풍처럼 허세를 부리지 않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딱 어울리게 많이 개조되었으므로 여기서 인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시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용했기 때문에 원작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발라드곡에 맞춰 가사는 개조할 수 있었지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오르고 계속적으로 마음이 들뜨고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작곡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 작곡가이면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가끔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숨은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어느 선배 작곡가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그는 몇 개월 후 그 곡을 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 그 작곡가는 약속된 기일에 악보를 넘기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어겼지만 ) 그 순간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감격한 순간도 잠시였고 도대체 노래가 목소리에서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 작곡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긴장을 풀라고. 왜, 그렇게 뻣뻣한 거야!”
“…….”
“발라드는 춤을 추는 거야. 조금은 부드러워야 한단 말이지. 너무 지나치게 센티멘탈해도 안되고 너무 느려서도 안되고 차분해야지. 유연하고 섬세하게 감정을 담아내야지. 그렇다고 너무 유순하고 밋밋해서도 안되고. 서정성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되고. 달콤한 멜로디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되는 거야. 허세를 부리면 안돼. 아무리 블루스 계열이라고 해도 음정 박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욕심부리지 말라고. 박자를 놓치면 큰일이야. 그때 필사적으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해도 관객들은 눈치를 채고 실망하게 되지. 네 분노를 쏟아내지 마. 당연히 너무 장엄해서도 안되는 거야. 너무 거만하고 고급스럽게 노래해서도 안되고. 발라드는 가사 전달이 중요하니까 너무 몽환적인 창법이어서도 안되지. 피날레에서 긴 여운이 남아야 하고 그래서 멋진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죠?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때려 치워. 때려…… 뭐? 발라드 가수가 되겠다고?”
“……”
“네 주제를 파악하라니까.”
“……”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네. 여기서 그만두자고.”
“그럴 순 없습니다.”
“뭐라고……?”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벌써부터 자포자기해서는 안되겠지. 다시 시작하자고.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뜨내기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 말이야. 사랑과 이별의 절절한 감정이 중요하거든.”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한국적 발라드이지만 한창 유행했던 슬로우 미디엄 템포의 뽕 발라드는 절대로 안돼. 그러면 폭삭 망하는 거야. 알겠어? 그건 진즉 한물갔다니까. 재즈 발라드 계열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퓨전 재즈도 아니고 스무드 재즈도 아냐. 발라드는 클래식과는 거리가 가깝지만 너무 고급스럽거나 우아하다는 느낌을 주면 안돼. 어쨌거나 대중음악이니까. 섬세하고 서정적인 노래이긴 하지. 피아노와 현악기 주도로 풍성한 사운드가 받쳐 줄거야.
악단의 반주 음악과 충분히 교감해야 하지만 악단을 너무 믿지 말라고. 네 노래가 중요한 거야. 악단의 연주 테크닉에도 한계가 있고 경계선이 있는 거야. 균형이 중요해. 이건 네 노래야. 자기 목소리가 중요하지. 존재감을 보여주라고. 걔들이 하는 음악을 극복하란 말이야.”
“뭔가 깨달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지. 내 작곡은 누구한테서 훔친 거고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주제를 변조한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악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그건 너의 권리이면서도 의무야.”
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한 달여를 전국 방방곡곡 해안가를 걸어다니며 자신을 독려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닷바람 혹은 거세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를 다그친 것이다. 그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 작곡가가 화가 나서 욕을 해주길 잘했어. 그 욕을 들으니까 이상하게도 속이 후련해졌거든. 그런 지독한 욕을 한 번쯤은 먹어야만 좋은 약이 되는 거야.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자기 분석을 하면서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던 구조적 문제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너무 음악에 가까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음악의 내밀한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했다. 그 노래를 몇백 번이나 목이 터져라 부르고 또 불렀다. 이제야 발성과 호흡과 음악적 직감이 그 곡에 완전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악기들과 만나 하모니를 만들면서 노래가 생명력을 얻었다.
일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불가해한 신비와 정적이 녹음실을 감싼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작곡가가 흥분해서 말했다.
“훨씬, 좋아졌네! 훨씬……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나올 줄이야! 당장 녹음 들어가자고!”
“그런가요!?”
그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더니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소리 죽여 울다가 어쩔 수 없이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 작곡가도 어쩔 수 없는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다. 눈물이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펑펑 쏟아졌다.
그때까지 고되고 지난한 긴 인생 여정 중에서 가끔 눈물을 흘렸지만 그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펑펑 울면 분노가 해소된다. 울음은 위안이 된다. 눈물은 슬픔을 가라앉히고 날려버릴 수 있다.
진짜 가수 인생이 지금 막 시작된 기분이다. 여태껏 겪은 모든 수모는 모조리 이 순간을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이제 새삼스럽게 오디션을 볼 필요는 없었다.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의 두목인 그 작곡가의 추천으로 어느 (음반을 녹음하고 제조할 수 있는 녹음실과 프레스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는) 음반 기획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가 고집스럽게 내세운 조건은 TV 등에 출연하지 않고 오직 음반 판매와 라이브 공연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데뷔 앨범의 녹음, 믹싱, 마스터링을 진행했다. 그 앨범은 ‘가을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해서 그가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해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여러 편의 노래와 몇 편의 연주곡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그 노래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그때부터 그는 시쳇말로 뜨기 시작했다. 붕! 붕!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찬란한 태양이 활활 타오르는 하늘로! 삶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삶의 꽃이 춤을 췄다!
가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좋은 노래를.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런데 가수는 팬들이,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있어야만 한다. 콘서트장에 팬들이 몰려와서 웅성거리고, 휘파람을 불고, 박수 치고, 너무 울고 웃고, 팬츠에 오줌을 지리고,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하고 앙코르가 이어져야 한다.
팬들과 진심이 통해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 팬들이 진심으로 감동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사람의 마음을 끌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무대에 올라가는 걸음걸이, 말하는 방식, 태도, 그가 무대에서 하려고 애쓰는 것들을 팬들은 바라보고 경청하고 감상하고 참여하고 향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살고, 시인은 시를 먹고 살고, 가수는 음악과 팬들의 박수를 먹고 살아야 한다. 그 외의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

김민기는 언젠가 청주교도소로 아버지를 면회 갔다.
그는 어린 시절 신촌 부근에서 월셋집과 전셋집을 전전하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 시절을 새삼 돌이켜 보면 그건 어떤 종류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할 순 없다. 아버지는 아무 뚜렷한 이유 없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항상 두렵고 무서웠다. 아버지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고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아버지를 증오하고 반항한 적은 없었다. 그랬었다. 아버지가 단 한 번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쁜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조금 무심했을 뿐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부터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몇십 년간을 남남처럼 아예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아버지란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고 어쨌거나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어찌된 일인가? 아버지 얼굴이나 모습이 도대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옛날에 이미 재혼하여 출가한) 할머니만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그는 그 할머니의 도움으로 무난히 먹고살 수 있었고 예고에도 갈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그 옛날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서울에 도착했을 때 유일하게 반갑게 맞이해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대견한 듯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 새끼 많이 컸네. 영락없이 애비를 닮았구나.” 할머니는 그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커갈 수 있게 감싸주고 격려하고 돌봐주었다.
인자하고 굳센 할머니는 생명의 기둥이고 마지막 안식처였다.
할머니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는 더욱 아름답다.
그래서 ( 민들레와 오랑캐꽃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 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인 ) 할머니 기일에는 혼자서 경기도 가평 대금산 골짜기 양지바른 소나무밭에 있는 산소에 간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리워서 매번 눈물을 쏟았다.
거기에 할머니 집안의 선산과 가족묘가 있다.
그 옛날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간 후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는 그리움을 달래려고 평생동안 맹물을 안주로 해서 소주를 마셨다.

교도소 면회실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반갑고 그리웠다기보다는 가슴이 먹먹해서 계속 말문이 막혀버렸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쩐 일이냐……? 왜 갑자기……?”
“……”
“이왕 만났으니까 가슴에 맺혔던 말을 하고 싶구나. 내 자식을 알뜰살뜰 자식답게 키우고 싶었어.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안 되었지. 나는 방랑자였으니까. 뭐라고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네.
그렇게나 평생 증오했던 내 아버지를 그대로 닮고 말았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악에 굴복했다는 생각이 들고, 삶을 배신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한다면 우리가 화해를 할 수 있을까?
네 노래가 점점 좋아지고 있더구나. 리듬 박자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야. 불협화음은 안되지. 음악에도 생활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단다. 음악적 기교보다 언제나 인간의 따뜻한 감성이 더 우선하는 거야. 감정이입 말이다.
네 음악 스타일에는 시끄럽고 요란한 헤비메탈은 맞지 않아. 그건 사람을 어지럽게 하고 마침내 미치게 만들지. 그리고 전자음을 가급적 멀리하란 말이지. 결국 언플러그를 하란 말이 되겠군. 그게 인간적인 거야. 하지만 때로는 일렉트릭 기타와 일렉트릭 피아노, 드럼 머신의 미묘하고 몽환적인 음색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
내 생각은 그래.
지금쯤…… 음악을 즐겨라. 관객들의 환호를 즐거워하고 기뻐해라. 난 뉴욕에서 술에 취한 머저리들을 앞에 두고 밴드 공연을 할 때면, 무대로 나아가면서 마치 출근 카드에 싸인하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었지. 나는 평생을 자기혐오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언제나 절망적이었지.
너만은 아주 잘하고 있어. 자기 보호와 자기 존중 말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려면 자기 집이 있어야만 하지. 음악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면 그건 예술을 모독하는 거야. 하지만 뒤늦게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 반드시 독립적인 삶이 필요하지.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네 애들이 많이 컸겠구나.
이곳은 네가 올 곳이 못 된다. 다시는 오지 마라.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간곡히 부탁한다. 다시는…… 다시는…… 날 찾을 생각을 하지 마라. 면목 없구나. 면목이……. 나쁜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너의 앞길에서 사라져주는 거겠지.

그는 누나와 결혼해서 3녀 1남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아내는 다시 다섯 번째를 임신했다.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대마초도 피운 적이 없다. 그리고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가수임에도 여태껏 스캔들 하나 없다.
젊은 시절 한동안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그때 고통과 공포심이 엄습할 때마다 담배를 피운 적은 있었다. 그는 왼손잡이이면서도 담배를 피울 때만은 담배를 오른손에 들었다. 그러나 담배가 자신의 목소리와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고는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그는 오직 저작권료와 공연 수입으로만 산다. 서초동 남부터미널 근처 아담한 단독 주택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산다.
그는 가족과 자신의 노래와 팬들의 사랑, 삶의 무게 이외에 더 이상 어떤 욕심도 없다.
조용하고 절제력 있는 생활. 행복한 삶.
그러나, 어찌 명곡에 대한 욕심이 없겠는가. 명곡에 대한 욕심은 모든 가수가 죽어서 관에 들어갈 때까지 꿈꾸는 것이다. 그는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트랙인 시작곡부터 맨 마지막 곡까지 전체를 자작곡으로만 채운 자기 앨범을 7집까지 발표했지만 여전히 명곡에 목말라 있다.
하지만 명곡이 무엇이란 말인가.
불멸의 음악이여!?
너는 깊은 영혼이다!?
하지만 기계에 불과한 컴퓨터가 음악에 너무 많이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뻔한 레퍼토리에 안주해서도 안된다. 음악은 진화되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음악과 반대로 가는 정체되거나 반동적이어서는 안된다. 겉포장은 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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