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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설득, 전향 轉向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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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중원
댓글 0건 조회 32회 작성일 26-05-09 11:49

본문

대화와 설득, 전향 轉向





넘치는 성령의 빛으로

제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빛을 보게 하시고,

제 귀를 여러 주시어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제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생명을 받아 안게 하소서.





그 무렵 심학무는 국정원의 높은 분인 북한 담당 염무성(廉茂聖) 국장과 면담하게 되었다. 염 국장은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16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키에 머리칼은 점점 빠지고 있었으며 귀 뿌리 주위 촘촘한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닳고 닳은 아주 노련한 조사관 출신처럼 보였지만 권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장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는 3사관학교 출신으로 원래 국군 정보사령부 공작단 소속 장교였다. 정보사 공작단은 국정원의 예산 지원과 감독하에 대북공작을 전문적으로 실행했다. 그는 연길 지역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한 실적을 인정받아 특채 형식으로 그 당시 안기부에 스카웃되어 대북공작을 담당하는 제2차장 산하 해외사업국에서 몇 명의 비밀 공작원을 지휘하는 전문 공작관으로 근무했고(흔히 공작관과 그가 지휘하는 공작원은 바늘과 실 또는 야구에서 포수와 투수에 비유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제1차장 산하 대공 수사실 소속이 되었다.

그는 계급정년에 걸려 퇴직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국장이지 실제 직급은 그 아래였고 임시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인맥과 학벌, 지연 등이 제한되어 있어서) 승진할 가망은 전혀 없다. 더욱이 홑몸이다. 요즘은 자기 연민에 빠져서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쉴 새 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자주 술을 마시지만 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루빨리 재혼하라고 강권을 하지만 그는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전혀 자신이 없어서 차일피일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긴 여름날의 태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국정원 대공상담실은 강남 테헤란로 이면 도로에 있다. 그들은 아늑한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잡담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응접실은 꽃무늬가 들어있는 회색 벽지로 둘렀고 바닥에는 단순한 무늬의 카펫이 깔려 있다. 북쪽으로 난 큰 창문에는 하얀 플라스틱 커튼이 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수수했고 단순했다. 벽에는 흔해빠진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조 그림 하나 걸려있지 않다. 부하 직원인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남녀가 시중을 들었다. 남자 직원이 말했다. “국장님, 저희는 옆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수고했네.”

처음에는 둘은 잠깐 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술이 돌면서 어느 순간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국장은 사나이끼리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는 커피보다는 술이 좋다고 하였다. 탁자에는 스웨덴 보드카 앱솔루트 두 병과 맥주 두 병, 양담배, 술안주 등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안주는 마른 안주와 과일, 달걀 오믈렛으로 만든 샌드위치, 치즈 등이었다.

국장은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둘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다음 단숨에 들이켰다. 심학무는 술이 혀끝을 맴도는 것을 느끼는 순간 뱃속이 뜨거워지며 열기가 훅 치밀어 올랐다. 잠시 아찔하면서 몽롱한 상태에 빠졌다. 긴장이 풀리고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 풀어졌다. 그는 ‘역시 술이야’라고 생각했다.

국장이 말했다. “염무성 국장이오. 말이 국장이지 지금은 별 볼일이 없지. 옛날이 그립다네. 우리 기분 전환하자구…… 상의를 벗으라구. 술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이거 북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스웨덴 술이야. 보드카 맛은 아주 미묘하지. 우리끼리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술을 마시면 혀가 풀리니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은 거야.”

국장의 예리한 눈은 전문가답게 심학무를 평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길에 심학무는 자신이 신참 풋내기로 느껴졌다. 스무 살 정도 연상이었고 공작원으로서 경험이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같이 일하는 사람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더 깊이 그리고 더 잘 알게 된다. 서로 만나면 근육과 신경은 긴장하여 아주 조그만 제스처나 얼굴의 표정에도 반응하고 모든 감각기관은 더욱 민감해진다. 상대방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아주 사소한 행동의 미묘함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가장 은밀한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심학무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술은…… 처음 구경하지요.”

“심신이 완전히 지쳐 있을 거야. 이런 때는 술이 최고의 보약이지. 어떤 골빈 의사가 독한 술이 머리를 썩게 만든다고 헛소리를 했지만…….”

“지금 산산조각이 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양주를 마실 때 괜히 폼 잡으려고 술과 얼음을 섞어 마시는데…… 그건 아냐. 술맛을 버리는 거지. 그러려면 차라리 맨 물을 마시는 게 낫지. 괜찮겠어?”

“저는 상관 없습니다.”

국정원 사람들이 심학무를 (최고급 가죽 소파, 크롬 도금한 내부 장식, 천장과 바닥을 네온처럼 비춰 주는 LED 조명, 웅장하게 울리는 음향 시스템, 물병이 담긴 아이스박스, 선루프 등이 설치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에 태워서 내곡동 본부에서 출발하여 서너 시간 동안 강남대로에서 한남대교를 건너 장충동으로, 워커힐 호텔, 남산 타워, 세종로, 연세대학교, 여의도 63빌딩을 거쳐서 다시 역삼동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니까 모처럼 바깥 바람을 쏘여 주려 한다고 생색을 냈지만 실제는 남한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북한과 비교해보도록 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게 목적이었다.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니까…… 기분이 어땠어?”

“부럽군요. 사람들이 숨 쉬고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거기에 속지는 말게. 서울은 만원이라네. 인간도 세상도 너무 복잡하지.”

“감사합니다만…… 갑자기 정장을 억지로 입히고…… 리무진에 태워서 뭘 어쩌겠다는 거죠?”

“오해하지 말게. 그 동안…… 사죄하는 의미로 받아 주게.

이건 수사하는 게 아니야. 조서를 작성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자유롭게 대화를 하자고……. 서로 궁금한 게 많을 거 아닌가. 나도 군 장교 출신이고 오랫동안 공작원 생활을 했으니까. 우리는 같은 공작원 출신으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단 말이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지. 내가 만약 연길에서 체포되어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솔직하자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까 진의와 숨겨진 의도를 가늠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을 거야.”

“간첩들이 말하는데 솔직한 대화가 가능할까요? 제가 반박을 해도 화를 내시지 않겠다는 건가요?”

“왜? 화를? 반박을 실컷 하라고.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성립하니까. 상대방의 말을 끊고 끼어들면 안 되는 거지만. 당신을 빈정거리고 싶지도 않지.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감없이 하겠습니다.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내뱉는 견해이건 신념이건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대립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겠나?”

“제가 굳이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는……”

“오해하지 말게.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말이야…… 문제의 해결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음의 짐이 상당히 줄어든다고 하지.”

“그럴까요?”

“나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많다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자기 자랑을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끼리 격렬한 토론은 피하자고.

그러면 술맛이 떨어지니까. 차라리 잡담하는 기분으로 얘기를 하자는 거야. 화제를 바꿔보지. 남자들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못하면서 많이 마시는 것처럼 자랑을 하는데 술을 마셔보면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마시자고. 우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내 말이 오락가락하면서 옆길로 샐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합동신문센터에서는 마음 놓고 담배 피우기도 어려웠을 거야. 규칙이 그러니까. 이거 한 번 피워 보지. 미제 말보로 골드인데 이게 조금 순하긴 하지만 맛은 일품일걸. 북쪽 담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거야.”

“담배 없이는 못살 거 같습니다. 탈북하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웠거든요. 그런데 합신센터가 기가 막혔지요. 조사관들은 내 앞에서 연기를 마구 뿜어대며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더러 자백하면 담배를 주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담배는 원기를 북돋아 주니까 기분을 좋아지게 하지.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 바에야……”

“담배는 세상에서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스파이들은 대개 골초야. 환경이 그렇거든. 긴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기다리는 게 우리의 운명이야. 긴장을 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담배가 최고야. 담배는 진정제 역할을 톡톡히 하지.”

“국가적인 모순이지요. 국가가 운영하는 담배회사가 담배를 생산해서 팔아먹으면서 한쪽에서는 금연운동을 국가적으로 펼치고 있으니까요.”

“지친 기색이야…… 더운 여름에 조사받으면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어……? 지금 정신이 산만해서 제정신이 아닐 거야. 이 술로 잠시나마 그런 것들을 해소하라고.

그런데 술은 밤에 마셔야 제맛이 나는데 말이야. 술은 진정제야. 뱃속을 편하게 해줄 거라고.”

“술이라면……”

“실컷 마시고 취해보게. 그러면 본래의 모습이 자기도 모르는 새 튀어나올 거니까.”

“저는 조사과정에서 모습이 충분히 노출되었지요.”

“그런데 말이야…… 내 고향이 남쪽 끝 바닷가야. 지도에서 보면 길쭉하게 바다로 뻗어있는 반도야. 면사무소에서도 십 리를 더 들어가는 바닷가인데.

나는 가난한 어부의 자식이야. 부모님은 평생을 거친 바다에서 살았어. 나는 어렸을 적 바다를 정말 두려워했지만. 파도에 휩쓸려 멀리 떠밀려갈까 봐 벌벌 떨었던 거야. 큰형님은 지금도 고향에서 바닷일을 하고 계시지.

당신 역시 산골 중의 산골인 함경도 갑산 출신이던데……?”

“지금은 양강도 갑산군입니다. 억지로 쪼개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사이에 양강도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갑산은 함경북도 길주와 붙어있어요. 길주는 혜산역에서 출발하는 백두산청년선과 평라선이 교차하는 교통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갑산에 살았지?”

“저는 증조부 때 일은 잘 몰라요. 할아버지 때부터……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해방이 됐을 때 연세가 얼마쯤 되었을까.”

“아마 사십 대 초반쯤 되었을 거예요. 할머니가 두 살인가 세 살 위인데 길주 출신이에요. 할아버지는 아마 글을 읽을 줄 몰랐을 겁니다. 그래도 가난한 농민 출신이니까 의식이 있어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사상에 빠져 농민조합에 가입하였답니다. 그 때문에 경찰서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매를 맞고 나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해방이 되고 나서 김일성이 단행한 토지개혁령에 의해 상당한 혜택을 받았을 거 아닌가?”

“1946년인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하에 토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때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농민을 네 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5정보 이상의 땅을 소유한 사람은 지주, 그 다음은 부농, 중농, 빈농 순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빈농에 속했습니다. 해방 후 혼란스러울 때 공화국은 모든 빈농에게 땅을 주면서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라도 갑자기 농토가 공짜로 생기니까 너무 좋아서 마을에서 제일 먼저 공산당에 입당해가지고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6·25 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는 1949년 갑산고등중학교를 막 졸업했는데 바로 인민군에 징집되어 들어갔어요. 고등중학교 동기 동창인 지주의 아들과 함께 징집되어 신병훈련소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나서 인민군 15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의 다부동 전선에서 인민군이 패퇴할 때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가 오판한 거야.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거든. 그래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니까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서 통일을 하라고 특명을 내렸지. 그런데 미군이 개입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당한 거지. 전투에서는 강이란 게 지형상 굉장히 중요하지.

그게 방어막 구실을 하는데 그 당시 인민군은 허겁지겁 내려오면서 강을 건너는 장비가 없었어. 게다가 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서 끊겼단 말이야. 맥아더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어.”

“남조선에서는 맥아더가 영웅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정히 평가해야만 하지.

더글러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어. 그는 극동사령부 사령관인데도 한국전쟁 발발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어.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중국이 참전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했어. 그 역시 심각하게 오판한 거지.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맥아더는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만약 원자탄이 우리나라 좁은 땅에 떨어졌다면 말이야…… 우리 한민족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해 보라고.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지?”

“아버지와 지주 아들은 함께 포로가 된 후 처음에는 부산의 임시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나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전선과 비교하면 식사도 제대로 나오고 잠자리도 그런대로 편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목숨을 건 투쟁 때문에 포로들이 수없이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지금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자리에는 유적공원이 만들어졌지.”

“1953년 포로 교환 당시 아버지는 당연히 북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주 아들은 끝까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에서야 결국 반공포로가 되어 남쪽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지막 만났을 때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조선을 택했다.

남쪽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앞날이 막막하지만 북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돌아가면 착취 계급인 지주 출신이라고 온갖 핍박을 받을 거니까…… 우리 집에 가거든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내가 막심한 불효자식이니까.’

아버지는 1953년 9월 초순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북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지주 집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인민군에 의해 가족이 전부 총살당했고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지주 아들은 지금쯤 남한에서 사업에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을 거야.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하기로 소문이 났으니까. 아니면 한밑천 장만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수도 있어.”

“아버지는 인민군에서 10년을 복무한 후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우리 형제들을 낳은 거지요.”

심학무는 회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았다. 조부모님, 부모님, 큰형님, 누나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어린 시절 고향의 집과 마을이 차례로 떠올랐다.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는가. 아버지는 오랫동안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는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 머리가 하얘지자 가끔 띄엄띄엄 단편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산굽이를 감돌아 흐르는 강, 낙동강 전선, 15사단, 폭발음, 탱크의 굉음, B-29 폭격기 편대의 폭탄, 불길, 공포, 너무 많은 죽음, 시체 더미와 배설물, 살 썩는 냄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온몸을 기어다니며 득실거리는 이. 판문점의 황량한 벌판과 침묵. 장단역. 벽돌과 잔해뿐인 침묵에 빠진 함흥.

그리고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다.

“낙동강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인민군은 패배했기 때문에 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 난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어. 백병전을 할 힘이 없어서 그대로 쓰러져버렸단다. 대검이 내 목을 찌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그 국군 병사가 대검을 거둬들이고 수통을 열어 내 입속으로 물을 넣어주었어. 그래서 살아난 거지.”

그가 군관 요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어머니는 수심에 잠겨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이 출셋길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예민한 직감으로 그때 벌써 그의 기구한 운명을 예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머니의 사진을 가지고 내려올 수 없었다. 그는 가짜 이름으로 탈북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사진이나 편지는 물론이고 메모 쪽지 하나 가족을 생각나게 하거나 기념하는 그 어떤 사소한 것도 가지고 내려올 수 없었다.

“당신은 아직도 6·25가 북침인 거로 알고 있는가?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어보면 6·25 전쟁은 남과 북의 내전이라고 했어. 그것도 1950년 6월 24일과 25일 새벽 사이에 남한 측이 먼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도발하니까 북한이 반격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켜 남북한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났다는 거야.

이 정도면 북침이라고 억지를 써도 될 것 같은데.”

“그건 아니지요. 저도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내 말이 틀렸는지 말이야.

북한은 남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야. 이조 시대 양반과 상놈의 사회보다 훨씬 더 하지. 당신 가족은 출신성분이건 사회성분이건 흠잡을 데가 없으니까 핵심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리고 전형적인 농촌 출신이니까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가정이야. 그런 가정에서 무난히 자랐는데 하필이면 공작원이라고…….

그동안 조사받느라고 고생 많았어.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혼자서 싸워야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예비조사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조사는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만약 조사관들이 조금 거칠게 굴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겠어. 조사란 그런 거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게.

우리가 끝까지 추적했으니까…… 완전히 노출됐다고. 당신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촘촘한 그물을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어.”

“제가 함량 부족이고 의지가 부족했습니다. 거대한 공룡 조직을 상대로 저 혼자서 싸워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약물을 입속으로 주입하거나 전기충격을 가했기 때문에 실토한 거 아니야?”

“글쎄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단단히 각오를 다졌는데…… 구타, 폭력, 통증 유발 자세 강요, 매달기, 고춧가루 물고문, 불고문, 질식고문, 자백제 투여, 전기고문 등등 신체적 고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고도의 기술인 심리적인 고문을 했죠.

그게 ‘같은 질문 계속하기’ 고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깜빡 속았어요. 아주 신사적으로 시작되었거든요. 하지만 같은 질문을 밤낮 가리지 않고 수십 번씩 수백 번씩 계속해서 하게 되면 진술들에 조금씩 차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마각을 드러내는 거죠. 너무나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 수법이야말로 간첩을 다루는데 적격이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위협하고 협박하고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겁니다.

그건 아주 세련된 폭력이고 고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현대적인 고문 수법인거죠 .

그래서…… 저를 이렇게 저렇게 마음껏 가지고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완전히 x신을 만들었지요 .”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천지개벽을 하고 있는데 그쪽은 아직도 1950년대 냉전시대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무슨 말씀인가요?”

“북쪽은 순수한 전문 스파이 교육과 훈련이 턱없이 부족하지.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문화가 되지 않은 거야. 시대에 한참이나 뒤처진 거지. 지금은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인데 말이야. 지금 세상에서 전문 스파이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터넷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하지. 고도의 두뇌 싸움에서 이기려면 프로파일러 수준의 심리전 훈련을 받아야만 하지.”

“교육 방식이 너무 낙후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요. 이념과 사상 교육이 첫째니까요. 빨치산 시절의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북은 적을 너무 모르고 있네. 아마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거겠지.

결론을 요약하자면 풀어주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걸 남쪽에서는 ‘기브 앤드 테이크’ 라고 하지. 세상 만사가 그렇지 않은가. 주는 것 없이 받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야. 트레이드 오프라고 할 수도 있고.”

“무슨 말씀인지……?”

“그놈은 계속 우릴 엿먹이고 있어. 아주 사악한 놈이야.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 우리 조직의 골칫덩어리니까. 아직까지도 정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서 체포하는 데 몇 번이나 실패했어. 아주 오래된 거물 고정 간첩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 ……분명히 그럴거야?”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목구멍이 죄어드는 느낌이다. 입술을 깨문다. 몸에 잘 맞지 않는 처음 입어보는 정장을 만지작거린다. 드디어 핵심 쟁점에 도달한 것이다. 공작원이 되고 나서부터는 언제나 두려움을 안은 채 자유와 목숨을 내놓고 사는 법을 배웠다. 아찔한 위험이 있었을 뿐 영화에서나 나오는 낭만적인 멋이나 도취감은 없었다. 언제나 긴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살았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같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심학무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더러 협조를 하라는 말씀인 거죠. 배신을 하라고…… 저에게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가해도 그건 소용없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내려왔는데 제가 배신을 하면 그건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겁니다.”

“우린 고문 같은 거 하지 않아. 설득하지 못하면 그뿐이야. 이건 자발적 협조가 필요하니까 고문으로 될 일이 아니야.

스스로 결정하라고. 우리도 고문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인간 혐오증에 빠지게 되는 거야.”

“모진 고문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기였고 허울뿐이었어. 유물론이란 게 인간의 정신을 무시하고 말살하려는 이론이었단 말이지. 인간은 물질이 아니야. 그건 인간의 본질에도 반하는 거고 인간의 존재 조건에도 반하는 거였어. 잘 생각해보라고…… 공산주의 원조인 소비에트도 진즉 끝났다고. 이미 끝났다니까.

이걸 알게나…… 북한에서 그렇게 신처럼 떠받들었던 스탈린 말이야. 오죽했으면 그 마누라 나데즈다는 권총으로 자살했고, 그 딸 스베틀라나는 철천지 원수 국가이고 자본주의 대국인 미국으로 망명했을까? 어떻게 공산주의 유토피아인 소비에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도 스탈린의 마누라와 딸이 말이야. 스탈린이 누구야! 레닌은 너무 일찍 죽었고 스탈린은 너무 오래 살았어. 어쨌거나 그 지독한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한 장본인이야.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신 같은 존재였지.

공산주의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몰락이건 실패이건 간에 예정이 되어있었어.

결론은 북한은 이미 끝났다는 거야.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무슨 놈의…? 공화국이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니 사상이라고…? 다 끝났다니까.

왜, 쓸데없이 귀중한 목숨을 거는거야?”

“모든 게 끝났다고 말씀하셨나요?”

“하지만…… 기회는 있을 거야. 세상은 돌고 도니까.

민중! 민중! 민중이란 말이야. 민중이건 시민이건 결코 패배하지 않아. 민중이 속아넘어가고 미신을 믿고 순종적이어도 언젠가는 마침내 깨어나게 될 거야. 사람을 매료시키고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경우에도 한계가 있는 거야. 그게 역사의 순리니까.”

“북한에 무슨 민중이 있습니까……? 어리석은 인민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 인민은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인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강제적으로 세뇌되어왔지. 하지만 열광과 환호에도 끝이 있는 거야. 어떤 계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 다시 말하면 인민이 민중으로 돌변하는……거지.”

“무슨 계기가 있다고요……? 백년하청일겁니다.”

“북한을 어떻게 남한과 비교할 수 있겠어. 남과 북을 나란히 놓을 순 없단 말이지. 북한에서 인민은 모두가 노예가 되었고 당신은 살인의 도구로 이용된 거지. 북쪽의 공작원 교육은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과정이야. 오죽했으면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왔겠어.”

“그건 너무 피상적인 견해가 아닐까요?”

“내가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지…… 자본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여기에도 뿌리 깊은 문제는 있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거기는 완전무결하게 김씨 왕조야. 공산주의는 낡은 봉건체제를 혁파하는 것인데 거꾸로 지독한 김씨 왕조가 성립된 거지. 무슨 주체사상을 들먹이면서 말이야.”

“……”

“시대착오인 거야. 당신은 지성인이니까 환멸을 느꼈을 거라고. 그리고 내심 분노했겠지. 그렇지 않나?”

“제가 말입니까……? 아직 그렇게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봅니다. 제 자신을 추스르고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가 전부는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정글의 법칙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는 돈이 최고인 것 같아요. 너무나 비인간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알라고…… 북에서는 성경을 마약이라고 하지만 주체사상은 성경과 아주 비슷하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대신에 김일성을, 예수님이란 이름 대신 김정일을 집어넣은 게 주체사상이니까. 다시 말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성경으로 삼고, 노동당을 사도 집단으로 삼고,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십계명으로 삼고 있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외웠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아셔야 합니다. 남쪽에서 나온 주체사상 관련된 책들은 거의 백 프로 북한 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겁니다. 독창적인 게 아니라는 거죠. 북한 걸 가지고 월북한 학자들을 시켜서 남한식 용어나 문체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거죠. 남한 사람들은 제목이건 내용이건 완전히 여기 스타일이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겁니다.”

“좌파들…… 걔들 참으로 뻔뻔하지. 위선자들이야. 우리가 체포하여 조사하면서 그걸 지적하면…… 끝까지 자신들이 독창적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우긴단 말이지.”

“그럴 겁니다. 그 사람들 입만 살아있는 위선자이니까요.”

“역사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북쪽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 일색이야. 우리나라 독립도 김일성 덕분이라고 하고. 김일성의 동상이 북한에 몇만 개나 세워져 있는지 알고 있겠지.

김일성이 누구야? 그 인간이 스탈린에게 읍소한거야.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남조선 해방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어. 남조선 반동 세력들이 조국의 영구 분단을 획책하고 있다는 거지. 딱 3일이면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어. 그래서 스탈린이 승인하고 모택동이 동의를 한거야. 전쟁은 꼬박 3년이 걸렸고 우리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었지.

다시 말하면 김일성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6.25전쟁의 장본인이고 원흉인거지.

그런 민족 반역자를 위해 동상을 세운단 말인가?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쇳물 덩어리에 불과한 거야. 각 가정과 직장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한 방에 의무적으로 김일성과 그 아들 김정일의 사진까지 걸도록 했어.”

“너무 지나치게 비판하지 마십시오. 저도 알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처럼 세상은 돌고 돌지 않습니까. 남쪽에서도 언제든지 극악무도한 독재자가 또다시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북쪽의 독재 권력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고.

권력은 얻을수록 더욱 추구하는 괴물이라고 할 수 있지.

권력은 독이고 마약이야. 깊이 중독되거든. 권력은 커질수록 남용된다니까. 그렇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고 결국 붕괴된다고 했어. 인간들은 왜 그렇게 권력에 집착할까.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권력과 수단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독재 권력을 유지하려면 강제수용소가 필요한 거야. 스탈린의 강제수용소 ,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 ,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S-21 수용소 , 북한의 강제수용소 등 모두가 독재자들이 그들의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만든 거야. 다시 말하면 민주국가에는 강제수용소가 있을 수 없어. 참 묘하지…… 그들도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존재를 숨기려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지만 대명천지에 그건 불가능했어.”

“남쪽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자유방종은 언제든지 파멸을 자초할 수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염려하는 격이네. 헛소리 때려 치우고…… 정신 차리란 말이야. 네가 괘변을 늘어놓을 때마다…… 내 신경이 거슬린다고.”

“북한은 경제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경제만 회복된다면…… 우리끼리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까……? 남쪽은 당분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지. 이제서야 민주주의가 막 꽃피기 시작한 거야. 남쪽은 활짝 열린 개방사회라니까. 밀실이 아니고 광장이란 말이지. 우리는 인민이 아니고 시민이란 걸…… 알아야지.”

“미국 제국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이 틀어막고 있습니다.”

“미국이…… 왜 그럴까?”

“자신들은 핵무장을 하면서 우리가 하면 왜 안되는 거죠?”

“어려운 문제야. 미국은 세계를 쥐고 흔드는 최고 강대국이야.”

“너무 낙관하지 마십시오. 과도한 낙천주의 역시 자유방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부터 정치범수용소인지, 강제수용소인지 그 이야기를 해 보자고. 이건 남쪽에서 하는 소리고 그쪽에서는 뜬금없이 특별독재구역이라고 하더군.

거기서 온갖 학대를 당하고 쥐까지 잡아 먹으면서 살았으니까…… 아마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을걸.”

“지금 수용소 이야기를……?”

“거길 순전히 김상빈의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갔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어. 연습이건 훈련이건 부족했나?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완벽하게 연기했어야 하는데?”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무슨 일이건 과잉은 좋지 않아…… 당신은 지나치게 열성을 다한 거야.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야. 스파이는 과대망상도 안되지만 자기비하를 해도 안 되지. 냉정해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만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지.

스파이에게 강렬한 감정은 필요 없는 거야. 그건 불필요한 소음이고 쓸모없는 잡음에 불과하니까 그걸 깨끗이 무시하고 억눌러야만 하는 거지.”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단 말입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이었어. 어른이 돼서도 그게 남아있었지. 그런 건 스파이에게는 절대 금물이야. 스파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거든. 그걸 혹독한 훈련…… 육체 훈련과 정신 훈련을 통해서 극복한 거야.”

“우리 처지에는 어쩔 수 없어요. 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요.”

“나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당신을 시험할 생각은 없다네. 내가 그럴만한 처지가 아니야. 지금도 지독한 후유증을 앓고 있으니까. 지금 말이야…… 내가 북을 중상모략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겁박하는 것도 아니야.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그게 반드시 필요할 거야.”

“어느 정도는…… 수용소 하면 제일 먼저 배고픈 게 생각납니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지요. 그리고 찢어지고 더러운 누더기 옷이 생각납니다. 지독한 악취와 벽을 기어다니는 매미처럼 큰 바퀴벌레가 생각나고 열쇠와 자물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지금도 귓전을 때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구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 옛날 스탈린은 총살당할 자와 강제수용소에 수감될 자들, 두 부류로 나누었어. 지금 북한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거야. 아무나 눈 밖에 나면 반동분자란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수감하고 있지.”

“맞는 말씀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어요.”

“알아서 다행이구만……. 북한이 그걸 애써 숨기고 있지만 어림없는 일이야. 지금도 북한은 대외적으로 억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게 없다는 거지. 농장이니 공장이니 기업소라든가 하면서 위장 명칭을 사용해도 소용 없단 말이지.

나치 SS장교들이 똑같이 그랬어. 그들은 유대인 수용자들에게 자신만만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와 진실이 외부에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면서 설혹 알려진다 해도 누가 그걸 믿겠냐고 했어. 그러면서 득의만만했지.

너희들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누구도 증언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 그걸 알게나…… 수용소마다 여러 개의 오케스트라와 밴드가 있었어. 그걸 수용자 중에서 뽑힌 대원들이 연주했지. 난 음악을 잘 모르지만 음악이 예술이라는 건 알고 있지. 나치 살인자들은 그들도 인간이니까 가볍고 명랑한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낸 거야.

또는 말이야…… 장엄한 연주를 들으면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 그러니까……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인간들이 어떻게 다른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북한에는 멜랑콜리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거나 눈물을 흘릴만큼 장엄한 그런 종류의 음악은 없지요. 북한 체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최고 지도자를 칭송하는 노래밖에 없어요. 예를 들자면 ‘장군님 식솔’이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노래를 해 보게. 내가 장단을 맞출테니까. 백 번이건 천 번이건 불렀을 거 아닌가?”

“제가 지금 그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수는 없어요. 술 때문에 목이 잠겨 있지 않습니까. 대신에…… 가사를……”

심학무는 작은 양주잔에 스스로 술을 가득 채워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고 나서 물로 입가심한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메마른 가시밭길 울고 울며 네 왔느냐 / 거친 길 에들면서 외로웁던 시내 / 몰아 불행에 감겨 찢겨진 봄을 시름 놓고 맡긴 곳은 아 인정의 바다 / 사랑의 바다 / 고향은 다르지만 뜻이 같아 뜻에 살고 떠난 곳 어디여도 정에 끌려 정에 사네 / 흘러서 흘러 모여서 모여 형제 같은 너와 나는 아 한집안 식솔 / 장군님 식솔 / 시냇물 흘러오며 흐려질 수 있어도 바다에 안기면 하나 되어 푸른 빛 / 민족의 운명 한 몸에 안은 그 품속에 너와 나는 아 한집안 식솔 장군님 식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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