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02-703-9837
회원가입 로그인
회원가입 로그인

소설창작실

  • 자유게시판
  • 소설창작실

소설창작실

자백과 고문 後記 (afterward)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유중원
댓글 0건 조회 31회 작성일 26-05-11 10:34

본문

자백과 고문 後記 (afterward)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평범한 것인가?


1. 김근태 열사
김근태 열사는 1985년 여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물고문, 전기고문을 순서대로 당하면서 강제적으로 허위 진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공소사실이 전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서성 전 대법관이었다. 그는 재판 당시 고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인이 신청한 고문 근거 보전 신청을 기각하고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는 변호사로 개업한 후 사법개혁에 대해서 “기존 관행이나 기구를 무너뜨려서 형식만 참신하게 하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사법개혁은 국민들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고 국민들에게 편리하고 친절한 법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키백과」참조.)
고문은 끝났어도 고문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극한 상황에 처했던 고문 피해자들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서도 그때의 아픈 기억과 고통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씹어야 한다.
육체적 후유증으로 두통, 소화 불량, 성기능 장애, 청력 및 시력 이상, 이상 감각 등에 시달리고 무력감, 기억 손상, 우울증, 악몽 등 정신적인 고통을 오랫동안 감수해야 한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매년 초가을만 되면 한 달가량 몸살을 앓았다. 한기와 콧물 때문에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몸놀림도 둔해졌다. 파킨슨병도 앓았다.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도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2011년 10월 15일. 그날은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세차게 내렸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흠뻑 맞으며 갈지자로 여기저기 거리를 헤맸다.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파킨슨병 증세라고 했다.
그는 11월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입원했는데 딸 김병민의 결혼식이 있기 열흘 전이었다.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의 변호인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는 말했다.
…… 김근태는 70년대부터 여러 민주화 운동에 관여했는데 그 때는 거의 잡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요. 78년경부터 83년까지 약 5년 동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 간사를 했습니다. 주로 도시 산업선교회 활동, 실무자 활동을 쭉 인천 언더에서 한 사람이죠. 그때 김동완 목사나 교회 관계자들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그랬습니다. 83년 9월에 여러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을 묶어 청년운동단체로 민청련을 만들었습니다.
…… 민청련 의장을 누가 맡느냐 이런 걸로 좀 논의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지도력이나 운동에 전력해온 경력이나 운동권 후배들한테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 같은 면에 있어서, 김근태가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어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이 되었어요.
…… 그때 민청련 활동은 대단했습니다. 80년대 초에 운동권이 박살나면서 침체기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돌파구를 연 것이 민청련이었어요. 학생운동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재야세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 청년그룹들이 민청련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 『민주화의 길』도 발간하고, 많은 활동을 합니다. 민청련은 타협노선이 아니라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내걸면서도 공개 조직으로 움직여 운동의 중심축을 만들어냈습니다.
…… 그래서 물고문을 하고, 전기고문하고,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그러면서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합니다. 자술서를 무려 7차례 쓰고, 피의자신문조서를 10회나 작성했어요. 이거 피눈물 나는 이야기에요. 수사기관에 가서 자술서 쓰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몰라요. 더구나 고문당하면서 이렇게 많은 양을 쓴다는 게 일반인은 상상도 못합니다. 자술서와 피의자신문조서 같은 것 보면요, 이게 글씨가 깨끗해요. 고치게 되면 다시 써야 돼요. 그걸 갖다가 김근태가 몇십 페이지, 백 페이지를 썼단 말입니다. 불과 20일 내에 그 많은 양을 깨끗한 글씨로 쓴 것입니다. 물고문, 전기고문을 몇 차례씩 가하고, 잠도 안 재우고, 그러면서 자술서 쓰게 하고, 자술서 내용을 토대로 피의자신문조서를 만들고…… 이런 작업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쭉 한 겁니다. 김근태는 완전히 파괴되었죠. 이거는 도저히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김근태의 탄원서라는 걸 한 번 읽어보세요. 김근태 고문 사건의 진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다 나와 있습니다.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인권변론 한 시대」참조)

2. 고문 고발장
박정희 유신 시절의 대표적인 고문 사건이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다. 중정에 의한 온갖 가혹한 고문과 조작을 거쳐 무고한 8명의 국민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18시간 만에 목을 매달아 사형집행까지 하였으니.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가?
국가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생성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암묵적으로) 사회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인가?
국가는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해야 되고 따라서 공적이고 사회적인 국가 인격과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잔혹한 폭력이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유명한 고문 사건은 1985년 김근태 고문 조작 사건, 1986년 부천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외에도 암흑의 소굴에서 자행된 고문 사건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군사독재정권의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노련하고 능숙한 고문 기술자들에 의해 가장 조직적이고 악랄하게 진행된 고문 사건으로 대표적인 것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 동안 자행된 김근태 고문 사건이다.
장기간에 걸쳐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온갖 종류의 고문을 가하고 이에 대해 피고문자의 끈질긴 의지가 충돌하는 과정은 고문과 자백의 유구한 역사에 있어서 가히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전적 성격을 띤 에세이 혹은 회고록, 고발장이라 할 수 있는 「남영동」에서 고문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그대로 전재하였다. 내가 어떻게 작가로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달리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아주 똑같은 내용이지만 일인칭 자전적 회
고록과 제3자가 쓴 3인칭 소설은 가독성과 독자의 감수성 면에서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본다.
나는 역사를 쓰는 역사가가 아니라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가이기를 바랬다.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적 성격을 띤 역사적 텍스트이지만 소설과 사실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는 소설가적 본능에 의해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소설적 서사가 차지하는 부분이 극히 미미하지만) 그래도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non-fiction이 아니라 fiction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논픽션과 픽션이 결합된 f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벌써 반세기 전쯤 미국에서 대두된 뉴저널리즘을 흉내내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다. 나는 반평생을 변호사로 살았기 때문에 뼛속 깊이 현실과 사실을 철저히 규명하는데 집착한다. 사실이 확실하게 규명되어야만 법률을 적용해서 결론 (主文)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소설적 자유와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아마도 논픽션 작가들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자기 과제를 제대로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소설은 사정이 다르다. 소설 작가들은 자기가 꾸며낸 세계를, 그것도 종종 자신이 만들어낸 암시적인 문체로 쓰기 때문에 (토머스 핀천, 돈 덜릴로) 우리는 그들에게 “그건 잘못됐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나한테는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논픽션 작가들은 그런 여유를 누릴 수 없다. 그들은 사실에 대해, 인터뷰 대상자에 대해, 이야기의 무대와 거기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진다. 자신의 솜씨, 그리고 과도함과 무질서의 위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를 잃거나, 혼란스럽게 하거나, 지겹게 하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두지 못하는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모든 부정확함에 대해, 기법상의 온갖 실수에 대해 “그건 잘못됐어”라고 말할 수 있다. 「글쓰기 생각쓰기 On Writing Well: The Class Guide to Writing Nonfiction」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참조 .〕
김근태 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거짓 자백을 한 타자이면서 자백의 주체이다. 그의 인격과 인간적 주체성을 냉정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다.
이 책은 불과 2년 후인 1987년 9월에 초판이 나왔다.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정직성, 그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법원을 향하여 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탄원서에 근거했으므로 그 정확성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무한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국가기관이 자행한 무자비한 고문을 증언해야 한다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빠뜨려서는 안 되고 더욱 사실대로 기록하여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그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그 당시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또한 그러한 고문을 당하고도 마지막 날 남영동을 떠나면서 고문자들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고, 나중에 그들을 용서한 용기와 인격에 경의를 표한다. 가증스러운 고문자와 피고문자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었을까.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은 인질이나 피해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가해자에게 동조 감화되어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유대감을 느끼는 비이성적 심리 현상이다. 생존을 위한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방어 기제이므로 학대받는 아이나 가정폭력 피해자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 가해자와 극도로 억압된 관계에서 피해자가 생존을 위해 가해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애착을 느끼거나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변호하는 비합리적인 방어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애정이 있다기보다는 가해자를 자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에 따른 연기나 동조인 경우가 많다는 분석도 있다.〕
그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므로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혹시 위선 또는 자기 기만이 아닌지 의심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차마 쓸 수 없는 것이 있고 건너 뛰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만 나는 그의 내면 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
그는 민주화 투쟁을 위해서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하였다.

3. 암흑의 소굴들
우리나라에서 고문다운 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악독한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박정희의 유신독재체제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그 이전 시대인 자유당 시절 경찰이 자행했던 고문은 구식이고 차라리 순진했다. 자백을 받기 위해서라면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두들겨 팼으니까. 아직 악랄하고 치밀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유행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 분실은 그 당시 ‘남산’으로 불리던 안기부 남산 분실과 ‘서빙고 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과 함께 고문수사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그러니까 이 3곳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3대 고문실이었다.
그들은 무슨 실적을 쌓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악독한 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에 있다.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 1987년 6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가 1987년 1월 14일 물고문으로 숨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개축한 7층 건물의 외관과 내부는 그대로 남았다. 고문 피해자가 도망치거나 투신할 수 없도록 좁게 만든 창문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격자로 배치한 취조실, 고문 피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든 5층 높이의 나선형 계단 등은 당시의 잔혹했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은 그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딸 병민이가 ‘근태 서재, 시 소리 숲’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남영동 대공 분실에 열었다고 한다. 아빠가 고문당했던 515호 조사실에 참혹한 고문의 기억이 아닌, 고문을 극복하고자 한 김근태의 노력을 따뜻한 느낌으로 연출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찾아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남영동 대공 분실에 찾아갈 수 없었다. 남영동 대공 분실을 마주하는 일은 나에겐 끔찍한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남영동 대공 분실을 몽땅 부수고 철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고문 수사의 상징이었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국군 보안사 대공처 6과 소속이었던 서빙고 분실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한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서빙고 호텔’ 또는 ‘빙고 호텔’로 불리며 군인은 물론 민간인에게도 잔혹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던 곳이다. 이곳 요원들은 서로가 이름도 알지 못할 정도로 보안을 지켰다. 요원들끼리도 가명과 은어를 사용했다. 고문은 ‘강력심사’, 물고문은 ‘수도공사’, 각목 등을 사용한 수사는 ‘토목공사’로 불렀다.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장군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건물은 1990년 철거됐다. 그 자리에는 2004년 1월 기무사 직원 아파트가 들어섰다. 2004년 1월 준공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주차장 터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해방 후인 1957.9.1.부터 특무부대 공작분실로 개관, 1971.9.20. 보안사 수사분실로 개칭하여 사용하다가 1990.11월 폐쇄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수많은 방첩인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터로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후안무치하게도 잔인한 고문자들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자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2018년 1월 아파트 진출로 바닥에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 분실 자리’ 라는 글귀를 새긴 동판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곳이 과거 잔인한 고문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중구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자리 잡은 예장산 자락에는 과거 중앙정보부 6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6국은 ‘육국(肉局)’으로 불렸다. 사람이 고깃덩어리가 돼서 나오는 곳이란 의미였다.
과거 ‘인민혁명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에 대한 가혹한 수사와 고문이 이뤄졌던 곳이다. 그 건물 지하 밀실에서 말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그 당시 안기부는 서초구 내곡동에 최신식 6개 동 건물을 짓고 나서 이문동에 있던 본부와 남산 별관이 동시에 이전했다. 그때 온갖 고문 도구들도 함께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언젠가 시절이 바뀌면 먼지를 털어내고 창고에서 꺼낼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60600045&code=940100&s_code=as264

4. 자백과 고문, 고문 기술자들
그들 (고문 기술자들)은 거짓 자백이라도 상관없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밤낮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신발을 벗겨서 얼굴 머리 때리기, 무수한 발길질과 뺨 때리기, 얼굴에 가래침 뱉기, 몽둥이질, 손바닥 발바닥 등 특정 부위 때리기, 손발톱 사이 찌르기, 손가락 사이 나무 막대기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기, 발가벗긴 몸을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기, 로프로 인정사정없이 등을 후려 갈기기, 터진 살갗에 소금물 붓기, 며칠 동안 흰 벽만 쳐다보게 하기,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 붓기, 손발톱 뽑기, 군대식 원산폭격, 통닭구이, 거꾸로 매달기, 비녀 꽂기, 체모 불태우기,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 자극하기, 며칠 동안 잠 안 재우기, 다른 사람들의 고문 소리 듣게 하기, 가족을 데려다가 고문하겠다고 협박하기, 실제 권총을 들이대고 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기, 성기 고문,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그나마 조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어 기소했다.
하지만 고문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자백을 완벽하게 받기 전까지 절대 상대방이 목숨을 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자살을 방지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폭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언제 고문을 멈추어야 할지 정확하게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고문은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겨서는 안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전기고문 기술자는 “차라리 고문은 예술이다.”라고 설교했던 것이다.
 
우리는 170만의 목숨을 앗아간 크메르 루즈 대학살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때 S-21 교도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말로 심문하는 ‘차가운 고문‘, 고문의 정도가 심한 ’뜨거운 고문‘, 그 중간에 해당하는 ’미지근한 고문‘이 있었다. 고문의 종류에는 전기 충격과 채찍질, 코에 물을 넣는 고문과 구타,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우는 고문, 죄수의 가슴을 불로 지지는 고문, 손톱, 발톱을 뽑는 고문, 배설물을 한두 숟가락 떠먹이는 고문, 오줌을 마시게 하는 고문, 왕지네 같은 독이 있는 곤충으로 위협하는 고문 등이 있었다. 물고문의 경우 위에 물이 가득 차면 죄수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구토를 한다. 심하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때는 죄수가 의식을 되찾으면 다시 심문을 한다. 동물 사육하듯 음식을 줬고 진짜 동물처럼 대했다. 그리고 죄수가 으스러질 날을 기다렸다. 처형자들은 사람을 ’죽인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처단한다’, ‘퇴출시킨다’ 또는 ‘으스러뜨린다‘고 했다.
자백을 받고 나서 프톰펜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쯔엉 엑의 형장(킬링 필드)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는 잘 으스러뜨리는 것이 검은 인민복을 입은 사형집행인들의 당연한 의무였다. 사형집행인들은 (횃불을 들고) 밤에만 사형을 집행했는데 땅이 푹 꺼지도록 둥글게 판 구덩이에 죄수가 무릎을 꿇고 앉게 한 다음 죄수의 목 뒤를 굴대로 내려쳐서 목이 꺾이면 마지막으로 목을 벴다. (그렇게 사형을 집행해서 170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던 것이다) 보통 밤 9시경에 시작되는데 사형수가 많으면 동이 틀 때까지 진행되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의 고문 방식은 아주 원시적이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는 어떤 고문이 있었던가? 나치의 고문관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치유 불가능한 노인과 장애인 등은 즉시 가스 살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사망케 하였고 , 또는 독극물과 세균을 투여하거나 혹한에 노출시켜 그 영향을 연구하는 생체실험의 실험 도구로 사용했다. 오직 신체 건강한 사람만 살려주었고 그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과 음식물만 제공한 다음 중노동을 하게 했고 그래서 신체가 쇠약해서 더 이상 노동이 불가능할 때는 소각실에 집어넣어서 지클론 B (Zyklon B) 독가스로 죽게 했다.〔그들은 친절하게도 유대인을 고문한 게 아니다. (유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려왔지만) 처음부터 노동이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으로 분류해서 전자의 경우 일정 기간, 대략 몇 주나 몇 달간 중노동을 하게 하고 몸이 쇠약해져서 도저히 더 이상 노동이 불가능하게 되면 그때 소각실에 던져 넣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즉시 소각실에 집어넣어 집행을 했던 것이다.〕그러니까 선진국인 독일 사람들은 지극히 과학적이어서 캄보디아 사람들보다 무려 40년 전에 벌써 독가스로 대량 살인을 감행했던 것이다.

5.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그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악에 굴복하고 악에 물들어버린 비겁한 인간들이고 패배자들이었을까? 악이 그들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인가? 아무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아주 잔인한 인간 종족으로 돌변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기기만과 위선, 안일한 이기주의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래서 인면수심의 악마가 되었다. 겉으로는 가면을 쓰고 악마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자백과 조작, 완전한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에 빠져서 인격 파괴, 인간성 말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살인보다 더 무섭고 악랄한 범죄이다.
그들이 정말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면 인간적으로 반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겸손할 줄 알고, 후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 중 누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진실규명 위원회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했던 고문 기술자들은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절의 고문의 추억에 잠겼다. 한결같이 변명하기에 급급하거나, 고문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거나, 나는 가해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다고 주장하거나, “이제 빨갱이 세상이 되니까 빨갱이들이 날뛰는구만. 빨갱이를 잡으려면 고문이 필수적이야. 고문 없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구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빨강병에 걸린 환자들이야. 그 병은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인단 말이지. 그것들한테는 충격요법이 필요해요. 가장 효과가 있는 게 전기충격요법이지. 다시 말하면 그건 고문이 아니라 충격요법인 거요. 충격요법은 오랫동안 정신과 환자를 치료하는 데 사용된 거 아닌가”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하거나, 자신은 오로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들은 고문 당시 고문 피해자들이 괴로워하고 울부짖고 단말마의 고통을 느낄 때 쾌감을 느끼고 즐거워했다고 (피해자들이) 증언했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을 재미있는 유희쯤으로 여긴 것일까?
그 시절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렇게 고문을 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면 고문 담당자가 과로사로 순직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문 기술자 중에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도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 뭘 기도했단 말인가? 에돔 땅의 욥의 운명을 떠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욥에게 크나큰 고난을 내리신 것처럼 틀림없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도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난을 내리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욥처럼 그 고난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 완전히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광기는 뇌신경의 심각한 오작동에 의한 정신병인가? 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한 고뇌에 찬 시적 기획이란 말인가? 아마도 너무 타락한 시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나중에라도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만약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평범한 것인가?
무신론자들 혹은 불가지론자들은 신과 악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자들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전적으로 선하므로 악은 존재할 수 없고 만약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고 그걸 없애기를 원하며 그 방법까지 알고 있으므로 악은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극히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어쨌거나 여전히 이 세상에 악은 제거되지 않은 채 오히려 물리적 악과 도덕적 악, 모든 종류의 고통과 악행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그러므로 전지전능한 신은 선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종교와 이성, 철학에 관하여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심각한 종교적, 철학적 문제인데 궤변에 가까운 단순한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이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인격체도 도덕적 행위자도 아니며 모든 도덕적 언어도 무의미해진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면, 죄를 짓고 악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악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고문기술자들은 평생 동안 습관적으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처음과 끝이 있는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해서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변명을 자신을 아는 친구, 주위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식이나 형제들에게까지 반복해서 되풀이했다.
진실규명 위원회의 조사관들은 끊임없이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어떤 울분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고문자들이 지긋지긋한 인간 별종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조사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가령, 당신도 한 번 똑같이 당해보겠어! 물고문! 전기고문! 인간 백정 같으니라고! 자식들 앞에서 무슨 낯짝으로!) 그걸 목구멍 속으로 다시 집어 넣으니라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무진 고통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1만 2000명을 죽인 캄보디아 S-21 수용소 소장 두크
그는 과연 인간인가, 악마인가
“…… 그땐 혁명이 죄수들을 한 명씩 없앤다는 의미였으니까요. 저는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저는 평생 동안 뭔가를 할 때마다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 제 본명은 깡 켁 아우(kaing Guek Eav)이지만 혁명군에 들어가면서부터 두크(Duck)란 이름을 썼습니다. 저를 포함해 부모님과 식구들, 제 조국의 국민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혁명군에 가담했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 조국은 참담한 비극을 겪어야 했고 1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정의를 믿는 한 사람으로서 제가 몸담았던 캄푸치아(Kampuchea) 공산당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어요. 도망쳐 나올 수도 없었고 무조건 상급 기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감옥에서 사람들을 심문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결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죽이진 않았어도 분명 저 대신 다른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죠. 단지 제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고 제 손놀림이 한 사람의 생사를 결정했어요. 제가 심문한 죄수에 대한 평가를 상부에 보고했으니까요. 저는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서를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는 죄수들의 자백을 근거로 새로운 범죄자를 체포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죠. 저는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엔 혁명 세력이 세운 정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군요. 제가 1만2000명을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함께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럽습니다.”
“…… 제가 혁명에 가담하자 그들은 비밀을 철저히 지키도록 저를 훈련했어요. 상대가 상급 감독관일 때면 그의 비밀을 지켜주고 상대가 부하직원일 때는 절대 비밀을 누설하면 안 됐어요. 누구를 죽였든, 누구를 죽이라고 명령했든, 몇 명을 죽였든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면 안 됐지요. 나중에는 ‘비밀이 많을수록 생존할 확률이 높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어요. 그래서 혁명군이 이룬 성공 중 절반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어요. 저는 그 누구에게도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고 남의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또 눈앞에 일어나는 일도 외면하며 보지 않았어요. 교육을 받을 때 배운 가장 중요한 규칙이었으니까요.”

〔두크는 대학을 나왔고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폴 포트의 캄보디아 공산당의 별칭인 크메르 루즈 (Khmers rouges)에 가입하여 고위 인물이 되면서 1만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S-21 수용소 소장이 되었다. 폴 포트는 공산주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적들인 대학 교수, 학교 교사들, 화이트칼라인 사무직 노동자, 행정부 공무원들, 프랑스 유학파,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잔인하게 살해하여 제거했다. 그 숫자가 무려 170만 명에 달한 것이다.
두크는 거짓 강제 자백을 받아내는 大家였다. 그가 세밀하고 정확하게 작성한 자백 기록은 20만 페이지에 이르고 한 피의자에게서만 700페이지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무고한 피의자들이 자백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고문을 했고 그러면 피의자들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 거짓 자백을 했던 것이다. 자백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킬링 필드로 끌려갔고 사형 집행인들이 목을 내려쳐서 처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살인마였고 살인 기계였다.
그런데 두크가 나중에 세례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하느님이 어떻게 그런 살인마를 목사가 되도록 받아주었단 말인가? 그는 크메르 루즈가 멸망한 후 국제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불교 국가인 캄보디아에는 사형 제도가 없었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 살인 고문관의 정신세계’라는 부제가 붙은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 전혜영 옮김, 「자백의 대가 Le Maitre Des Aveux」참조.〕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은 나치 친위대 (SS) 장교 (상급 돌격대 지도자)로 유대인 이송 및 절멸 정책 (최종 해결책)을 실무적으로 총괄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특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변론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은 히틀러가 만든 절멸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적극 주장하면서 책임을 완전히 회피했다.
1961년 12월 15일, 예루살렘 특별재판소는 유죄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항소했으나 1962년 5월 최종 확정되었고 그달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무슨 염치로 사형이 확정된 후 친필로 된 ‘사면 청원서’를 그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에게 제출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악의 평범성 논란
아이히만 재판을 기자 자격으로 참관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악마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평범한 관료였음을 지적했다.
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은 끔찍한 악행이 악마 같은 특별한 본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맹목적 복종과 관료제적 무사유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악행의 원인은 특별한 악의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사유의 부재 (Thoughtlessness)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히만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관료제 내에서 출세하려 했던 평범한 가장이자 직업 공무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관의 명령과 법 (당시 나치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행위가 거대한 악을 완성했으므로 진부한 악은 심오하거나 악마적인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피상적이고 진부한 일상의 영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상황에 순응하면 평범한 사람도 대량 학살 같은 악의 공범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솔 벨로는 자신의 소설 「Becoming Eichmann」에서 아서 샘러라는 인물을 통해 아렌트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했다.
“세기의 가장 중대한 범죄를 아둔하게 보이게 만드는 생각은 평범하지 않아. …… 지식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해. 모든 사람은 (일부 여류작가를 제외한다면) 살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그것은 매우 오래된 인간의 앎이야. 태고부터 가장 순수한 인간들도 생명이 신성하다는 것을 이해했어. 그 오래된 이해를 거부하는 것은 평범함이 아니며 거기에는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음모가 있었어. 평범함은 양심을 없애버리려는 매우 강력한 의지를 위장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지. 그런 계획이 사소한가? 인간의 생명이 사소한 경우에만 그럴 거야.”
나중에 역사학자들이나 기자들이 숨어 있는 자료들을 찾아서 신중히 연구하고 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아렌트는 어리석게도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의 기만적인 연극과 왜곡된 논리에 완전히 속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기자 자격으로 재판정에서 방청했으므로 아이히만을 관찰하는 기간이 극히 짧았다. 그것도 재판 과정에서 유리벽에 갇혀 재판을 받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을 뿐이다. 직접 대면하여 치밀하게 조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주 경솔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 역시 그가 던진 짧은 언어에 어리석게도 속아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특별한 악마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악의 평범성 운운했던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가?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비(非)나치스화 청문회가 열렸을 때 나치에 협조한 위선자였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위해서 증언했다. 그가 나치에 협조했다는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서 증언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하이데거의 정부로 불륜 관계였던 것이 밝혀졌다. 그녀 역시 틀림없이 위선자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독일의 제3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나치의 잔당들인 히틀러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었던 장관, 나치의 집단 학살을 죽을 때까지도 끝까지 부정한 장군, 히틀러가 인정한 최우수 조종사, 검은 군복의 무장 친위대인 SS부대의 고위 장교들은 1947년 당시 공공연히 나치를 찬양하고 반유대주의자였던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의 비호하에 스웨덴의 말뫼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망명했고 부에이노스아이레스에서 나치 핵심 그룹을 형성했는데 아이히만은 그 그룹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그곳에서 반유대적인 나치 잡지인 「데어 비크」가 1947년 창간되었고 아이히만은 그 잡지의 영원한 편집장인 에베르트 프리치를 존경하여 ‘프리치 동지’라고 불렀다. 그 잡지는 나치의 치밀한 기획하에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했다. 희생자의 수가 600만에 훨씬 못 미친다거나 강제수용소는 물론이고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히틀러와 나치는 무관하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줄기차게 계속 펼쳤다. 그 무렵 아이히만은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기 위하여 1955년 네덜란드의 언론인 빌렘 S. 자센과 한 인터뷰에서 “내가 학살한 유대인이 더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유감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노회하고 영악한 악마였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노련한 늙은 배우처럼 연기를 하며 교묘하게 거짓 진술을 했지만 그때 인터뷰에서 녹음한 테이프는 그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철저한 아리안 민족주의자이고 골수 반유대주의자이고 광신적인 히틀러 신봉자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흔해 빠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최후 진술에서 말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담자였고 권력 지향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지만 일말의 반성은커녕 그곳에서도 반유대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절멸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정권이 바뀌고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추적을 받게 되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오랫동안 잠적하였다. 모사드 요원에 의해 체포될 당시에는 추하게 늙어서 머리는 거의 빠지고 얼굴은 주름이 깊이 패여 쭈글쭈글했으며 걸음걸이는 어색한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악마도 세월의 무게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962년 5월 31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사체는 화장되어 지중해의 이스라엘 수역 밖에 뿌려졌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고 집행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에게 죽음은 오히려 지나치게 가벼운 징벌이자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녀의 저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의 후기에 조금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고 결론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는 오직 한 차례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너무 성급했고 무성의했다. 아이히만의 인생 궤적과 인간성, 성격, 상황 등에 관해서 충분히 연구 검토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결론을 내렸다. 무언가에 쫓긴 나머지 (저널리스트 혹은 정치 이론가로서) 자신의 명망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그녀의 궤변을 깊이 있게 검토하고 비판을 하지 않은 채 그걸, ‘악의 평범성’을 마구잡이 그대로 인용 원용한 국내외 논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러므로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베티나 슈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Eichmann before Jerusalem」, 조앙 샤푸토의 「피의 법칙 La Loi du Sang」,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친 나치 정책에 관한 우키 고니의 「진정한 오데사 La Authentica Odessa」, 유대인 학살 전범 연구자인 시몬 비젠탈의 자서전인 「나는 아이히만을 추적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또 다른 저서인 「책임과 판단 Responsabilite et judgment」를 깊이 살펴보고 충분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6. 나치의 악마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을 했다. 제3제국 최고위 인물들이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무렵 나치 악마들의 정신세계를 조사했던 미군 장교는 더글러스 켈리 정신과 의사 (당시 소령)였고, 심리학자는 유대계인 구스타프 마크 길버트 중위였다.
 젊은 군의관들은 그동안 베일에 쌓인 ‘나치 성격’ 또는 ‘나치 정신세계’를 파헤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 체제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책임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인간들이 어떻게 나치 운동에 가담해 그런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글라스 켈리는 주장했다. “최고위 나치들이 끔찍한 행위를 자행하고 묵인하도록 이끈 자질은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특이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이들이 여기에는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독일 제3제국을 통치했던 최고위층 나치들이 매우 지적이면서도 정신의학적으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 것 같다. 젊은 정신과 의사는 노회한 나치 고위 인사들의 교묘한 언변과 연기에 속아 넘어갔거나 오랫동안 (10여개월) 함께 지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동화 또는 동조되었을지도 모른다. (스톡홀롬 증후군을 연상할 수 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악은 자주 가면을 바꾸어 쓴다지만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악행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놀라운 능력으로 광분해서 하루 18시간씩 버티면서 업무를 수행했다. 우리는 악을 행하기 위해서 분출하는 그 에너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켈리는 동료 정신과 의사들 가운데 별난 이들이 많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는 이를 “유감스럽지만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불안정한 사람들이 정신과를 전공으로 택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의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정신과는 아마 다른 어느 분야보다 별난 이들을 더 많이 끌어들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직업 수명은 15년쯤입니다. 그 뒤로는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요.”
그는 1940년부터 정신과 진료를 해왔다. 1958년 새해 첫날 늦은 오후 그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 켈리는 계단참까지 내려와 연설가처럼 아내와 아버지, 아들을 마주한다. “더는 이 꼴 못 참겠다!” 그가 악을 쓴다. “이걸, 청산가리를 삼키면 난 30초 안에 죽을 거다. 내가 이걸 먹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경련에 뒤틀어진 눈은 벌겋게 튀어나와 있고 입가에는 거품이 흐른다. (잭 엘하이의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참조.)
그가 그렇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동조했던 헤르만 괴링은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원했지만 거부되자 극비리에 손에 쥔 청산가리 캡슐을 삼키고 죽었지만 켈리는 책상 서랍에 두 자루의 권총이 보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총 대신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하지만 그는 4년 후인 1962년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하지 못하고 죽었다.

구스타프 길버트는 나치의 성격을 깊이 파고들어 뉘른베르크에서 수감자들과 지낸 몇 달을 기록한 연대기를 내놓았고, 이는 훗날 많은 심리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피고인들 가운데 몇몇을 정상적이거나 평범한 성격으로 보지 않고, 위험하고 독특한 인격 유형을 지닌 사이코패스로 여겼다. 길버트에 따르면 괴링 (나치 독일의 제2인자로 히틀러의 후계자였다)은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덕적 용기가 부족했고, 친절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상대에게 거칠게 달려드는 성향이 있었다. 가족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괴링에게 전쟁은 국가 이익을 둘러싼 고상한 투쟁이 아니라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권력에 대한 그의 갈망은 냉소와 가학성, 탐욕을 끌어냈다. (잭 엘하이의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참조.)
 
나는 길버트의 견해에 찬성한다. 내가 참고문헌을 통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그들의 내면 저 깊은 심연에는 불가사의한 악의 근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양심 속에는 눈꼽 티끌만큼이라도 죄책감이 없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모든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수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자비했고 자기애가 강했으며 자기 가족과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냉혹할 만큼 무관심했다. 악명 높은 범죄자.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적 장애인. 도덕적 가치관이 없는 인간. 전형적인 불량배. 피해망상적인 인간. 자의식 과잉. 과시 성향. 자기기만. 그의 정신에 불꽃처럼 불을 붙여서 분노와 폭력의 발작을 일으키는 약물에 중독된 자. 편집증. 과대망상.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공격적 성향의 나르시시스트. 히스테리형 중증 신경증 환자. 건강염려증 환자. 인종 이론가. 반유대주의자. 포르노그래피 수집가. 사디스트. 강간범. 마술사. 정규 교육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술장사를 했던 히틀러의 외무장관. 자신들이 범죄자로 재판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괴물이고 악마들이었다.

에필로그
나치의 악마들의 오묘한 뇌를 해부해보려고 시도했지만 뇌 조직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가슴에 총을 쏴서 처형해야 했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치유 불가능한 자들이었지만 재판 없이 즉결처형을 할 수는 없었고 국제군사재판소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에서 정식으로 재판절차를 거쳐야 했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이 세상 역시 모순적이어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을 통찰해보면 평범한 인간에게도 모두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를 정신질환자나 미친 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신이 말짱했다. 법적으로 본다면 정신적 분별력이라 할 수 있는 책임능력이 충분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면서도 수백만 명을 박해하고 살해한 정권을 냉혹하게 운영한 자들이었다. 상당한 지적 능력과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정상 범주에 속한 인간들이었다. 지저분하고 비열한 인격적으로 밑바닥까지 추락한 천박한 인간들이었지만 말이다.
〔나치 친위대원이 음악, 특히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면, 이상하게도 더욱 인간다워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부드럽고, 한결 다정했으며,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듯 대화할 수 있었다. 때로는 어떤 선율을 들으며 오래 보지 못한 연인이나 소중한 이를 떠올렸다. 두 눈은 인간의 눈물을 담은 액체로 물들었다. 그때 우리는 어쩌면 전부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음악을 이토록 사랑하고,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인류에게 이토록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남성 오케스트라단원이었으며 나중에 카펠 마이스터를 맡아 생존했던 시몽 락스의 회고록에서.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인류 최악의 학살을 저지르는 나치들의 이중성을 목격했다. 수용소 내 오케스트라는 수감자들의 강제노역 출퇴근, 나치 친위대 (SS)의 연회, 심지어 사형을 집행하는 가스실로 향하는 ‘선별’ 작업을 하는 중에도 연주를 강요받았다.)〕

그들은 재판을 앞두고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강제수용소에서 잔혹 행위와 관련성을 전면 부인하고 자기들은 전적으로 무죄라고 주장한다. “저는 언젠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하느님께 답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제 무죄를 판결하시리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화가 심했고 뒤에서 서로를 향해 비웃고 욕하면서 책임을 전가한다.
괴링은 눈곱만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허세 부리고, 허영심 많고, 잘난 체하는 허풍쟁이었다. 자기 아내와 딸만은 끔찍이 사랑해서 감옥에서도 계속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는 정복지에서 각종 미술품과 귀중품을 약탈해서 사리사욕을 취한 범죄자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 나는 독일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을 거요. 50~60년 뒤에는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의 동상이 세워질 거요. 조그만 동상일지 몰라도, 독일의 모든 가정마다 하나씩 말이오.”
국제군사재판소의 재판부는 1946년 10월 초순경 피고인 3명에게는 무죄 판결을 내렸고 18명에게는 유죄를 선고했는데 그중에서 7명에게는 징역 10년에서 무기징역까지의 형이 선고되었다. 나머지 11명의 피고인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은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괴링은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들은 죽어서도 (부관참시를 연상케 하는) 보복 조치를 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유대인 희생자들처럼 뮌헨 인근의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시체 소각실에서 불태워졌고 잿가루는 강에 뿌려졌다. 강물은 그 모든 것을 품에 안고 무심히 흘러갔다.
(자신은 결코 생포되어서는 안 되며 분노한 독일인들이 절대 자신의 시신을 더럽힐 기회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자기 스스로에게 맹세하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고,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의 아내와 6명의 자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나치 독일의 친위대 수장으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악명 높은 전범이었던) 하인리히 힘러는 1945년 5월 연합군에게 체포된 후 영국군에 의해 구금 중 자살했고, 헤르만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그 무렵 청산가리가 든 작은 캡슐을 깨물고 자살했다 (으깨어진 캡슐에서 흘러나온 청산가리가 목구멍으로 스며들자 헐떡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떨고 경련을 일으키며 숨졌다).
그들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고 참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용서하는 자 역시 기만 또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고 위선자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독, 이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리모 레비).
나치 독일이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일으켰는데 인간으로서 그게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 일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인류의 고귀한 양심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와 화해의 경계선을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건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신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 네 사람은 왜 자살을 감행했는가? (자살 이외의 고백의 피난처는 없다. 그러므로 자살은 곧 고백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 그걸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용서를 빌려고 그랬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악행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지면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고 아래로 떨어뜨려 밧줄의 인장력으로 목표를 부러뜨리거나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방식인데 이때 시체는 늘어지면서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 사진기자들은 짜릿한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래서 그 치욕스러운 모습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그들은 몸서리를 쳤다. (어쨌거나 그들은 완전무결하게 패배했다. 만약 그들이 승리했다면 진실은 끝까지 암흑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참고 문헌
더글라스 켈리가 심리 자료와 검사 결과, 관찰 기록을 토대로 쓴 「뉘른베르크 교도소의 22개 감방 22 Cells in Nuremberg」벤 E. 스웨어링겐 지음, 「헤르만 괴링 자살의 미스터리 The Mystery of Hermann Goering’s Suicide」. 로버트 겔라틀리가 편집한 「뉘른베르크 인터뷰 : 한 미국인 정신과 의사가 피고인 및 증인과 나눈 대화 The Nuremberg Interviews : An American Psychiatrist’s Conservations with the Defendants and Witnesses」, 구스타프 길버트 지음, 「뉘른베르크 다이어리Nuremberg Diary」, 「독재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Dictatorship」베티나 슈탕네트 지음,「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Eichmann Vor Jerusalem」. 잭 엘하이 지음 / 채재용 옮김,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 전혜영 옮김, 「자백의 대가」, 시몽 락스 (Szymon Laks)의 회고록 「Music of Another World」, 강제수용소 내 여성 오케스트라를 다룬 파니아 페넬롱 (Fania Fenelon)의 회고록 「Playing for Time」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업무시간 : 오전 10시 ~ 오후 4시

사단법인 한국소설가 협회
주소 : 04175)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2, 한신빌딩 1113
전화번호 : 02-703-9837 FAX : 02-703-7055
이메일 : novel2010@naver.com

Copyright © K-novel All Rights Reserved

계좌안내

국민은행 827-01-0340-303 (사)한국소설가협회

농협 069-01-257808 (사)한국소설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