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휴 歸休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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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휴 歸休
모든 비극은 죽음으로써 종막이 되고……
― G.G. 바이런
경복궁 동쪽 돌담을 왼쪽으로 끼고 삼청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청파출소를 지나자 왼쪽으로 팔판동이 나왔고 계속 더 올라가자 삼청동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나왔다.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느리게도 빠르게도 걷는다.
그 시절 악명 높은 국군 기무사령부는 삼청동 가는 길의 오른편 소격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국군 서울지구병원 안에 숨어 있어서 밖에서는 거기가 무시무시한 기무사임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 알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총에 맞아 이미 시체가 된 대통령이 가장 먼저 실려 간 곳이 그 병원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보안사 도당들은 그해 겨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나는 언덕길을 올라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숲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무들이 울창했고 무성하게 자라난 보드라운 풀들이 너울거렸고 봄의 꽃들이 피어있다.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덤불 숲속에서 봄의 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곳에는 옛날 옛날 옛적에는 깊은 샘이 있었고 송사리가 사는 맑은 개울이 흘렀다. 그리고 작은 신비한 나비들이 많이 날아 다녔다. 큰주홍부전나비와 독수리팔랑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 남방남색공작나비 등이 날아 다녔다.
숲을 온통 녹색으로 색칠하였으니 여름은 위대한 화가였다.
한여름에는 밤하늘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세 살 터울의 형은 움직이는 불빛을 보고 밤 도깨비가 날아다닌다고 하였다.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곤충.
반딧불이 혹은 개똥벌레.
반딧불이는 어떤 가수가 불렀던 ‘개똥벌레’라는 노래 때문인지 깨끗한 곳에서만 살 수 있는데도 개똥에 사는 더러운 벌레라는 오해를 받았다. 애벌레 상태로 겨울을 난 반딧불이는 여름을 앞두고 성충으로 변신한다. 배에 형광색 발광기를 켜고 이르면 늦은 5월부터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반딧불이의 빛은 구애의 빛이다. 암수가 불빛을 주고받으며 제 짝을 찾아 나선다.
그 숲은 가을이 되면 산수유와 단풍나무가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자연의 색은 성숙해진다. 빨간색은 붉게, 노란색은 샛노랗게, 보라색은 가짓빛으로 자신의 색을 찾아 영글었다.
그리고 꾀꼬리 대신 꿩과 까투리와 산비둘기와 산새들이 모여들어 재잘거렸고, 원형으로 돌출된 커다란 육각형 겹눈을 흘깃거리며 전진, 정지, 후진, 뒤집기 등 자유자재로 비행 기술을 구사하는 고추잠자리들은 짝을 찾아 헤매 다녔다.
아침 일찍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계곡은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가을이 되어 일교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밤사이 계곡이 차갑게 식어서 안개가 낀 것이다. 그러나 낮 동안 햇살이 비치면서 지상의 온도가 올라가면 안개는 서서히 흩어졌다. 자욱한 안개가 너무나 그립다. 그 계곡에는 흰 꽃잎에 노란색 수술이 겹으로 피면서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야생 수선화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그 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 정취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한 아카시아 나뭇잎 냄새를 맡으며 가파르게 경사진 숲속 길을 올라가자 숨이 차올라 목이 막혔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차가워진 몸이 몹시 떨렸다. 그 순간 과거로 이어진 문이 열리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옛 기억의 잎사귀들이 살랑거리면서 슬픈 음악을 연주한다.
나는 어린 시절 가회동 꼭대기에 살았다. 그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때 동네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에서는 채소와 두부도 팔았고, 생선 가게와 정육점, 연탄 배달집, 세탁소, 방앗간, 대중목욕탕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과 맞닿을 듯한 높고 가파른 축대와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두 사람이 지나가려면 어깨를 비켜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미로처럼 이어졌다. 대낮이면 아이들 고함 소리로 가득 찼다가 저녁때쯤이면 이 집 저 집에서 새어나오는 밥 짓는 냄새와 된장찌개 냄새로 채워졌다.
그래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곳에서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에 편의점과 피자집, 이탈리아 식당, 식빵 전문점, 프랜차이즈 카페, SK텔레콤 대리점 등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개축해서 세련미를 살린 부티크,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자수나 옻칠, 민화, 한지, 한복 등 전통 장인들이 운영하는 공방들이 들어서 있다.
어쩌다 골목길 안쪽에 남아있는 일제 때쯤 지은 오래된 단층 한옥집은 3~4층 다세대 주택들에 둘러싸여 마치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동네의 술친구 서너 명과 함께 옛집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단골손님이었다. 손때가 묻어 끈적이는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중년의 주인과 손님들은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은 핏물이 고인 생선과 돼지고기, 남쪽에서 올라온 꼬막으로 안주를 만들었다. 그들은 막걸리 아니면 독한 소주를 마셨다. 아버지는 거나하면 옛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고기 몇 점을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겨울밤이면 몇 점의 고기를 얻어먹고 싶어서 아버지를 마중한다는 핑계로 그 술집에 가서는 안쪽을 기웃거렸다.
북촌 한옥 마을의 비탈진 골목길.
외국 관광객 수십 명이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왁자지껄했다. 골목길 양쪽에 있는 빛바랜 기와지붕과 벽돌담, 격자무늬의 녹슨 창살을 단 한옥들의 대문에는 ‘Silence please’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그 문장 아래는 중국어, 일본어로 같은 뜻의 말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골목 곳곳에 정숙을 요청하는 안내판과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관광지가 된 가회동 주택가의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종로 구청에서 현수막까지 만들어 내 걸었을까.
골목길에서 만난 북촌 주민이 말했다.
“매일 외국 관광객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입니다. 사람 사는 게 아니지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대문을 열어놓고 관광객들에게 집도 구경시켜주고 화장실도 이용하게 해줬죠. 그러나 일행 하나가 들어오면 줄지어 들어오는 통에 결국 문을 닫아 놓고 살지요. 그랬더니 이제는 아침마다 대문 앞에 버려진 쓰레기 치우는 일이 큰일이랍니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잃어 버렸다.
우리가 아직 젊었을 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
내가 연극에 미쳐 빠져 있을 때 저녁이면 그 친구와 함께 매일처럼 들렸다. 그 시절 우리들의 호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많은 시간과 아스라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냥 그곳에서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의 기억이다.
명동에는 그 옛날 은성주점과 돌체다방과 쉘부르와 코스모스 백화점과 엘칸토, 떼아뜨르 추 등 소극장들과 음악다방들이 있었다. 그 이전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헝가리 랩소디를 틀어 주었던 음악다방인 ‘봉선화 다방’과 시인과 작가, 화가 등 예술가들이 모여 들었던 ‘아카데미 다방’이 있었지만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다만 명동의 상징으로 신성불가침의 성지였던 주황색 벽돌의 엷은 붉은 빛이 여전히 감도는 명동성당은 아직도 그 낮은 언덕에 무심하게 우뚝 서 있다.
지금은 온통 외국인 관광객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가 화장품 가게, 중저가 의류 브랜드와 대형 프랜차이즈 식당들만 즐비하다. 맛집 골목으로 유명했던 먹자 골목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중국 대사관 뒤쪽 이른바 카페 골목도 사라지고 없다. 옛날에는 그 골목에 카페와 구둣가게, 보세옷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몽땅 화장품 가게가 되었다.
무색무취의 무국적 거리로 변해버렸으니 이제 명동은 잃어버린 땅, 빼앗긴 땅이 되었다.
거리는 일본어 간판과 중국어 간판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옛날과는 완전히 색다른 골목 표정을 띠고 있다.
긴 그림자를 오만하게 드리우며 하늘을 가리고 있는 새로 지은 고층 건물들은 무미건조하고 더욱 차갑고 냉소적으로만 느껴진다.
명동의 중심에는 명동예술극장이 있다. 맞은편에는 유네스코 회관이 있는데 유네스코의 옆구리 좁은 길 역시 유커들이 넘쳐났고 그들을 상대로 한 많은 좌판들과 호객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하다.
우리가 명동을 한참 드나들던 시절이 언제였든가? 예술가들이 은성주점, 돌체다방, 동방살롱 등을 배경으로 드나들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1970년대 중반부터 오비스캐빈, 쉘부르 등에서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던 젊은 신인 가수들이 새롭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시절도 다 지나간 다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브랜드 옷가게와 구두가게, 먹고 마시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때 외환은행 본점 건물 뒤쪽 좁은 골목에는 유리 칸막이 안에서 디제이가 하루 종일 팝송을, 가끔은 남미 음악이나 재즈를 틀어주는 경양식집들이 한집 건너 몰려 있었다.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가끔은 그렇고 그런 가수들이 출연해서 라이브 연주를 하였다. 그곳에서 함박스테이크 아니면 돈가스를 먹었고 오비 병맥주를 마셨다.
그 친구는 술에 취하면 센티멘탈해져서 늘 노래를 불렀다.
명동 샹송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리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불렀다. 부르는 게 아니라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불렀던 박인희 가수는 언젠가 L.A.로 떠난 뒤였다. 소문대로 가수 박인희는 31살에 요절한 시인 박인환의 친동생이었을까?
지하철 2호선과 4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번 출구를 나오자 ‘샤프카’라는 러시아식 방한모를 쓴 러시아인들이 자주 보였다. 길 건너편에 몇 억 광년이나 떨어진 머나먼 별나라에서 외계인이 타고 내려온 UFO처럼 생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보인다. 골목 간판에 쓰여진 문자들이 몹시 낯설었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주로 쓰는 키릴 문자였다. 그곳에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이 밀집해있다. 과거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처럼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교류하는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그곳은 ‘서울의 실크로드’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거기가 을지로5가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이다.
나는 그 시절 동대문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가 끝난 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자주 광희동에서 쌍림동 방면으로 이어지는 술집 골목을 찾았다. 그때 나에게 야구장은 성지였다. 세속 종교의 지붕이 없는 성당이었다. 그렇게 추억이 어린 야구장이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여전히 야구의 백미인 홈런이 하늘 높이 날아갈 때 관중들이 쏟아내는 귀청을 찢는 함성 소리가 귓가를 맴돌면서 아련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 일대가 외국인 거리로 변하게 된 건 냉전이 종식된 후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이루어진 1990년부터라고 한다. (세상은 돌고 돈다. 한때 철천지 원수 국가였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국교를 맺다니. 조선과 제정 러시아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 공사가 철수하면서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 동대문 의류시장을 찾은 보따리 상인들이 이곳에 몰려있던 숙박업소에 며칠씩 묵게 되면서 부터였다.
러시아 의류상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단다.
“동대문의 한국 의류는 값이 너무 싸면서도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나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지요. 그래서 한 번 오면 몽땅 사가지요. 이익이 많이 남거든요.”
그 이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다른 나라 소상인들이 밀려 들어와 자연스럽게 이곳에 터를 잡았다.
나는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광희동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르칸트’에 들렸다. (그 도시는 서역과 중국의 실크로드 중간에 위치한 도시이지만 몽골어로는 ‘밤의 바위’ 또는 ‘딱딱한 바위’를 의미한다. 왜 바위일까? 한때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으며 비비하눔 유적지로 유명하다. 거기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언젠가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가게에 들어서자 벽에는 우즈벡 전통 의상인 ‘치아판’이 걸려있고 우리의 트로트와 묘하게 닮은 구슬프고 흥겨운 선율이 어우러진 우즈벡 전통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에 마치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우즈벡 전통 볶음밥인 ‘플러프’와 훈제 양꼬치 ‘샤실릭’, 전통 빵을 시켜 먹으면서 러시아 보드카를 마셨다.
광희동 거리 중심부에 있는 뉴금호타운은 ‘몽골타워’로 불리고 있었다. 그 10층 건물에는 몽골인이 운영하는 식당, 몽골식 전통 찻집, 그리고 여행사, 중고 휴대폰 판매점 등이 입주해 있기 때문이다. 3층에 있는 ‘잘루스’에선 우유에 녹차, 소금 등을 넣어 만든 몽골식 전통차인 수태차를 맛볼 수 있다. 타향살이에 지친 몽골인들은 이곳에 모여 고향 음식을 먹으며 향수에 젖어 고향 이야기를 나눈단다. 고비 사막과 유목민 생활,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살을 에는 지독한 추위, 몽골 게르, 쌍봉낙타와 낙타 젖, 독수리와 회색 늑대, 풍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생활 정보를 나눈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세운상가가 있는 종로4가 예지동.
예지동은 입정동과는 세운상가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상에 있고 배오개 길을 건너면 광장시장이 나온다. 나는 예지동 시계골목을 찾았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뒷골목에 들어서자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린 듯 옛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낡은 시계 점포에 진열된 옛날 시계들과 색이 바랜 간판들이 보인다. 그 짧고 좁은 거리엔 수많은 시계, 귀금속 가게, 솜씨가 귀신같은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카메라 수리점이 밀집해 있다.
그 골목은 1960년대 무렵 청계천의 상인들이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형성됐다. 거친 목재로 만든 사과궤짝 위에 싸구려 시계를 고무줄에 묶어 진열해 놓고 팔던 게 시초였다. 그러면서 귀금속 가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까지는 혼수 마련을 위해 꼭 들려야 하는 장소가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계 기능이 포함된 삐삐와 휴대폰의 등장은 이 골목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명품 예물의 상권이 고급 백화점으로 이동하면서 그런 손님들의 발길마저 끊겼다. 하지만 재개발의 광풍은 아직 여기까지 몰아치진 않았다.
그 옛날 그 자리엔 60년 경력의 주인 아저씨가 여전히 2평 남짓한 가게에서 반세기가 넘게 정확한 시계처럼 반복된 삶을 살고 있었다. 세밀한 시계 수리공의 작업. 그 아저씨는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허리는 굽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누구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몹시 피곤해보였다. 내가 인사를 하면 누구인지 기억이나 할까? 나는 그 시계 가게를 외면한 채 도망치듯 그냥 지나쳤다.
오래된 그 골목에는 옛날 전통 맛집들이 몇 개는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그날 밤 옛날에 가끔 들렸던 빈대떡 파는 술집을 찾아갔다. 10여 분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빈자리가 났다. 혼자 앉아서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 웬 낯선 중년의 남자와 합석하게 되었다. 웬일인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막걸리와 소주를 섞어서 한참을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2차를 갔는데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테이블 서너 개가 고작인 작은 술집이었는데 미지근하게 데운 일본 청주인 사케를 마셨다.
그가 말했다.
“이 동네는 신문에 기사가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동네가 유명하면 절대 안 된다니까. 절대로 안 되지. 그렇고 말고. 이 좋은 동네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면 예전에 느꼈던 편안함과 호젓함은 온데간데없게 되겠지요. 그러면 옛날 집들은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떠나야 하고 그 자리에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온단 말이지요.”
나는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바깥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에서부터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지나고 남대문 세무서를 지나서 고층빌딩이 화려하게 빛나는 을지로2가 대로변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을지로3가역을 지나면서부터 어느새 높은 빌딩들이 모습을 감추고 낡은 저층 건물들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는 을지로3가와 을지로4가 지역이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 대림상가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갑작스러운 풍경 변화에 시간의 흐름이 뚝 끊긴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된 거리의 낡은 풍경 사이로 수십 년간 거리를 지켜온 작은 가게들이 보인다. 변한 것 같지만 변하지 않은 풍경들. 그러나 풍경은 건물만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풍경에는 건물과 장소를 이어주는 길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을지로3가에서 을지로4가에 이르는 큰 길가에는 벽지와 바닥재 가게를 비롯해 배관공사 자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 방수시공 업체, 알루미늄 샤시 가게, 세면대와 양변기를 취급하는 도기 타일 전문점, 부동산 중개소, 다방, 세무사 사무실, 직업 소개소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고, 전기재료와 조명기구를 파는 가게들은 대낮인데도 여전히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뒤쪽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철물점, 자재상, 인쇄공장, 화공약품을 파는 가게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공동 화장실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에 봉고트럭과 리어카로 물품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수표동에서 큰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골목길을 좀 더 걸어 들어가면 작은 철공소와 모터 가게, 주물 가게, 정밀기계 가공업체, 금형 가공업체가 밀집해있는 입정동과 산림동의 공장지대가 나온다. 너무 오래된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낡은 건물과 건물, 처마와 처마가 거의 붙어있고 곱창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형성하고 있다. 절삭기의 원통형 톱날이 금속을 자르면서 나오는 요란한 굉음과 쇳가루가 뿜어져 나오면서 튀는 불꽃과 매캐한 쇳가루 냄새, 기름 냄새가 골목길에 가득하다.
이것은 신기한 풍경이라기보다는 고단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는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꿈을 가진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는 그저 고달픈 일터이고 직장일 뿐이다.
저녁이 되면 공장들은 일제히 셔터를 내려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골목 전체가 깜깜해진다. 골목 구석에 남아있는 오래된 식당들만 불을 밝힌다.
아버지도 조촐한 밥상과 술 한 잔이 그리워 퇴근길이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이곳에 있는 작은 철공소에서 젊은 견습생 한 사람만 데리고 수직 밀링머신으로 공작물을 자르거나 깎는 작업을 했었다.
나는 그 시절 아버지의 철공소에서 가늘고 긴 철판을 잘라서 깎고 며칠 동안 숫돌에 갈아서 칼날 부분을 예리하게 만들고, 손잡이 부분은 얇은 가죽으로 감싸서 검은 테이프로 겹겹이 감았던 단도를 만들어서 보관했다.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옛날 골목길을 보았을 때 정겨웠다. 주책없이 옛날 생각에 젖어서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설치 작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사진 작가, 전시 기획자 등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전시장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운상가 쪽은 어떤 형태이든 조만간 재개발이 될 모양이다.
옥탑방.
서울에서 방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곳. 자신만의 마당을 즐길 수 있는 곳. 옥탑방은 시야가 트여 조망이 좋고 임대료가 저렴했다. 그때는 2층 평평한 옥상에 옥탑방이 있었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옥탑방의 문이 보였다. 집 안에 들어서면 5평 남짓한 아기자기한 공간이 나타났고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문 밖 마당엔 구석에 굴뚝이 솟아있고 빨랫줄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좁은 공간을 활용해야 했다. 옥탑방 곳곳에 수납공간을 만들고 가구 배치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여전히 곰팡이가 가득했다.
도시의 풍경 속으로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더욱 컴컴해진 어둠 속으로 건물들이 흐물흐물 차츰 사라지고 별들이 깜박이며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옛날 그 집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여름이면 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의 연보라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꽃이 내뿜는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옥상까지 퍼져 올라왔었다.
지금은 대학로 번화한 뒷골목에서 낙산 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4, 5층 높이의 원룸 빌딩들이 좁은 간격으로 숲을 이룬 채 들어서 있다.
내가 그때 무슨 일 때문인지 머리는 박박 깎였고 먹방에 갇혔다. 먹방이란 글자 그대로 먹물을 뿌린 듯 사방이 새카만 독거실을 말한다. 겨우 0.8평으로 밥그릇이 들어오는 식구통만 열려 있는 폐쇄된 방이었는데 이른바 징벌방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사방을 둘러싼 검은 시멘트벽은 한기를 내뿜는다. 하루 온종일 식구통만 바라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식구통만 늘 열려 있어 어두컴컴한 작은 상자 안으로 네모난 하얀 외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먹방에서 감금된 상태로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진다. 마침내 무감각해지고 자아는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가까운 미래마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지나간 시간과 과거만이 남아있다. 과거 외에 확실한 것은 없었다.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먹방 생활을 견디려면 과거에, 추억에 의지해야만 한다.
옛날에 품었던 희망, 그 시절의 꿈, 옛 사랑, 오래전 이야기, 지난날의 이야기는 아름다웠던가? 슬펐던가? 내가 과거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대학로 뒤쪽 낙산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단독주택의 옥상을 생각했다.
그 산 꼭대기에 오르면 왼쪽으로 삼선동과 한성대학교 캠퍼스가, 오른쪽으로 창신동 꼭대기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아득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마음껏 우러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즐거웠던 한 시절을, 그날 밤 칼이 번쩍이며 피가 낭자했던 그 끔찍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서부터 시작해서 생각나는 대로 거리와 골목과 지역으로 추억을 찾아 떠돌았다.
짧게 지나가는 이 찬란한 계절이 아쉬워서 또는 한없이 복잡한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또는 건강한 몸으로 추스르기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뚜렷한 목적지가 있을 리 없다. 천천히,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로 발길을 옮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너무 낯설다.
새로워지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세상이 너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일까.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모든 생물체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심지어 사상 또는 이념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도 이 원칙은 적용되는 것일까. 변화는 진화를 의미할 것이다.
교도소의 높고 차가운 시멘트벽은 나와 바깥 세계를, 시간의 벽은 나의 삶과 한없이 느리게 지나가는 무기수의 시간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나에게 변화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변화가 두려웠고 무서웠다. 나의 시간을 끝장내는 것은 결국 죽음뿐일 것이다.
동대문역을 내려서 새로 명명된 율곡로를 따라 대학로에 들어섰다. 서울사대 부설 초등학교와 서울사대 부설 여자중학교, 방송통신대학, 서울대 의과대학, 동숭교회 건물은 옛날 모습 그대로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천천히 걸어서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쯤에 다다르자 호객꾼이 연극, 뮤지컬 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힌 책받침을 들고는 옷깃을 붙잡는다. 고등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앳된 얼굴이고 간혹 요란하게 몸을 뒤틀면서 껄렁댄다.
앳된 얼굴이 말했다.
“이 연극 무지 재밌다니까요. 아저씨, 배꼽 빠져요.”
며칠째 동숭동 일대를 천천히 걸어서 뺑뺑 돌고 있다. 동숭동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몹시 낯설었다. 무작정 걸었다. 상실감에 힘겨웠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낯선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기쁨과 웃음, 걱정과 슬픔을 함께 느껴보고 싶다.
나는 뭔가 말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설핏 선잠이 들면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다.
사형 집행관이 내 목에 밧줄을 걸었다. 밧줄이 조여 오면서 뭉툭한 촉감이 피부에 느껴지고 전율처럼 심장과 내장으로 내려왔다.
집행관이 말했다. ‘연극쟁이였다고 하니까 잘 알고 있겠지.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라고. 너의 연극은 이제 막을 내린 거야. 법률의 규정에 따라 형을 집행한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옛날 나의 일터였던 소극장이 있는 건물을 찾았다. 언제부터인가 건물을 새로 단장해서 소극장이 있던 지하에는 젊은이들이 다니는 술집이 생겼고 1층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들어서있다.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그 연출가를 만나기로 했다. 언젠가 그 시절부터 운명을 함께하는 동지였고 오래 친구였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친구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불멸의 영혼은 결코 대학로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친구와 지금부터 허심탄회하게 깊고 깊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등장 인물
남자 - 56세
친구 - 57세
다만 친구는 대학로를 배회하는 영혼이다.
무대
명동이나 강남역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 풍경.
최신 팝 음악이나 재즈의 선율이 낮게 흐른다.
커피숍에서는 한국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중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가운데 간간이 일본어 정도만 귀에 들어온다. 화장실 안내판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되어있다.
건물 밖 골목에는 외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핑백을 들거나 ‘바켄’이나 ‘이코복스’같은 유명 커피전문점의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든 세련된 차림의 외국인 여성들이 눈에 띈다. 창밖은 하늘이 개어 가는지 궂어 지는지 분간이 안 가는데 엷은 회색 구름이 가느다란 봄비를 뿌리고 있다.
창 쪽 4인용 탁자에 아메리카노 종이 커피 잔 두 개가 놓여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비스듬히 앉아있다.
남자 (카페 안을 둘러보고 나서 밖을 내다보며) 많이 변했군!
목소리 (사이) 안 변하면 이상하지.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니. 자넨 흰 머리가 많이…… 그러나 얼굴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군. 옛날 그대로야. 세월이 비켜간 거라고.
남자 난들 별 수 있겠어. (사이) 그런데 걔들이 누구지? 지하철 입구에서 공연 순위가 인쇄된 책받침 같은 걸 주더라고…… 웃기는 소리도 하고……
목소리 속칭 ‘삐끼’라고 불리는 호객꾼한테 걸렸구만. 걔들은 연극, 뮤지컬 리스트가 빼곡한 책받침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붙잡는다네. 걔들이 대학로 물 흐린다고 원성이 자자하지.
남자 (미심쩍게) 그게 무슨 말인가?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내가 이 바닥을 떠난 지가 오래됐으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단 말이지.
목소리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이 바닥은 좁지 않은가. 뻔하다고 할 수 있지.
남자 뭐라고 했나?
목소리 그러니까 걔들을 업고 있는 공연 기획사들이 있는 거지. 뒤에 강력한 조폭들이 바치고 있다는 등, 점조직이라는 등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 무성하지.
남자 그렇다면!!!! 나도 알아야 하니까???? 자세히 좀……
목소리 (은근히 멸시감을 드러내지만 목소리에는 분노와 상실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삐끼라고 하면 무척 싫어한다네. 자존심은 있다는 거지. 자기들끼리는 ‘전단팀’이라고 하더라고. 제작사마다 기획팀이니 마케팅팀이니 있지 않는가.
(사이) 그러니까 그런 업무처럼 공연 소개하는 전단지 만들고 돌리는 일을 한다는 거지. 홍보팀 직원인 셈이야. 단지 그 일을 회사 내에서 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 한다는 거지. (사이) 가장 왕성하게 전단팀을 운영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네. 돈에 환장한 친구들이지…… 걔들은 안면몰수하고 있는 거야……
남자 그러면??? 삐끼들의 조직이란 게???
목소리 어떤 제작사에 소속되면 완전히 피라미드식 구조라네. 실장 한 명에 팀장 서너 명, 각 팀장 아래에 10명 내외의 알바가 있지. 공휴일이나 주말엔 고등학생 알바가 많지. 전단팀은 비수기 때는 20명 내외, 연말이나 방학 등 성수기 때는 50명 정도가 된다고 보면 되겠지.
하지만 연말과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대목엔 팀별로 100명까지도 풀린다네.
남자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말이지……? 돈은 어떻게 나누지?
목소리 당연히 교통비라든가 기본급은 없다네. 손님을 물어오는 데로…… 다시 말하면 티켓을 많이 파는 만큼 돈을 버는 구조라네. 그래서 열심히 뛰는 자들은 돈을 꽤 벌 수 있을 것이네.
남자 구체적으로 말해보게나.
목소리 그렇지. 자넨 관심이 많겠지. 자세히 말해주겠네.
전단팀의 총 판매액 중 30~50퍼센트가 그들 몫으로 떨어진다네. 다시 말하면 티켓 한 장당 실장 10퍼센트, 팀장 10퍼센트, 알바에게 10~30퍼센트 할당된다네. 그게 이 바닥에서는 반 공식처럼 되어있지.
그러면 알바는 100만 원 남짓, 실장과 팀장은 200만~300만 원을 벌수도 있다는 거야.
남자 그렇다면…… 걔들 수입이 얼마나 될까!!??
목소리 그렇고말고. (사이) 걔들 수입은 웬만한 배우보다 훨씬 낫지. 현장까지 직접 뛰는 특급 실장과 팀장은 월 500만 원도 찍는다고 소문이 나있지.
남자 그렇게 삐끼가 많으니 구역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조폭들도 자기들 구역이 있지 않은가.
목소리 자기들끼리 구역을 둘러싼 몸싸움과 신경전이 치열하다네. 가장 인기 있는 구역은 지하철역 입구인데 그곳은 공평하게 다 함께 들어가고…… 나머지 지역은 서로 나누어서 독점 방식으로 한다네. 그러니까 골목길도 구간별로 주인이 정해져 있는 거지.
남자 삐끼들 때문에 부작용이 많을 것 아닌가?
목소리 삐끼가 순위까지 조작한다네. 당연히 원성이 높았지. 지금은 모바일 시대 아닌가.
남자 ??????
목소리 네가 모바일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래…… 옛날과는 완전히 다르지. 그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군.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 않은가.
남자 (창밖을 망연히 내다보며) 그렇지…… 어쩔 수 없었지…… 나는 캄캄한 벽 속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 콘크리트 벽은 높고 두텁다네. 밤이면 감시탑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시간에 맞춰…… 허공에서 어른거리다 사라진다네. (사이) 그리고…… 그 벽은 만질 때마다 거칠고 날카로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진다네.
목소리 하루 종일 밤낮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자 그러게 말이네……?
목소리 걔들은 예매사이트 순위 화면을 찍어내서 그 중간쯤에 자기들 공연을 가짜로 집어넣어 인쇄하고 그걸 코팅해서 책받침을 만들어 뿌린다네.
그걸 보여주며 손님을 꼬드기는 거지.
남자 설마?? 그렇게까지 썩었겠나??
목소리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걸세.
그때 커피를 마시던 외국인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밖으로 나간다.
침묵
모든 비극은 죽음으로써 종막이 되고……
― G.G. 바이런
경복궁 동쪽 돌담을 왼쪽으로 끼고 삼청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청파출소를 지나자 왼쪽으로 팔판동이 나왔고 계속 더 올라가자 삼청동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나왔다.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느리게도 빠르게도 걷는다.
그 시절 악명 높은 국군 기무사령부는 삼청동 가는 길의 오른편 소격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국군 서울지구병원 안에 숨어 있어서 밖에서는 거기가 무시무시한 기무사임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 알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총에 맞아 이미 시체가 된 대통령이 가장 먼저 실려 간 곳이 그 병원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보안사 도당들은 그해 겨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나는 언덕길을 올라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숲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무들이 울창했고 무성하게 자라난 보드라운 풀들이 너울거렸고 봄의 꽃들이 피어있다.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덤불 숲속에서 봄의 향기를 맡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곳에는 옛날 옛날 옛적에는 깊은 샘이 있었고 송사리가 사는 맑은 개울이 흘렀다. 그리고 작은 신비한 나비들이 많이 날아 다녔다. 큰주홍부전나비와 독수리팔랑나비,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 남방남색공작나비 등이 날아 다녔다.
숲을 온통 녹색으로 색칠하였으니 여름은 위대한 화가였다.
한여름에는 밤하늘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세 살 터울의 형은 움직이는 불빛을 보고 밤 도깨비가 날아다닌다고 하였다.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곤충.
반딧불이 혹은 개똥벌레.
반딧불이는 어떤 가수가 불렀던 ‘개똥벌레’라는 노래 때문인지 깨끗한 곳에서만 살 수 있는데도 개똥에 사는 더러운 벌레라는 오해를 받았다. 애벌레 상태로 겨울을 난 반딧불이는 여름을 앞두고 성충으로 변신한다. 배에 형광색 발광기를 켜고 이르면 늦은 5월부터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반딧불이의 빛은 구애의 빛이다. 암수가 불빛을 주고받으며 제 짝을 찾아 나선다.
그 숲은 가을이 되면 산수유와 단풍나무가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자연의 색은 성숙해진다. 빨간색은 붉게, 노란색은 샛노랗게, 보라색은 가짓빛으로 자신의 색을 찾아 영글었다.
그리고 꾀꼬리 대신 꿩과 까투리와 산비둘기와 산새들이 모여들어 재잘거렸고, 원형으로 돌출된 커다란 육각형 겹눈을 흘깃거리며 전진, 정지, 후진, 뒤집기 등 자유자재로 비행 기술을 구사하는 고추잠자리들은 짝을 찾아 헤매 다녔다.
아침 일찍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계곡은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가을이 되어 일교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밤사이 계곡이 차갑게 식어서 안개가 낀 것이다. 그러나 낮 동안 햇살이 비치면서 지상의 온도가 올라가면 안개는 서서히 흩어졌다. 자욱한 안개가 너무나 그립다. 그 계곡에는 흰 꽃잎에 노란색 수술이 겹으로 피면서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야생 수선화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그 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 정취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한 아카시아 나뭇잎 냄새를 맡으며 가파르게 경사진 숲속 길을 올라가자 숨이 차올라 목이 막혔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차가워진 몸이 몹시 떨렸다. 그 순간 과거로 이어진 문이 열리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옛 기억의 잎사귀들이 살랑거리면서 슬픈 음악을 연주한다.
나는 어린 시절 가회동 꼭대기에 살았다. 그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때 동네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에서는 채소와 두부도 팔았고, 생선 가게와 정육점, 연탄 배달집, 세탁소, 방앗간, 대중목욕탕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과 맞닿을 듯한 높고 가파른 축대와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두 사람이 지나가려면 어깨를 비켜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미로처럼 이어졌다. 대낮이면 아이들 고함 소리로 가득 찼다가 저녁때쯤이면 이 집 저 집에서 새어나오는 밥 짓는 냄새와 된장찌개 냄새로 채워졌다.
그래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곳에서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에 편의점과 피자집, 이탈리아 식당, 식빵 전문점, 프랜차이즈 카페, SK텔레콤 대리점 등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개축해서 세련미를 살린 부티크,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자수나 옻칠, 민화, 한지, 한복 등 전통 장인들이 운영하는 공방들이 들어서 있다.
어쩌다 골목길 안쪽에 남아있는 일제 때쯤 지은 오래된 단층 한옥집은 3~4층 다세대 주택들에 둘러싸여 마치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동네의 술친구 서너 명과 함께 옛집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단골손님이었다. 손때가 묻어 끈적이는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중년의 주인과 손님들은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은 핏물이 고인 생선과 돼지고기, 남쪽에서 올라온 꼬막으로 안주를 만들었다. 그들은 막걸리 아니면 독한 소주를 마셨다. 아버지는 거나하면 옛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고기 몇 점을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겨울밤이면 몇 점의 고기를 얻어먹고 싶어서 아버지를 마중한다는 핑계로 그 술집에 가서는 안쪽을 기웃거렸다.
북촌 한옥 마을의 비탈진 골목길.
외국 관광객 수십 명이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왁자지껄했다. 골목길 양쪽에 있는 빛바랜 기와지붕과 벽돌담, 격자무늬의 녹슨 창살을 단 한옥들의 대문에는 ‘Silence please’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다. 그 문장 아래는 중국어, 일본어로 같은 뜻의 말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골목 곳곳에 정숙을 요청하는 안내판과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관광지가 된 가회동 주택가의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종로 구청에서 현수막까지 만들어 내 걸었을까.
골목길에서 만난 북촌 주민이 말했다.
“매일 외국 관광객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입니다. 사람 사는 게 아니지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대문을 열어놓고 관광객들에게 집도 구경시켜주고 화장실도 이용하게 해줬죠. 그러나 일행 하나가 들어오면 줄지어 들어오는 통에 결국 문을 닫아 놓고 살지요. 그랬더니 이제는 아침마다 대문 앞에 버려진 쓰레기 치우는 일이 큰일이랍니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잃어 버렸다.
우리가 아직 젊었을 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
내가 연극에 미쳐 빠져 있을 때 저녁이면 그 친구와 함께 매일처럼 들렸다. 그 시절 우리들의 호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많은 시간과 아스라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냥 그곳에서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의 기억이다.
명동에는 그 옛날 은성주점과 돌체다방과 쉘부르와 코스모스 백화점과 엘칸토, 떼아뜨르 추 등 소극장들과 음악다방들이 있었다. 그 이전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헝가리 랩소디를 틀어 주었던 음악다방인 ‘봉선화 다방’과 시인과 작가, 화가 등 예술가들이 모여 들었던 ‘아카데미 다방’이 있었지만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다만 명동의 상징으로 신성불가침의 성지였던 주황색 벽돌의 엷은 붉은 빛이 여전히 감도는 명동성당은 아직도 그 낮은 언덕에 무심하게 우뚝 서 있다.
지금은 온통 외국인 관광객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가 화장품 가게, 중저가 의류 브랜드와 대형 프랜차이즈 식당들만 즐비하다. 맛집 골목으로 유명했던 먹자 골목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중국 대사관 뒤쪽 이른바 카페 골목도 사라지고 없다. 옛날에는 그 골목에 카페와 구둣가게, 보세옷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지금은 몽땅 화장품 가게가 되었다.
무색무취의 무국적 거리로 변해버렸으니 이제 명동은 잃어버린 땅, 빼앗긴 땅이 되었다.
거리는 일본어 간판과 중국어 간판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옛날과는 완전히 색다른 골목 표정을 띠고 있다.
긴 그림자를 오만하게 드리우며 하늘을 가리고 있는 새로 지은 고층 건물들은 무미건조하고 더욱 차갑고 냉소적으로만 느껴진다.
명동의 중심에는 명동예술극장이 있다. 맞은편에는 유네스코 회관이 있는데 유네스코의 옆구리 좁은 길 역시 유커들이 넘쳐났고 그들을 상대로 한 많은 좌판들과 호객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하다.
우리가 명동을 한참 드나들던 시절이 언제였든가? 예술가들이 은성주점, 돌체다방, 동방살롱 등을 배경으로 드나들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1970년대 중반부터 오비스캐빈, 쉘부르 등에서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던 젊은 신인 가수들이 새롭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시절도 다 지나간 다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브랜드 옷가게와 구두가게, 먹고 마시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때 외환은행 본점 건물 뒤쪽 좁은 골목에는 유리 칸막이 안에서 디제이가 하루 종일 팝송을, 가끔은 남미 음악이나 재즈를 틀어주는 경양식집들이 한집 건너 몰려 있었다.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가끔은 그렇고 그런 가수들이 출연해서 라이브 연주를 하였다. 그곳에서 함박스테이크 아니면 돈가스를 먹었고 오비 병맥주를 마셨다.
그 친구는 술에 취하면 센티멘탈해져서 늘 노래를 불렀다.
명동 샹송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리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불렀다. 부르는 게 아니라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불렀던 박인희 가수는 언젠가 L.A.로 떠난 뒤였다. 소문대로 가수 박인희는 31살에 요절한 시인 박인환의 친동생이었을까?
지하철 2호선과 4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번 출구를 나오자 ‘샤프카’라는 러시아식 방한모를 쓴 러시아인들이 자주 보였다. 길 건너편에 몇 억 광년이나 떨어진 머나먼 별나라에서 외계인이 타고 내려온 UFO처럼 생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보인다. 골목 간판에 쓰여진 문자들이 몹시 낯설었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주로 쓰는 키릴 문자였다. 그곳에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이 밀집해있다. 과거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처럼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교류하는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그곳은 ‘서울의 실크로드’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거기가 을지로5가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이다.
나는 그 시절 동대문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가 끝난 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자주 광희동에서 쌍림동 방면으로 이어지는 술집 골목을 찾았다. 그때 나에게 야구장은 성지였다. 세속 종교의 지붕이 없는 성당이었다. 그렇게 추억이 어린 야구장이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여전히 야구의 백미인 홈런이 하늘 높이 날아갈 때 관중들이 쏟아내는 귀청을 찢는 함성 소리가 귓가를 맴돌면서 아련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 일대가 외국인 거리로 변하게 된 건 냉전이 종식된 후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이루어진 1990년부터라고 한다. (세상은 돌고 돈다. 한때 철천지 원수 국가였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국교를 맺다니. 조선과 제정 러시아는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 공사가 철수하면서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 동대문 의류시장을 찾은 보따리 상인들이 이곳에 몰려있던 숙박업소에 며칠씩 묵게 되면서 부터였다.
러시아 의류상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단다.
“동대문의 한국 의류는 값이 너무 싸면서도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나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지요. 그래서 한 번 오면 몽땅 사가지요. 이익이 많이 남거든요.”
그 이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다른 나라 소상인들이 밀려 들어와 자연스럽게 이곳에 터를 잡았다.
나는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광희동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르칸트’에 들렸다. (그 도시는 서역과 중국의 실크로드 중간에 위치한 도시이지만 몽골어로는 ‘밤의 바위’ 또는 ‘딱딱한 바위’를 의미한다. 왜 바위일까? 한때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으며 비비하눔 유적지로 유명하다. 거기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언젠가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가게에 들어서자 벽에는 우즈벡 전통 의상인 ‘치아판’이 걸려있고 우리의 트로트와 묘하게 닮은 구슬프고 흥겨운 선율이 어우러진 우즈벡 전통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에 마치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우즈벡 전통 볶음밥인 ‘플러프’와 훈제 양꼬치 ‘샤실릭’, 전통 빵을 시켜 먹으면서 러시아 보드카를 마셨다.
광희동 거리 중심부에 있는 뉴금호타운은 ‘몽골타워’로 불리고 있었다. 그 10층 건물에는 몽골인이 운영하는 식당, 몽골식 전통 찻집, 그리고 여행사, 중고 휴대폰 판매점 등이 입주해 있기 때문이다. 3층에 있는 ‘잘루스’에선 우유에 녹차, 소금 등을 넣어 만든 몽골식 전통차인 수태차를 맛볼 수 있다. 타향살이에 지친 몽골인들은 이곳에 모여 고향 음식을 먹으며 향수에 젖어 고향 이야기를 나눈단다. 고비 사막과 유목민 생활,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살을 에는 지독한 추위, 몽골 게르, 쌍봉낙타와 낙타 젖, 독수리와 회색 늑대, 풍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생활 정보를 나눈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세운상가가 있는 종로4가 예지동.
예지동은 입정동과는 세운상가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상에 있고 배오개 길을 건너면 광장시장이 나온다. 나는 예지동 시계골목을 찾았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뒷골목에 들어서자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린 듯 옛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낡은 시계 점포에 진열된 옛날 시계들과 색이 바랜 간판들이 보인다. 그 짧고 좁은 거리엔 수많은 시계, 귀금속 가게, 솜씨가 귀신같은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카메라 수리점이 밀집해 있다.
그 골목은 1960년대 무렵 청계천의 상인들이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형성됐다. 거친 목재로 만든 사과궤짝 위에 싸구려 시계를 고무줄에 묶어 진열해 놓고 팔던 게 시초였다. 그러면서 귀금속 가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까지는 혼수 마련을 위해 꼭 들려야 하는 장소가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계 기능이 포함된 삐삐와 휴대폰의 등장은 이 골목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명품 예물의 상권이 고급 백화점으로 이동하면서 그런 손님들의 발길마저 끊겼다. 하지만 재개발의 광풍은 아직 여기까지 몰아치진 않았다.
그 옛날 그 자리엔 60년 경력의 주인 아저씨가 여전히 2평 남짓한 가게에서 반세기가 넘게 정확한 시계처럼 반복된 삶을 살고 있었다. 세밀한 시계 수리공의 작업. 그 아저씨는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허리는 굽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누구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몹시 피곤해보였다. 내가 인사를 하면 누구인지 기억이나 할까? 나는 그 시계 가게를 외면한 채 도망치듯 그냥 지나쳤다.
오래된 그 골목에는 옛날 전통 맛집들이 몇 개는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그날 밤 옛날에 가끔 들렸던 빈대떡 파는 술집을 찾아갔다. 10여 분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빈자리가 났다. 혼자 앉아서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 웬 낯선 중년의 남자와 합석하게 되었다. 웬일인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막걸리와 소주를 섞어서 한참을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2차를 갔는데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테이블 서너 개가 고작인 작은 술집이었는데 미지근하게 데운 일본 청주인 사케를 마셨다.
그가 말했다.
“이 동네는 신문에 기사가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동네가 유명하면 절대 안 된다니까. 절대로 안 되지. 그렇고 말고. 이 좋은 동네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면 예전에 느꼈던 편안함과 호젓함은 온데간데없게 되겠지요. 그러면 옛날 집들은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떠나야 하고 그 자리에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온단 말이지요.”
나는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바깥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역에서부터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지나고 남대문 세무서를 지나서 고층빌딩이 화려하게 빛나는 을지로2가 대로변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을지로3가역을 지나면서부터 어느새 높은 빌딩들이 모습을 감추고 낡은 저층 건물들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는 을지로3가와 을지로4가 지역이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 대림상가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갑작스러운 풍경 변화에 시간의 흐름이 뚝 끊긴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된 거리의 낡은 풍경 사이로 수십 년간 거리를 지켜온 작은 가게들이 보인다. 변한 것 같지만 변하지 않은 풍경들. 그러나 풍경은 건물만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풍경에는 건물과 장소를 이어주는 길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을지로3가에서 을지로4가에 이르는 큰 길가에는 벽지와 바닥재 가게를 비롯해 배관공사 자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 방수시공 업체, 알루미늄 샤시 가게, 세면대와 양변기를 취급하는 도기 타일 전문점, 부동산 중개소, 다방, 세무사 사무실, 직업 소개소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고, 전기재료와 조명기구를 파는 가게들은 대낮인데도 여전히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뒤쪽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철물점, 자재상, 인쇄공장, 화공약품을 파는 가게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공동 화장실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에 봉고트럭과 리어카로 물품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수표동에서 큰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골목길을 좀 더 걸어 들어가면 작은 철공소와 모터 가게, 주물 가게, 정밀기계 가공업체, 금형 가공업체가 밀집해있는 입정동과 산림동의 공장지대가 나온다. 너무 오래된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낡은 건물과 건물, 처마와 처마가 거의 붙어있고 곱창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형성하고 있다. 절삭기의 원통형 톱날이 금속을 자르면서 나오는 요란한 굉음과 쇳가루가 뿜어져 나오면서 튀는 불꽃과 매캐한 쇳가루 냄새, 기름 냄새가 골목길에 가득하다.
이것은 신기한 풍경이라기보다는 고단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는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꿈을 가진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는 그저 고달픈 일터이고 직장일 뿐이다.
저녁이 되면 공장들은 일제히 셔터를 내려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골목 전체가 깜깜해진다. 골목 구석에 남아있는 오래된 식당들만 불을 밝힌다.
아버지도 조촐한 밥상과 술 한 잔이 그리워 퇴근길이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이곳에 있는 작은 철공소에서 젊은 견습생 한 사람만 데리고 수직 밀링머신으로 공작물을 자르거나 깎는 작업을 했었다.
나는 그 시절 아버지의 철공소에서 가늘고 긴 철판을 잘라서 깎고 며칠 동안 숫돌에 갈아서 칼날 부분을 예리하게 만들고, 손잡이 부분은 얇은 가죽으로 감싸서 검은 테이프로 겹겹이 감았던 단도를 만들어서 보관했다.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옛날 골목길을 보았을 때 정겨웠다. 주책없이 옛날 생각에 젖어서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설치 작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사진 작가, 전시 기획자 등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전시장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운상가 쪽은 어떤 형태이든 조만간 재개발이 될 모양이다.
옥탑방.
서울에서 방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곳. 자신만의 마당을 즐길 수 있는 곳. 옥탑방은 시야가 트여 조망이 좋고 임대료가 저렴했다. 그때는 2층 평평한 옥상에 옥탑방이 있었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옥탑방의 문이 보였다. 집 안에 들어서면 5평 남짓한 아기자기한 공간이 나타났고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문 밖 마당엔 구석에 굴뚝이 솟아있고 빨랫줄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좁은 공간을 활용해야 했다. 옥탑방 곳곳에 수납공간을 만들고 가구 배치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화장실에는 여전히 곰팡이가 가득했다.
도시의 풍경 속으로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더욱 컴컴해진 어둠 속으로 건물들이 흐물흐물 차츰 사라지고 별들이 깜박이며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옛날 그 집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여름이면 마당 귀퉁이에 서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의 연보라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꽃이 내뿜는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옥상까지 퍼져 올라왔었다.
지금은 대학로 번화한 뒷골목에서 낙산 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4, 5층 높이의 원룸 빌딩들이 좁은 간격으로 숲을 이룬 채 들어서 있다.
내가 그때 무슨 일 때문인지 머리는 박박 깎였고 먹방에 갇혔다. 먹방이란 글자 그대로 먹물을 뿌린 듯 사방이 새카만 독거실을 말한다. 겨우 0.8평으로 밥그릇이 들어오는 식구통만 열려 있는 폐쇄된 방이었는데 이른바 징벌방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사방을 둘러싼 검은 시멘트벽은 한기를 내뿜는다. 하루 온종일 식구통만 바라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식구통만 늘 열려 있어 어두컴컴한 작은 상자 안으로 네모난 하얀 외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먹방에서 감금된 상태로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진다. 마침내 무감각해지고 자아는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가까운 미래마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지나간 시간과 과거만이 남아있다. 과거 외에 확실한 것은 없었다.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먹방 생활을 견디려면 과거에, 추억에 의지해야만 한다.
옛날에 품었던 희망, 그 시절의 꿈, 옛 사랑, 오래전 이야기, 지난날의 이야기는 아름다웠던가? 슬펐던가? 내가 과거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대학로 뒤쪽 낙산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단독주택의 옥상을 생각했다.
그 산 꼭대기에 오르면 왼쪽으로 삼선동과 한성대학교 캠퍼스가, 오른쪽으로 창신동 꼭대기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아득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마음껏 우러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즐거웠던 한 시절을, 그날 밤 칼이 번쩍이며 피가 낭자했던 그 끔찍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서부터 시작해서 생각나는 대로 거리와 골목과 지역으로 추억을 찾아 떠돌았다.
짧게 지나가는 이 찬란한 계절이 아쉬워서 또는 한없이 복잡한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또는 건강한 몸으로 추스르기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뚜렷한 목적지가 있을 리 없다. 천천히,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로 발길을 옮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너무 낯설다.
새로워지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세상이 너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일까.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모든 생물체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심지어 사상 또는 이념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도 이 원칙은 적용되는 것일까. 변화는 진화를 의미할 것이다.
교도소의 높고 차가운 시멘트벽은 나와 바깥 세계를, 시간의 벽은 나의 삶과 한없이 느리게 지나가는 무기수의 시간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나에게 변화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변화가 두려웠고 무서웠다. 나의 시간을 끝장내는 것은 결국 죽음뿐일 것이다.
동대문역을 내려서 새로 명명된 율곡로를 따라 대학로에 들어섰다. 서울사대 부설 초등학교와 서울사대 부설 여자중학교, 방송통신대학, 서울대 의과대학, 동숭교회 건물은 옛날 모습 그대로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천천히 걸어서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쯤에 다다르자 호객꾼이 연극, 뮤지컬 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힌 책받침을 들고는 옷깃을 붙잡는다. 고등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앳된 얼굴이고 간혹 요란하게 몸을 뒤틀면서 껄렁댄다.
앳된 얼굴이 말했다.
“이 연극 무지 재밌다니까요. 아저씨, 배꼽 빠져요.”
며칠째 동숭동 일대를 천천히 걸어서 뺑뺑 돌고 있다. 동숭동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몹시 낯설었다. 무작정 걸었다. 상실감에 힘겨웠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낯선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기쁨과 웃음, 걱정과 슬픔을 함께 느껴보고 싶다.
나는 뭔가 말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설핏 선잠이 들면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다.
사형 집행관이 내 목에 밧줄을 걸었다. 밧줄이 조여 오면서 뭉툭한 촉감이 피부에 느껴지고 전율처럼 심장과 내장으로 내려왔다.
집행관이 말했다. ‘연극쟁이였다고 하니까 잘 알고 있겠지.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라고. 너의 연극은 이제 막을 내린 거야. 법률의 규정에 따라 형을 집행한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옛날 나의 일터였던 소극장이 있는 건물을 찾았다. 언제부터인가 건물을 새로 단장해서 소극장이 있던 지하에는 젊은이들이 다니는 술집이 생겼고 1층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들어서있다.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그 연출가를 만나기로 했다. 언젠가 그 시절부터 운명을 함께하는 동지였고 오래 친구였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친구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불멸의 영혼은 결코 대학로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친구와 지금부터 허심탄회하게 깊고 깊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등장 인물
남자 - 56세
친구 - 57세
다만 친구는 대학로를 배회하는 영혼이다.
무대
명동이나 강남역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 풍경.
최신 팝 음악이나 재즈의 선율이 낮게 흐른다.
커피숍에서는 한국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중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가운데 간간이 일본어 정도만 귀에 들어온다. 화장실 안내판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되어있다.
건물 밖 골목에는 외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핑백을 들거나 ‘바켄’이나 ‘이코복스’같은 유명 커피전문점의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든 세련된 차림의 외국인 여성들이 눈에 띈다. 창밖은 하늘이 개어 가는지 궂어 지는지 분간이 안 가는데 엷은 회색 구름이 가느다란 봄비를 뿌리고 있다.
창 쪽 4인용 탁자에 아메리카노 종이 커피 잔 두 개가 놓여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비스듬히 앉아있다.
남자 (카페 안을 둘러보고 나서 밖을 내다보며) 많이 변했군!
목소리 (사이) 안 변하면 이상하지.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니. 자넨 흰 머리가 많이…… 그러나 얼굴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군. 옛날 그대로야. 세월이 비켜간 거라고.
남자 난들 별 수 있겠어. (사이) 그런데 걔들이 누구지? 지하철 입구에서 공연 순위가 인쇄된 책받침 같은 걸 주더라고…… 웃기는 소리도 하고……
목소리 속칭 ‘삐끼’라고 불리는 호객꾼한테 걸렸구만. 걔들은 연극, 뮤지컬 리스트가 빼곡한 책받침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붙잡는다네. 걔들이 대학로 물 흐린다고 원성이 자자하지.
남자 (미심쩍게) 그게 무슨 말인가?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내가 이 바닥을 떠난 지가 오래됐으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단 말이지.
목소리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이 바닥은 좁지 않은가. 뻔하다고 할 수 있지.
남자 뭐라고 했나?
목소리 그러니까 걔들을 업고 있는 공연 기획사들이 있는 거지. 뒤에 강력한 조폭들이 바치고 있다는 등, 점조직이라는 등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 무성하지.
남자 그렇다면!!!! 나도 알아야 하니까???? 자세히 좀……
목소리 (은근히 멸시감을 드러내지만 목소리에는 분노와 상실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삐끼라고 하면 무척 싫어한다네. 자존심은 있다는 거지. 자기들끼리는 ‘전단팀’이라고 하더라고. 제작사마다 기획팀이니 마케팅팀이니 있지 않는가.
(사이) 그러니까 그런 업무처럼 공연 소개하는 전단지 만들고 돌리는 일을 한다는 거지. 홍보팀 직원인 셈이야. 단지 그 일을 회사 내에서 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 한다는 거지. (사이) 가장 왕성하게 전단팀을 운영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네. 돈에 환장한 친구들이지…… 걔들은 안면몰수하고 있는 거야……
남자 그러면??? 삐끼들의 조직이란 게???
목소리 어떤 제작사에 소속되면 완전히 피라미드식 구조라네. 실장 한 명에 팀장 서너 명, 각 팀장 아래에 10명 내외의 알바가 있지. 공휴일이나 주말엔 고등학생 알바가 많지. 전단팀은 비수기 때는 20명 내외, 연말이나 방학 등 성수기 때는 50명 정도가 된다고 보면 되겠지.
하지만 연말과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대목엔 팀별로 100명까지도 풀린다네.
남자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말이지……? 돈은 어떻게 나누지?
목소리 당연히 교통비라든가 기본급은 없다네. 손님을 물어오는 데로…… 다시 말하면 티켓을 많이 파는 만큼 돈을 버는 구조라네. 그래서 열심히 뛰는 자들은 돈을 꽤 벌 수 있을 것이네.
남자 구체적으로 말해보게나.
목소리 그렇지. 자넨 관심이 많겠지. 자세히 말해주겠네.
전단팀의 총 판매액 중 30~50퍼센트가 그들 몫으로 떨어진다네. 다시 말하면 티켓 한 장당 실장 10퍼센트, 팀장 10퍼센트, 알바에게 10~30퍼센트 할당된다네. 그게 이 바닥에서는 반 공식처럼 되어있지.
그러면 알바는 100만 원 남짓, 실장과 팀장은 200만~300만 원을 벌수도 있다는 거야.
남자 그렇다면…… 걔들 수입이 얼마나 될까!!??
목소리 그렇고말고. (사이) 걔들 수입은 웬만한 배우보다 훨씬 낫지. 현장까지 직접 뛰는 특급 실장과 팀장은 월 500만 원도 찍는다고 소문이 나있지.
남자 그렇게 삐끼가 많으니 구역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조폭들도 자기들 구역이 있지 않은가.
목소리 자기들끼리 구역을 둘러싼 몸싸움과 신경전이 치열하다네. 가장 인기 있는 구역은 지하철역 입구인데 그곳은 공평하게 다 함께 들어가고…… 나머지 지역은 서로 나누어서 독점 방식으로 한다네. 그러니까 골목길도 구간별로 주인이 정해져 있는 거지.
남자 삐끼들 때문에 부작용이 많을 것 아닌가?
목소리 삐끼가 순위까지 조작한다네. 당연히 원성이 높았지. 지금은 모바일 시대 아닌가.
남자 ??????
목소리 네가 모바일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래…… 옛날과는 완전히 다르지. 그때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군.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 않은가.
남자 (창밖을 망연히 내다보며) 그렇지…… 어쩔 수 없었지…… 나는 캄캄한 벽 속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 콘크리트 벽은 높고 두텁다네. 밤이면 감시탑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시간에 맞춰…… 허공에서 어른거리다 사라진다네. (사이) 그리고…… 그 벽은 만질 때마다 거칠고 날카로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진다네.
목소리 하루 종일 밤낮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자 그러게 말이네……?
목소리 걔들은 예매사이트 순위 화면을 찍어내서 그 중간쯤에 자기들 공연을 가짜로 집어넣어 인쇄하고 그걸 코팅해서 책받침을 만들어 뿌린다네.
그걸 보여주며 손님을 꼬드기는 거지.
남자 설마?? 그렇게까지 썩었겠나??
목소리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걸세.
그때 커피를 마시던 외국인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밖으로 나간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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