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판문점」의 참고자료 1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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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1. 포로 송환
부산의 임시 포로수용소는 밀려드는 인민군 포로 때문에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1951년 2월 1일부터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건설되면서 2월 말까지 5만 4천여 명의 포로들이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송되었고, 3월 1일에는 부산의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거제도로 옮기면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3월 31일에 이르면 거제도에 수용된 총인원은 9만 9천여 명이 되었고, 5월 말에 11만 6천여 명, 몇 개월 후에는 대략 17만여 명이 되었다. 거제도에는 28개의 포로 수용 막사 단지가 건설되었고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각 구역은 6, 7, 8, 9구역으로 명명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북진과 동시에 일부는 영등포에서 수원으로 남하했다.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을 개시하면서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을 격파하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남쪽 전선에서 병력의 퇴로가 차단되면 독 안의 쥐 신세가 되어 궤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긴급 총후퇴를 명령했다.
(유엔군은 유엔 결의에 따라 참전한 16개국 국가의 연합군을 지칭한다. 유엔군은 압도적으로 미국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 15개국 군인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는 유엔군과 미군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9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38선을 월선하도록 허가했다. 전쟁의 방향이 봉쇄에서 롤백으로 전환된 것이다. 미군들에게는 추수감사절까지 작전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고 12일 해주를, 19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초산을 점령했고, 11월 22일 미군 제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의 혜산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무렵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인해전술에 밀려 비극적인 후퇴가 시작되었다. (북진하고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0만 명이 넘는 인민군과 2만여 명의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특히 인민군 포로 중에는 남한 출신으로 강제로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편입되었던 다수의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난 중인 다수의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포로로 취급되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는 미군과 국군, 인민군과 중공군 간에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은 1951년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지구전의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만 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개최되었다. 1952년 1월 27일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양측이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가장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던 포로 송환 문제는 예상과 달리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휴전 협정 체결을 1년 넘게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포로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정전 후 포로를 지체없이 석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강제적 송환 원칙에도 불구하고 본국(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이 많이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포로가 원할 경우에 한해서 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미국과 합의 없이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그리고 휴전 협정에 서명을 거부했다. 한국 정부의 서명 거부로 인하여 한국이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에서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때부터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반공 세력과 친공 세력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 친공 세력과 포로수용소를 관할하는 미군 수용소 당국 간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1952년 2월에는 국제적십자사 위원회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송환 가부에 대한 포로들의 의사를 묻는 분류 심사를 시행했고, 52년 7월경에는 심사 과정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37,700여 명이 거제도 수용소를 나와 8개의 수용소로 분산 배치되었다가 그 무렵 대부분이 석방되었다.
1952년 5월 7일 6,400여 명의 강성 인민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제76 수용동에서 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수용소의 대표자는 “수용동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문제를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다. 도드 준장이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신사답게 앉아서 문제를 해결하자.”라며 도드를 초대했다가 붙잡아서 포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라는 영어 메시지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 안전은 보장된다. 총격이나 그 밖의 폭행이 가해지면 생명이 위험한 줄 알아라.”라고 협박했다. (도드 준장은 수용소장직에서 해임되고 나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대령으로 강등되었다. 그가 해임되자 미군은 찰스 콜슨 장군을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관으로 신속하게 임명했다.)
그 납치사건을 계기로 미군 사령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고 52년 9월 약 5만 명의 반공포로를 8개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배치했다. (5만 명에는 35,700여 명의 인민군 반공포로와 제주 모슬포 수용소로 보내진 중공군 14,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1953년 6월 18일 6‧18 반공포로 석방 당시 35,700여 명 중에서 27,400여 명이 석방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또는 정전)이 성립되었다. 그해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주은래는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월 7일부터 24일까지 소련을 방문했다. 새로운 소련 지도부와 정전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휴전회담은 꼬박 2년을 끌었다. 최대 쟁점은 남북을 가르는 선을 긋는 문제였다. 원래의 38선과 전쟁 과정에서 새로 생긴 군사분계선 중에서 어느 선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였다. 결국 군사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으로 결정되었지만 또 다른 쟁점은 전쟁 포로들의 송환 문제였다.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전쟁 포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제네바 협약만으로는 명쾌하게 해결될 수 없었다.
북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국가 권력과 개인의 주체성 간 간극의 문제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라는 형이상적이고 존재론적 물음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우선해야 한다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6‧25 전쟁은 포로들 개개인에게 본국으로 송환 여부에 대한 의사를 묻고 동의하는 경우에만 송환한다는 자발적 송환 원칙이 공식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공산군 측으로 송환을 원하는 인민군 포로 75,823명과 중공군 포로 6,670명 등 82,493명은 수용소에서 특별 열차를 이용하여 장단역에서 내리거나 25척의 수송선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이동한 후 영등포를 거쳐서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북으로 돌아갔다.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내려와 교환된 남쪽 포로는 국군 8,321명과 미군 3,746명을 포함하여 모두 13,444명이었다. 북쪽은 체포된 국군 포로들을 반혁명 분자로 처단하든가 ‘해방 전사’란 이름으로 인민군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갇힌 수많은 유엔군 포로는 기아, 학대, 고문, 추위, 질병, 학살 등으로 죽어갔다.)
이제 남은 과제는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문제였다.
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4,704명과 인민군 7,900명이 있었고 남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국군 335명, 미군 23명, 영국군 1명이 있었다. 이들 포로는 모두 인도 관리군에 인계될 예정이었다.
양측으로부터 포로의 인계와 인수는 1953년 9월 10일부터 시작되어 25일에 모두 끝났다. 유엔군측이 인도 관리군에 인민군 7,900명과 중공군 14,704명을 인계했고, 이어서 북한군 측은 국군 335명, 미군 23명, 영국군 1명을 인도군에 인계했다.
이제 양측의 송환 거부 포로들은 인도군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 송환을 거부하는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 22,604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628명이 북으로 송환을 희망했고 (북한국 188명, 중공군 440명 등), 일부는 중립국을 희망했다. 남으로 귀환을 거부했던 국군과 유엔군 포로 359명 중 설득회에 참여했던 인원은 6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 가운데 설득회를 통해서 복귀한 포로는 없었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 미군 2명과 한국군 8명 등 10명이 귀환했다.
1954년 1월 20일 인도군은 포로들을 쌍방에 인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모두 19시간 동안 21,890명이 유엔군 측으로, 349명이 북한군 측으로 인계됐다. 북한군 74명, 중공군 12명, 국군 2명 등 88명은 중립국을 택했다.
결국 송환되지 않는 포로들은 1954년 1월 22일부터 민간인이 됐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만이 아닌 중립국을 원했지만, 자유중국 정부는 이들을 심사 없이 수용할 것을 천명했다. 한국 정부도 다른 곳을 원하는 포로까지 포함해서 심사 없이 모든 송환 거부 북한 포로를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다. 한국 정부로 이송된 송환 거부 포로들은 수용소로 옮겨져서 재교육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그들 중 대다수가 국군에 입대했다. 석방된 포로들은 매년 6월 18일과 1월 23일을 각각 ‘반공의 날’, ‘세계자유의 날’로 정하여 반공포로석방 기념행사를 통해 반공의식을 고취시켰다.
판문점
판문점은 6.25 전쟁의 휴전협상이 진행된 곳이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선적리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판문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판문점은 정전협정 이후 6.25 전쟁 포로 교환업무를 맡게 된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 교환 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협상이 이뤄진 실제 정전협정 조인 장소는 현재의 판문점보다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다. 정전협정 이후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쌍방의 행정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
2. 인도 관리군
1953년 8월경 한국의 판문점으로 파견될 인도 관리군 1개 여단 약 6,000명은 수도 델리에서 부대 편성을 마치고 인도 남부의 마드라스에 집결했다. 그리고 5개의 파견단으로 나눠서 각기 시차를 두고 수송선에 탑승하여 인천을 향해 출발했다. 다만 제5 파견대인 마라타 연대의 제2 대대는 수송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인천에 도착했는데 그 수송기에는 파견군 사령관 도랏 소장과 그의 참모진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인천에 도착한 인도군은 미군 항공모함으로 옮긴 다음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갔다. 그때 헬리콥터가 1,300번이나 떴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조치 때문에 인도군은 남한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장단역으로 갈 수 없었다.)
1954년 2월, 마지막 임무를 처리한 인도군 1,500명과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인 K.S. 티마야 장군 등은 인천항에서 아우스트리아호를 타고 인도 마드라스항으로 돌아갔다.
인도군은 (행정, 관리, 병원 근무 요원들인) 관리부대와 경비부대로 반반씩 나뉘어 있었다. 경비부대에는 영국군에서 훈련을 받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노련한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인도군은 장군이나 사병이나 할 것 없이 가슴과 팔에 INA (인도 국군)이라고 새긴 헝겊 뱃지가 붙어 있었다.
중립지대인 판문점 근처에는 좌우측에 인도군 천막 수십 개가 줄을 지어서 질서 정연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고 HINDINARGAR (인도 마을)이라고 쓴 엄청나게 큰 간판이 붙어있었으며 광장 한 모퉁이에는 주황색, 흰색, 초록색으로 된 인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인도 마을 부근에는 관리 센터, 보급 기지, 병원 등이 들어서 있고 도로를 따라 왕래하는 차량도 많았고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착륙장도 있었다.
1947년 인도 독립법 (Indian Independence Act 1947)에 의해 1947년 8월 14일 11시 57분에 파키스탄은 별도의 국가로 선언되고 1947년 8월 15일 12시 2분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민주주의 주권 국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8월 15일이 인도의 독립 기념일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광복을 맞이했지만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을 토대로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영국 식민지에서 풀려나 독립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되는 신생 국가 인도는 냉전시대 양대 진영의 대립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중립 노선을 걸으며 국제분쟁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희망과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인도 파견군도 공명정대하게 임무를 완수하여 국제적 신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인도 정부가 친공적이라고 생각하여 반인도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반인도적 태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반인도적 조치는 그 당시 판문점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벌레처럼 싫어하는 인도군에게 포로들이 호감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도 관리군과 반공포로들 간에 끊임없이 대립하고 분쟁이 일어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관리 당국인 미군 부대에게 대항하여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대립했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인도군이 한반도에 파견되어 오는 것은 공산 진영의 사주를 받아 반공포로를 설득한 다음 이북으로 보내려는 계략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한국 정부를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한국 정부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미군 당국은 몹시 당황했다. 미군은 영국군 · 호주군 · 캐나다군 장교들을 동원하여 인도군의 성격 · 본질 · 임무를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해 달라는 설득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미군 당국자와 포로들 대표 간에 설득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대표가 말했다. “우리가 중립지대에 이송된 후에 어떤 돌발사고가 일어나거나 또는 고의적으로 일으켜서 북한 괴뢰군이 포로를 송두리째 끌고가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걔들은 불과 몇 키로미터 위에서 대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당국자가 말했다. “그런 일은 도대체 있을 수 없습니다. 반공포로 8,000명이 아니라 8명이라도 데려갈 수 없어요.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국제적 약속은 깰 수 없을 것입니다. ”
“무엇으로 약속을 지킨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인도군은 관리부대 이외 수천 명의 경비부대도 옵니다. 장교만 해도 700여 명입니다. 그들, 즉 사령관을 위시하여 일개 졸병에 이르기까지 6~8개월간 미군 수준의 월급이 지급되며 특별수당도 지급됩니다. 따라서 공정하고 평화롭게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중간에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반공포로에 대해서 학대를 하고 북으로 올라가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여러분은 인도군의 포로가 아닙니다. 인도군과 여러분은 대등한 지위에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의 염려와 공포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한 우려는 인도군 사령부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인도 관리군 사령관 도랏 소장은 남북 양측 포로들이 품고 있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인도 관리군을 대표하여 이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는 본국에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당신들의 결정을 수용할 것입니다. 송환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는 당신들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들의 희망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것이며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올바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 우리가 인수한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것입니다.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보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우리들을 당신들의 친구처럼 받아들여 수용소 분위기를 질서 있고 우애가 넘치게 협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동안 전우처럼, 친구처럼 잘 지냅시다.”
이 메시지는 한국말과 중국말로 인쇄되어 각 포로 수용소에 배부되었으나 반공포로들의 대표가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에 일반 포로들은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관리 당국과 인도군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군은 공산군’이라는 인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3. 비무장지대 송환 거부 포로 수용소 배치도
비무장지대(DMZ)에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폭 4킬로미터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과 북쪽으로 각기 2킬로미터씩 떨어진 비무장지대에 설득과 송환 절차를 위해서 포로들을 수용할 (막사로 된) 수용동들이 설치되었다. 북쪽은 북측 사령부, 남쪽은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했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중간에 설득실이 있었고 설득실 양편에는 인도 관리군의 보호하에 있는 비송환 포로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남쪽에는 임진강이 있고 약 500미터 높이의 야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던 비무장지대 지역은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점령국이 (인민군에서 미군과 국군으로 다시 중공군과 인민군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뢰가 곳곳에 매설되어 있었다.
비무장지대 남쪽 동중리 근처에는 거제도 수용소와 제주도 수용소에서 배로 수송되거나 부산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올라온 2만 2600여 명의 중공군 및 인민군 전쟁포로(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들이, 북쪽 비무장지대인 송곡리와 팔산리 마을에는 남쪽으로 송환을 거부한 미군, 영국군, 국군 친공 포로 359명의 막사가 있었다.
유엔군 수용 캠프는 7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구역에는 6 내지 8개의 수용소가 있었고 각 수용소는 약 500명 가량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다. 각 구역은 철조망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구역들은 아주 붙어있어서 포로 경비 업무와 인도관리군 보호가 극히 어렵게 되어 있었다. 임시 막사들은 모두 조립식으로 지어졌다. 거기 쓰이는 널빤지는 모두 미국에서 배로 실려 왔다. 막사들은 난방이 잘 되어 있었고 냉온수도 쓸 수 있었으며 주방 시설도 괜찮았다.
북측은 5명의 설득관과 359명의 포로들이 (9월 말경부터 다음 해 1월 말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살아야 할) 막사만 건축하면 되었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22,600명의 포로와 32명의 설득관들이 살아야 할 (D-30, D-31, E-35, G-48 등 수십 개의) 막사를 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득실 막사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당초 유엔군측 설득실 막사는 16개였지만 중립국 송환 위원회는 기존의 16개 막사 옆에 16개의 막사를 새로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최소한 32개의 막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북한 측 설득실 막사는 단 1개면 충분했다). 당초 247명의 북쪽 설득관들이 32개의 설득실에 배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을 운반하는 트럭이 설득실 구역으로 들어올 때 유엔군 경비원들의 조사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인도 관리군 경비원들은 별도의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득소 안에는 정원을 넘는 340명의 설득관들이 들어왔다.
비무장지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 안에는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전략적 요지에 인도 관리군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 부대는 곤봉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시를 위해 울타리를 감시하는 목재 망루에는 경기관총을 배치해 놓았고 그리고 근처 언덕 뒤에는 무장한 인도군 예비 중대가 잠복하고 있었다.
(휴전조인이 끝나고 나서 1953년 9월 초 인도군 1개 여단 6천여 명의 병력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도군 수송선에서 내려 미군 항공모함에 갈아탄 다음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판문점 부근의 비무장지대로 공수되었다. 그들은 인도 정부가 공산주의에 편향됐다고 생각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도군의 한국 영토 착륙 거부’라는 강경한 조치 때문에 한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1953년 9월 10일, 반공포로 선발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던 498명의 인민군 출신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특별 열차로 와서 비무장 지대 장단역에서 내려 수용소 막사까지 미군들의 보호를 받으며 행진해 왔다.
그 포로들은 반공 깃발을 흔들고 악기를 두들겨 대며 행진했다. ‘송환 결사 반대’, ‘공산당 타도’, ‘김일성에게 죽음을’ 같은 반공 구호를 외치고 무서운 기세로 소리를 지르고 온갖 몸짓과 손짓을 했다. 인도 관리군은 포로들의 머릿수만 세고 미군으로부터 인수했다. 여기서 포로들은 25명씩 그룹으로 나뉘었고 각 그룹은 각기 대표자가 통솔했다. 25명 포로의 한 그룹이 구내 통로로부터 불려 나오면 그들은 10미터 정도씩 간격을 유지하면서 한번에 한 사람씩 사각형 넓은 확인 탁자까지 나아갔다. 탁자에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자기 신분 증명서만 되돌려 받으면 끝이었다. 자기 이름이 확인되고 기록된 후 구내 안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인도 적십자사가 그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태피 (설탕, 버섯, 땅콩을 섞어서 만든 캔디)를 제공했다. 그리고 끝으로 숨긴 무기가 있나 보따리 검사를 하면 절차는 끝났다.
포로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탁자 주위에는 남쪽과 북쪽의 장교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확인을 받고 있던 포로들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탁자에 앉아 있는 인민군 장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그를 공격했다. 인도 관리군이 말릴 틈도 없었다. 그들 포로는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몇 개는 치명적일 만큼 정확했다. 그들은 인민군 장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포로들은 철조망 위에 올라 숨어 있는 인민군 참관인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인민군 장교를 보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도 관리군들이 달려들어 사태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4. 판문점 포로 설득실 배치도
6‧25 전쟁 해결의 마지막 큰 걸림돌은 포로 송환 (repatriation) 문제였다. 포로 석방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정, 중립국 송환 위원회의 포로 교환 협정의 해석 적용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송환 거부 포로들을 둘러싼 양측의 사상 전쟁은 총칼을 든 싸움만큼이나 치열했다. 포로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선전물로 목숨을 건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배치도는 인민군 출신 반공포로들을 북한 측에서 설득하는 경우의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고위 장교들은 반공포로들을 설득해서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출신 친공포로를 설득하는 경우에는 설득자는 남한의 고위 장교가 되고 피설득자는 친공포로가 된다.)
중립국 위원들은 스위스와 스웨덴은 민주주의 국가를, 체코와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를 대변하며, 인도는 중립국이다.
반공포로들이 유엔군이 지은 설득실 막사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북쪽 설득관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가 앉는 의자와 설득자의 무거운 책상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가끔 포로가 설득자와 말싸움하면서 격분하여 의자를 던지고 난동을 부리거나 책상을 뒤엎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들이 무기 따위를 숨겨 들어가지 못하도록 세밀한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은 단단한 돌멩이나 혹은 나이프 같은 것을 옷 속에 교묘히 숨겨 들여가곤 했다.)
포로들은 양쪽 대기소에 각각 250명씩 보내졌다. 그리고 맨 먼저 양쪽으로부터 25명씩 헤아려 설득회 막사로 가는 중간에 있는 조그만 임시 대기소까지 갔다. 이곳에서 포로들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설득회 막사로 들어갔다. 소규모 임시 대기소는 설득회 장소에서 약 200m 떨어져 있었고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도 관리군은 머뭇거리는 포로들을 재촉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통로를 따라 보냈다. 이런 방식으로 32개 설득회 막사에 각각 한 사람씩 보내졌다. 포로가 설득회 구역에 들어오면 한 인도 관리군 장교가 이름과 번호를 확인하고 두 경비병은 그 사람을 북쪽 설득관이 있는 막사로 호위되어 들어갔다.
설득실에 들어가면 중립국 심사단이 포로들에게 이름, 군번, 계급, 부대, 국적을 물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자기가 송환을 바라는지 여부, 또 자기의 선택이 위협이나 협박이 없는 자신의 자유 의사인지 아닌지를 질문받았다. 포로들의 답변은 심사서에 기재되었다. 그 포로들의 희망사항이 명백하게 제시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서에 서명했다.
포로 교환 협정은 명백하게 전쟁 포로를 인수하는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설득회는 끝나야 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하지만 설득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양측의 사사건건 의견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20일이 흘러가 버렸다. 따라서 90일 내에 설득회가 끝나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90일 동안의 기간 중 10일간만 설득회가 열렸다. 설득회는 1953년 12월 23일 끝났다. 22,600여 명의 반공포로 중에서 3천5백여 명만이 설득회에 참여했고 그중에서 북송을 선택한 숫자는 4%를 조금 넘는 150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인민군 포로는 46명만이 북으로 귀환을 희망했다. (그러므로 480여 명은 설득회에 참석하지 않고 북으로 송환을 희망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올라갔고, 또한 인민군 76명 역시 설득회에 참여하지 않은 채 인도 관리군쪽으로 탈출하여 최종적으로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인도군 관리하에 있는 동안 중공군 12명과 인민군 20명이 사망했고 인민군 10명은 행방불명 또는 도망자로 처리되었다.)
전쟁 포로 (피설득자)는 설득실에 개별적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전쟁 전에 속했던 국가의 대표 (설득자)로부터 왜 고국 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설득 (설명)을 들은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지, 송환을 거부할지, 중립국으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송환 거부자들은 어쨌거나 사상적으로 전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로들의 전향이란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아주 막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포로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몇 번씩이나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은 그들을 설득하면 재전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설득해서 진정한 의지를 밝힐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송환 거부 포로들은 두 유형으로 나뉘었다. 단순한 유형은 설득을 듣지조차 않는 듯 멍하고 조용하게 있었다. 뭐라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득을 위한 대화가 끝나면 말 한마디 없이 송환 거부문을 통해 걸어나갔다. 다른 유형이 다수를 차지했다. 노래를 부르고 반공 구호를 외치며 들어갔다. 할 수 있는 한 설득회를 방해하려고 시도했다. 북쪽 설득관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그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려고 해서 인도 경비병과 싸웠다.
하지만 중립국을 선택한 88명 (76명의 한국인과 12명의 중국인)의 포로들이 처한 상황은 복잡했다. 그들은 남한이나 북한, 중국이나 대만으로 송환되지 않고 ‘중립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 그들은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인도로 향했다.
그들은 대한반공청년단과 비밀리에 남한 정부의 지시를 받고 있는 수용소 내 지도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수용소 내에서 끊임없이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북쪽으로 송환은 물론이고 중립국을 선택한다는 것은 민족 반역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내색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의중이 밝혀지면 엄청난 박해와 집단적 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자칭 지도자들은 중립국을 희망하는 용의자를 발견하면 즉시 체포해서 가두고 고문하여 불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잘못하면 사형집행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설득실에서조차 중립국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이 결국 밝혀지게 되고 그때 당할 심한 고문과 폭력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립국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포로 수용소의 철조망 울타리를 뚫고 인도 관리군 막사로 도망쳐야 했다.
설득 과정은 5분에서 30분 정도 빨리 끝날 수도 있었지만 피설득자가 물고 늘어지면 몇 시간씩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설득실에 들어가는 것은 포로의 권리이지 강제적 의무는 아니었다. 규정상 몇 번이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오직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것마저 완강히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북으로 송환을 결정하고 명백하게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는 그 즉시 짐을 들고 공산 측 출구로 빠져나와서 북으로 귀환했다. 그러므로 원래의 막사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남한 출신 설득관들은 아주 좋은 옷감에 잘 재봉된 미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색상의 스카프를 하고 있었으며 비싸보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고 갖고 있는 담배 케이스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남한 사람 모두가 그것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로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미제이며 남한이 미국의 주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이 북한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지적했다.
반면에 북측 설득관은 고급 군관들로서 김일성 장군의 지시문을 읽어주면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이념의 타당성을 길게 설명하고 미국 제국주의와 남한은 미제 주구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인민공화국의 치적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설득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공 포로들은 그들 이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북한의 너무나 비참한 실상을 낱낱이 폭로했으며,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을 악마처럼 저주했다.
아주 가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남한 출신으로 대위 시절 연대 수송 담당 장교였는데 중공군이 참전하여 후퇴할 당시 평양 근처에서 전쟁 포로가 되어 평양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한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했다.
그가 북측이 마련한 설득실에 들어섰을 때, (남쪽) 설득관이 자신과 같은 연대에서 복무했던 옛 전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득관은 그 당시 연대 정보 장교였는데 그들은 같은 고향 (충주와 음성) 출신이었다. 그들은 뜻밖에 만났지만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고 부둥켜안으며 옛 전우로서 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옛 시절을 회상하고 고향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포로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설득관은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기 전 포로의 어머니를 만났다며 사진과 편지를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늙었소. 그래도 건강하다오. 사진을 잘 보시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눈물로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부처님께 빌고 있소."라고 설득관이 말했다. 포로는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어머님에게 내가 잘 있다고 전해 주시오. 내가 불효자식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나는 곧 돌아갈 것입니다. 조국이 해방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설득관 친구에게 "다 소용없네. 이렇게 한다고 내가 돌아갈 것 같은가. 헛수고란 말일세. 나는 이미 북에 남기로 결심했네."라고 말했다.
그 설득관은 너무 당황했다. 자신의 친구가 설득관보다 더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갇혀 있는 동안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에 세뇌되어 북한에 남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설득실 장면은 그 소설의 핵심인데 묘사와 설명이 너무 허술했다. 역사적 사실, 진실, 맥락을 훼손, 조작, 왜곡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특히 역사소설 (또는 분단소설), 전쟁소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작가에게 진실을 왜곡 조작할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역사를 私有化하거나 개인적 취향에 맞추거나 자신의 관점에 맞춰 견강부회하거나 감상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결코 무책임하게 상상력을 남용 오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가 (20대 중반쯤)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그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감수성이 지극히 예민한 10대 중반의 소년이었고 흥남철수 작전 때 월남했으므로 그 전쟁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중요한 참고문헌이 미처 나오기 전이었지만 대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일본의 주요 신문 등에는 한국전쟁과 포로 수용소, 포로 송환 문제와 관련해서 충분히 참고할 만한 다수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1952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도드 사건의 의미’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 사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이념이나 사상이라는 면에서 대조하고 공산주의 포로들이 일종의 연극을 하면서 정치적 주장을 펴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논박하면서 ‘…… 이 사건에 내포된 중대한 의미는 그 포로들이 그들의 수용소장을 납치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면 어렵지 않게 파악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국제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신문 방송사와 통신사들이 파견한 종군기자들 또는 프리랜서 기자들이 수없이 많은 기사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기사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고 조잡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쯤이면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많은 반공포로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구술 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 소설은 작가가 20대에 갈겨쓴 습작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5. 아우스트리아호
아우스트리아호는 1954년 2월 6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대만 해협을 거쳐 홍콩에 들른 다음 싱가포르에 기항했고 믈라카 해협을 지나 안다만 제도를 통과하여 2월 24일 첸나이항에 도착했다. (인도 타밀나두 주의 주도이다. 벵골만과 접한 남인도의 최대 도시이다. 과거 명칭은 마드라스였다).
이 배는 2만 4500톤의 대형 수송선으로 최종적 임무를 끝마친 마지막 인도군 1,500명과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 88명이 타고 있었다. 또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이었던 K.S. 티마야 장군도 타고 있었다. 선장은 눈같이 흰 제복에 금판의 인도 해군 대령 견장을 단 곤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쑥한 군복을 입고 4~5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다녔다. (아우스트리아호는 1930년 영국에서 건조된 해군 수송선이었다. 하지만 선내는 5층, 6층으로 선실이 열을 짓고 호화로운 극장, 영화실, 댄스홀, 휴게실, 그리고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서 군용 수송선이 아니라 대서양을 오가는 일류 호화 여객선 같았다. 배가 너무 커서 인도군 1,500명이 승선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인도군과 인도로 가는 포로들은 오전 11시경 승선을 완료했지만 짐 싣는 데에 3시간 정도 더 걸렸다. 아우스트리아호 이외에도 6척의 배가 추가로 인천에 왔다가 빈 배로 돌아갔다. 아우스트리아호는 인도 남부의 마드라스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참조.)
인도군과 포로들의 선실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인도군은 포로들을 강압적으로 관리했다. 어느 인도군 소령은 판문점에서 4, 5명의 하사관을 인솔하고 다녔다. 그는 이제부터 중립국으로 가는 포로들을 관리하는 소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포로들은 누구나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는 이 수송선이 3천 톤의 ‘타고르호’로 나온다. 이 수송선은 뜬금없이 일본을 거쳐 마카오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인도의 항구로 가는 항로가 아닌데도 말이다.
어떻게 연안 여객선도 아닌데 3천 톤짜리 배란 말인가?
왜? 어째서 마카오로 가고 거기서 주인공은 느닷없이 자살을 하는가? 자살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설시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역사소설이고 리얼리즘 소설이라면 개연성(probability)과 핍진성(verisimilitude), 필연성(inevitability)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거 아닌가.
실제 인도로 가는 배에서 자살한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 중립국으로 가는 반공포로가 30여 명이란 말인가?
선장은 선박에서 제왕적 지위에 있다. 어떻게 해서 감시를 받고있는 일개 포로가 제 마음대로 선장실을 들락날락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 선장의 총을 제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단 말인가?
현대 전쟁의 역사상 전쟁 포로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립국을 택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한 경우인 것이다. 그것도 유엔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88명은 일단 인도로 가긴 하지만 거기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한국인 76명의 경우, 최종 정착 국가는 한국 5명, 북한 6명, 브라질 48명, 아르헨티나 11명, 인도 6명이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광장」은 역사적 진실을 너무나 많이 훼손했다. ‘소설이니까’라고 혹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라고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소설을 모독하는 것이다. 진지한 소설은 잡설이 아니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고 수능에도 3번이나 출제되었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그 소설이 역사책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암기했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소설적 자유 (romanesque liberté)와 관련하여 모리아크의 ‘모든 작가들은 창조주로서 신과 가장 흡사해야 한다’라는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소설가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가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시점(視點)과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연쇄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건들의 연결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지적 권능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특히 작중인물의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가 작중인물의 자유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는 소설 쓰기에서 작가의 자유를 주장한 게 아니라 자유의 한계를 주장한 것이다.
어쨌거나 소설 속 이야기에는 내적 논리와 함께 개연성과 핍진성과 필연성이 관통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작가의 자유는 어쩔 수 없이 제약을 받게 된다). 실력이 없고 태만하고 무능한 작가만이 우연성에 기대는 것이다.
그 작가는 역사적 진실을 임의적으로 훼손 변조 조작을 한 것이다. 그렇게 역사적 사실을 훼손하려면 노골적으로 역사를 희화한 통속소설이라고 하던가 혹은 이 소설은 독자들을 웃기기 위한 코미디 소설이라고 양해를 구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 대화 이후 소설을 수정 보완하지 않았는가? 왜 그 작가는 이 대화 이후에도 역사적 진실에 맞춰서 30년 동안이나 그 소설을 수정 보완하지 않았는가? (그는 2018년 7월 고인이 되었으므로 그 대화 이후 거의 30년을 더 살았다.) 그는 소설 속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뭔가 단단히 곡해하고 있지 않은가? 상상력의 발휘에도 한계가 있고 오용이나 남용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면서 수백 권의 참고문헌을 읽고 역사적 진실이 단 하나라도 왜곡되지 않도록 그토록 철저하게 수정하고 수정 보완했는가? 왜 하진은 「전쟁 쓰레기」를 쓰면서 23편의 참고문헌을 탐독했는가? 그 작가는 스스로 단지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그 소설을 썼다고 고백했다.
〔아주 상세한 것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참조. 이 책은 종이책으로 나온 이후 내 블로그에 전체가 실려있지만 발간 이후 참고문헌을 참조하여 계속 수정 보완 중에 있다. 또한 위에서 열거한 참고문헌들 중에서 특히 「내가 겪은 조선전쟁」(1991.6. 발간), 「판문점 일기」(1993.10. 발간), 「심문실의 한국전쟁」, 「전쟁 쓰레기」등을 읽고 검토해보면 그 소설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벗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광장」을 여러 번 수정 발간해서 (일곱 번이나) 화제가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책인 「내가 겪은 조선전쟁」, 「판문점 일기」,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등은 이미 30여 년 전에 나왔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한국전쟁 관련 다수의 논문과 에세이, 두툼한 책들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읽고 검토해서 수정 보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는 단 한 권의 참고문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독자(혹은 비평가)를 위해서, 후행 논문이나 책에서 추가 연구를 위해서는 엄선된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과 참고문헌은 일심동체이다. 참고문헌은 후행 논문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텍스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참고문헌들을 본문과는 물론이고 참고문헌끼리 비교해서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Intertextuality 혹은 Interdependence).
그런데 소설에도 참고문헌이 필요할까? 소설의 주제를 형성하고 스토리 라인을 제대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참고문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참고문헌은 명작소설의 원천이다. 특히 역사소설이나 전쟁소설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이 없다면 명작소설은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하진의 「전쟁 쓰레기」는 어떠했나? 그가 발표한 소설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유명 문학상들은 연거푸 거머쥐었다. 미국 문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수상 경력이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이데올로기와 전쟁 포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최인훈의 「광장」과 주제라는 면에서 아주 흡사하다. 그는 그 소설을 쓰면서 무려 23권의 참고문헌을 참조했다. 그 스스로 논픽션이나 회고록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픽션이며 주요 인물들은 허구적이다) 대부분의 사건들과 디테일은 아주 사실적이다. (하진 장편소설 / 왕은철 옮김, 「전쟁 쓰레기」 참조.)
여러분 대문호 톨스토이가 수십 권의 참고문헌을 참조하여 어떻게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는지 참고하세요. 여러분은 무슨 긴 글을 쓸 때면 우선 먼저 참고문헌을 면밀히 조사해서 읽어야 하고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세요. 무궁무진한 자료와 참고문헌을 더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겁이 덜컥 날 지경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참고문헌을 취사선택해서 엄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포로 송환
부산의 임시 포로수용소는 밀려드는 인민군 포로 때문에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1951년 2월 1일부터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건설되면서 2월 말까지 5만 4천여 명의 포로들이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송되었고, 3월 1일에는 부산의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거제도로 옮기면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3월 31일에 이르면 거제도에 수용된 총인원은 9만 9천여 명이 되었고, 5월 말에 11만 6천여 명, 몇 개월 후에는 대략 17만여 명이 되었다. 거제도에는 28개의 포로 수용 막사 단지가 건설되었고 4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각 구역은 6, 7, 8, 9구역으로 명명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북진과 동시에 일부는 영등포에서 수원으로 남하했다.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을 개시하면서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을 격파하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남쪽 전선에서 병력의 퇴로가 차단되면 독 안의 쥐 신세가 되어 궤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긴급 총후퇴를 명령했다.
(유엔군은 유엔 결의에 따라 참전한 16개국 국가의 연합군을 지칭한다. 유엔군은 압도적으로 미국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 15개국 군인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는 유엔군과 미군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9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38선을 월선하도록 허가했다. 전쟁의 방향이 봉쇄에서 롤백으로 전환된 것이다. 미군들에게는 추수감사절까지 작전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고 12일 해주를, 19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초산을 점령했고, 11월 22일 미군 제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의 혜산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무렵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인해전술에 밀려 비극적인 후퇴가 시작되었다. (북진하고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0만 명이 넘는 인민군과 2만여 명의 중공군이 포로가 되었다. 특히 인민군 포로 중에는 남한 출신으로 강제로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편입되었던 다수의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난 중인 다수의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포로로 취급되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는 미군과 국군, 인민군과 중공군 간에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은 1951년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지구전의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만 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개최되었다. 1952년 1월 27일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기로 양측이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가장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던 포로 송환 문제는 예상과 달리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휴전 협정 체결을 1년 넘게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포로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정전 후 포로를 지체없이 석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강제적 송환 원칙에도 불구하고 본국(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이 많이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포로가 원할 경우에 한해서 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미국과 합의 없이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그리고 휴전 협정에 서명을 거부했다. 한국 정부의 서명 거부로 인하여 한국이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에서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때부터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반공 세력과 친공 세력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 친공 세력과 포로수용소를 관할하는 미군 수용소 당국 간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1952년 2월에는 국제적십자사 위원회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송환 가부에 대한 포로들의 의사를 묻는 분류 심사를 시행했고, 52년 7월경에는 심사 과정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37,700여 명이 거제도 수용소를 나와 8개의 수용소로 분산 배치되었다가 그 무렵 대부분이 석방되었다.
1952년 5월 7일 6,400여 명의 강성 인민군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제76 수용동에서 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수용소의 대표자는 “수용동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문제를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다. 도드 준장이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신사답게 앉아서 문제를 해결하자.”라며 도드를 초대했다가 붙잡아서 포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라는 영어 메시지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 안전은 보장된다. 총격이나 그 밖의 폭행이 가해지면 생명이 위험한 줄 알아라.”라고 협박했다. (도드 준장은 수용소장직에서 해임되고 나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대령으로 강등되었다. 그가 해임되자 미군은 찰스 콜슨 장군을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관으로 신속하게 임명했다.)
그 납치사건을 계기로 미군 사령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었고 52년 9월 약 5만 명의 반공포로를 8개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배치했다. (5만 명에는 35,700여 명의 인민군 반공포로와 제주 모슬포 수용소로 보내진 중공군 14,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1953년 6월 18일 6‧18 반공포로 석방 당시 35,700여 명 중에서 27,400여 명이 석방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또는 정전)이 성립되었다. 그해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주은래는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3월 7일부터 24일까지 소련을 방문했다. 새로운 소련 지도부와 정전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휴전회담은 꼬박 2년을 끌었다. 최대 쟁점은 남북을 가르는 선을 긋는 문제였다. 원래의 38선과 전쟁 과정에서 새로 생긴 군사분계선 중에서 어느 선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였다. 결국 군사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으로 결정되었지만 또 다른 쟁점은 전쟁 포로들의 송환 문제였다.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전쟁 포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제네바 협약만으로는 명쾌하게 해결될 수 없었다.
북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국가 권력과 개인의 주체성 간 간극의 문제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라는 형이상적이고 존재론적 물음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우선해야 한다는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6‧25 전쟁은 포로들 개개인에게 본국으로 송환 여부에 대한 의사를 묻고 동의하는 경우에만 송환한다는 자발적 송환 원칙이 공식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공산군 측으로 송환을 원하는 인민군 포로 75,823명과 중공군 포로 6,670명 등 82,493명은 수용소에서 특별 열차를 이용하여 장단역에서 내리거나 25척의 수송선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이동한 후 영등포를 거쳐서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북으로 돌아갔다.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내려와 교환된 남쪽 포로는 국군 8,321명과 미군 3,746명을 포함하여 모두 13,444명이었다. 북쪽은 체포된 국군 포로들을 반혁명 분자로 처단하든가 ‘해방 전사’란 이름으로 인민군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갇힌 수많은 유엔군 포로는 기아, 학대, 고문, 추위, 질병, 학살 등으로 죽어갔다.)
이제 남은 과제는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문제였다.
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4,704명과 인민군 7,900명이 있었고 남으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국군 335명, 미군 23명, 영국군 1명이 있었다. 이들 포로는 모두 인도 관리군에 인계될 예정이었다.
양측으로부터 포로의 인계와 인수는 1953년 9월 10일부터 시작되어 25일에 모두 끝났다. 유엔군측이 인도 관리군에 인민군 7,900명과 중공군 14,704명을 인계했고, 이어서 북한군 측은 국군 335명, 미군 23명, 영국군 1명을 인도군에 인계했다.
이제 양측의 송환 거부 포로들은 인도군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 송환을 거부하는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 22,604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628명이 북으로 송환을 희망했고 (북한국 188명, 중공군 440명 등), 일부는 중립국을 희망했다. 남으로 귀환을 거부했던 국군과 유엔군 포로 359명 중 설득회에 참여했던 인원은 6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 가운데 설득회를 통해서 복귀한 포로는 없었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 미군 2명과 한국군 8명 등 10명이 귀환했다.
1954년 1월 20일 인도군은 포로들을 쌍방에 인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모두 19시간 동안 21,890명이 유엔군 측으로, 349명이 북한군 측으로 인계됐다. 북한군 74명, 중공군 12명, 국군 2명 등 88명은 중립국을 택했다.
결국 송환되지 않는 포로들은 1954년 1월 22일부터 민간인이 됐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만이 아닌 중립국을 원했지만, 자유중국 정부는 이들을 심사 없이 수용할 것을 천명했다. 한국 정부도 다른 곳을 원하는 포로까지 포함해서 심사 없이 모든 송환 거부 북한 포로를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다. 한국 정부로 이송된 송환 거부 포로들은 수용소로 옮겨져서 재교육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그들 중 대다수가 국군에 입대했다. 석방된 포로들은 매년 6월 18일과 1월 23일을 각각 ‘반공의 날’, ‘세계자유의 날’로 정하여 반공포로석방 기념행사를 통해 반공의식을 고취시켰다.
판문점
판문점은 6.25 전쟁의 휴전협상이 진행된 곳이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선적리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개성특별시 판문구역 판문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판문점은 정전협정 이후 6.25 전쟁 포로 교환업무를 맡게 된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 교환 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협상이 이뤄진 실제 정전협정 조인 장소는 현재의 판문점보다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다. 정전협정 이후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쌍방의 행정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
2. 인도 관리군
1953년 8월경 한국의 판문점으로 파견될 인도 관리군 1개 여단 약 6,000명은 수도 델리에서 부대 편성을 마치고 인도 남부의 마드라스에 집결했다. 그리고 5개의 파견단으로 나눠서 각기 시차를 두고 수송선에 탑승하여 인천을 향해 출발했다. 다만 제5 파견대인 마라타 연대의 제2 대대는 수송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인천에 도착했는데 그 수송기에는 파견군 사령관 도랏 소장과 그의 참모진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인천에 도착한 인도군은 미군 항공모함으로 옮긴 다음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갔다. 그때 헬리콥터가 1,300번이나 떴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조치 때문에 인도군은 남한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장단역으로 갈 수 없었다.)
1954년 2월, 마지막 임무를 처리한 인도군 1,500명과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인 K.S. 티마야 장군 등은 인천항에서 아우스트리아호를 타고 인도 마드라스항으로 돌아갔다.
인도군은 (행정, 관리, 병원 근무 요원들인) 관리부대와 경비부대로 반반씩 나뉘어 있었다. 경비부대에는 영국군에서 훈련을 받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노련한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인도군은 장군이나 사병이나 할 것 없이 가슴과 팔에 INA (인도 국군)이라고 새긴 헝겊 뱃지가 붙어 있었다.
중립지대인 판문점 근처에는 좌우측에 인도군 천막 수십 개가 줄을 지어서 질서 정연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고 HINDINARGAR (인도 마을)이라고 쓴 엄청나게 큰 간판이 붙어있었으며 광장 한 모퉁이에는 주황색, 흰색, 초록색으로 된 인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인도 마을 부근에는 관리 센터, 보급 기지, 병원 등이 들어서 있고 도로를 따라 왕래하는 차량도 많았고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착륙장도 있었다.
1947년 인도 독립법 (Indian Independence Act 1947)에 의해 1947년 8월 14일 11시 57분에 파키스탄은 별도의 국가로 선언되고 1947년 8월 15일 12시 2분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민주주의 주권 국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8월 15일이 인도의 독립 기념일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광복을 맞이했지만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을 토대로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영국 식민지에서 풀려나 독립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되는 신생 국가 인도는 냉전시대 양대 진영의 대립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중립 노선을 걸으며 국제분쟁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희망과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인도 파견군도 공명정대하게 임무를 완수하여 국제적 신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인도 정부가 친공적이라고 생각하여 반인도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반인도적 태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반인도적 조치는 그 당시 판문점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벌레처럼 싫어하는 인도군에게 포로들이 호감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도 관리군과 반공포로들 간에 끊임없이 대립하고 분쟁이 일어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관리 당국인 미군 부대에게 대항하여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대립했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인도군이 한반도에 파견되어 오는 것은 공산 진영의 사주를 받아 반공포로를 설득한 다음 이북으로 보내려는 계략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한국 정부를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한국 정부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미군 당국은 몹시 당황했다. 미군은 영국군 · 호주군 · 캐나다군 장교들을 동원하여 인도군의 성격 · 본질 · 임무를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해 달라는 설득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미군 당국자와 포로들 대표 간에 설득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대표가 말했다. “우리가 중립지대에 이송된 후에 어떤 돌발사고가 일어나거나 또는 고의적으로 일으켜서 북한 괴뢰군이 포로를 송두리째 끌고가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걔들은 불과 몇 키로미터 위에서 대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당국자가 말했다. “그런 일은 도대체 있을 수 없습니다. 반공포로 8,000명이 아니라 8명이라도 데려갈 수 없어요.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국제적 약속은 깰 수 없을 것입니다. ”
“무엇으로 약속을 지킨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인도군은 관리부대 이외 수천 명의 경비부대도 옵니다. 장교만 해도 700여 명입니다. 그들, 즉 사령관을 위시하여 일개 졸병에 이르기까지 6~8개월간 미군 수준의 월급이 지급되며 특별수당도 지급됩니다. 따라서 공정하고 평화롭게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중간에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반공포로에 대해서 학대를 하고 북으로 올라가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여러분은 인도군의 포로가 아닙니다. 인도군과 여러분은 대등한 지위에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의 염려와 공포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한 우려는 인도군 사령부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인도 관리군 사령관 도랏 소장은 남북 양측 포로들이 품고 있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인도 관리군을 대표하여 이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는 본국에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당신들의 결정을 수용할 것입니다. 송환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는 당신들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들의 희망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것이며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올바른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 우리가 인수한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것입니다.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보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은 우리들을 당신들의 친구처럼 받아들여 수용소 분위기를 질서 있고 우애가 넘치게 협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동안 전우처럼, 친구처럼 잘 지냅시다.”
이 메시지는 한국말과 중국말로 인쇄되어 각 포로 수용소에 배부되었으나 반공포로들의 대표가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에 일반 포로들은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관리 당국과 인도군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군은 공산군’이라는 인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3. 비무장지대 송환 거부 포로 수용소 배치도
비무장지대(DMZ)에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폭 4킬로미터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하여 남쪽과 북쪽으로 각기 2킬로미터씩 떨어진 비무장지대에 설득과 송환 절차를 위해서 포로들을 수용할 (막사로 된) 수용동들이 설치되었다. 북쪽은 북측 사령부, 남쪽은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했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중간에 설득실이 있었고 설득실 양편에는 인도 관리군의 보호하에 있는 비송환 포로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남쪽에는 임진강이 있고 약 500미터 높이의 야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던 비무장지대 지역은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점령국이 (인민군에서 미군과 국군으로 다시 중공군과 인민군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뢰가 곳곳에 매설되어 있었다.
비무장지대 남쪽 동중리 근처에는 거제도 수용소와 제주도 수용소에서 배로 수송되거나 부산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올라온 2만 2600여 명의 중공군 및 인민군 전쟁포로(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들이, 북쪽 비무장지대인 송곡리와 팔산리 마을에는 남쪽으로 송환을 거부한 미군, 영국군, 국군 친공 포로 359명의 막사가 있었다.
유엔군 수용 캠프는 7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구역에는 6 내지 8개의 수용소가 있었고 각 수용소는 약 500명 가량을 수용하게 되어 있었다. 각 구역은 철조망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구역들은 아주 붙어있어서 포로 경비 업무와 인도관리군 보호가 극히 어렵게 되어 있었다. 임시 막사들은 모두 조립식으로 지어졌다. 거기 쓰이는 널빤지는 모두 미국에서 배로 실려 왔다. 막사들은 난방이 잘 되어 있었고 냉온수도 쓸 수 있었으며 주방 시설도 괜찮았다.
북측은 5명의 설득관과 359명의 포로들이 (9월 말경부터 다음 해 1월 말경까지 약 4개월 동안 살아야 할) 막사만 건축하면 되었지만 유엔군 사령부는 22,600명의 포로와 32명의 설득관들이 살아야 할 (D-30, D-31, E-35, G-48 등 수십 개의) 막사를 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득실 막사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당초 유엔군측 설득실 막사는 16개였지만 중립국 송환 위원회는 기존의 16개 막사 옆에 16개의 막사를 새로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최소한 32개의 막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북한 측 설득실 막사는 단 1개면 충분했다). 당초 247명의 북쪽 설득관들이 32개의 설득실에 배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을 운반하는 트럭이 설득실 구역으로 들어올 때 유엔군 경비원들의 조사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인도 관리군 경비원들은 별도의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득소 안에는 정원을 넘는 340명의 설득관들이 들어왔다.
비무장지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 안에는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전략적 요지에 인도 관리군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 부대는 곤봉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시를 위해 울타리를 감시하는 목재 망루에는 경기관총을 배치해 놓았고 그리고 근처 언덕 뒤에는 무장한 인도군 예비 중대가 잠복하고 있었다.
(휴전조인이 끝나고 나서 1953년 9월 초 인도군 1개 여단 6천여 명의 병력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도군 수송선에서 내려 미군 항공모함에 갈아탄 다음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판문점 부근의 비무장지대로 공수되었다. 그들은 인도 정부가 공산주의에 편향됐다고 생각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도군의 한국 영토 착륙 거부’라는 강경한 조치 때문에 한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1953년 9월 10일, 반공포로 선발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던 498명의 인민군 출신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특별 열차로 와서 비무장 지대 장단역에서 내려 수용소 막사까지 미군들의 보호를 받으며 행진해 왔다.
그 포로들은 반공 깃발을 흔들고 악기를 두들겨 대며 행진했다. ‘송환 결사 반대’, ‘공산당 타도’, ‘김일성에게 죽음을’ 같은 반공 구호를 외치고 무서운 기세로 소리를 지르고 온갖 몸짓과 손짓을 했다. 인도 관리군은 포로들의 머릿수만 세고 미군으로부터 인수했다. 여기서 포로들은 25명씩 그룹으로 나뉘었고 각 그룹은 각기 대표자가 통솔했다. 25명 포로의 한 그룹이 구내 통로로부터 불려 나오면 그들은 10미터 정도씩 간격을 유지하면서 한번에 한 사람씩 사각형 넓은 확인 탁자까지 나아갔다. 탁자에서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자기 신분 증명서만 되돌려 받으면 끝이었다. 자기 이름이 확인되고 기록된 후 구내 안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인도 적십자사가 그들에게 따뜻한 커피와 태피 (설탕, 버섯, 땅콩을 섞어서 만든 캔디)를 제공했다. 그리고 끝으로 숨긴 무기가 있나 보따리 검사를 하면 절차는 끝났다.
포로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탁자 주위에는 남쪽과 북쪽의 장교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확인을 받고 있던 포로들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탁자에 앉아 있는 인민군 장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그를 공격했다. 인도 관리군이 말릴 틈도 없었다. 그들 포로는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몇 개는 치명적일 만큼 정확했다. 그들은 인민군 장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포로들은 철조망 위에 올라 숨어 있는 인민군 참관인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인민군 장교를 보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도 관리군들이 달려들어 사태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4. 판문점 포로 설득실 배치도
6‧25 전쟁 해결의 마지막 큰 걸림돌은 포로 송환 (repatriation) 문제였다. 포로 석방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정, 중립국 송환 위원회의 포로 교환 협정의 해석 적용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송환 거부 포로들을 둘러싼 양측의 사상 전쟁은 총칼을 든 싸움만큼이나 치열했다. 포로들은 하나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선전물로 목숨을 건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배치도는 인민군 출신 반공포로들을 북한 측에서 설득하는 경우의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고위 장교들은 반공포로들을 설득해서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출신 친공포로를 설득하는 경우에는 설득자는 남한의 고위 장교가 되고 피설득자는 친공포로가 된다.)
중립국 위원들은 스위스와 스웨덴은 민주주의 국가를, 체코와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를 대변하며, 인도는 중립국이다.
반공포로들이 유엔군이 지은 설득실 막사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북쪽 설득관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가 앉는 의자와 설득자의 무거운 책상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가끔 포로가 설득자와 말싸움하면서 격분하여 의자를 던지고 난동을 부리거나 책상을 뒤엎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로들이 무기 따위를 숨겨 들어가지 못하도록 세밀한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은 단단한 돌멩이나 혹은 나이프 같은 것을 옷 속에 교묘히 숨겨 들여가곤 했다.)
포로들은 양쪽 대기소에 각각 250명씩 보내졌다. 그리고 맨 먼저 양쪽으로부터 25명씩 헤아려 설득회 막사로 가는 중간에 있는 조그만 임시 대기소까지 갔다. 이곳에서 포로들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설득회 막사로 들어갔다. 소규모 임시 대기소는 설득회 장소에서 약 200m 떨어져 있었고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도 관리군은 머뭇거리는 포로들을 재촉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통로를 따라 보냈다. 이런 방식으로 32개 설득회 막사에 각각 한 사람씩 보내졌다. 포로가 설득회 구역에 들어오면 한 인도 관리군 장교가 이름과 번호를 확인하고 두 경비병은 그 사람을 북쪽 설득관이 있는 막사로 호위되어 들어갔다.
설득실에 들어가면 중립국 심사단이 포로들에게 이름, 군번, 계급, 부대, 국적을 물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자기가 송환을 바라는지 여부, 또 자기의 선택이 위협이나 협박이 없는 자신의 자유 의사인지 아닌지를 질문받았다. 포로들의 답변은 심사서에 기재되었다. 그 포로들의 희망사항이 명백하게 제시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서에 서명했다.
포로 교환 협정은 명백하게 전쟁 포로를 인수하는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설득회는 끝나야 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하지만 설득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양측의 사사건건 의견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20일이 흘러가 버렸다. 따라서 90일 내에 설득회가 끝나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90일 동안의 기간 중 10일간만 설득회가 열렸다. 설득회는 1953년 12월 23일 끝났다. 22,600여 명의 반공포로 중에서 3천5백여 명만이 설득회에 참여했고 그중에서 북송을 선택한 숫자는 4%를 조금 넘는 150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인민군 포로는 46명만이 북으로 귀환을 희망했다. (그러므로 480여 명은 설득회에 참석하지 않고 북으로 송환을 희망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올라갔고, 또한 인민군 76명 역시 설득회에 참여하지 않은 채 인도 관리군쪽으로 탈출하여 최종적으로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인도군 관리하에 있는 동안 중공군 12명과 인민군 20명이 사망했고 인민군 10명은 행방불명 또는 도망자로 처리되었다.)
전쟁 포로 (피설득자)는 설득실에 개별적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전쟁 전에 속했던 국가의 대표 (설득자)로부터 왜 고국 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설득 (설명)을 들은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지, 송환을 거부할지, 중립국으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송환 거부자들은 어쨌거나 사상적으로 전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로들의 전향이란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아주 막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포로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몇 번씩이나 바꾸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은 그들을 설득하면 재전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설득해서 진정한 의지를 밝힐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송환 거부 포로들은 두 유형으로 나뉘었다. 단순한 유형은 설득을 듣지조차 않는 듯 멍하고 조용하게 있었다. 뭐라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득을 위한 대화가 끝나면 말 한마디 없이 송환 거부문을 통해 걸어나갔다. 다른 유형이 다수를 차지했다. 노래를 부르고 반공 구호를 외치며 들어갔다. 할 수 있는 한 설득회를 방해하려고 시도했다. 북쪽 설득관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그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려고 해서 인도 경비병과 싸웠다.
하지만 중립국을 선택한 88명 (76명의 한국인과 12명의 중국인)의 포로들이 처한 상황은 복잡했다. 그들은 남한이나 북한, 중국이나 대만으로 송환되지 않고 ‘중립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 그들은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인도로 향했다.
그들은 대한반공청년단과 비밀리에 남한 정부의 지시를 받고 있는 수용소 내 지도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수용소 내에서 끊임없이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북쪽으로 송환은 물론이고 중립국을 선택한다는 것은 민족 반역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내색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의중이 밝혀지면 엄청난 박해와 집단적 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자칭 지도자들은 중립국을 희망하는 용의자를 발견하면 즉시 체포해서 가두고 고문하여 불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잘못하면 사형집행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설득실에서조차 중립국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이 결국 밝혀지게 되고 그때 당할 심한 고문과 폭력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립국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포로 수용소의 철조망 울타리를 뚫고 인도 관리군 막사로 도망쳐야 했다.
설득 과정은 5분에서 30분 정도 빨리 끝날 수도 있었지만 피설득자가 물고 늘어지면 몇 시간씩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설득실에 들어가는 것은 포로의 권리이지 강제적 의무는 아니었다. 규정상 몇 번이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오직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것마저 완강히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북으로 송환을 결정하고 명백하게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는 그 즉시 짐을 들고 공산 측 출구로 빠져나와서 북으로 귀환했다. 그러므로 원래의 막사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남한 출신 설득관들은 아주 좋은 옷감에 잘 재봉된 미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색상의 스카프를 하고 있었으며 비싸보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고 갖고 있는 담배 케이스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남한 사람 모두가 그것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로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미제이며 남한이 미국의 주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이 북한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지적했다.
반면에 북측 설득관은 고급 군관들로서 김일성 장군의 지시문을 읽어주면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이념의 타당성을 길게 설명하고 미국 제국주의와 남한은 미제 주구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인민공화국의 치적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설득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공 포로들은 그들 이론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북한의 너무나 비참한 실상을 낱낱이 폭로했으며,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을 악마처럼 저주했다.
아주 가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남한 출신으로 대위 시절 연대 수송 담당 장교였는데 중공군이 참전하여 후퇴할 당시 평양 근처에서 전쟁 포로가 되어 평양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한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했다.
그가 북측이 마련한 설득실에 들어섰을 때, (남쪽) 설득관이 자신과 같은 연대에서 복무했던 옛 전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득관은 그 당시 연대 정보 장교였는데 그들은 같은 고향 (충주와 음성) 출신이었다. 그들은 뜻밖에 만났지만 너무 반가워서 인사하고 부둥켜안으며 옛 전우로서 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옛 시절을 회상하고 고향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포로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설득관은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기 전 포로의 어머니를 만났다며 사진과 편지를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늙었소. 그래도 건강하다오. 사진을 잘 보시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눈물로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부처님께 빌고 있소."라고 설득관이 말했다. 포로는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어머님에게 내가 잘 있다고 전해 주시오. 내가 불효자식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나는 곧 돌아갈 것입니다. 조국이 해방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설득관 친구에게 "다 소용없네. 이렇게 한다고 내가 돌아갈 것 같은가. 헛수고란 말일세. 나는 이미 북에 남기로 결심했네."라고 말했다.
그 설득관은 너무 당황했다. 자신의 친구가 설득관보다 더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갇혀 있는 동안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에 세뇌되어 북한에 남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설득실 장면은 그 소설의 핵심인데 묘사와 설명이 너무 허술했다. 역사적 사실, 진실, 맥락을 훼손, 조작, 왜곡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특히 역사소설 (또는 분단소설), 전쟁소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작가에게 진실을 왜곡 조작할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역사를 私有化하거나 개인적 취향에 맞추거나 자신의 관점에 맞춰 견강부회하거나 감상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결코 무책임하게 상상력을 남용 오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가 (20대 중반쯤)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그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감수성이 지극히 예민한 10대 중반의 소년이었고 흥남철수 작전 때 월남했으므로 그 전쟁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중요한 참고문헌이 미처 나오기 전이었지만 대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일본의 주요 신문 등에는 한국전쟁과 포로 수용소, 포로 송환 문제와 관련해서 충분히 참고할 만한 다수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1952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도드 사건의 의미’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 사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이념이나 사상이라는 면에서 대조하고 공산주의 포로들이 일종의 연극을 하면서 정치적 주장을 펴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논박하면서 ‘…… 이 사건에 내포된 중대한 의미는 그 포로들이 그들의 수용소장을 납치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면 어렵지 않게 파악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국제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신문 방송사와 통신사들이 파견한 종군기자들 또는 프리랜서 기자들이 수없이 많은 기사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기사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고 조잡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쯤이면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많은 반공포로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구술 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 소설은 작가가 20대에 갈겨쓴 습작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5. 아우스트리아호
아우스트리아호는 1954년 2월 6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대만 해협을 거쳐 홍콩에 들른 다음 싱가포르에 기항했고 믈라카 해협을 지나 안다만 제도를 통과하여 2월 24일 첸나이항에 도착했다. (인도 타밀나두 주의 주도이다. 벵골만과 접한 남인도의 최대 도시이다. 과거 명칭은 마드라스였다).
이 배는 2만 4500톤의 대형 수송선으로 최종적 임무를 끝마친 마지막 인도군 1,500명과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 88명이 타고 있었다. 또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이었던 K.S. 티마야 장군도 타고 있었다. 선장은 눈같이 흰 제복에 금판의 인도 해군 대령 견장을 단 곤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쑥한 군복을 입고 4~5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다녔다. (아우스트리아호는 1930년 영국에서 건조된 해군 수송선이었다. 하지만 선내는 5층, 6층으로 선실이 열을 짓고 호화로운 극장, 영화실, 댄스홀, 휴게실, 그리고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서 군용 수송선이 아니라 대서양을 오가는 일류 호화 여객선 같았다. 배가 너무 커서 인도군 1,500명이 승선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인도군과 인도로 가는 포로들은 오전 11시경 승선을 완료했지만 짐 싣는 데에 3시간 정도 더 걸렸다. 아우스트리아호 이외에도 6척의 배가 추가로 인천에 왔다가 빈 배로 돌아갔다. 아우스트리아호는 인도 남부의 마드라스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참조.)
인도군과 포로들의 선실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인도군은 포로들을 강압적으로 관리했다. 어느 인도군 소령은 판문점에서 4, 5명의 하사관을 인솔하고 다녔다. 그는 이제부터 중립국으로 가는 포로들을 관리하는 소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포로들은 누구나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는 이 수송선이 3천 톤의 ‘타고르호’로 나온다. 이 수송선은 뜬금없이 일본을 거쳐 마카오로 향한다. 인천항에서 인도의 항구로 가는 항로가 아닌데도 말이다.
어떻게 연안 여객선도 아닌데 3천 톤짜리 배란 말인가?
왜? 어째서 마카오로 가고 거기서 주인공은 느닷없이 자살을 하는가? 자살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설시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역사소설이고 리얼리즘 소설이라면 개연성(probability)과 핍진성(verisimilitude), 필연성(inevitability)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거 아닌가.
실제 인도로 가는 배에서 자살한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 중립국으로 가는 반공포로가 30여 명이란 말인가?
선장은 선박에서 제왕적 지위에 있다. 어떻게 해서 감시를 받고있는 일개 포로가 제 마음대로 선장실을 들락날락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 선장의 총을 제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단 말인가?
현대 전쟁의 역사상 전쟁 포로들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립국을 택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한 경우인 것이다. 그것도 유엔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88명은 일단 인도로 가긴 하지만 거기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한국인 76명의 경우, 최종 정착 국가는 한국 5명, 북한 6명, 브라질 48명, 아르헨티나 11명, 인도 6명이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광장」은 역사적 진실을 너무나 많이 훼손했다. ‘소설이니까’라고 혹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라고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소설을 모독하는 것이다. 진지한 소설은 잡설이 아니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고 수능에도 3번이나 출제되었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그 소설이 역사책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암기했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소설적 자유 (romanesque liberté)와 관련하여 모리아크의 ‘모든 작가들은 창조주로서 신과 가장 흡사해야 한다’라는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소설가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가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시점(視點)과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연쇄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건들의 연결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지적 권능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특히 작중인물의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가 작중인물의 자유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는 소설 쓰기에서 작가의 자유를 주장한 게 아니라 자유의 한계를 주장한 것이다.
어쨌거나 소설 속 이야기에는 내적 논리와 함께 개연성과 핍진성과 필연성이 관통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작가의 자유는 어쩔 수 없이 제약을 받게 된다). 실력이 없고 태만하고 무능한 작가만이 우연성에 기대는 것이다.
그 작가는 역사적 진실을 임의적으로 훼손 변조 조작을 한 것이다. 그렇게 역사적 사실을 훼손하려면 노골적으로 역사를 희화한 통속소설이라고 하던가 혹은 이 소설은 독자들을 웃기기 위한 코미디 소설이라고 양해를 구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 대화 이후 소설을 수정 보완하지 않았는가? 왜 그 작가는 이 대화 이후에도 역사적 진실에 맞춰서 30년 동안이나 그 소설을 수정 보완하지 않았는가? (그는 2018년 7월 고인이 되었으므로 그 대화 이후 거의 30년을 더 살았다.) 그는 소설 속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뭔가 단단히 곡해하고 있지 않은가? 상상력의 발휘에도 한계가 있고 오용이나 남용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면서 수백 권의 참고문헌을 읽고 역사적 진실이 단 하나라도 왜곡되지 않도록 그토록 철저하게 수정하고 수정 보완했는가? 왜 하진은 「전쟁 쓰레기」를 쓰면서 23편의 참고문헌을 탐독했는가? 그 작가는 스스로 단지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그 소설을 썼다고 고백했다.
〔아주 상세한 것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참조. 이 책은 종이책으로 나온 이후 내 블로그에 전체가 실려있지만 발간 이후 참고문헌을 참조하여 계속 수정 보완 중에 있다. 또한 위에서 열거한 참고문헌들 중에서 특히 「내가 겪은 조선전쟁」(1991.6. 발간), 「판문점 일기」(1993.10. 발간), 「심문실의 한국전쟁」, 「전쟁 쓰레기」등을 읽고 검토해보면 그 소설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벗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광장」을 여러 번 수정 발간해서 (일곱 번이나) 화제가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책인 「내가 겪은 조선전쟁」, 「판문점 일기」,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등은 이미 30여 년 전에 나왔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한국전쟁 관련 다수의 논문과 에세이, 두툼한 책들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읽고 검토해서 수정 보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는 단 한 권의 참고문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독자(혹은 비평가)를 위해서, 후행 논문이나 책에서 추가 연구를 위해서는 엄선된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과 참고문헌은 일심동체이다. 참고문헌은 후행 논문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텍스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참고문헌들을 본문과는 물론이고 참고문헌끼리 비교해서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Intertextuality 혹은 Interdependence).
그런데 소설에도 참고문헌이 필요할까? 소설의 주제를 형성하고 스토리 라인을 제대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참고문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참고문헌은 명작소설의 원천이다. 특히 역사소설이나 전쟁소설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이 없다면 명작소설은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하진의 「전쟁 쓰레기」는 어떠했나? 그가 발표한 소설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유명 문학상들은 연거푸 거머쥐었다. 미국 문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수상 경력이다. 이 소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이데올로기와 전쟁 포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최인훈의 「광장」과 주제라는 면에서 아주 흡사하다. 그는 그 소설을 쓰면서 무려 23권의 참고문헌을 참조했다. 그 스스로 논픽션이나 회고록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픽션이며 주요 인물들은 허구적이다) 대부분의 사건들과 디테일은 아주 사실적이다. (하진 장편소설 / 왕은철 옮김, 「전쟁 쓰레기」 참조.)
여러분 대문호 톨스토이가 수십 권의 참고문헌을 참조하여 어떻게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는지 참고하세요. 여러분은 무슨 긴 글을 쓸 때면 우선 먼저 참고문헌을 면밀히 조사해서 읽어야 하고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세요. 무궁무진한 자료와 참고문헌을 더 찾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겁이 덜컥 날 지경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참고문헌을 취사선택해서 엄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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