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판문점」의 참고자료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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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도로 간 사람들
그들이 즉흥적으로 중립국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와 토론을 했고 가끔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남한으로 가면 아무런 연고도 없었기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고구마나 채소를 재배해는 가난한 농부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넓은 세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그들은 무국적자일 뿐 포로의 신세는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일단 인도로 간 다음 거기서 일시 체류하면서 인도에 남거나 다른 제3국을 선택했지만 그 국가들이 그들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인도로 간 모든 포로들의 제3국 선택 동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들 모두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또한 포로 수용소에서 경험한 격렬한 친공과 반공 이데올로기 전쟁과 상호 간 폭력과 욕설과 난투극, 살육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밤마다 친공포로 수용소 천막에서 울려대는 적기가, 김일성 장군 찬양, 공산주의 학습, 인민재판, 군사적 행진과 이에 대항하는 반공포로들의 투쟁, 판문점의 중립지대 포로 수용소 시절 극우 반공세력들의 정신교육 그리고 탈북 또는 중립국 선택의 우려가 있는 포로들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압박 등은 ……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이를 돌이켜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립국 선택 행위를 이념적이거나 사상적인 원인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하다. 76명의 포로가 제3국을 선택한 동기는 그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매우 다양하였다. 그들이 포로가 된 과정도 달랐다. 그들은 유엔군의 귀순 권유 삐라를 들고 귀순했지만 귀순자와 포로, 의용군과 일반 피난민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귀순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전쟁포로가 된 것이다. 지기철의 경우는 심문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부산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후 다시 1951년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현동화는 수용소 생활 초기에는 장교와 사병의 구분만 있었을 뿐 반공과 친공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군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친공과 반공 집단 간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 인명 살상을 경험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국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모든 것을 떠나 인간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66 수용소는 친공 막사였기 때문에 소수의 반공성향 포로들은 철저히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이념 대립에 대한 혐오감뿐만 아니라 전쟁 중 우연히 접하게 된 고향의 부모와 가족들의 몰살 소문과 전쟁 중에 다친 그의 눈을 미국에서 치료받고자 한 소망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하였다. 우선 멕시코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 치료도 받고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를 중립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지기철은 자원 북송을 거부하여 1953년 9월 판문점의 중립지대로 옮겨진 후 대부분 인민군 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극도의 반공주의와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폭력행위에 대한 반감 때문에 11월 말경 중립국을 선택하기 위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인도군 사령부로 향했다.
(김경학의 ‘중립국 인도로 간 반공포로’에는 김철진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데 1998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고 했다.)
지기철은 그의 생애 가운데 한반도에 거주했던 기간은 어린 시절 3년과 한국전쟁과 포로생활 기간 4년을 포함하여 겨우 7년뿐이다. 그에게는 남북한 어느 곳도 낯선 곳이었다. 그는 포로 생활 중에 반공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북한으로 갈 수 없었다. 또한 인민군 포병 부대 대대장까지 한 자신에게 반공 국가인 남한 정부가 적절한 삶을 보장해 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는 1923년 경북 예천군 유천면에서 6남 2녀의 넷째로 태어나 3세 되던 해에 만주 봉천으로 부모를 따라 이주하였다. 그는 만주의 한인학교인 동흥중학 1년이 학력의 전부다. 1944년 8월 관동군 징집 1기로 일본군에 사병으로 징집되어 포병연대에 배속되었고 11월경에는 만주 국경의 무링가 마을에 배치되었다.
1949년 지기철 소좌는 약 6개월간 사상교육을 받고 북한군 포병연대 대대장이 되어 전쟁준비를 위해 사리원에 배치되었다.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서부 전선의 선봉부대로 남하하여6월 28일 서울에 진입했다. 계속해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까지 내려갔지만 이곳에서 미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껴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16일 부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1개 대대를 끌고 투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를 정치보위부 장교가 눈치챈 것 같자 그는 단신으로 귀순하였다.
최인철은 순진한 사람으로 사상이나 이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 그는 그런 걸 알지도 못했다) 그는 친공포로 막사 시절에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땅굴을 파는 등 순종하였고, 반공포로 막사 시절에는 비록 철조망을 기어오르다 실패했지만 (그때 철조망을 탈출하려다가 미군 헌병에게 붙잡힌 것이다) 1953년 6월 말경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남한으로 탈출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체를 비롯한 자유이지 이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판문점 중립지대에서 몇 개월간 수용되어 있는 동안 그는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하였다. 그는 북쪽의 인권을 마구 유린하는 공산주의 통치가 싫었고 그들의 무서운 인권 유린을 목도했기 때문에 결국 제3국을 선택했다. (남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남쪽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는 1928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인민군의 사진병으로 차출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그때부터 고향과 부모 형제 자매 친구들과 헤어졌고 그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인도에 주저앉아 거의 반세기 동안 살았다.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다 우여곡절 끝에 티베트 여인을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거의 무일푼으로 밑바닥 삶을 살았고 인도 정부로부터 받는 한 달 1000루피의 연금으로 생활을 겨우 꾸려 나갔다. (2000년 무렵 이야기이다. 2000년 6월 7일자 조선일보 참조.)
주영복은 회고록에서 1952년 중후반 경 영천 포로 수용소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또 다른 포로인 지신영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그들은 점점 더 친해졌고 지신영은 주영복을 의지하며 따라다녔다. 어느 틈엔가 주영복은 지신영을 설득해 중립국행을 선택하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인도에 함께 도착했으나 지신영은 중남미가 아니라 인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지신영이 말했다. “많이 생각한 끝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소. 그렇다고 주 형이 중립국에 가자고 한 것에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나도 바보는 아니기에 남과 북 모두를 버렸을 뿐이지요. 우리 모두 정치와 사상을 떠나 해외에서 농사를 지어 성공하자는 생각이 있었던 거지 누구를 믿고 떠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신영은 중남미보다는 인도에서 농사를 지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도 사람들만큼 순진하고 정부가 민주적인 곳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모니카 김 지음, 「심문실의 한국전쟁」참조. 지신영은 인도 남부에 홀로 정착한 후 인도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술로 시계 수리점 종업원으로 일했으며 조그만 시계 수리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주영복 (朱榮福)
그는 반공포로이면서 중립국 행을 선택했다. 1924년 1월 14일 중국 연변의 용정에서 출생했다. (전쟁 발발 당시에는 26세였다.) 1945년 8월 15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다음 해 인민군에 러시아어 통역으로 입대하면서 중위로 임관되고 (그 시절에 이학구 총좌와 알게 되었고 친하게 지냈다) 1950년 공병 소좌로 인민군 제2군단 공병 참모가 되었다. 1950년 9월 김포에서 귀순했지만 포로가 되어 1954년 2월 석방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심사 당시 중립국을 선택했다. 1954년 2월부터 인도에서 2년간 체류하다가 브라질로 갔다.
(나는 왜 중립국을 선택했는가? 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천 번도 더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판문점의 반공포로 수용소를 탈출했다. 그는 자주 악몽을 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매일처럼 거행되는 인민재판이나 자아비판, 막사에 울려퍼지는 적기가와 인민군가, 해방동맹, 군사훈련, 행진 등이 꿈속에서 떠올랐고, 중립지대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그들에게 끌려가 죽을만큼 매를 맞고 철조망을 넘어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때 겪은 일들이…… 그들이 “저놈 잡아라”, “저놈 죽여라”, “이중 변절자”, “회색분자”, “진짜 빨갱이”라고 외치면서 쫓아오던 일들이 꿈에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후줄근하게 흘렀고 마침내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한동안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서 하루라도 독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립국을 선택했지만 중립국을 찾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잘 사는 나라인 스웨덴이나 스위스는 거절했다. 미국은 그때 국제적인 정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냉담했다. 남은 길은 원래의 나라인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인도에 잔류하거나 남미행만 가능했다. 그 당시 인도 정부는 휴전협정 조항에 따라 그들의 모국인 북조선으로는 보내줄 수 있지만 남조선으로는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그들은 무국적자로 2년 체류 조건으로 인도로 갔었는데 또다시 자기들이 살고 싶은 제3국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나라가 그들을 수용할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가장 선호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미국은 그들에게 냉담했다. 그때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멕시코의 경우 차일피일하면서 그들을 외면했다. 멕시코 정부의 태도는 오락가락했다. 당초 54명의 포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24명으로 축소했고 다시 12명으로 제한했다. 그러고도 소식이 끊겼다.
그때 제10회 유엔 총회에서 브라질 정부는 한국전쟁의 포로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신문 1면에 「Gov. of Brasil accept the Korean EX PWs!」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반공포로들은 1956년 2월 6일 비행기로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했다. 반공포로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받아들인 브라질 정부와 국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브라질 국가를 합창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연습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최국주의 지휘하에 브라질 국가를 불러 언론을 비롯한 브라질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브라질행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열심히 연습했던 것이다.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참조.)
그는 중립국 인도로 떠났다가 브라질을 선택하여 정착한 것이다. 초창기 한국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브라질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포한사전』을 발간하였는데 그 사전은 한국 학생들의 포르투갈어 학습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이 사전을 집필하면서 포르투갈어-영어 사전, 포르투갈어-일본어 사전, 그리고 영어-한국어 사전을 참고했다. 남미 국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브라질만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그가 8만 단어 분량의 포한사전을 직접 편찬한 것을 보면 그의 회상과 기억, 추론, 서술, 단어, 문구, 문장 등은 1차 자료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영복은 초기 한국 농업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도착할 무렵, 상파울루주에 있는 꾸바떵 제철소의 협력회사였던 일본 제철소에서 일본어 번역 및 통역으로 일했다. 그 당시 브라질로 간 반공포로 청년들은 대부분 일본계 2세나 브라질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고 총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총각이긴 했지만 (실제 40세의 나이였으므로) 뻐드렁이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런데 교민 중 한 사람이 그가 결혼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인지 혹은 그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한국 여인을 중매했다. 그녀 역시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 그때까지 노처녀였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쉽게 결정했다. 하지만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맞선을 볼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진을 교환했고 그 사진을 보고 결혼 여부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브라질 시민권을 이미 취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브라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임장에 의한 결혼 서류’를 보냈다. 그 서류를 받은 예비 신부는 일본 요꼬하마 소재 브라질 영사관에 가서 영주비자를 받고 1963년 초 상파울루주 깜삐나스시의 비오라꼬뿌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몇몇 한인 교포들이 그와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갔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신부와 밑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동시에 실망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처음으로 대면한 신랑 신부가 서로 실망했던 것이다. 신부는 신랑이 사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고 신랑은 신부의 인물이 사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결혼했다. 당시 부부는 한인촌이 형성된 상파울루 중심부에 있는 꼰지데 사르제다스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래도 자식을 낳으며 그곳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 그후 그와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재이주했다. 미국으로 재이주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처형의 초청으로 가능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나이든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노동직 일자리라고 하더라도 만족해야 했는데 그 당시 그가 얻은 일자리는 어느 고층건물의 야간 수위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이때 그는 밤을 세워가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천매의 원고를 탈고했다. 그렇게 해서 회고록이자 자서전인『내가 겪은 조선전쟁』,『76인의 포로들』이 탄생했다. (내가 6.25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모아서 검토했지만 이 책들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참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세밀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서술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조국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스스로 추방되었고 망명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고 외톨이었으며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다. 평생 동안 국제적 난민처럼 떠돌면서 한때는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l.A.시절을 말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수구초심으로 돌아가 그때 조국을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살았다. 평생 동안 고국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사무쳐서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칼날과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 곡예를 부려야 했다. 인생역정에서 마주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면서 극단적 회의론자에서 인생을, 인간을, 세상을 긍정하는 긍정론자로 변모했고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인간 삶의 의미를 발견해서 인생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돌과 모래, 바다, 기계 같은 물질, 심지어 생명체인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유독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도덕적 양심,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지성적 지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불굴의 정신력과 자유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고귀했다. (그가 신을 믿는지 여부 ― 철저한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인지, 理神論者인지, 인간이나 동물, 식물 같은 생명체에 한해서 신의 형상인 것으로 인정하는 제한적 범신론자인지, 인격신인 유일신을 믿으면서 하느님에게 의지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그는 주저주저하는 회의론자로서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지적 탐험가였으므로 탁월한 지성인이 되었고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배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생각했었다. 나는 시간이 훨씬 많이 흐른 다음 아마 불혹의 나이가 지났을 때쯤 (그때까지 죽지 않고 무난히 살아남는다면), 내가 지금 느끼고 겪었던 것들을, 영광과 환희는 없고 오욕으로 점철된 자화상을 회고하면서 글로써 풀어내야만 할 것이다. 내가 평생 동안 증오하는 인물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단 자신을 미화 과장하거나 또는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변명을 하지 않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극적인 가공 없이도 그 자체로 문학적 세련미가 조금은 돋보이는 글을……〕
그는 죽었지만 (그가 죽은 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온갖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으며 품격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동화 (玄東和)
전 재인도한인회장 (1932년생, 전쟁 발발 당시 18세.)
그는 함북 청진 출신으로 해방 후 38선 이북인 강원도 금화군 (현 철원군)에 정착했다. 부친이 여관을 운영해서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1949년 평양사동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다음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전쟁 발발 당시 제26 여단 소속 중위였는데 1950년 10월 말경 강원도 화천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현동화는 김경학의 위 논문에서는 선명수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그는 인도에서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으며 재인도 교민들을 대표하는 인도 한인회장이 되었다. 1남 1녀를 한국에 유학 보냈다. 2021년 2월 12일 89세로 별세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 살면서 남한을 동경했다. 열세 살 때 해방을 맞고 나서 북한에서 진행되었던 재산몰수 등 공산화 과정을 생생히 목격했다. 전쟁 중 고향 마을이 폭격을 당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당시 북에 있었던 어머니와 형제들은 살아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가 중립국 행을 택한 계기는 이념과 사상 때문이 아니었다. 멕시코에 가면 이웃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도 다니고 더 공부할 수 있겠다는 현실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인도를 거쳐 멕시코로 가서 전쟁 때 미군 폭격을 당해 입은 심한 상처의 후유증을 치료하고 학업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멕시코 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하자 동료 3명과 함께 인도에 정착한 것이다. (그때 반공청년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문명철 (1930년생, 전쟁 발발 당시 20세)
그는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넉넉하게 잘 사는 독실한 기독교도 가정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47년 무렵 모택동의 공산당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지주들과 자본가들, 정치인들을 무조건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무슨 죄목을 씌워 인민재판을 해서 사형을 집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본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부모님의 고향인 함경북도 웅진으로 탈출하였다. 20세 때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가을 인민군의 강제 징집으로 평양으로 끌려가던 중 미군 폭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빠져나왔지만 미군의 포로가 되어 원산 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미군 화물선에 실려 부산으로 내려와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당시 그는 민간인이었으므로 전쟁포로 (prisoner of war)가 아니었지만 미군은 막무가내로 전쟁포로로 취급했다. 몇 개월간 부산의 포로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복막염과 맹장염을 앓아 죽을 고생을 했다. 부산 동래에 있는 14육군 야전병원에서 미군 대령 계급의 병원장의 집도로 수술을 받아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다시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2년 6월경 포로 분류 심사에서 전쟁포로가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 인정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나와 영천의 반공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8월 27일 그는 인도군이 관할하는 판문점 중립지대로 이송되었다.
그들 일행은 이름과 번호를 확인한 후 한 천막에 약 50명씩 배치해서 수용되었다. 그 반공포로 수용소는 대한반공청년단과 지도부가 그들을 밤낮으로 감시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천막을 빠져나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영어를 잘하는 포로 통역관인 ‘미스터 리’가 찾아왔다. 그는 통역관이기 때문에 어느 수용소라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어?” 문명철이 대답했다. “중립국으로 가기로 했어.” “그래, 잘했어.” “그런데, 이 지옥같은 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이렇게 하자. 내일 이맘때 내가 이 천막으로 다시 올게. 그러면 자네는 조금 있다가 갑자기 배가 몹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때 내가 자네를 등에 업고 뛰면 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니 변함없이 새날이 밝아왔다. 문명철은 오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친구의 각본에 따라 연극을 해야만 했다. 친구의 등에 업혀 저 관객들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저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니 저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날 밤 9시, 미스터 리가 태연하게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일부러 큰 소리로 나누었다. 드디어 그가 눈으로 사인을 해주었고, 그 신호에 따라 그는 “배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정말 아픈 사람처럼 시늉했다. 복막염과 맹장염으로 아팠던 때를 기억하며 “아이구 배야. 아이구”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그 친구가 한 몫 거들며 말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야? 배가 아파? 자넨 전에도 복막염 수술을 받은 적이 있잖아. 그게 또 재발했나? 안 되겠는걸. 빨리 의무실로 가야겠네.”
인도군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 모인 포로들의 천막 숙소를 향하여 20분 동안 함께 걸어갔다.
문명철이 말했다. “자네도 나와 함께 중립국으로 가서 공부하세나” 미스터 리가 말했다. “나도 자네와 함께 가고 싶지만 중립국으로 가면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결혼을 해도 한국 여자와 해야 하는데 그곳에선 더 어려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여러모로 생각해보아도 나는 남한에 남아서 더 공부하고 그 다음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겠네.”
그는 인도에서 2년간 체류하다가 1956년 2월 브라질로 가 상파울루에 정착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신학석사, 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브라질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상파울루 메트로폴리탄 대학 교수, 상파울루 브라질 감리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참조. 짜우짜우는 포르투갈어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생 동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그는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고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다.
(인도에 도착한 한국인 포로 76명의 그 후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을 벗어난 것이다. 그들의 긴 이야기는 한수산, 〔「제3국으로 간 반공포로들의 그 후」, 1983, 마당〕과 백웅태, 〔「거제도에서 판문점까지」, 1987, 대원출판사〕, 김경학, 〔「중립국 인도로 간 반공포로」, 이 논문은 「전쟁과 기억」, 2005, 한울에 실려있다〕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7. 참고문헌
1차 자료와 2차 자료
장편소설 「판문점」을 쓰면서 참조한 참고문헌 중에서 1차 자료는 오세희 저「65포로수용소」,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 현동화 구술 정동현 씀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 송관호 6‧25 전쟁 수기 / 김종운 정리 「전쟁포로」,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 「76인의 포로들」, K.S. 티마야 씀 / 라윤도 옮김 「판문점 일기」, 인도 국방부 발간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백선엽 지음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고영근 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유엔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명의로 된) 한국 휴전 협정,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 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 일, 유엔군 대표단 수석 대표: 미국 육군중장 윌리엄 K. 해리슨 2세 명의로 된) 포로 교환 협정 (중립국 송환 위원회 위임 협약), (6.25 전쟁 발발 당시 관련 국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1949년 협약을 직접적으로 비준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발발 후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부터 1949년 제네바협약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전쟁포로 송환에 관한 1949년 제네바협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 북한 측 자료인 6.25 전쟁에 관한 「조국해방전쟁사」등이 있다.
2차 자료는 김학재 지음 「판문점 체제의 기원」, 조성훈 저 「한국전쟁과 포로」, 서동만 지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모니카 김 지음 / 김학재‧안중철 옮김 「심문실의 한국전쟁」, 하진 장편소설 / 왕은철 옮김 「전쟁 쓰레기 (War Trash)」, 정연선 지음 「잊혀진 전쟁의 기억」, 김동춘 지음 「전쟁과 사회」, 유중원 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국사편찬위원회 (1995)「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 (1950~1954)」등이 있다.
특히 1차 자료가 중요했는데 그중에서 (6‧25 전쟁 당시 공병 소좌로 인민군 전선사령부 공병 부부장이었는데, 1950년 9월 자진 투항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판문점의 포로 석방 심사 과정에서 제3국 인도를 선택한 주영복의)「내가 겪은 조선전쟁」과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심사 당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상 전쟁의 심판을 맡았던 인도 장군인 티마야의)「판문점 일기」,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를 주로 참조했다. 2차 자료 중에서는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포로」, 「심문실의 한국전쟁」이 중요했다. 사진은「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전쟁포로」「판문점 일기」「한국전쟁과 포로」등에서 옮겼다 〔이 사진들의 출처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 자료실의 ‘Korea War’ 파일이고 나는 재인용 한 것이다. 이 파일에는 수만 매의 사진 자료가 저장되어 있고 일정한 절차를 밟으면 누구든지 열람 복사할 수 있다〕.
소설일수록, 특히 역사소설일수록 참고문헌은 중요하다. 참고문헌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참고문헌은 일심동체이다. (그러므로 참고문헌은 인내하면서 차근차근, 무엇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읽는 일이 중요하다. 참고문헌을 읽고 해석할 때 함부로 자신의 선입견이나 습관 또는 취향을 개입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부 사항에 집착하여 시야가 좁은 방식으로 읽어서도 안될 것이다.) 보통 본문을 읽으면서 또는 본문을 읽고 나서 참고문헌을 참조하게 되지만 때로는 참고문헌을 먼저 읽으면 당해 소설을 깊이 있게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소설에서 참고문헌은 독자들이 소설을 잘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Intertextuality 또는 미하일 바흐친의
Interdependence
참고문헌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하거나 인용 원용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한 목록이다. 그것은 출처를 명시하고 논지의 타당성을 확보하며 표절 의혹을 방지하고 독자가 참고문헌을 직접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참고문헌을 참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텍스트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성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참고문헌은 본문 텍스트와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의 일부 형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연설과 저술에서 모방은 웅변술이나 작문 기술을 발달시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을 자유롭게 빌려 쓰는 것을 초기 상호텍스트성을 연구한 학자들은 ‘영향 이론 (influence theory)’이라고 불렀다. 이 영향은 모방, 오독, 패러디, 전승의 일부 차용, 또는 다른 텍스트에 대한 암시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이전의 텍스트가 이후의 텍스트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의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를 활용, 차용, 혹은 모방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담론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텍스트와 관습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일 바흐친은 텍스트들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바흐친은 모든 텍스트적 표현이 다성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텍스트가 이전 텍스트들과 현실이 지닌 다면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화성 (dialogicity)이라고 부르면서, 한 텍스트를 이전 텍스트들과 나눈 하나의 대화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화한 형태로 보았다. 바흐친과 크리스테바 두 사람이 말하는 상호텍스트성은 모두 텍스트와, 그에 앞서는 텍스트가 주는 영향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예술작품 또는 모든 학문적 업적에서 당해 작품은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재즈 앙상블은 평소에 함께 연주하던 사람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하면 재즈 앙상블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그날 하룻밤을 위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날 밤 공연이 끝나면 앙상블은 곧바로 흩어진다. 하지만 즉흥 연주(improvisation)는 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들의 상호 작용(interaction)에서 나온다. 그래도 앙상블과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일시적인 협업일지라도 그 결과물은 계속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악 작품은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작품이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 천재성을 개인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함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수많은 인간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나심 엘 카블리 지음/이나래 옮김,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참조)
미메시스(mimesis)는 자연이나 현실 세계를 모방, 재현, 표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똑같이 따라 하는 모사(摹寫)를 넘어, 대상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재창조하거나 인간이 학습하고 감각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긴 하다. 예술적 창작의 핵심 원리로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고 예술은 다시 현실을 모방한 것이므로 '가짜의 가짜'라며 비판적으로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며 배움의 원천이자 지식 습득의 과정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어쨌거나 예술은 모방, 재현, 도용, 표절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기존의 창작물을 차용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현대 예술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소설 (분단소설과 전쟁소설을 포함하여)을 많이 쓴다. 그들 소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텍스트성 또는 상호의존성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 「증언」, 「판문점」, 「인간의 초상」, 중편소설 「남과 북」, 「전쟁 부역자」, 「검은 그림자의 여인—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배신 혹은 전향」, 「외톨이 테러리스트」, 「시인의 죽음」, 단편소설 「쥐새끼 박멸 작전」, 「해무」등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스토리텔링이라는 소설성을 위해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문학성을 위해서, 독자들의 가독성과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짜깁기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들 소설의 상호텍스트성과 관련해서는 에세이인지 논문인지 알 수 없는「문학에서 잘라내기」참조〕
결론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에서 떼어놓고 읽기는 불가능하므로 이 텍스트들의 상호관계망에서는 어떤 텍스트도, 어떤 독자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 텍스트들의 관계는 인용, 원용, 도용, 행간에 숨기기, 패러디, 패스티쉬 (pastiche), 인유 (allusion), 모방 (mimicry)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텍스트들의 관계에 관한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담론에서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상호텍스트성은 이야기들의 세계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본문 너머의 넓고 큰 세계 (the world behind the text)를 엿보게 해준다. 그래서 참고문헌이 중요하고 그것과 본문 텍스트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므로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다. (장 프라수아 라신 등이 공동 집필한 논문 「성경의 문학비평」 참조.)
학술 논문과 소설
작가는 6.25 전쟁과 포로송환 문제를 큰 주제로 한 짧은 장편소설을 쓴 것일 뿐 학술 논문을 쓴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쓴 법학 관련 논문들이 내 소설의 참고문헌으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기는 했나?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내 소설과 법학 논문 (또는 전문서)은 차원이 다르다. (법학은 방대하고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역사는 불과 삼백년 남짓이고 그 전성기는 19세기였는데 벌써 그 전성기가 지나가 버렸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제 강점기 일본을 경유해서, 일본을 모방해서 도입되었으므로 겨우 백년 남짓이다.) 법학자로서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일과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이다. 논문과 소설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소설은 논문과는 다르게 사유하고 표현해야 하며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주제의 경우에도 탐구하는 영역이 완전히 딴판인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방법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문장과 문체, 단어, 스타일, 구조, 분위기,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참고문헌을 원용, 인용하는 방식 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소설의 경우 형식적이나마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들 참고문헌을 통해서 장편소설을 쓰는 데 필수적인 한국전쟁 관련 역사적 사건과 사실, 실재, 인물, 맥락 등을 나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소설이든 논문이든 고유한 텍스트는 처음과 중간, 결말이라는 완결성을 가져야 하고 (그래야만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있어야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은 논지의 제시가 중요하고 입증의 증거를 정교하게 제시해야 하며 반대의 견해를 논박할 수 있어야 한다. 논지의 명확성, 간결성, 논리적 일관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어떤 종류의 글은 형식과 내용의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논문은 형식이 아주 단순할 수 있다. (판결문이나 공소장처럼) 관습적으로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그에 맞게 짜맞춘다. 그러므로 논문 심사에서 형식이 문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장 역시 전문용어를 쓰므로 (부사나 형용사를 쓰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무미건조하고 단순 명쾌하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생동감이 없다.
반면에 소설은 미시적이어서 세심한 디테일과 그 디테일의 인과성이 중요하고 작중 인물의 주관성 (생각과 감정, 꿈과 기억 등)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문학적 세련미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언어적 기교가 필요하다. 작가 특유의 단어와 문장, 문체 스타일이 중요할 수 있다. 특히 예술지상주의가 문학적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 그걸 그렇게나 강조한다. 단어는 낯설고 화려한 춤을 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학적이거나 미학적 특질이 표현되어야 하므로 문장은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넘어서 찌글찌글하고 간지럽다.
그렇다면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는 각기 독특한 표현의 재료가 있다.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음악은 소리를, 무용은 몸짓을, 미술은 색채나 돌, 진흙 등을 가지고 각기 미적 감각을 표현한다. 이 중에서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의사 전달이나 생각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데 언어의 기능은 사회가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더욱 다양해졌고 그것이 말로 쓰이느냐 글로 쓰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일상적 언어는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정보적 기능과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표현적 기능, 행동이나 태도에 영향을 주는 지시적 기능 등이 주된 기능이다. 반면에 문학적 언어는 정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희곡은 무대를 배경으로 대화를 통하여,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단어, 문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서술과 묘사,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렇다고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특징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는 운율, 심상, 의미 어조 등에 의해서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함축된 형식에 의해 밀도 높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리얼리즘 소설에서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나는 많은 법학 관련 논문과 판례평석, 책들을 썼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학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소설을 쓰는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어쨌거나 법학 논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소설은 예술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난해한 전문용어 투성이 논문을 읽는 독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내가 많은 법학 논문과 판례평석, 법학 전문 책들을 열심히 써서 발표했지만 그걸 읽는 독자가 과연 몇 명쯤 될까?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공유하는 그들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문이건 소설이건 공적 논의의 장으로 나와야 된다. 21세기 대명천지 다원주의 사회에서 공개성의 원칙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독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건 논문이건 독자가 없다면 그건 무용지물이다. 나는 상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오직 좋은 작품과 성실한 독자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바이럴 효과(viral effect)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즉흥적으로 중립국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대화와 토론을 했고 가끔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남한으로 가면 아무런 연고도 없었기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고구마나 채소를 재배해는 가난한 농부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넓은 세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그들은 무국적자일 뿐 포로의 신세는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일단 인도로 간 다음 거기서 일시 체류하면서 인도에 남거나 다른 제3국을 선택했지만 그 국가들이 그들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인도로 간 모든 포로들의 제3국 선택 동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들 모두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또한 포로 수용소에서 경험한 격렬한 친공과 반공 이데올로기 전쟁과 상호 간 폭력과 욕설과 난투극, 살육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밤마다 친공포로 수용소 천막에서 울려대는 적기가, 김일성 장군 찬양, 공산주의 학습, 인민재판, 군사적 행진과 이에 대항하는 반공포로들의 투쟁, 판문점의 중립지대 포로 수용소 시절 극우 반공세력들의 정신교육 그리고 탈북 또는 중립국 선택의 우려가 있는 포로들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압박 등은 ……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이를 돌이켜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립국 선택 행위를 이념적이거나 사상적인 원인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하다. 76명의 포로가 제3국을 선택한 동기는 그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매우 다양하였다. 그들이 포로가 된 과정도 달랐다. 그들은 유엔군의 귀순 권유 삐라를 들고 귀순했지만 귀순자와 포로, 의용군과 일반 피난민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귀순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전쟁포로가 된 것이다. 지기철의 경우는 심문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부산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후 다시 1951년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현동화는 수용소 생활 초기에는 장교와 사병의 구분만 있었을 뿐 반공과 친공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군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친공과 반공 집단 간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 인명 살상을 경험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국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모든 것을 떠나 인간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66 수용소는 친공 막사였기 때문에 소수의 반공성향 포로들은 철저히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이념 대립에 대한 혐오감뿐만 아니라 전쟁 중 우연히 접하게 된 고향의 부모와 가족들의 몰살 소문과 전쟁 중에 다친 그의 눈을 미국에서 치료받고자 한 소망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하였다. 우선 멕시코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 치료도 받고 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를 중립국으로 향하게 하였다.
지기철은 자원 북송을 거부하여 1953년 9월 판문점의 중립지대로 옮겨진 후 대부분 인민군 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극도의 반공주의와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폭력행위에 대한 반감 때문에 11월 말경 중립국을 선택하기 위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인도군 사령부로 향했다.
(김경학의 ‘중립국 인도로 간 반공포로’에는 김철진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데 1998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고 했다.)
지기철은 그의 생애 가운데 한반도에 거주했던 기간은 어린 시절 3년과 한국전쟁과 포로생활 기간 4년을 포함하여 겨우 7년뿐이다. 그에게는 남북한 어느 곳도 낯선 곳이었다. 그는 포로 생활 중에 반공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북한으로 갈 수 없었다. 또한 인민군 포병 부대 대대장까지 한 자신에게 반공 국가인 남한 정부가 적절한 삶을 보장해 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는 1923년 경북 예천군 유천면에서 6남 2녀의 넷째로 태어나 3세 되던 해에 만주 봉천으로 부모를 따라 이주하였다. 그는 만주의 한인학교인 동흥중학 1년이 학력의 전부다. 1944년 8월 관동군 징집 1기로 일본군에 사병으로 징집되어 포병연대에 배속되었고 11월경에는 만주 국경의 무링가 마을에 배치되었다.
1949년 지기철 소좌는 약 6개월간 사상교육을 받고 북한군 포병연대 대대장이 되어 전쟁준비를 위해 사리원에 배치되었다.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서부 전선의 선봉부대로 남하하여6월 28일 서울에 진입했다. 계속해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까지 내려갔지만 이곳에서 미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껴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16일 부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1개 대대를 끌고 투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를 정치보위부 장교가 눈치챈 것 같자 그는 단신으로 귀순하였다.
최인철은 순진한 사람으로 사상이나 이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 그는 그런 걸 알지도 못했다) 그는 친공포로 막사 시절에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땅굴을 파는 등 순종하였고, 반공포로 막사 시절에는 비록 철조망을 기어오르다 실패했지만 (그때 철조망을 탈출하려다가 미군 헌병에게 붙잡힌 것이다) 1953년 6월 말경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남한으로 탈출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체를 비롯한 자유이지 이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판문점 중립지대에서 몇 개월간 수용되어 있는 동안 그는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중립국을 선택하였다. 그는 북쪽의 인권을 마구 유린하는 공산주의 통치가 싫었고 그들의 무서운 인권 유린을 목도했기 때문에 결국 제3국을 선택했다. (남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남쪽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는 1928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인민군의 사진병으로 차출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그때부터 고향과 부모 형제 자매 친구들과 헤어졌고 그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인도에 주저앉아 거의 반세기 동안 살았다.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다 우여곡절 끝에 티베트 여인을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거의 무일푼으로 밑바닥 삶을 살았고 인도 정부로부터 받는 한 달 1000루피의 연금으로 생활을 겨우 꾸려 나갔다. (2000년 무렵 이야기이다. 2000년 6월 7일자 조선일보 참조.)
주영복은 회고록에서 1952년 중후반 경 영천 포로 수용소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또 다른 포로인 지신영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그들은 점점 더 친해졌고 지신영은 주영복을 의지하며 따라다녔다. 어느 틈엔가 주영복은 지신영을 설득해 중립국행을 선택하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인도에 함께 도착했으나 지신영은 중남미가 아니라 인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지신영이 말했다. “많이 생각한 끝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소. 그렇다고 주 형이 중립국에 가자고 한 것에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나도 바보는 아니기에 남과 북 모두를 버렸을 뿐이지요. 우리 모두 정치와 사상을 떠나 해외에서 농사를 지어 성공하자는 생각이 있었던 거지 누구를 믿고 떠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신영은 중남미보다는 인도에서 농사를 지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도 사람들만큼 순진하고 정부가 민주적인 곳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모니카 김 지음, 「심문실의 한국전쟁」참조. 지신영은 인도 남부에 홀로 정착한 후 인도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술로 시계 수리점 종업원으로 일했으며 조그만 시계 수리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주영복 (朱榮福)
그는 반공포로이면서 중립국 행을 선택했다. 1924년 1월 14일 중국 연변의 용정에서 출생했다. (전쟁 발발 당시에는 26세였다.) 1945년 8월 15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다음 해 인민군에 러시아어 통역으로 입대하면서 중위로 임관되고 (그 시절에 이학구 총좌와 알게 되었고 친하게 지냈다) 1950년 공병 소좌로 인민군 제2군단 공병 참모가 되었다. 1950년 9월 김포에서 귀순했지만 포로가 되어 1954년 2월 석방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심사 당시 중립국을 선택했다. 1954년 2월부터 인도에서 2년간 체류하다가 브라질로 갔다.
(나는 왜 중립국을 선택했는가? 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천 번도 더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판문점의 반공포로 수용소를 탈출했다. 그는 자주 악몽을 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매일처럼 거행되는 인민재판이나 자아비판, 막사에 울려퍼지는 적기가와 인민군가, 해방동맹, 군사훈련, 행진 등이 꿈속에서 떠올랐고, 중립지대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그들에게 끌려가 죽을만큼 매를 맞고 철조망을 넘어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때 겪은 일들이…… 그들이 “저놈 잡아라”, “저놈 죽여라”, “이중 변절자”, “회색분자”, “진짜 빨갱이”라고 외치면서 쫓아오던 일들이 꿈에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후줄근하게 흘렀고 마침내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한동안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서 하루라도 독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립국을 선택했지만 중립국을 찾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잘 사는 나라인 스웨덴이나 스위스는 거절했다. 미국은 그때 국제적인 정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냉담했다. 남은 길은 원래의 나라인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인도에 잔류하거나 남미행만 가능했다. 그 당시 인도 정부는 휴전협정 조항에 따라 그들의 모국인 북조선으로는 보내줄 수 있지만 남조선으로는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그들은 무국적자로 2년 체류 조건으로 인도로 갔었는데 또다시 자기들이 살고 싶은 제3국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나라가 그들을 수용할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가장 선호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미국은 그들에게 냉담했다. 그때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멕시코의 경우 차일피일하면서 그들을 외면했다. 멕시코 정부의 태도는 오락가락했다. 당초 54명의 포로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24명으로 축소했고 다시 12명으로 제한했다. 그러고도 소식이 끊겼다.
그때 제10회 유엔 총회에서 브라질 정부는 한국전쟁의 포로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신문 1면에 「Gov. of Brasil accept the Korean EX PWs!」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반공포로들은 1956년 2월 6일 비행기로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했다. 반공포로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받아들인 브라질 정부와 국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브라질 국가를 합창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연습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최국주의 지휘하에 브라질 국가를 불러 언론을 비롯한 브라질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브라질행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열심히 연습했던 것이다.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참조.)
그는 중립국 인도로 떠났다가 브라질을 선택하여 정착한 것이다. 초창기 한국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브라질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포한사전』을 발간하였는데 그 사전은 한국 학생들의 포르투갈어 학습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이 사전을 집필하면서 포르투갈어-영어 사전, 포르투갈어-일본어 사전, 그리고 영어-한국어 사전을 참고했다. 남미 국가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브라질만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그가 8만 단어 분량의 포한사전을 직접 편찬한 것을 보면 그의 회상과 기억, 추론, 서술, 단어, 문구, 문장 등은 1차 자료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영복은 초기 한국 농업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도착할 무렵, 상파울루주에 있는 꾸바떵 제철소의 협력회사였던 일본 제철소에서 일본어 번역 및 통역으로 일했다. 그 당시 브라질로 간 반공포로 청년들은 대부분 일본계 2세나 브라질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고 총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총각이긴 했지만 (실제 40세의 나이였으므로) 뻐드렁이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런데 교민 중 한 사람이 그가 결혼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인지 혹은 그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한국 여인을 중매했다. 그녀 역시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 그때까지 노처녀였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쉽게 결정했다. 하지만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맞선을 볼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진을 교환했고 그 사진을 보고 결혼 여부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브라질 시민권을 이미 취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브라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임장에 의한 결혼 서류’를 보냈다. 그 서류를 받은 예비 신부는 일본 요꼬하마 소재 브라질 영사관에 가서 영주비자를 받고 1963년 초 상파울루주 깜삐나스시의 비오라꼬뿌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몇몇 한인 교포들이 그와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갔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신부와 밑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동시에 실망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처음으로 대면한 신랑 신부가 서로 실망했던 것이다. 신부는 신랑이 사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고 신랑은 신부의 인물이 사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결혼했다. 당시 부부는 한인촌이 형성된 상파울루 중심부에 있는 꼰지데 사르제다스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래도 자식을 낳으며 그곳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 그후 그와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재이주했다. 미국으로 재이주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처형의 초청으로 가능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나이든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노동직 일자리라고 하더라도 만족해야 했는데 그 당시 그가 얻은 일자리는 어느 고층건물의 야간 수위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이때 그는 밤을 세워가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천매의 원고를 탈고했다. 그렇게 해서 회고록이자 자서전인『내가 겪은 조선전쟁』,『76인의 포로들』이 탄생했다. (내가 6.25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모아서 검토했지만 이 책들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참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세밀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서술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조국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스스로 추방되었고 망명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고 외톨이었으며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다. 평생 동안 국제적 난민처럼 떠돌면서 한때는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l.A.시절을 말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수구초심으로 돌아가 그때 조국을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살았다. 평생 동안 고국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사무쳐서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칼날과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 곡예를 부려야 했다. 인생역정에서 마주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면서 극단적 회의론자에서 인생을, 인간을, 세상을 긍정하는 긍정론자로 변모했고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인간 삶의 의미를 발견해서 인생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돌과 모래, 바다, 기계 같은 물질, 심지어 생명체인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유독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도덕적 양심,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지성적 지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불굴의 정신력과 자유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고귀했다. (그가 신을 믿는지 여부 ― 철저한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인지, 理神論者인지, 인간이나 동물, 식물 같은 생명체에 한해서 신의 형상인 것으로 인정하는 제한적 범신론자인지, 인격신인 유일신을 믿으면서 하느님에게 의지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그는 주저주저하는 회의론자로서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지적 탐험가였으므로 탁월한 지성인이 되었고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배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생각했었다. 나는 시간이 훨씬 많이 흐른 다음 아마 불혹의 나이가 지났을 때쯤 (그때까지 죽지 않고 무난히 살아남는다면), 내가 지금 느끼고 겪었던 것들을, 영광과 환희는 없고 오욕으로 점철된 자화상을 회고하면서 글로써 풀어내야만 할 것이다. 내가 평생 동안 증오하는 인물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단 자신을 미화 과장하거나 또는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변명을 하지 않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극적인 가공 없이도 그 자체로 문학적 세련미가 조금은 돋보이는 글을……〕
그는 죽었지만 (그가 죽은 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온갖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으며 품격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동화 (玄東和)
전 재인도한인회장 (1932년생, 전쟁 발발 당시 18세.)
그는 함북 청진 출신으로 해방 후 38선 이북인 강원도 금화군 (현 철원군)에 정착했다. 부친이 여관을 운영해서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1949년 평양사동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다음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전쟁 발발 당시 제26 여단 소속 중위였는데 1950년 10월 말경 강원도 화천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현동화는 김경학의 위 논문에서는 선명수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그는 인도에서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으며 재인도 교민들을 대표하는 인도 한인회장이 되었다. 1남 1녀를 한국에 유학 보냈다. 2021년 2월 12일 89세로 별세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 살면서 남한을 동경했다. 열세 살 때 해방을 맞고 나서 북한에서 진행되었던 재산몰수 등 공산화 과정을 생생히 목격했다. 전쟁 중 고향 마을이 폭격을 당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당시 북에 있었던 어머니와 형제들은 살아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가 중립국 행을 택한 계기는 이념과 사상 때문이 아니었다. 멕시코에 가면 이웃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도 다니고 더 공부할 수 있겠다는 현실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인도를 거쳐 멕시코로 가서 전쟁 때 미군 폭격을 당해 입은 심한 상처의 후유증을 치료하고 학업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멕시코 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하자 동료 3명과 함께 인도에 정착한 것이다. (그때 반공청년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문명철 (1930년생, 전쟁 발발 당시 20세)
그는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넉넉하게 잘 사는 독실한 기독교도 가정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47년 무렵 모택동의 공산당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지주들과 자본가들, 정치인들을 무조건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무슨 죄목을 씌워 인민재판을 해서 사형을 집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본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부모님의 고향인 함경북도 웅진으로 탈출하였다. 20세 때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가을 인민군의 강제 징집으로 평양으로 끌려가던 중 미군 폭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빠져나왔지만 미군의 포로가 되어 원산 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미군 화물선에 실려 부산으로 내려와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당시 그는 민간인이었으므로 전쟁포로 (prisoner of war)가 아니었지만 미군은 막무가내로 전쟁포로로 취급했다. 몇 개월간 부산의 포로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복막염과 맹장염을 앓아 죽을 고생을 했다. 부산 동래에 있는 14육군 야전병원에서 미군 대령 계급의 병원장의 집도로 수술을 받아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다시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2년 6월경 포로 분류 심사에서 전쟁포로가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 인정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나와 영천의 반공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8월 27일 그는 인도군이 관할하는 판문점 중립지대로 이송되었다.
그들 일행은 이름과 번호를 확인한 후 한 천막에 약 50명씩 배치해서 수용되었다. 그 반공포로 수용소는 대한반공청년단과 지도부가 그들을 밤낮으로 감시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천막을 빠져나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영어를 잘하는 포로 통역관인 ‘미스터 리’가 찾아왔다. 그는 통역관이기 때문에 어느 수용소라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어?” 문명철이 대답했다. “중립국으로 가기로 했어.” “그래, 잘했어.” “그런데, 이 지옥같은 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이렇게 하자. 내일 이맘때 내가 이 천막으로 다시 올게. 그러면 자네는 조금 있다가 갑자기 배가 몹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때 내가 자네를 등에 업고 뛰면 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니 변함없이 새날이 밝아왔다. 문명철은 오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친구의 각본에 따라 연극을 해야만 했다. 친구의 등에 업혀 저 관객들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저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니 저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날 밤 9시, 미스터 리가 태연하게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일부러 큰 소리로 나누었다. 드디어 그가 눈으로 사인을 해주었고, 그 신호에 따라 그는 “배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정말 아픈 사람처럼 시늉했다. 복막염과 맹장염으로 아팠던 때를 기억하며 “아이구 배야. 아이구”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그 친구가 한 몫 거들며 말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야? 배가 아파? 자넨 전에도 복막염 수술을 받은 적이 있잖아. 그게 또 재발했나? 안 되겠는걸. 빨리 의무실로 가야겠네.”
인도군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 모인 포로들의 천막 숙소를 향하여 20분 동안 함께 걸어갔다.
문명철이 말했다. “자네도 나와 함께 중립국으로 가서 공부하세나” 미스터 리가 말했다. “나도 자네와 함께 가고 싶지만 중립국으로 가면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결혼을 해도 한국 여자와 해야 하는데 그곳에선 더 어려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여러모로 생각해보아도 나는 남한에 남아서 더 공부하고 그 다음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겠네.”
그는 인도에서 2년간 체류하다가 1956년 2월 브라질로 가 상파울루에 정착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신학석사, 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브라질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상파울루 메트로폴리탄 대학 교수, 상파울루 브라질 감리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참조. 짜우짜우는 포르투갈어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생 동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그는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고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다.
(인도에 도착한 한국인 포로 76명의 그 후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을 벗어난 것이다. 그들의 긴 이야기는 한수산, 〔「제3국으로 간 반공포로들의 그 후」, 1983, 마당〕과 백웅태, 〔「거제도에서 판문점까지」, 1987, 대원출판사〕, 김경학, 〔「중립국 인도로 간 반공포로」, 이 논문은 「전쟁과 기억」, 2005, 한울에 실려있다〕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7. 참고문헌
1차 자료와 2차 자료
장편소설 「판문점」을 쓰면서 참조한 참고문헌 중에서 1차 자료는 오세희 저「65포로수용소」,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 현동화 구술 정동현 씀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 송관호 6‧25 전쟁 수기 / 김종운 정리 「전쟁포로」,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 「76인의 포로들」, K.S. 티마야 씀 / 라윤도 옮김 「판문점 일기」, 인도 국방부 발간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백선엽 지음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고영근 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유엔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명의로 된) 한국 휴전 협정,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 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 일, 유엔군 대표단 수석 대표: 미국 육군중장 윌리엄 K. 해리슨 2세 명의로 된) 포로 교환 협정 (중립국 송환 위원회 위임 협약), (6.25 전쟁 발발 당시 관련 국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1949년 협약을 직접적으로 비준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발발 후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부터 1949년 제네바협약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전쟁포로 송환에 관한 1949년 제네바협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 북한 측 자료인 6.25 전쟁에 관한 「조국해방전쟁사」등이 있다.
2차 자료는 김학재 지음 「판문점 체제의 기원」, 조성훈 저 「한국전쟁과 포로」, 서동만 지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모니카 김 지음 / 김학재‧안중철 옮김 「심문실의 한국전쟁」, 하진 장편소설 / 왕은철 옮김 「전쟁 쓰레기 (War Trash)」, 정연선 지음 「잊혀진 전쟁의 기억」, 김동춘 지음 「전쟁과 사회」, 유중원 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국사편찬위원회 (1995)「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 (1950~1954)」등이 있다.
특히 1차 자료가 중요했는데 그중에서 (6‧25 전쟁 당시 공병 소좌로 인민군 전선사령부 공병 부부장이었는데, 1950년 9월 자진 투항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판문점의 포로 석방 심사 과정에서 제3국 인도를 선택한 주영복의)「내가 겪은 조선전쟁」과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심사 당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상 전쟁의 심판을 맡았던 인도 장군인 티마야의)「판문점 일기」,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를 주로 참조했다. 2차 자료 중에서는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포로」, 「심문실의 한국전쟁」이 중요했다. 사진은「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전쟁포로」「판문점 일기」「한국전쟁과 포로」등에서 옮겼다 〔이 사진들의 출처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 자료실의 ‘Korea War’ 파일이고 나는 재인용 한 것이다. 이 파일에는 수만 매의 사진 자료가 저장되어 있고 일정한 절차를 밟으면 누구든지 열람 복사할 수 있다〕.
소설일수록, 특히 역사소설일수록 참고문헌은 중요하다. 참고문헌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참고문헌은 일심동체이다. (그러므로 참고문헌은 인내하면서 차근차근, 무엇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읽는 일이 중요하다. 참고문헌을 읽고 해석할 때 함부로 자신의 선입견이나 습관 또는 취향을 개입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부 사항에 집착하여 시야가 좁은 방식으로 읽어서도 안될 것이다.) 보통 본문을 읽으면서 또는 본문을 읽고 나서 참고문헌을 참조하게 되지만 때로는 참고문헌을 먼저 읽으면 당해 소설을 깊이 있게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소설에서 참고문헌은 독자들이 소설을 잘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Intertextuality 또는 미하일 바흐친의
Interdependence
참고문헌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하거나 인용 원용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한 목록이다. 그것은 출처를 명시하고 논지의 타당성을 확보하며 표절 의혹을 방지하고 독자가 참고문헌을 직접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참고문헌을 참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텍스트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성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참고문헌은 본문 텍스트와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의 일부 형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연설과 저술에서 모방은 웅변술이나 작문 기술을 발달시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을 자유롭게 빌려 쓰는 것을 초기 상호텍스트성을 연구한 학자들은 ‘영향 이론 (influence theory)’이라고 불렀다. 이 영향은 모방, 오독, 패러디, 전승의 일부 차용, 또는 다른 텍스트에 대한 암시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이전의 텍스트가 이후의 텍스트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의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를 활용, 차용, 혹은 모방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담론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텍스트와 관습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일 바흐친은 텍스트들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바흐친은 모든 텍스트적 표현이 다성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텍스트가 이전 텍스트들과 현실이 지닌 다면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화성 (dialogicity)이라고 부르면서, 한 텍스트를 이전 텍스트들과 나눈 하나의 대화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화한 형태로 보았다. 바흐친과 크리스테바 두 사람이 말하는 상호텍스트성은 모두 텍스트와, 그에 앞서는 텍스트가 주는 영향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예술작품 또는 모든 학문적 업적에서 당해 작품은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재즈 앙상블은 평소에 함께 연주하던 사람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하면 재즈 앙상블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그날 하룻밤을 위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날 밤 공연이 끝나면 앙상블은 곧바로 흩어진다. 하지만 즉흥 연주(improvisation)는 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들의 상호 작용(interaction)에서 나온다. 그래도 앙상블과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일시적인 협업일지라도 그 결과물은 계속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악 작품은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작품이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 천재성을 개인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함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수많은 인간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나심 엘 카블리 지음/이나래 옮김,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참조)
미메시스(mimesis)는 자연이나 현실 세계를 모방, 재현, 표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똑같이 따라 하는 모사(摹寫)를 넘어, 대상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재창조하거나 인간이 학습하고 감각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긴 하다. 예술적 창작의 핵심 원리로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고 예술은 다시 현실을 모방한 것이므로 '가짜의 가짜'라며 비판적으로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며 배움의 원천이자 지식 습득의 과정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어쨌거나 예술은 모방, 재현, 도용, 표절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기존의 창작물을 차용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현대 예술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소설 (분단소설과 전쟁소설을 포함하여)을 많이 쓴다. 그들 소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텍스트성 또는 상호의존성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 「증언」, 「판문점」, 「인간의 초상」, 중편소설 「남과 북」, 「전쟁 부역자」, 「검은 그림자의 여인—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배신 혹은 전향」, 「외톨이 테러리스트」, 「시인의 죽음」, 단편소설 「쥐새끼 박멸 작전」, 「해무」등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스토리텔링이라는 소설성을 위해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문학성을 위해서, 독자들의 가독성과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짜깁기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들 소설의 상호텍스트성과 관련해서는 에세이인지 논문인지 알 수 없는「문학에서 잘라내기」참조〕
결론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에서 떼어놓고 읽기는 불가능하므로 이 텍스트들의 상호관계망에서는 어떤 텍스트도, 어떤 독자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 텍스트들의 관계는 인용, 원용, 도용, 행간에 숨기기, 패러디, 패스티쉬 (pastiche), 인유 (allusion), 모방 (mimicry)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텍스트들의 관계에 관한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담론에서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상호텍스트성은 이야기들의 세계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본문 너머의 넓고 큰 세계 (the world behind the text)를 엿보게 해준다. 그래서 참고문헌이 중요하고 그것과 본문 텍스트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므로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다. (장 프라수아 라신 등이 공동 집필한 논문 「성경의 문학비평」 참조.)
학술 논문과 소설
작가는 6.25 전쟁과 포로송환 문제를 큰 주제로 한 짧은 장편소설을 쓴 것일 뿐 학술 논문을 쓴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쓴 법학 관련 논문들이 내 소설의 참고문헌으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기는 했나?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내 소설과 법학 논문 (또는 전문서)은 차원이 다르다. (법학은 방대하고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역사는 불과 삼백년 남짓이고 그 전성기는 19세기였는데 벌써 그 전성기가 지나가 버렸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제 강점기 일본을 경유해서, 일본을 모방해서 도입되었으므로 겨우 백년 남짓이다.) 법학자로서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일과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이다. 논문과 소설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소설은 논문과는 다르게 사유하고 표현해야 하며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주제의 경우에도 탐구하는 영역이 완전히 딴판인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방법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문장과 문체, 단어, 스타일, 구조, 분위기,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참고문헌을 원용, 인용하는 방식 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소설의 경우 형식적이나마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들 참고문헌을 통해서 장편소설을 쓰는 데 필수적인 한국전쟁 관련 역사적 사건과 사실, 실재, 인물, 맥락 등을 나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소설이든 논문이든 고유한 텍스트는 처음과 중간, 결말이라는 완결성을 가져야 하고 (그래야만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있어야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은 논지의 제시가 중요하고 입증의 증거를 정교하게 제시해야 하며 반대의 견해를 논박할 수 있어야 한다. 논지의 명확성, 간결성, 논리적 일관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어떤 종류의 글은 형식과 내용의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논문은 형식이 아주 단순할 수 있다. (판결문이나 공소장처럼) 관습적으로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그에 맞게 짜맞춘다. 그러므로 논문 심사에서 형식이 문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장 역시 전문용어를 쓰므로 (부사나 형용사를 쓰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무미건조하고 단순 명쾌하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생동감이 없다.
반면에 소설은 미시적이어서 세심한 디테일과 그 디테일의 인과성이 중요하고 작중 인물의 주관성 (생각과 감정, 꿈과 기억 등)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문학적 세련미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언어적 기교가 필요하다. 작가 특유의 단어와 문장, 문체 스타일이 중요할 수 있다. 특히 예술지상주의가 문학적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 그걸 그렇게나 강조한다. 단어는 낯설고 화려한 춤을 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학적이거나 미학적 특질이 표현되어야 하므로 문장은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넘어서 찌글찌글하고 간지럽다.
그렇다면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는 각기 독특한 표현의 재료가 있다.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음악은 소리를, 무용은 몸짓을, 미술은 색채나 돌, 진흙 등을 가지고 각기 미적 감각을 표현한다. 이 중에서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의사 전달이나 생각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데 언어의 기능은 사회가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더욱 다양해졌고 그것이 말로 쓰이느냐 글로 쓰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일상적 언어는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정보적 기능과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표현적 기능, 행동이나 태도에 영향을 주는 지시적 기능 등이 주된 기능이다. 반면에 문학적 언어는 정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희곡은 무대를 배경으로 대화를 통하여,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단어, 문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서술과 묘사,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렇다고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특징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는 운율, 심상, 의미 어조 등에 의해서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함축된 형식에 의해 밀도 높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리얼리즘 소설에서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나는 많은 법학 관련 논문과 판례평석, 책들을 썼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학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소설을 쓰는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어쨌거나 법학 논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소설은 예술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난해한 전문용어 투성이 논문을 읽는 독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내가 많은 법학 논문과 판례평석, 법학 전문 책들을 열심히 써서 발표했지만 그걸 읽는 독자가 과연 몇 명쯤 될까?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공유하는 그들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문이건 소설이건 공적 논의의 장으로 나와야 된다. 21세기 대명천지 다원주의 사회에서 공개성의 원칙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독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건 논문이건 독자가 없다면 그건 무용지물이다. 나는 상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오직 좋은 작품과 성실한 독자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바이럴 효과(viral effect)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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