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잘라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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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잘라내기
cut-up technique
문학에서 잘라내기 기법은 기존의 텍스트를 무작위로 잘게 잘라 조합하여 새로운 텍스트로 다시 만드는, 우연성의 문학 기법 또는 창작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타인의 작품을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작품을 작가의 동의도 없이 제멋대로 잘게 잘라서 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표절 또는 명예훼손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잘라내기는 (종이에 인쇄되어 완성된) 텍스트에서 단어, 문구, 문장, 문단 등을 잘게 잘라내서 뿔뿔이 흩어지게 한 다음 즉흥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지그재그로 조합해서 독립적인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기존 작품 속에서 뺄 건 빼고 더할 것은 더하고 바꿀 건 바꿔가면서 스토리 라인을 어느 정도 줄이거나 확장시키거나 수정 보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잘라내기 기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참혹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1920년대 다다이즘적 풍경 속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시인 트리스탄 트라는 신문 기사에서 자른 단어들을 봉투 안에 넣고 무작위로 꺼낸 말을 사용해 시를 만들었다.
질 J. 보르만은 자신의 레트리즘 (Lettrism)적 창작의 일환으로 이 기법을 발전시켰고, 화가이자 작가인 브라이온 가이신은 이 기법을 사용하여 ‘Minutes to Go’라는 시를 썼다. 1977년 윌리암 S. 버로스와 브라이온 가이신은 이 창작 스타일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The Third Mind’를 출판했다.
비트 세대에 속하는 동성애자 소설가 윌리암 S. 버로스 (그래서 그는 런던 시절 남성 동성애자의 집합소로 유명해서 남성 매춘부들이 자주 나타났던 리젠트 팰리스 호텔 입구를 어슬렁거렸다) 는 텍스트를 잘라내서 분해한 뒤 재배치해서 새로운 소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문학 기법인 cut-up technique를 개발했다. 그가 소설에서 이 기법을 최초로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문학에서 잘라내기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무의미함의 의미’라는 다다이즘의 풍조 속에서 시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그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소설까지 확장되었는지는 그렇게 실제 쓰여진 소설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내가 이 기법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읽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이고 (2019년 경인가?) 그 후 계속 이 기법에 대해서 깊이 연구 할 기회는 없었다.
호주 시인 제임스 매컬리 (James Phillip McAuley)와 해럴드 스튜어트 (Harlod Frederick Stewart)는 어니스트 랄로 말리 (Ernest Lalor Malley)라는 가짜 시인을 발명해서 새로 나온 모더니즘 詩들을 한껏 조롱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말리를 자동차 정비공이자 보험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최근 사망했으며 문학 교육을 받지 않은았지만 탁월한 감수성으로 여러 편의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시를 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매컬리와 스튜어트는 예술 · 문학 저널인 ‘앵그리 펭귄 Angry Penguins’의 편집자 맥스 해리스를 속여 말리의 작품을 출판하고 가짜 시인이 그야말로 천재라며 환호를 보냈다.
그들은 어느날 오후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여러 책들과 콘사이즈 옥스퍼드 사전, 셰익스피어 전집, 명언 사전 등에서 단어와 문구들을 닥치는 대로 잘라내서 어니스트 말리의 비극적인 삶과 시 작품을 오후 한나절 만에 뚝딱 만들어 냈다.
그들은 책을 무작위로 펼쳐서 단어와 문구를 되는대로 고르고 잘라서 끄집어낸 것이다. 이런 단어와 문구들로 목록을 만든 뒤 뒤섞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문장을 엮어냈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틀린 인용문과 거짓 암시를 사용했다. 의도적으로 낯설고 좋지 않은 시구를 사용해서 이상한 리듬 박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 문학 사기꾼들은 존재하지 않는 유명인의 인용구를 만들어서 말리의 시에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너에게 혹독했다, 내 형제여,
이미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을 때
이 시들에는 부분적으로 표절도 있었다. 그들의 ‘전시로서의 문화 Culture As Exhibit’라는 詩의 첫 세 줄은 ‘모기 번식지의 배수에 대한 미국 보고서’를 그대로 잘라내 베낀 것이다.
“늪, 습지, 구덩이, 기타
물이 고인 지역은
번식지의 역할을 한다”
이제 나는 당신을 찾았다, 나의 아노펠레스!
어니스트 말리 사기는 영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 허버트 리드 (Herbert Read)를 비롯한 문학계의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이 사건은 수십 년 동안 호주의 모더니즘 詩의 전통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앵그리 펭귄’은 몇 년 뒤 폐간했고 편집자 맥스 해리스는 말리의 詩에 있는 음란한 내용을 출판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 가짜 시인 말리의 詩 작품은 정당한 초현실주의 시로 인정되어 명성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리의 詩는 스튜어트와 매컬 리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내놓은 詩들보다 더 널리 읽히고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김영사, 「당신이 속는 이유」제6장 ‘어디서 보고 들은 것 같은 친숙함’ 참조)
‘들숨에 키스, 날숨에 이혼’ 넷플보다 비싼 100초 드라마
‘숏폼 드라마’가 전 세계 콘텐트 플랫폼 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스토리 자체가 지극히 단순하고 짧아서 ‘들숨에 키스하고 날숨에 이혼’하는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는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0813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단단익선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음)’, 새해 달구는 짧은 콘텐츠 전쟁. ‘길면 죽는다. 짧아야 산다.’ 콘텐트를 다루는 산업계에 떨어진 특명이다. 최근 10~30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짤막한 분량 이른바 쇼트 텐트 (short+content) 소비가 급증한 반면 긴 분량의 롱 텐트 (long+content) 소비는 급감한 이유이다. 그래서 롱 텐트인 웹툰과 웹소설은 둔화되고 네이버 검색창에는 숏 텐츠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6713)
이러한 소비 추세라면 詩는 얼마나 더 짧아져야 하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아니면 모든 게 짧을 대로 짧아지면서 모든 게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문학에서 잘라내기 (cut up)는 거의 전부 詩 쓰기에서 일어났었다. 모더니즘 시를 어설프게 흉내내면서. 산문의 경우에는 그런 식은 도대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산문의 경우 시간의 흐름, 공간적 배경, 리얼리티의 구체성이 필수적이고 인과관계의 연쇄와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무의미한 방식으로 산문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시 소설성 또는 산문성이란 무엇인가? 서사성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散文은 짧은 시들의 화려한 반짝임, 형식주의, 운문의 외형적 규범, 비현실적인 것, 낭만주의적 정신을 배제한다. 산문은 현실주의적이고 날카롭게 비판적이고 자유롭다.
자유로운 글을 쓰려는 필자는 산문 정신이 투철하다면 심연에 닿기 위해서 (지루하고 빈약하고 핏기 없는 글을 피하기 위해서) 한없이 깊이 들어가 쓰고 또 쓰고 수정하고 수정 보완해야 한다. 산문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써야 한다.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방식의 시 쓰기는 詩를, 시의 본질을, 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타락시키는 것이고, 시를 잡문 쓰레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2천여 년 전에 호라티우스는 詩論에서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했고, 투르게네프는 ‘시는 신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시가 있다.’라고 했고, 에머슨은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고 했고, 셸리는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했고, 볼테르는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라고 했고, 클로델은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고 했고, 이광수는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의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함석헌은 ‘시란 곧 참이다’라고 했고, 박두진은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라고 했고, 조지훈은 ‘시란 지 · 정 · 의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 한 것이다.’라고 했다.
AI 시대에는 AI가 시인이 되어서 그런 식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리듬 박자도 제멋대로인 짧디 짧은 시를 마구잡이로 쓸 것이다. 그들은 뚝딱 (다시 말하면 몇 초 또는 몇 분 사이에) 수백 편, 수천 편, 수만 편의 시를 찍어낼 수 있다. (시인이란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라고 했는데) 이제 인간 시인은 사라질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듣는 이의 영혼을 하늘 높이 올려주는) 진정한 시도 더 이상 창작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훨씬 이전부터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이브라함과 만수라의 사랑과 귀향에 필요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발췌해서 잘라내고 재배치하여 새로운 단편소설(귀향 歸鄕)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 기법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다만 「사하라」가 품고 있는 수많은 주제 가운데서 묻혀버리기 쉬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와 사막에 대한 향수와 귀향 문제를 주제적 차원에서 확장하고 심화시켜서 부각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방식처럼 우연히 무작위적으로 분절돼서 튀어나온 파편들을 주워 모아 맞춰보는 식이 아닌 것이다. (산문성에 관하여 전술한 것처럼 내 소설은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나는 그들만큼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나는 시를 쓸 줄도 모르므로 시인이라고 자처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모더니즘 시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작품과 의절 (cut-off) 한 게 아니라 이미 발표한 작품이라도 잊지 않고 계속적으로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 보완한다. 불안 강박에 시달린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언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임종의 순간까지 계속 수정 보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재료를 검토하고 조금씩 변주하고 수정 보완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내 소설들에서는 언제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나는 기존에 쓴 글들(소설이든 에세이든 학술 논문이든 간에)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해석 재해석하면서 자체 검열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무언가 고칠 부분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완벽에 대한 집착이 원흉이다. 그게 스토리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수정하면 할수록 달라보인다. 당연히 더 나아 보인다. 나는 어떤 작품이건 간에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장편소설들을 의식적으로 분해해서 어떤 특정한 주제, 인물, 에피소드, 장면을 잘라낸 다음 중 · 단편소설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에서 스토리의 전개와 관련하여 균형 감각 역시 중요하므로 혹은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빠질 수도 있는 부분을 잘라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부분을 분리 독립해서 디테일을 추가하고 스토리텔링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것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는 신화, 전설, 서사시를 비롯해서 소설의 본질은 storytelling이다. 그것도 의미가 충만한 재밌는 이야기여야 한다. 특히 장편소설은 긴 이야기여야 하므로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강력하고 밀도 있고 내용이 풍성한 줄거리가 중요하다. 형식보다 주제와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소설의 형식은 잡설에 가까울 만큼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껍데기일 수도 있다.
그 줄거리는 아주 많은 잔가지를 뻗어나가게 한다.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또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나아가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짜여 나가면서 주제가 생기거나 혹은 당초 의도했던 주제가 변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확실한 끝맺음이 중요하다. 결말은 소설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 결말에서 (그 결말이 흔해빠진 통상적인 대단원이라고 해도) 소설의 힘이 생기면서 강력한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기본 구조는 먼저 시간적 배경과 장소적 배경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소설이 안정되고 탄탄해진다. 역사소설의 경우에는 시대적 배경과 상황, 시대정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장소성 역시 중요하다.
장편소설의 경우 장소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고 시간적으로는 때로는 몇 세대에 걸칠 만큼 매우 길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이 중요할 수 있다. 계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가끔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간 잠깐 졸거나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서 혹은 지칠 대로 지쳐서 눈앞이 캄캄해서) 주제와 동떨어지고 느슨하고 형체가 불분명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작가가 미궁에 빠져 한없이 헤매게 된다.
장편소설 쓰기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수개월, 수년에 걸쳐 장편소설을 쓸 때는 한없이 헤매면서 쓸데없는 상상, 공상, 몽상, 망상에 빠져든다. 그래서 지루하고 멍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의 방랑 (wandering of mind)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한 과정에서 Writer’s Block에 부딪혀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을 허송할 수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일시적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잃게 된다. 결국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이야기를 쓰다가 지치면 활력과 흥미가 재충전될 때까지 글쓰기를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몇 달 동안 내팽개쳐 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면 구성과 플롯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작품을 다시 수정하거나 여기저기 세부사항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작품을 포기한 게 아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교하고 균형 잡힌 스토리가 되도록 전체를 통합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서 독립시키는 것이다.
나는 풍부한 생각과 감정을 통해서 소설 속에서 인물과 사물, 사건의 의미, 본질을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주의자이다.
그러므로 공허한 추상주의자가 아니라 정확하고 세밀하게 디테일을 추구하는 리얼리스트가 되고자 한다. 소설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작품은 현실과 멀어질수록 생명력을 상실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글에서도 써야 하는 것은 모두 써야 하고 쓸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쓴다. 다시 말하면 필요한 것은 충분히 쓴다. 그래야만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극사실주의자나 슈퍼사실주의자 (super-realist)는 아니고 맥시멀리스트로 자처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극도로 축소되고 압축된 스타일인 미니멀리즘은 정말 불편하다. 나는 미니멀리즘을 서사 능력이 부족한 또는 필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쓰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21세기 大明天地다. 컴퓨터, 이메일, 인터넷, 스마트폰, SNS, AI 시대이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카카오, 네이버 같은 플랫폼들이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짧은 동영상인 쇼트 폼에 광적으로 열광한다. 그래서 온갖 지식, 정보, 루머, 광고, 가설, 이론, 궤변이 끊임없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까 미니멀리즘은 (그런 것들이 21세기 대명천지인 지금 세상에 등장하기 전) 그 옛날, 근 반세기 전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유행한 문학적 기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서 주제, 인물, 배경, 스토리 라인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빠져버린다면 그래서 이야기의 뼈대만 남게되어 건조하고 단순화되어 버린다면 심오한 소설적 깊이와 미적, 정서적 감각, 문장의 밀도, 질감이 사라져버린다. 그건 소설이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짓이다. 예술은 예술이 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소설적 기교, 문학성, 풍부한 상상력, (형식과 내용을 포함한 소설 쓰기에서) 과감성 등을 대부분 포기해야만 한다. 소설에서 서정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 문장의 리듬이 배제된다면 어떻게 심미적 감각을 살릴 수 있겠는가.
3인칭 全知的 視點 (또는 觀點) 소설에서는 스토리 전개에 매몰된 나머지 話者 (또는 서술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누군가 ‘3인칭이란 인칭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다시 말하면 소설 속에서 전지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뚜렷하게 의식되지 않아서 소설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지만 독자는 그게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리얼리스트 작가가 쓰는 리얼리즘 소설에서 (비개인적이고 비인칭적인) 객관적인 묘사(서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회 비평적 리얼리즘 소설을 쓰기 때문에 작가의 관점에서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장편소설에서는 (괴테가 일찍이 세계문학을 주창하면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시대상, 풍토, 상황, 민족성이나 지역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본성을 현현한 보편적인) 큰 주제에 딸린 작은 주제들이 매번 등장하는 여러 장면들과 맥락이 이어지는데 이때 어느 정도 안정과 균형이 필요하다. 그렇게 장면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인물들과 사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논리적이면서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장편 영화의 경우 장면이 40~80개 정도 나오지만 장편 소설에서는 그보다 두 세배 넘게 크고 작은 장면이 등장하게 된다)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허구 세계(fiction)는 독창적이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에는 그 본질적 속성으로 개연성과 핍진성,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리얼리스트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소설이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스토리 라인을 특정한 역사적 실재, 인물, 사건의 맥락 속에 집어넣게 된다. 그러면 독자들은 당해 소설이 품고 있는 핵심과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정서적 힘에 이끌려서 어떤 지적 감동, 즐거움과 만족감, 정신적 혼란과 떨림 같은 복합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독자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처음과 중간, 끝이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는 강렬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쓰는 글에서 ‘총량 불변의 법칙’을 신봉한다. 반드시 써야만 하는 일정량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균형이 깨지면 어쩌나 하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다시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충분히 말해야 하는 것과 너무 많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멈춰야 할 순간을 잘 알지 못한다. 스토리의 진행에 기여하지 않는, 부사와 형용사의 오남용에 의한 과잉 묘사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다. 글 속에서 한없이 헤매인다. 그러면 소설의 문맥 속에서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혹은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라는 중요한 핵심을 찾아낼 수 없다.)
종이책의 발간은 여간 어렵고 성가신 일이 아니다. 나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무수히 거절을 당했다. 그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입에 발린 몇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속내는 지금 팔릴만한 책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양심도 없고 예의가 없다. 참으로 무지막지하다. 작가가 열과 성을 다하여 애써 쓴 작품을 무시한다. 거의 예외 없이 왜 거절을 하는지 그 이유를 짧게라도 회신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체 가타부타 답신을 보내지 않는다.)
특히 장편이건 단편이건 분량이 많으면 무조건 손사래를 쳤다. 가뭄에 콩 나듯이 단편소설의 원고를 청탁받으면 어김없이 매수 제한을 한다. 그러므로 충분히 쓸 수 없다. 나중에 수정 보완하거나 별도로 일부를 쪼개고 분리해서 후속 작품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지금’은 100년, 즉 한 세기를 말하고, ‘여기’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에코토피아를 포함한) 전 세계 지구촌을 아우르고, ‘우리’는 인종과 지역, 민족,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를 초월한 모든 인간을 말한다.
첫 장편소설 「사하라」는 최초 종이책으로 출판하였을 때는 330쪽에 불과하였지만 공간적 배경과 에피소드와 인물들과 주제를 추가하여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750~800쪽까지 불어났다.
그래서 주제들은 희미해지면서 문맥이 끊어졌고 스토리텔링은 지지부진하면서 길을 잃어버렸다. (이 大河 소설에서는 소설의 구조와 내적 논리에 따라 얽히고설킨 중심 플롯에서 파생된 남녀 간 사랑과 관련한 4개의 삼각관계를 포함해서 여러 하위 플롯 때문에 1,000여 개가 넘는 많은 장면이 나오게 된다.)
소설에서 공간(space) 또는 장소(place)는 소설의 척추가 되므로 아주 중요하다. 공간과 장소를 굳이 구별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공간은 너무 넓고 막연해서 특정하기가 곤란하고 장소는 좁아서 지리적으로 특징 지어진 작은 공간으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특별한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가진 장소에 깊은 애착이나 애증을 느끼면서 관련 지식이나 기억을 축적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관점에서 견고하게 뿌리가 박힌 장소 감각 혹은 장소성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하라」의 공간적 혹은 장소적 배경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아우르는 아주 방대하다. 그래서 대하 소설이다. (특히 사막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소설의 핵을 구성하고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탈영토적이고 지역주의 (regionalism)나 로컬리즘(localism)을 벗어났다. (벌교, 남쪽 바다, 부산, 서울, ㈜ 공간, 파리, 센강, 퐁데자르 다리, 리비아, 트리폴리, 프라하,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스페인 그라나다, 타클라마칸 사막, 세렝게티 평원, 멕시코 유카탄 반도, 엘도라도, 보르네오 섬, 오코방고, 젠네 등은 김규현의 장소이고, 사하라 사막, 타만라세트, 알제리, 알제, 마라케시, 페스, 카사블랑카, 통북투, 아라비아 반도, 지중해, 마르세유, 엘우에드, 크레타 섬,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등은 이브라함의 장소이고, 베트남, 빈롱, 투루빌, 파리, 소르본 대학, 생라자르 역, 1940년 프랑스가 패망할 무렵의 서부전선, 드레스덴의 포로수용소, 사바나, 탕헤르, 케이프타운,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자크의 장소이다.
시대적으로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걸쳐있다.
그 시기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공산주의 악의 제국이었던 구 소련이 해체되는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국내적으로는 그 시기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으므로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 사건들이 분출했다.
80년대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여름 그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 일에 걸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이르렀다. 1986년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권인숙 양은 주민등록증을 변조 위장취업한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성적 모욕과 폭행을 당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었고 그해 6월항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1988년 가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공사 1단계 사업은 1984년 착공되어 1995년 2월 준공되었고 2단계 사업은 2005년 6월 준공되었다.)
그 소설에서 작가는 극단적인 flashback 기법으로 세 주인공 인물의 인생행로를 조명하면서 [여행, 귀향, 사막, 사하라, 티베트, 낙타, 투아레그, 주술사, 종교와 신의 문제, 무슬림과 코란, 성경, 유신론과 무신론, 김규현은 건축가이므로 건축의 문제, 삼각관계의 사랑과 이별, 성적 욕망, 예술가의 초상, 죽음과 자살, 운명 혹은 숙명, 無相, 無常, 無想, 전쟁(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부족전쟁 등),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아프리카와 반식민주의 운동, HIV/AIDS, 삼인칭 전지적 시점과 화자 같은] 방대한 테마를 다루지만, 세 사람은 독립된 독자적인 주체로서 제각기 목소리가 (복수의 성부로 구성되어 각각 독립된 선율과 리듬을 갖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대립하고 화합하는) 음악의 대위법처럼 교차하고 결합하므로 텍스트는 당연히 단성적이 아니라 多聲的 (polyphony)인 것이다.
김규현은 극동에서 온 동양인이고 최고 명문 대학인 S대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온 벌써 유명한 건축가이지만 이브라함은 멸종위기에 처한 사하라 사막의 소수민족인 투아레그인이고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밀입국자이다.
자크(Jacques Rivérare)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보내졌지만 친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그는 1940년 서부전선에서 괴멸하는 프랑스 보병연대 소속 사병으로 복무했다. 언제나 유색인종으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왔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방랑했다. 하지만 마르세유 시절 이브라함을 만나서 아버지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김규현과 이브라함 간에는 인종적, 계층적, 환경과 지역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에서는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똑같이 이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탈수증으로 죽어가면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모든 차이를 초월한다.
장편소설「사하라」에서 인물들의 대화 혹은 독백, 침묵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독백 역시 작중 인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대화이지만 연극에서 모놀로그처럼 청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화성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청자는 어떨 때는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alter ego일 것이다.) 침묵에 관해서 ‘말해서 후회한 적은 자주 있어도 침묵을 지켜서 후회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했으니까 침묵의 대화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뭐라고 너에게 말해야 할까?
침묵보다 더 좋은 말이 있겠는가?
나는 눈을 딱 감고 600여 쪽 남짓에서 종결했다.
그래도 그 범위 내에서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종이책 출판을 완전히 포기했다. 이 새로운 버전은 내 블로그에 실려있다.
(https://blog.naver.com/jungwon4760/222747311815)
그리고 분리 독립되어 잘라낸 부분은 디테일을 추가하고 수정 보완하여 단편소설로 넘겨졌다.
(「사하라」에서는 단편 ‘바다’, ‘나는 걷는다’, ‘배반의 장미’, ‘낙타’, ‘파리의 이별’, ‘시인 혹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남자’, ‘마르세유’, ‘하딤 마흐메드’, ‘사하라 사막의 남쪽’, ‘카사블랑카’, ‘젠네의 대사원을 찾아서’, ‘결별의 기억’ , ‘라이언킹’, ‘강물은 흐른다’, ‘예술가의 초상’, ‘호모에렉투스’, ‘침묵의 노래’, ‘티베트 기행’, ‘신의 은총’, 중편소설 ‘달빛 죽이기’, 에세이 ‘에덴동산의 탈출 (혹은 인간해방)’, ‘오디세우스 (의 영원한 여정)’, ‘애니멀 킹과 호모사피엔스’, ‘신은 누구인가?’, ‘나는 무신론자인가?!’,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으로의 여행’ 등이, 「광화문광장」에서는 ‘그해 겨울’, ‘진실과 왜곡 – 영화 1987’, ‘1987년 7월 5일’, ‘광화문광장’ 등이, 「인간의 초상」에서는 ‘소총수들’, ‘내 고향’, ‘어느 일등병의 비망록’, ‘빈롱으로 가는 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영현병 김재수 하사’, ‘매복 작전’ 등이, 미발표 장편소설 (가제) 「증언」에서는 ‘쥐새끼 박멸작전’, ‘해무’, ‘두만강’, ‘대화와 설득’, ‘고정간첩’ 등이 분리 독립 되어서 독자적인 완성체로 등장할 수 있다.)
소설에는 흔히 ‘작가의 말’이 後記처럼 붙어있고, 번역 소설에는 ‘번역자의 말’이나 작품 해설, 역주, 해제라는 부속품이 붙어있고, 책이 잘 팔리도록 혹은 아주 잘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 표지나 뒷표지를 디자인하면서 텍스트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나 추천의 글을 넣기도 하는데 이것을 파라텍스트(paratext)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 단편소설은 원래의 텍스트에서 분리되어있긴 하지만 상호텍스트(intertext)라는 관점에서 읽기 쉬움(readable)과 가독성, 세밀한 독해를 도와준다는 의미로 파악한다면 파라텍스트라고 할 수도 있다.
한 편의 소설이 발표되고 출판까지 됐다고 하여 작품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은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완성은 불가능하다. 작가가 살아있건 사후이건 간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작품을 해체하여 독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재조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대단한 작품이라도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죽음’ 이론이고 독자의 텍스트 참여와 독자에 의한 텍스트의 의미 재생산이라는 독자수용 이론 (Reader response theory)이다.
그럴 경우 새로운 작품의 분리 독립은 불가피하다.
나는 항상 내 소설은 물론이고 다른 소설에 있어서도 작중 인물의 그 후가 매우 궁금하다. 그들은 그 후 어떤 인생역정을 걸어갔을까. 그들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주인공인 작중인물 김규현과 그의 아내 심현숙은 헤어졌고 김규현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여행 중 탈수증으로 죽었는데(사망진단서에서 self-murder라고 되어있지만), 그들(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은 어떻게 다시 만나서 해후하고 화해하였는가? 그걸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문을 열고 집을 떠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19세기 북유럽의 사회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엄혹한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없이 추락했거나 (또는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했거나, 자존심이 무척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바로 돌아와서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을 것이다. 도저히 엄격한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인 완고한 사회에서 여성이 독립해서 자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아주 무책임했다고 할 수 있다. 노라를 제멋대로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승옥 작가의 옛날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주인공들의 그 후가 너무 궁금해서 ‘무진기행, 그 후’를 썼다. 작중 인물인 윤희중(또는 윤기중)과 상대역인 음악 선생님 하인숙 (본명 金惠淑), 고시에 합격하고 세무서장이 된 조성식, 국어 선생님 박치순과 그 아내 등의 인생행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영화 (노인시설에서 한 젊은이의 총격에 의한 집단사살 그리고 이어지는 자살로 시작되는) ‘플랜 75’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신인 감독 5인과 함께 만든 2019년 옴니버스 영화 ‘10년’의 다섯 편(‘플랜 75’, ‘장난꾸러기 동맹’, ‘데이터’,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라’) 중 한 작품을 분리 독립해서 장편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그 후 それから」의 제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후’이다. 「산시로」에서는 어떤 대학생에 대해서 썼는데, 이 소설은 그 후에 대해서 썼기 때문에 ‘그 후’이다. 「산시로」의 주인공은 단순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다음 단계의 인물이어서 이 점에서도 ‘그 후’이다. 이 주인공은 마지막에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그 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 후’이다.”
나는 내 소설의 작중 인물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누구든지 정중히 대했으므로 언제나 내 마음속에 엄연히 살아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연결망에 묶여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 속 배역보다 훨씬 더 심오한 존재들이다. 그저 배경을 채우는 단순한 엑스트라 이상의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스토리텔링 이후인 그들의 그 後가 말할 수 없이 궁금해서 그들의 인생행로가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탐색했고 그래서 ‘인물들의 에필로그’를 썼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그때 다른 선택을 하였다면 운명이 어떻게 엇갈리고 따라서 이야기가 어떻게 변주되면서 결론이 달라졌을지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결론을 해피 엔딩이나 새드 엔딩으로 바꾸는 것 말이다.
지금은 컴퓨터와 문서 작업의 비약적 발달로 잘라내기인지 쪼개기인지 모방인지 변주인지 아주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다. 쪼개고, 잘라내고, 이리저리 옮겨서 이어붙이고, 추가하고, 그래서 스토리를 원하는대로 개조하고 주제를 바꾸고 결론을 바꿀 수 있다.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서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대로 스토리 전개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interactive movie가 나왔으니, 넷플릭스는 최근 새 장편 TV영화 ‘Black Mirror; Banders natch’를 공개했는데 시청자들이 이 영화를 시청하면서 중간 중간에 스토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스토리 전개 중에 나온 제안을 수락하는지, 거절하느냐에 따라 다음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5가지 다른 결말을 도출할 수 있다. 심지어 영화의 배경음악인 original sound track도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독자가 아무리 잘라내서 재조립하는 경우에도 그걸 공개적으로 발표하려면 어느 정도 경계선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뼈대만 남길 것인지, 주제를 비트는 정도에서 디테일만 바꿀 것인지, 그럴 경우 모방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오마주 또는 패러디의 한계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표절의 의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 우리는 (그 개념이 너무 넓어서 논자에 따라 달리 사용되기는 하지만)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기반한 국민문학 (또는 민족문학)에서 탈피해서 세계문학에 편입해야 할 것이다.
괴테는 벌써 200년 전인 1827년 세계문학의 개념을 설파했고 그 이십 년 후인 1847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세계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이다. 21세기 大明天地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포스트 내셔널리즘, 포스트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 또는 안티 휴머니즘, 에코크리티시즘, 에코코스모폴리타니즘 (eco-cosmopolitanism)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나라 자본과 기업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은 일본, 캐나다, 영국, 미국으로 진즉 진출했고, 삼진식품은 부산 봉래시장에서 솥단지 건 지 70년 만에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이어 호주에도 어묵 베이커리 매장을 열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LG전자의 가전제품, 현대 기아차 그룹의 자동차 등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k-culture, k-food도 해외로 나갔다.
우리 문학은 국경이 무의미해진 지금 자폐적이고 일면적이고 편협한 한민족의 민족주의 또는 한반도의 지역주의라는 낡은 울타리를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안과 밖, 주체성과 타자성,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이항 대립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소수 문학(minor literature)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우선 작품 속 세계의 지평을 제한 없이 넓혀야 한다.
예술은 무한이고 영원이고 초월이다.
원작자와 번역자의 관계에서 번역이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생성형 AI가 일정 부분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노화와 질병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나 백 세까지 사는 게 아니다. 그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문학적 글을 쓰는 작업에 흥미를 잃고 산만해지고 고통을 느끼고 있다. 장인정신은 사라지고 있다.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완벽주의는 어불성설이다.
오랜 시간 길을 더듬기만 했다.
cut-up technique
문학에서 잘라내기 기법은 기존의 텍스트를 무작위로 잘게 잘라 조합하여 새로운 텍스트로 다시 만드는, 우연성의 문학 기법 또는 창작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타인의 작품을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작품을 작가의 동의도 없이 제멋대로 잘게 잘라서 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표절 또는 명예훼손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잘라내기는 (종이에 인쇄되어 완성된) 텍스트에서 단어, 문구, 문장, 문단 등을 잘게 잘라내서 뿔뿔이 흩어지게 한 다음 즉흥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지그재그로 조합해서 독립적인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기존 작품 속에서 뺄 건 빼고 더할 것은 더하고 바꿀 건 바꿔가면서 스토리 라인을 어느 정도 줄이거나 확장시키거나 수정 보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잘라내기 기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참혹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1920년대 다다이즘적 풍경 속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시인 트리스탄 트라는 신문 기사에서 자른 단어들을 봉투 안에 넣고 무작위로 꺼낸 말을 사용해 시를 만들었다.
질 J. 보르만은 자신의 레트리즘 (Lettrism)적 창작의 일환으로 이 기법을 발전시켰고, 화가이자 작가인 브라이온 가이신은 이 기법을 사용하여 ‘Minutes to Go’라는 시를 썼다. 1977년 윌리암 S. 버로스와 브라이온 가이신은 이 창작 스타일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The Third Mind’를 출판했다.
비트 세대에 속하는 동성애자 소설가 윌리암 S. 버로스 (그래서 그는 런던 시절 남성 동성애자의 집합소로 유명해서 남성 매춘부들이 자주 나타났던 리젠트 팰리스 호텔 입구를 어슬렁거렸다) 는 텍스트를 잘라내서 분해한 뒤 재배치해서 새로운 소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문학 기법인 cut-up technique를 개발했다. 그가 소설에서 이 기법을 최초로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문학에서 잘라내기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무의미함의 의미’라는 다다이즘의 풍조 속에서 시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그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소설까지 확장되었는지는 그렇게 실제 쓰여진 소설들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내가 이 기법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읽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이고 (2019년 경인가?) 그 후 계속 이 기법에 대해서 깊이 연구 할 기회는 없었다.
호주 시인 제임스 매컬리 (James Phillip McAuley)와 해럴드 스튜어트 (Harlod Frederick Stewart)는 어니스트 랄로 말리 (Ernest Lalor Malley)라는 가짜 시인을 발명해서 새로 나온 모더니즘 詩들을 한껏 조롱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말리를 자동차 정비공이자 보험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최근 사망했으며 문학 교육을 받지 않은았지만 탁월한 감수성으로 여러 편의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시를 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매컬리와 스튜어트는 예술 · 문학 저널인 ‘앵그리 펭귄 Angry Penguins’의 편집자 맥스 해리스를 속여 말리의 작품을 출판하고 가짜 시인이 그야말로 천재라며 환호를 보냈다.
그들은 어느날 오후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여러 책들과 콘사이즈 옥스퍼드 사전, 셰익스피어 전집, 명언 사전 등에서 단어와 문구들을 닥치는 대로 잘라내서 어니스트 말리의 비극적인 삶과 시 작품을 오후 한나절 만에 뚝딱 만들어 냈다.
그들은 책을 무작위로 펼쳐서 단어와 문구를 되는대로 고르고 잘라서 끄집어낸 것이다. 이런 단어와 문구들로 목록을 만든 뒤 뒤섞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문장을 엮어냈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틀린 인용문과 거짓 암시를 사용했다. 의도적으로 낯설고 좋지 않은 시구를 사용해서 이상한 리듬 박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 문학 사기꾼들은 존재하지 않는 유명인의 인용구를 만들어서 말리의 시에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너에게 혹독했다, 내 형제여,
이미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을 때
이 시들에는 부분적으로 표절도 있었다. 그들의 ‘전시로서의 문화 Culture As Exhibit’라는 詩의 첫 세 줄은 ‘모기 번식지의 배수에 대한 미국 보고서’를 그대로 잘라내 베낀 것이다.
“늪, 습지, 구덩이, 기타
물이 고인 지역은
번식지의 역할을 한다”
이제 나는 당신을 찾았다, 나의 아노펠레스!
어니스트 말리 사기는 영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 허버트 리드 (Herbert Read)를 비롯한 문학계의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이 사건은 수십 년 동안 호주의 모더니즘 詩의 전통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앵그리 펭귄’은 몇 년 뒤 폐간했고 편집자 맥스 해리스는 말리의 詩에 있는 음란한 내용을 출판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 가짜 시인 말리의 詩 작품은 정당한 초현실주의 시로 인정되어 명성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리의 詩는 스튜어트와 매컬 리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내놓은 詩들보다 더 널리 읽히고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김영사, 「당신이 속는 이유」제6장 ‘어디서 보고 들은 것 같은 친숙함’ 참조)
‘들숨에 키스, 날숨에 이혼’ 넷플보다 비싼 100초 드라마
‘숏폼 드라마’가 전 세계 콘텐트 플랫폼 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스토리 자체가 지극히 단순하고 짧아서 ‘들숨에 키스하고 날숨에 이혼’하는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는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0813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단단익선 (짧으면 짧을수록 더 좋음)’, 새해 달구는 짧은 콘텐츠 전쟁. ‘길면 죽는다. 짧아야 산다.’ 콘텐트를 다루는 산업계에 떨어진 특명이다. 최근 10~30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짤막한 분량 이른바 쇼트 텐트 (short+content) 소비가 급증한 반면 긴 분량의 롱 텐트 (long+content) 소비는 급감한 이유이다. 그래서 롱 텐트인 웹툰과 웹소설은 둔화되고 네이버 검색창에는 숏 텐츠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6713)
이러한 소비 추세라면 詩는 얼마나 더 짧아져야 하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아니면 모든 게 짧을 대로 짧아지면서 모든 게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문학에서 잘라내기 (cut up)는 거의 전부 詩 쓰기에서 일어났었다. 모더니즘 시를 어설프게 흉내내면서. 산문의 경우에는 그런 식은 도대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산문의 경우 시간의 흐름, 공간적 배경, 리얼리티의 구체성이 필수적이고 인과관계의 연쇄와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무의미한 방식으로 산문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시 소설성 또는 산문성이란 무엇인가? 서사성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散文은 짧은 시들의 화려한 반짝임, 형식주의, 운문의 외형적 규범, 비현실적인 것, 낭만주의적 정신을 배제한다. 산문은 현실주의적이고 날카롭게 비판적이고 자유롭다.
자유로운 글을 쓰려는 필자는 산문 정신이 투철하다면 심연에 닿기 위해서 (지루하고 빈약하고 핏기 없는 글을 피하기 위해서) 한없이 깊이 들어가 쓰고 또 쓰고 수정하고 수정 보완해야 한다. 산문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써야 한다.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방식의 시 쓰기는 詩를, 시의 본질을, 시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고, 타락시키는 것이고, 시를 잡문 쓰레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2천여 년 전에 호라티우스는 詩論에서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했고, 투르게네프는 ‘시는 신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시가 있다.’라고 했고, 에머슨은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고 했고, 셸리는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했고, 볼테르는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라고 했고, 클로델은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고 했고, 이광수는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의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함석헌은 ‘시란 곧 참이다’라고 했고, 박두진은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라고 했고, 조지훈은 ‘시란 지 · 정 · 의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 한 것이다.’라고 했다.
AI 시대에는 AI가 시인이 되어서 그런 식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리듬 박자도 제멋대로인 짧디 짧은 시를 마구잡이로 쓸 것이다. 그들은 뚝딱 (다시 말하면 몇 초 또는 몇 분 사이에) 수백 편, 수천 편, 수만 편의 시를 찍어낼 수 있다. (시인이란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입법자라고 했는데) 이제 인간 시인은 사라질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듣는 이의 영혼을 하늘 높이 올려주는) 진정한 시도 더 이상 창작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훨씬 이전부터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이브라함과 만수라의 사랑과 귀향에 필요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발췌해서 잘라내고 재배치하여 새로운 단편소설(귀향 歸鄕)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 기법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다만 「사하라」가 품고 있는 수많은 주제 가운데서 묻혀버리기 쉬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와 사막에 대한 향수와 귀향 문제를 주제적 차원에서 확장하고 심화시켜서 부각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방식처럼 우연히 무작위적으로 분절돼서 튀어나온 파편들을 주워 모아 맞춰보는 식이 아닌 것이다. (산문성에 관하여 전술한 것처럼 내 소설은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나는 그들만큼 담대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나는 시를 쓸 줄도 모르므로 시인이라고 자처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모더니즘 시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작품과 의절 (cut-off) 한 게 아니라 이미 발표한 작품이라도 잊지 않고 계속적으로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 보완한다. 불안 강박에 시달린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언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아마도 임종의 순간까지 계속 수정 보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재료를 검토하고 조금씩 변주하고 수정 보완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내 소설들에서는 언제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다. 나는 기존에 쓴 글들(소설이든 에세이든 학술 논문이든 간에)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해석 재해석하면서 자체 검열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무언가 고칠 부분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완벽에 대한 집착이 원흉이다. 그게 스토리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수정하면 할수록 달라보인다. 당연히 더 나아 보인다. 나는 어떤 작품이건 간에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장편소설들을 의식적으로 분해해서 어떤 특정한 주제, 인물, 에피소드, 장면을 잘라낸 다음 중 · 단편소설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에서 스토리의 전개와 관련하여 균형 감각 역시 중요하므로 혹은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빠질 수도 있는 부분을 잘라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부분을 분리 독립해서 디테일을 추가하고 스토리텔링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것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는 신화, 전설, 서사시를 비롯해서 소설의 본질은 storytelling이다. 그것도 의미가 충만한 재밌는 이야기여야 한다. 특히 장편소설은 긴 이야기여야 하므로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강력하고 밀도 있고 내용이 풍성한 줄거리가 중요하다. 형식보다 주제와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소설의 형식은 잡설에 가까울 만큼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껍데기일 수도 있다.
그 줄거리는 아주 많은 잔가지를 뻗어나가게 한다.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또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나아가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짜여 나가면서 주제가 생기거나 혹은 당초 의도했던 주제가 변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확실한 끝맺음이 중요하다. 결말은 소설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 결말에서 (그 결말이 흔해빠진 통상적인 대단원이라고 해도) 소설의 힘이 생기면서 강력한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기본 구조는 먼저 시간적 배경과 장소적 배경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소설이 안정되고 탄탄해진다. 역사소설의 경우에는 시대적 배경과 상황, 시대정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장소성 역시 중요하다.
장편소설의 경우 장소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고 시간적으로는 때로는 몇 세대에 걸칠 만큼 매우 길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이 중요할 수 있다. 계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가끔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간 잠깐 졸거나 다른 생각에 깊이 빠져서 혹은 지칠 대로 지쳐서 눈앞이 캄캄해서) 주제와 동떨어지고 느슨하고 형체가 불분명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작가가 미궁에 빠져 한없이 헤매게 된다.
장편소설 쓰기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수개월, 수년에 걸쳐 장편소설을 쓸 때는 한없이 헤매면서 쓸데없는 상상, 공상, 몽상, 망상에 빠져든다. 그래서 지루하고 멍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의 방랑 (wandering of mind)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한 과정에서 Writer’s Block에 부딪혀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을 허송할 수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일시적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잃게 된다. 결국 자포자기에 빠질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이야기를 쓰다가 지치면 활력과 흥미가 재충전될 때까지 글쓰기를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몇 달 동안 내팽개쳐 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면 구성과 플롯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작품을 다시 수정하거나 여기저기 세부사항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작품을 포기한 게 아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교하고 균형 잡힌 스토리가 되도록 전체를 통합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서 독립시키는 것이다.
나는 풍부한 생각과 감정을 통해서 소설 속에서 인물과 사물, 사건의 의미, 본질을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주의자이다.
그러므로 공허한 추상주의자가 아니라 정확하고 세밀하게 디테일을 추구하는 리얼리스트가 되고자 한다. 소설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작품은 현실과 멀어질수록 생명력을 상실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글에서도 써야 하는 것은 모두 써야 하고 쓸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쓴다. 다시 말하면 필요한 것은 충분히 쓴다. 그래야만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극사실주의자나 슈퍼사실주의자 (super-realist)는 아니고 맥시멀리스트로 자처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극도로 축소되고 압축된 스타일인 미니멀리즘은 정말 불편하다. 나는 미니멀리즘을 서사 능력이 부족한 또는 필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쓰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21세기 大明天地다. 컴퓨터, 이메일, 인터넷, 스마트폰, SNS, AI 시대이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카카오, 네이버 같은 플랫폼들이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짧은 동영상인 쇼트 폼에 광적으로 열광한다. 그래서 온갖 지식, 정보, 루머, 광고, 가설, 이론, 궤변이 끊임없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까 미니멀리즘은 (그런 것들이 21세기 대명천지인 지금 세상에 등장하기 전) 그 옛날, 근 반세기 전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유행한 문학적 기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서 주제, 인물, 배경, 스토리 라인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빠져버린다면 그래서 이야기의 뼈대만 남게되어 건조하고 단순화되어 버린다면 심오한 소설적 깊이와 미적, 정서적 감각, 문장의 밀도, 질감이 사라져버린다. 그건 소설이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짓이다. 예술은 예술이 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소설적 기교, 문학성, 풍부한 상상력, (형식과 내용을 포함한 소설 쓰기에서) 과감성 등을 대부분 포기해야만 한다. 소설에서 서정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 문장의 리듬이 배제된다면 어떻게 심미적 감각을 살릴 수 있겠는가.
3인칭 全知的 視點 (또는 觀點) 소설에서는 스토리 전개에 매몰된 나머지 話者 (또는 서술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누군가 ‘3인칭이란 인칭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다시 말하면 소설 속에서 전지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뚜렷하게 의식되지 않아서 소설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지만 독자는 그게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리얼리스트 작가가 쓰는 리얼리즘 소설에서 (비개인적이고 비인칭적인) 객관적인 묘사(서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회 비평적 리얼리즘 소설을 쓰기 때문에 작가의 관점에서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장편소설에서는 (괴테가 일찍이 세계문학을 주창하면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시대상, 풍토, 상황, 민족성이나 지역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본성을 현현한 보편적인) 큰 주제에 딸린 작은 주제들이 매번 등장하는 여러 장면들과 맥락이 이어지는데 이때 어느 정도 안정과 균형이 필요하다. 그렇게 장면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인물들과 사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논리적이면서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장편 영화의 경우 장면이 40~80개 정도 나오지만 장편 소설에서는 그보다 두 세배 넘게 크고 작은 장면이 등장하게 된다)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허구 세계(fiction)는 독창적이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에는 그 본질적 속성으로 개연성과 핍진성,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리얼리스트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소설이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스토리 라인을 특정한 역사적 실재, 인물, 사건의 맥락 속에 집어넣게 된다. 그러면 독자들은 당해 소설이 품고 있는 핵심과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정서적 힘에 이끌려서 어떤 지적 감동, 즐거움과 만족감, 정신적 혼란과 떨림 같은 복합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독자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처음과 중간, 끝이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는 강렬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쓰는 글에서 ‘총량 불변의 법칙’을 신봉한다. 반드시 써야만 하는 일정량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균형이 깨지면 어쩌나 하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다시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충분히 말해야 하는 것과 너무 많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멈춰야 할 순간을 잘 알지 못한다. 스토리의 진행에 기여하지 않는, 부사와 형용사의 오남용에 의한 과잉 묘사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다. 글 속에서 한없이 헤매인다. 그러면 소설의 문맥 속에서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혹은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라는 중요한 핵심을 찾아낼 수 없다.)
종이책의 발간은 여간 어렵고 성가신 일이 아니다. 나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무수히 거절을 당했다. 그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입에 발린 몇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속내는 지금 팔릴만한 책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양심도 없고 예의가 없다. 참으로 무지막지하다. 작가가 열과 성을 다하여 애써 쓴 작품을 무시한다. 거의 예외 없이 왜 거절을 하는지 그 이유를 짧게라도 회신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체 가타부타 답신을 보내지 않는다.)
특히 장편이건 단편이건 분량이 많으면 무조건 손사래를 쳤다. 가뭄에 콩 나듯이 단편소설의 원고를 청탁받으면 어김없이 매수 제한을 한다. 그러므로 충분히 쓸 수 없다. 나중에 수정 보완하거나 별도로 일부를 쪼개고 분리해서 후속 작품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지금’은 100년, 즉 한 세기를 말하고, ‘여기’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에코토피아를 포함한) 전 세계 지구촌을 아우르고, ‘우리’는 인종과 지역, 민족,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를 초월한 모든 인간을 말한다.
첫 장편소설 「사하라」는 최초 종이책으로 출판하였을 때는 330쪽에 불과하였지만 공간적 배경과 에피소드와 인물들과 주제를 추가하여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750~800쪽까지 불어났다.
그래서 주제들은 희미해지면서 문맥이 끊어졌고 스토리텔링은 지지부진하면서 길을 잃어버렸다. (이 大河 소설에서는 소설의 구조와 내적 논리에 따라 얽히고설킨 중심 플롯에서 파생된 남녀 간 사랑과 관련한 4개의 삼각관계를 포함해서 여러 하위 플롯 때문에 1,000여 개가 넘는 많은 장면이 나오게 된다.)
소설에서 공간(space) 또는 장소(place)는 소설의 척추가 되므로 아주 중요하다. 공간과 장소를 굳이 구별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공간은 너무 넓고 막연해서 특정하기가 곤란하고 장소는 좁아서 지리적으로 특징 지어진 작은 공간으로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특별한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가진 장소에 깊은 애착이나 애증을 느끼면서 관련 지식이나 기억을 축적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관점에서 견고하게 뿌리가 박힌 장소 감각 혹은 장소성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하라」의 공간적 혹은 장소적 배경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아우르는 아주 방대하다. 그래서 대하 소설이다. (특히 사막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소설의 핵을 구성하고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탈영토적이고 지역주의 (regionalism)나 로컬리즘(localism)을 벗어났다. (벌교, 남쪽 바다, 부산, 서울, ㈜ 공간, 파리, 센강, 퐁데자르 다리, 리비아, 트리폴리, 프라하,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스페인 그라나다, 타클라마칸 사막, 세렝게티 평원, 멕시코 유카탄 반도, 엘도라도, 보르네오 섬, 오코방고, 젠네 등은 김규현의 장소이고, 사하라 사막, 타만라세트, 알제리, 알제, 마라케시, 페스, 카사블랑카, 통북투, 아라비아 반도, 지중해, 마르세유, 엘우에드, 크레타 섬,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등은 이브라함의 장소이고, 베트남, 빈롱, 투루빌, 파리, 소르본 대학, 생라자르 역, 1940년 프랑스가 패망할 무렵의 서부전선, 드레스덴의 포로수용소, 사바나, 탕헤르, 케이프타운,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자크의 장소이다.
시대적으로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걸쳐있다.
그 시기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공산주의 악의 제국이었던 구 소련이 해체되는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국내적으로는 그 시기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으므로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역사적 사건들이 분출했다.
80년대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여름 그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 일에 걸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이르렀다. 1986년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권인숙 양은 주민등록증을 변조 위장취업한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성적 모욕과 폭행을 당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었고 그해 6월항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1988년 가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공사 1단계 사업은 1984년 착공되어 1995년 2월 준공되었고 2단계 사업은 2005년 6월 준공되었다.)
그 소설에서 작가는 극단적인 flashback 기법으로 세 주인공 인물의 인생행로를 조명하면서 [여행, 귀향, 사막, 사하라, 티베트, 낙타, 투아레그, 주술사, 종교와 신의 문제, 무슬림과 코란, 성경, 유신론과 무신론, 김규현은 건축가이므로 건축의 문제, 삼각관계의 사랑과 이별, 성적 욕망, 예술가의 초상, 죽음과 자살, 운명 혹은 숙명, 無相, 無常, 無想, 전쟁(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 부족전쟁 등),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아프리카와 반식민주의 운동, HIV/AIDS, 삼인칭 전지적 시점과 화자 같은] 방대한 테마를 다루지만, 세 사람은 독립된 독자적인 주체로서 제각기 목소리가 (복수의 성부로 구성되어 각각 독립된 선율과 리듬을 갖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대립하고 화합하는) 음악의 대위법처럼 교차하고 결합하므로 텍스트는 당연히 단성적이 아니라 多聲的 (polyphony)인 것이다.
김규현은 극동에서 온 동양인이고 최고 명문 대학인 S대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 온 벌써 유명한 건축가이지만 이브라함은 멸종위기에 처한 사하라 사막의 소수민족인 투아레그인이고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밀입국자이다.
자크(Jacques Rivérare)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보내졌지만 친아버지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그는 1940년 서부전선에서 괴멸하는 프랑스 보병연대 소속 사병으로 복무했다. 언제나 유색인종으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왔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방랑했다. 하지만 마르세유 시절 이브라함을 만나서 아버지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김규현과 이브라함 간에는 인종적, 계층적, 환경과 지역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에서는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똑같이 이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탈수증으로 죽어가면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모든 차이를 초월한다.
장편소설「사하라」에서 인물들의 대화 혹은 독백, 침묵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독백 역시 작중 인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대화이지만 연극에서 모놀로그처럼 청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화성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청자는 어떨 때는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alter ego일 것이다.) 침묵에 관해서 ‘말해서 후회한 적은 자주 있어도 침묵을 지켜서 후회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했으니까 침묵의 대화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뭐라고 너에게 말해야 할까?
침묵보다 더 좋은 말이 있겠는가?
나는 눈을 딱 감고 600여 쪽 남짓에서 종결했다.
그래도 그 범위 내에서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종이책 출판을 완전히 포기했다. 이 새로운 버전은 내 블로그에 실려있다.
(https://blog.naver.com/jungwon4760/222747311815)
그리고 분리 독립되어 잘라낸 부분은 디테일을 추가하고 수정 보완하여 단편소설로 넘겨졌다.
(「사하라」에서는 단편 ‘바다’, ‘나는 걷는다’, ‘배반의 장미’, ‘낙타’, ‘파리의 이별’, ‘시인 혹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남자’, ‘마르세유’, ‘하딤 마흐메드’, ‘사하라 사막의 남쪽’, ‘카사블랑카’, ‘젠네의 대사원을 찾아서’, ‘결별의 기억’ , ‘라이언킹’, ‘강물은 흐른다’, ‘예술가의 초상’, ‘호모에렉투스’, ‘침묵의 노래’, ‘티베트 기행’, ‘신의 은총’, 중편소설 ‘달빛 죽이기’, 에세이 ‘에덴동산의 탈출 (혹은 인간해방)’, ‘오디세우스 (의 영원한 여정)’, ‘애니멀 킹과 호모사피엔스’, ‘신은 누구인가?’, ‘나는 무신론자인가?!’,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으로의 여행’ 등이, 「광화문광장」에서는 ‘그해 겨울’, ‘진실과 왜곡 – 영화 1987’, ‘1987년 7월 5일’, ‘광화문광장’ 등이, 「인간의 초상」에서는 ‘소총수들’, ‘내 고향’, ‘어느 일등병의 비망록’, ‘빈롱으로 가는 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영현병 김재수 하사’, ‘매복 작전’ 등이, 미발표 장편소설 (가제) 「증언」에서는 ‘쥐새끼 박멸작전’, ‘해무’, ‘두만강’, ‘대화와 설득’, ‘고정간첩’ 등이 분리 독립 되어서 독자적인 완성체로 등장할 수 있다.)
소설에는 흔히 ‘작가의 말’이 後記처럼 붙어있고, 번역 소설에는 ‘번역자의 말’이나 작품 해설, 역주, 해제라는 부속품이 붙어있고, 책이 잘 팔리도록 혹은 아주 잘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 표지나 뒷표지를 디자인하면서 텍스트를 소개하는 짧은 글이나 추천의 글을 넣기도 하는데 이것을 파라텍스트(paratext)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 단편소설은 원래의 텍스트에서 분리되어있긴 하지만 상호텍스트(intertext)라는 관점에서 읽기 쉬움(readable)과 가독성, 세밀한 독해를 도와준다는 의미로 파악한다면 파라텍스트라고 할 수도 있다.
한 편의 소설이 발표되고 출판까지 됐다고 하여 작품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은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완성은 불가능하다. 작가가 살아있건 사후이건 간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작품을 해체하여 독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재조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대단한 작품이라도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죽음’ 이론이고 독자의 텍스트 참여와 독자에 의한 텍스트의 의미 재생산이라는 독자수용 이론 (Reader response theory)이다.
그럴 경우 새로운 작품의 분리 독립은 불가피하다.
나는 항상 내 소설은 물론이고 다른 소설에 있어서도 작중 인물의 그 후가 매우 궁금하다. 그들은 그 후 어떤 인생역정을 걸어갔을까. 그들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주인공인 작중인물 김규현과 그의 아내 심현숙은 헤어졌고 김규현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여행 중 탈수증으로 죽었는데(사망진단서에서 self-murder라고 되어있지만), 그들(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은 어떻게 다시 만나서 해후하고 화해하였는가? 그걸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문을 열고 집을 떠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19세기 북유럽의 사회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엄혹한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없이 추락했거나 (또는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져서 자살했거나, 자존심이 무척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바로 돌아와서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을 것이다. 도저히 엄격한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인 완고한 사회에서 여성이 독립해서 자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아주 무책임했다고 할 수 있다. 노라를 제멋대로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승옥 작가의 옛날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주인공들의 그 후가 너무 궁금해서 ‘무진기행, 그 후’를 썼다. 작중 인물인 윤희중(또는 윤기중)과 상대역인 음악 선생님 하인숙 (본명 金惠淑), 고시에 합격하고 세무서장이 된 조성식, 국어 선생님 박치순과 그 아내 등의 인생행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영화 (노인시설에서 한 젊은이의 총격에 의한 집단사살 그리고 이어지는 자살로 시작되는) ‘플랜 75’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신인 감독 5인과 함께 만든 2019년 옴니버스 영화 ‘10년’의 다섯 편(‘플랜 75’, ‘장난꾸러기 동맹’, ‘데이터’,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라’) 중 한 작품을 분리 독립해서 장편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그 후 それから」의 제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후’이다. 「산시로」에서는 어떤 대학생에 대해서 썼는데, 이 소설은 그 후에 대해서 썼기 때문에 ‘그 후’이다. 「산시로」의 주인공은 단순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다음 단계의 인물이어서 이 점에서도 ‘그 후’이다. 이 주인공은 마지막에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그 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 후’이다.”
나는 내 소설의 작중 인물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누구든지 정중히 대했으므로 언제나 내 마음속에 엄연히 살아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연결망에 묶여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 속 배역보다 훨씬 더 심오한 존재들이다. 그저 배경을 채우는 단순한 엑스트라 이상의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스토리텔링 이후인 그들의 그 後가 말할 수 없이 궁금해서 그들의 인생행로가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탐색했고 그래서 ‘인물들의 에필로그’를 썼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그때 다른 선택을 하였다면 운명이 어떻게 엇갈리고 따라서 이야기가 어떻게 변주되면서 결론이 달라졌을지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결론을 해피 엔딩이나 새드 엔딩으로 바꾸는 것 말이다.
지금은 컴퓨터와 문서 작업의 비약적 발달로 잘라내기인지 쪼개기인지 모방인지 변주인지 아주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다. 쪼개고, 잘라내고, 이리저리 옮겨서 이어붙이고, 추가하고, 그래서 스토리를 원하는대로 개조하고 주제를 바꾸고 결론을 바꿀 수 있다.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서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대로 스토리 전개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interactive movie가 나왔으니, 넷플릭스는 최근 새 장편 TV영화 ‘Black Mirror; Banders natch’를 공개했는데 시청자들이 이 영화를 시청하면서 중간 중간에 스토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스토리 전개 중에 나온 제안을 수락하는지, 거절하느냐에 따라 다음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5가지 다른 결말을 도출할 수 있다. 심지어 영화의 배경음악인 original sound track도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독자가 아무리 잘라내서 재조립하는 경우에도 그걸 공개적으로 발표하려면 어느 정도 경계선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뼈대만 남길 것인지, 주제를 비트는 정도에서 디테일만 바꿀 것인지, 그럴 경우 모방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오마주 또는 패러디의 한계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공동저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표절의 의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 우리는 (그 개념이 너무 넓어서 논자에 따라 달리 사용되기는 하지만)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기반한 국민문학 (또는 민족문학)에서 탈피해서 세계문학에 편입해야 할 것이다.
괴테는 벌써 200년 전인 1827년 세계문학의 개념을 설파했고 그 이십 년 후인 1847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세계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이다. 21세기 大明天地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포스트 내셔널리즘, 포스트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포스트 휴머니즘 또는 안티 휴머니즘, 에코크리티시즘, 에코코스모폴리타니즘 (eco-cosmopolitanism)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나라 자본과 기업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은 일본, 캐나다, 영국, 미국으로 진즉 진출했고, 삼진식품은 부산 봉래시장에서 솥단지 건 지 70년 만에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이어 호주에도 어묵 베이커리 매장을 열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LG전자의 가전제품, 현대 기아차 그룹의 자동차 등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k-culture, k-food도 해외로 나갔다.
우리 문학은 국경이 무의미해진 지금 자폐적이고 일면적이고 편협한 한민족의 민족주의 또는 한반도의 지역주의라는 낡은 울타리를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안과 밖, 주체성과 타자성,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이항 대립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소수 문학(minor literature)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우선 작품 속 세계의 지평을 제한 없이 넓혀야 한다.
예술은 무한이고 영원이고 초월이다.
원작자와 번역자의 관계에서 번역이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생성형 AI가 일정 부분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노화와 질병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나 백 세까지 사는 게 아니다. 그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문학적 글을 쓰는 작업에 흥미를 잃고 산만해지고 고통을 느끼고 있다. 장인정신은 사라지고 있다.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완벽주의는 어불성설이다.
오랜 시간 길을 더듬기만 했다.
- 다음글제2인자 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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