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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판문점」의 참고자료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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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중원
댓글 0건 조회 55회 작성일 26-01-13 13:13

본문

주영복은 초기 한국 농업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도착할 무렵, 상파울루주에 있는 꾸바떵 제철소의 협력회사였던 일본 제철소에서 일본어 번역 및 통역으로 일했다. 그 당시 브라질로 간 반공포로 청년들은 대부분 일본계 2세나 브라질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고 총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총각이긴 했지만 (실제 40세의 나이였으므로) 뻐드렁이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런데 교민 중 한 사람이 그가 결혼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인지 혹은 그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한국 여인을 중매했다. 그녀 역시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 그때까지 노처녀였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쉽게 결정했다. 하지만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맞선을 볼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진을 교환했고 그 사진을 보고 결혼 여부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브라질 시민권을 이미 취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브라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임장에 의한 결혼 서류’를 보냈다. 그 서류를 받은 예비 신부는 일본 요꼬하마 소재 브라질 영사관에 가서 영주비자를 받고 1963년 초 상파울루주 깜삐나스시의 비오라꼬뿌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몇몇 한인 교포들이 그와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갔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신부와 밑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동시에 실망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처음으로 대면한 신랑 신부가 서로 실망했던 것이다. 신부는 신랑이 사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고 신랑은 신부의 인물이 사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결혼했다. 당시 부부는 한인촌이 형성된 상파울루 중심부에 있는 꼰지데 사르제다스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래도 자식을 낳으며 그곳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 그후 그와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재이주했다. 미국으로 재이주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처형의 초청으로 가능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나이든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노동직 일자리라고 하더라도 만족해야 했는데 그 당시 그가 얻은 일자리는 어느 고층건물의 야간 수위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이때 그는 밤을 세워가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지나간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수천매의 원고를 탈고했다. 그렇게 해서 회고록이자 자서전인『내가 겪은 조선전쟁』,『76인의 포로들』이 탄생했다. (내가 6.25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모아서 검토했지만 이 책들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참고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세밀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서술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조국으로부터 불가피하게 스스로 추방되었고 망명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고 외톨이었으며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다. 평생 동안 국제적 난민처럼 떠돌면서 한때는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l.A.시절을 말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수구초심으로 돌아가 그때 조국을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살았다. 평생 동안 고국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사무쳐서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칼날과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 곡예를 부려야 했다. 인생역정에서 마주친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면서 극단적 회의론자에서 인생을, 인간을, 세상을 긍정하는 긍정론자로 변모했고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인간 삶의 의미를 발견해서 인생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돌과 모래, 바다, 기계 같은 물질, 심지어 생명체인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유독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도덕적 양심,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지성적 지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불굴의 정신력과 자유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고귀했다. (그가 신을 믿는지 여부 ― 철저한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인지, 理神論者인지, 인간이나 동물, 식물 같은 생명체에 한해서 신의 형상인 것으로 인정하는 제한적 범신론자인지, 인격신인 유일신을 믿으면서 하느님에게 의지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그는 주저주저하는 회의론자로서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지적 탐험가였으므로 탁월한 지성인이 되었고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배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생각했었다. 나는 시간이 훨씬 많이 흐른 다음 아마 불혹의 나이가 지났을 때쯤 (그때까지 죽지 않고 무난히 살아남는다면), 내가 지금 느끼고 겪었던 것들을, 영광과 환희는 없고 오욕으로 점철된 자화상을 회고하면서 글로써 풀어내야만 할 것이다. 내가 평생 동안 증오하는 인물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단 자신을 미화 과장하거나 또는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변명을 하지 않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극적인 가공 없이도 그 자체로 문학적 세련미가 조금은 돋보이는 글을……〕

그는 죽었지만 (그가 죽은 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온갖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본이었으며 품격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동화 (玄東和)

전 재인도한인회장 (1932년생, 전쟁 발발 당시 18세.)

그는 함북 청진 출신으로 해방 후 38선 이북인 강원도 금화군 (현 철원군)에 정착했다. 부친이 여관을 운영해서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1949년 평양사동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다음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전쟁 발발 당시 제26 여단 소속 중위였는데 1950년 10월 말경 강원도 화천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현동화는 김경학의 위 논문에서는 선명수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그는 인도에서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으며 재인도 교민들을 대표하는 인도 한인회장이 되었다. 1남 1녀를 한국에 유학 보냈다. 2021년 2월 12일 89세로 별세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 살면서 남한을 동경했다. 열세 살 때 해방을 맞고 나서 북한에서 진행되었던 재산몰수 등 공산화 과정을 생생히 목격했다. 전쟁 중 고향 마을이 폭격을 당해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당시 북에 있었던 어머니와 형제들은 살아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가 중립국 행을 택한 계기는 이념과 사상 때문이 아니었다. 멕시코에 가면 이웃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도 다니고 더 공부할 수 있겠다는 현실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인도를 거쳐 멕시코로 가서 전쟁 때 미군 폭격을 당해 입은 심한 상처의 후유증을 치료하고 학업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멕시코 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하자 동료 3명과 함께 인도에 정착한 것이다. (그때 반공청년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문명철 (1930년생, 전쟁 발발 당시 20세)

그는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넉넉하게 잘 사는 독실한 기독교도 가정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47년 무렵 모택동의 공산당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지주들과 자본가들, 정치인들을 무조건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무슨 죄목을 씌워 인민재판을 해서 사형을 집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본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부모님의 고향인 함경북도 웅진으로 탈출하였다. 20세 때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가을 인민군의 강제 징집으로 평양으로 끌려가던 중 미군 폭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빠져나왔지만 미군의 포로가 되어 원산 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미군 화물선에 실려 부산으로 내려와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당시 그는 민간인이었으므로 전쟁포로 (prisoner of war)가 아니었지만 미군은 막무가내로 전쟁포로로 취급했다. 몇 개월간 부산의 포로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복막염과 맹장염을 앓아 죽을 고생을 했다. 부산 동래에 있는 14육군 야전병원에서 미군 대령 계급의 병원장의 집도로 수술을 받아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다시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2년 6월경 포로 분류 심사에서 전쟁포로가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 인정되어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나와 영천의 반공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8월 27일 그는 인도군이 관할하는 판문점 중립지대로 이송되었다.

그들 일행은 이름과 번호를 확인한 후 한 천막에 약 50명씩 배치해서 수용되었다. 그 반공포로 수용소는 대한반공청년단과 지도부가 그들을 밤낮으로 감시 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천막을 빠져나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영어를 잘하는 포로 통역관인 ‘미스터 리’가 찾아왔다. 그는 통역관이기 때문에 어느 수용소라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어?” 문명철이 대답했다. “중립국으로 가기로 했어.” “그래, 잘했어.” “그런데, 이 지옥같은 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이렇게 하자. 내일 이맘때 내가 이 천막으로 다시 올게. 그러면 자네는 조금 있다가 갑자기 배가 몹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때 내가 자네를 등에 업고 뛰면 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니 변함없이 새날이 밝아왔다. 문명철은 오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친구의 각본에 따라 연극을 해야만 했다. 친구의 등에 업혀 저 관객들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저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니 저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날 밤 9시, 미스터 리가 태연하게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일부러 큰 소리로 나누었다. 드디어 그가 눈으로 사인을 해주었고, 그 신호에 따라 그는 “배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정말 아픈 사람처럼 시늉했다. 복막염과 맹장염으로 아팠던 때를 기억하며 “아이구 배야. 아이구”하고 배를 움켜쥐었다.

그 친구가 한 몫 거들며 말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야? 배가 아파? 자넨 전에도 복막염 수술을 받은 적이 있잖아. 그게 또 재발했나? 안 되겠는걸. 빨리 의무실로 가야겠네.”

인도군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중립국으로 가기 위해 모인 포로들의 천막 숙소를 향하여 20분 동안 함께 걸어갔다.

문명철이 말했다. “자네도 나와 함께 중립국으로 가서 공부하세나” 미스터 리가 말했다. “나도 자네와 함께 가고 싶지만 중립국으로 가면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결혼을 해도 한국 여자와 해야 하는데 그곳에선 더 어려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여러모로 생각해보아도 나는 남한에 남아서 더 공부하고 그 다음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겠네.”

그는 인도에서 2년간 체류하다가 1956년 2월 브라질로 가 상파울루에 정착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신학석사, 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브라질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상파울루 메트로폴리탄 대학 교수, 상파울루 브라질 감리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참조. 짜우짜우는 포르투갈어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생 동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그는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고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다.

(인도에 도착한 한국인 포로 76명의 그 후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을 벗어난 것이다. 그들의 긴 이야기는 한수산, 〔「제3국으로 간 반공포로들의 그 후」, 1983, 마당〕과 백웅태, 〔「거제도에서 판문점까지」, 1987, 대원출판사〕, 김경학, 〔「중립국 인도로 간 반공포로」, 이 논문은 「전쟁과 기억」, 2005, 한울에 실려있다〕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7. 참고문헌



1차 자료와 2차 자료

장편소설 「판문점」을 쓰면서 참조한 참고문헌 중에서 1차 자료는 오세희 저「65포로수용소」, 문명철 지음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 현동화 구술 정동현 씀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 송관호 6‧25 전쟁 수기 / 김종운 정리 「전쟁포로」, 주영복 지음 「내가 겪은 조선전쟁」 「76인의 포로들」, K.S. 티마야 씀 / 라윤도 옮김 「판문점 일기」, 인도 국방부 발간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백선엽 지음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고영근 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유엔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명의로 된) 한국 휴전 협정,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 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 일, 유엔군 대표단 수석 대표: 미국 육군중장 윌리엄 K. 해리슨 2세 명의로 된) 포로 교환 협정 (중립국 송환 위원회 위임 협약), (6.25 전쟁 발발 당시 관련 국가 가운데 어느 누구도 1949년 협약을 직접적으로 비준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발발 후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부터 1949년 제네바협약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전쟁포로 송환에 관한 1949년 제네바협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 북한 측 자료인 6.25 전쟁에 관한 「조국해방전쟁사」등이 있다.

2차 자료는 김학재 지음 「판문점 체제의 기원」, 조성훈 저 「한국전쟁과 포로」, 서동만 지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모니카 김 지음 / 김학재‧안중철 옮김 「심문실의 한국전쟁」, 하진 장편소설 / 왕은철 옮김 「전쟁 쓰레기 (War Trash)」, 정연선 지음 「잊혀진 전쟁의 기억」, 김동춘 지음 「전쟁과 사회」, 유중원 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국사편찬위원회 (1995)「한국전쟁기 북한군 포로관계 문서 (1950~1954)」등이 있다.

특히 1차 자료가 중요했는데 그중에서 (6‧25 전쟁 당시 공병 소좌로 인민군 전선사령부 공병 부부장이었는데, 1950년 9월 자진 투항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판문점의 포로 석방 심사 과정에서 제3국 인도를 선택한 주영복의)「내가 겪은 조선전쟁」과 (판문점에서 포로 송환 심사 당시 중립국 송환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상 전쟁의 심판을 맡았던 인도 장군인 티마야의)「판문점 일기」, 「한국에서 인도 관리군 小史」,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를 주로 참조했다. 2차 자료 중에서는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포로」, 「심문실의 한국전쟁」이 중요했다. 사진은「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전쟁포로」「판문점 일기」「한국전쟁과 포로」등에서 옮겼다 〔이 사진들의 출처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 자료실의 ‘Korea War’ 파일이고 나는 재인용 한 것이다. 이 파일에는 수만 매의 사진 자료가 저장되어 있고 일정한 절차를 밟으면 누구든지 열람 복사할 수 있다〕.

소설일수록, 특히 역사소설일수록 참고문헌은 중요하다. 참고문헌이 소설의 주제와 storytelling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참고문헌은 일심동체이다. (그러므로 참고문헌은 인내하면서 차근차근, 무엇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읽는 일이 중요하다. 참고문헌을 읽고 해석할 때 함부로 자신의 선입견이나 습관 또는 취향을 개입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부 사항에 집착하여 시야가 좁은 방식으로 읽어서도 안될 것이다.) 보통 본문을 읽으면서 또는 본문을 읽고 나서 참고문헌을 참조하게 되지만 때로는 참고문헌을 먼저 읽으면 당해 소설을 깊이 있게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소설에서 참고문헌은 독자들이 소설을 잘 이해하고 감상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Intertextuality 또는 미하일 바흐친의

Interdependence

참고문헌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참고하거나 인용 원용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한 목록이다. 그것은 출처를 명시하고 논지의 타당성을 확보하며 표절 의혹을 방지하고 독자가 참고문헌을 직접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참고문헌을 참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텍스트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성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참고문헌은 본문 텍스트와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의 일부 형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이미 찾아볼 수 있다. 연설과 저술에서 모방은 웅변술이나 작문 기술을 발달시키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을 자유롭게 빌려 쓰는 것을 초기 상호텍스트성을 연구한 학자들은 ‘영향 이론 (influence theory)’이라고 불렀다. 이 영향은 모방, 오독, 패러디, 전승의 일부 차용, 또는 다른 텍스트에 대한 암시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이전의 텍스트가 이후의 텍스트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의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를 활용, 차용, 혹은 모방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담론은 어떤 한 작가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텍스트와 관습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일 바흐친은 텍스트들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바흐친은 모든 텍스트적 표현이 다성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텍스트가 이전 텍스트들과 현실이 지닌 다면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화성 (dialogicity)이라고 부르면서, 한 텍스트를 이전 텍스트들과 나눈 하나의 대화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화한 형태로 보았다. 바흐친과 크리스테바 두 사람이 말하는 상호텍스트성은 모두 텍스트와, 그에 앞서는 텍스트가 주는 영향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예술작품 또는 모든 학문적 업적에서 당해 작품은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재즈 앙상블은 평소에 함께 연주하던 사람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드물다. 다시 말하면 재즈 앙상블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그날 하룻밤을 위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날 밤 공연이 끝나면 앙상블은 곧바로 흩어진다. 하지만 즉흥 연주(improvisation)는 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들의 상호 작용(interaction)에서 나온다. 그래도 앙상블과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일시적인 협업일지라도 그 결과물은 계속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악 작품은 다른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작품이 다양한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 천재성을 개인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함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수많은 인간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나심 엘 카블리 지음/이나래 옮김,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참조)

미메시스(mimesis)는 자연이나 현실 세계를 모방, 재현, 표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똑같이 따라 하는 모사(摹寫)를 넘어, 대상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재창조하거나 인간이 학습하고 감각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포함하는 개념이긴 하다. 예술적 창작의 핵심 원리로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고 예술은 다시 현실을 모방한 것이므로 '가짜의 가짜'라며 비판적으로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며 배움의 원천이자 지식 습득의 과정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어쨌거나 예술은 모방, 재현, 도용, 표절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기존의 창작물을 차용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현대 예술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소설 (분단소설과 전쟁소설을 포함하여)을 많이 쓴다. 그들 소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텍스트성 또는 상호의존성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 「증언」, 「판문점」, 「인간의 초상」, 중편소설 「남과 북」, 「전쟁 부역자」, 「검은 그림자의 여인—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배신 혹은 전향」, 「외톨이 테러리스트」, 「시인의 죽음」, 단편소설 「쥐새끼 박멸 작전」, 「해무」등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스토리텔링이라는 소설성을 위해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문학성을 위해서, 독자들의 가독성과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짜깁기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들 소설의 상호텍스트성과 관련해서는 에세이인지 논문인지 알 수 없는「문학에서 잘라내기」참조〕

결론은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에서 떼어놓고 읽기는 불가능하므로 이 텍스트들의 상호관계망에서는 어떤 텍스트도, 어떤 독자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 텍스트들의 관계는 인용, 원용, 도용, 행간에 숨기기, 패러디, 패스티쉬 (pastiche), 인유 (allusion), 모방 (mimicry)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텍스트들의 관계에 관한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담론에서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상호텍스트성은 이야기들의 세계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본문 너머의 넓고 큰 세계 (the world behind the text)를 엿보게 해준다. 그래서 참고문헌이 중요하고 그것과 본문 텍스트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므로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다. (장 프라수아 라신 등이 공동 집필한 논문 「성경의 문학비평」 참조.)



학술 논문과 소설

작가는 6.25 전쟁과 포로송환 문제를 큰 주제로 한 짧은 장편소설을 쓴 것일 뿐 학술 논문을 쓴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쓴 법학 관련 논문들이 내 소설의 참고문헌으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기는 했나?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내 소설과 법학 논문 (또는 전문서)은 차원이 다르다. (법학은 방대하고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역사는 불과 삼백년 남짓이고 그 전성기는 19세기였는데 벌써 그 전성기가 지나가 버렸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제 강점기 일본을 경유해서, 일본을 모방해서 도입되었으므로 겨우 백년 남짓이다.) 법학자로서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일과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이다. 논문과 소설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소설은 논문과는 다르게 사유하고 표현해야 하며 현실에 참여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주제의 경우에도 탐구하는 영역이 완전히 딴판인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방법 자체도 완전히 다르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문장과 문체, 단어, 스타일, 구조, 분위기,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참고문헌을 원용, 인용하는 방식 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소설의 경우 형식적이나마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들 참고문헌을 통해서 장편소설을 쓰는 데 필수적인 한국전쟁 관련 역사적 사건과 사실, 실재, 인물, 맥락 등을 나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소설이든 논문이든 고유한 텍스트는 처음과 중간, 결말이라는 완결성을 가져야 하고 (그래야만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내적 논리의 일관성이 있어야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은 논지의 제시가 중요하고 입증의 증거를 정교하게 제시해야 하며 반대의 견해를 논박할 수 있어야 한다. 논지의 명확성, 간결성, 논리적 일관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어떤 종류의 글은 형식과 내용의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논문은 형식이 아주 단순할 수 있다. (판결문이나 공소장처럼) 관습적으로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그에 맞게 짜맞춘다. 그러므로 논문 심사에서 형식이 문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장 역시 전문용어를 쓰므로 (부사나 형용사를 쓰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무미건조하고 단순 명쾌하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생동감이 없다.

반면에 소설은 미시적이어서 세심한 디테일과 그 디테일의 인과성이 중요하고 작중 인물의 주관성 (생각과 감정, 꿈과 기억 등)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문학적 세련미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언어적 기교가 필요하다. 작가 특유의 단어와 문장, 문체 스타일이 중요할 수 있다. 특히 예술지상주의가 문학적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 그걸 그렇게나 강조한다. 단어는 낯설고 화려한 춤을 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학적이거나 미학적 특질이 표현되어야 하므로 문장은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넘어서 찌글찌글하고 간지럽다.

그렇다면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는 각기 독특한 표현의 재료가 있다.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음악은 소리를, 무용은 몸짓을, 미술은 색채나 돌, 진흙 등을 가지고 각기 미적 감각을 표현한다. 이 중에서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의사 전달이나 생각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데 언어의 기능은 사회가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더욱 다양해졌고 그것이 말로 쓰이느냐 글로 쓰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일상적 언어는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정보적 기능과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표현적 기능, 행동이나 태도에 영향을 주는 지시적 기능 등이 주된 기능이다. 반면에 문학적 언어는 정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다. 희곡은 무대를 배경으로 대화를 통하여,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단어, 문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서술과 묘사,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렇다고 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특징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는 운율, 심상, 의미 어조 등에 의해서 독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함축된 형식에 의해 밀도 높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리얼리즘 소설에서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상적 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나는 많은 법학 관련 논문과 판례평석, 책들을 썼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학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소설을 쓰는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어쨌거나 법학 논문은 실용적이어야 하지만 소설은 예술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난해한 전문용어 투성이 논문을 읽는 독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내가 많은 법학 논문과 판례평석, 법학 전문 책들을 열심히 써서 발표했지만 그걸 읽는 독자가 과연 몇 명쯤 될까?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공유하는 그들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문이건 소설이건 공적 논의의 장으로 나와야 된다. 21세기 대명천지 다원주의 사회에서 공개성의 원칙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독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건 논문이건 독자가 없다면 그건 무용지물이다. 나는 상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오직 좋은 작품과 성실한 독자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바이럴 효과(viral effect)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8. 결어 — 역사와 역사소설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소설이란 무엇인가?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는 어떤 사람들이 기술하는가? 역사는 누굴 위해 기록되는가? 그리고 역사주의란 무엇인가? 역사와 역사소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역사소설을 쓰고 있는 내 경험에 의하면 역사소설은 역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와 문학은 철학과 함께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서로 다른 분야로 구분되어 취급된다. 문학 연구가나 역사가는 문학과 역사가 어떻게 다르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공명하고 조응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나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누구나 문학이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평생을 사는 사람이다. 그 질문을 통해서 역사와 문학의 본질과 경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역사란 '이미 일어났던 것(역사적 실재)을 다루'는 데 반하여 문학은 '일어날 수 있는 것(개연성)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서술하는 것을 생명으로 삼고 객관성을 담보한다. 반면에 문학을 하는 사람은 어떤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으로 파생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탐색하면서 이야기를 생생하게 구축한다. (평론가 김치수의 「역사와 역사소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참조)

그래서 역사가와 소설가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paradigm)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과 역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소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소한) 차이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소설이란 이미 확정되어 있는 실재를 소재로 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을 묘사한 예술 작품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형상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는, 묘사는 실상을 빌려서 허상을 그려낸다는 의미에서 묘사를 소설의 본질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공적인 기록으로부터 출발한 작가의 상상력이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은 부분 (또는 숨어있는 부분)과 융합하여 만들어낸 구조물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이 문학이 되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역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과 재해석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은 과거의 기록과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예술적 조합에 의한 것이다. (이때 작가의 상상력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환기시켜 서로 조응하고 공명하게 한다. 하지만 누구는, ‘상상력이라는 언어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게으름뱅이 작가들의 실상이 묵인되어 온 것일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통 역사소설을 쓰려면 정통 리얼리즘 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이 분화되고 리얼리즘의 개념마저 논자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나오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리얼리즘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치밀하게 묘사한 디테일의 진실성이다. 그래서 팩트체크 (factcheck)가 정말 중요하다. 리얼리즘 소설은 소설의 육체 (혹은 몸통) 라고 할 수 있는 실재의 구체성과 일관된 내적 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또한 역사소설은 당해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바탕을 두지만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사상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구현해야 한다). Storytelling이 시대적으로 중요한 핵심 주제 (主題)와 주재 (主材)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또는 그것들을 훼손 조작한다면 흥미 위주의 희극적 통속소설로 전락하게 된다.

미시사 (微視史)란 무엇인가?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 폰 랑케의 교조적 사실주의 (doctrinal realism) 또는 정통 역사주의나 프랑스 초기 아날학파를 초월한 후기 아날학파의 통계적이고 계량적인 방법론과 비교하면 순수 미시사야말로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소설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사는 작가에게 소설의 主題 (theme)와 主材 (subject matter)를 제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문학적 필치로 이야기 만들기 (story-fashioning)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미시사 또는 미시문화사는 역사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서술은 분석적이지 않고 세세하고 미묘하다. 그것은 거시 역사학처럼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거대 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정통 역사학에서는 역사의 밑바닥에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 기층민 인간 개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미시적 접근을 하면 역사 속에서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소하지만 중요한 인물과 실재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미시사에서는 익명의 거대 집단과 평균적 개인의 존재보다는 그동안 꼭꼭 숨겨져 왔던 소수 집단에 속하는 구체적 개인의 이름과 그를 둘러싼 삶의 형태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 역사학의 지나치게 좁고 엄격한 실증 방식보다는 (비록 추론 과정에 의문의 여지가 많을지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른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가능성의 역사가 가능해진다. 미시사는 딱딱하고 분석적인 문체가 아니라 사건의 전말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듯한 이야기로서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시사와 역사소설은 치명적일 만큼 근접해 있다. 미시사는 역사라기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깝다. 미시사에서는 역사적 자료의 부실 때문에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데 그걸 메꾸려면 필자의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시사적 인물의 서사에는 사건성과 소설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정통 역사학에서는 미시사를 폄하하면서 역사적 사료보다는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역사소설은 역사서술의 하위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미시사 (micro history)와 구술사 (oral history)와 관계가 있다. 역사는 어차피 과거시제이고 storytelling이기 때문에 오래전에 서사시나 소설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것이다. 미시사 서술은 역사소설이고 역사소설은 미시사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미시사와 역사소설은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고 소설의 전성기인 19세기의) 정통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사건 역사소설이건 아주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어서 역사적 사건, 실재, 인물, 맥락 등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서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시사는 역사소설이 된다. 역사소설은 철저한 정통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쓰게 되면 결국 미시사가 된다. SF이건 판타지이건 어떤 장르의 소설도 리얼리즘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리얼리스트 작가이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무명의) 작가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역사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있게 논의할 입장에 있지는 않다. 다만 역사적 사건의 평범하고 빈약한 이야기 속에 문학적 또는 소설적 무늬를 입히려면 불가피하게 작가적 상상력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역사적 사건, 인물의 인생역정을 (시작과 중간, 결말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전개하려면 작가의 합리적 추론과 상상력 발휘가 불가피하다. 나는 그것들의 전후사정, 인생역정이 너무 궁금하다. (내가 막말을 하자면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된다.) 그래서 역사적 실재를 훼손하거나 변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남용이나 오용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최소한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실과 허구를 혼합해서 소설을 쓰면 불가피하게 역사적 실재를 파편화하고 침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상력은 예술의 원천인데 작가가 그걸 무슨 수로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는가? 사르트르는 ‘상상을 통해서 인간이 현실의 제약을 넘어선 자유로운 존재임’을 강조했지 않은가.

나의 인생역정을 돌이켜보면 미시사와 역사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나는 이산가족이고 (외갓집이 함흥이고 거기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6.25 전쟁을 직접 경험했으며 월남전 참전 용사이니까, 그리고 내 아주 가까운 지인들이 (?) 6‧25 전쟁 당시 좌파와 우파 간 마을 전쟁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밤낮으로 미시사와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서 참고문헌과 소송사건의 판례를 찾아서 읽고 있다. (소송사건에는 필연적으로 사건성과 소설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재심 사건, 살인사건, 사기와 마약 사건, 자백과 고문, 분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남파 공작원 사건,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운동권 사건, 6‧25 전쟁과 관련하여 1950년 12월 중순경 흥남철수작전, 좌파와 우파 간 마을전쟁, 빨치산, 양민학살 사건, 1950년 10월경 황해도 신천의 인민대학살 사건, 전쟁 부역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사건 등에 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소설이란 역사 (역사적 사건, 사실, 진실, 인물, 실재, 맥락 등)를 토대로 주제를 설정하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스토리 속에 인과관계의 법칙, 개연성(probability)과 핍진성(verisimilitude), 필연성(inevitability)을 바탕으로 내적 논리와 내면적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엄격한 산문은 시적 파격(poetic license)을 모면할 수 있고 사르트르가 비판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제한받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 (history)와 문학 (storytelling)은 본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일심동체였다. 역사 기술은 과거형 Narrative와 Storytelling을 본질적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내러티브는 항상 사후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재현적 (representational)이다. 역사 서술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상당한 또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역사가의 렌즈에 의해 해석 재해석되고 설명 묘사될 뿐이다.) 어쨌거나 19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 흐름 속에 경험주의와 역사적 탐구의 영향이 커지면서 역사는 문학에서 분리 독립되었고 역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역사주의 (historicism)적 관점에서는 문학 작품을 역사적 사회적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은 역사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고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소설은, 특히 역사소설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 실재를 소재로 하여 텍스트를 구성하지만 문학인 이상 문학적, 미학적 특질이 분명하게 나타나거나 암시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나 맥락을 초월하여 독립된 텍스트의 내재성 속에는 작가의 고유한 관점, 문학적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1863년부터 1867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 그는 1865년부터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1805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연재를 끝낸 후 상당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하여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1868년 4권의 책으로 출간했고 1869년에 전 6권의 제2판을 출간했으며 1873년 또다시 상당 부분을 개정한 제3판을 출간했다. 그는 쇄를 거듭하면서 수정하고 수정 보완했으며 오늘날 4권짜리 작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거의 광적일 만큼 수정 보완에 집착했다.)

그 소설은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의 대결이 시작되는 1805년 전쟁부터 시작하여 (러시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리들란트 전투, 바그람 전투 등에서 나폴레옹에게 계속 패한다. 「전쟁과 평화」 1권과 2권은 이 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12년 러시아와 프랑스 간 전쟁(1812년 6월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국경선을 넘는다. 러시아는 석 달 만에 모스크바를 내주고 시베리아 쪽으로 퇴각한다. 하지만 텅 빈 모스크바에서 혹한의 겨울을 날 수 없었던 프랑스군은 스스로 퇴각하고, 러시아군은 그 뒤를 추격하여 파리까지 쫓아간다. 「전쟁과 평화」 3권과 4권은 이 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을 거쳐 1820년 12월까지 대략 15년의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소설 속에는 나폴레옹, 알렉산드르 1세, 쿠투조프 등 수많은 실존 인물들과 안드레이, 피에르, 나타샤 등 허구 인물들의 삶을 엮어나갔는데 모두 559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서 도서관의 장서를 방불할 만큼 무수한 역사 자료를 조사하고 읽었다. 그래서 그 소설 속에는 전쟁과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점, 역사와 역사 철학에 관한 작가의 관점이 노골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란 무엇인가? 이것은 장편도 아니고 서사시는 더더욱 아니다. 하물며 역사 연대기도 아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실제 표현된 형식으로 작가가 표현하기를 원했고 또 표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스스로 소설임을 부인한 것이다. 더욱이 소설 본문과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는 에필로그 1부와 2부에는 온통 역사와 역사가에 관한 담론뿐이다. 그 소설에는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 작가 스스로 붙인 각주뿐만 아니라 역자가 붙인 각주만 수백 개에 이른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역사적 실재를 훼손하거나 변조하거나 조작하지 않는다. (민음사, 「전쟁과 평화 4」 작품 해설 “변두리에서 중심을 바라보다” 참조)

그러므로「전쟁과 평화」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 역사소설로 읽을 수도 있고 또는 역사적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결합한 팩션형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특히 1812년 전쟁에 관한 역사서로 읽고 해석, 재해석할 수도 있다. (역사서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장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장르의 문제는 작가가 소설을 창작하는 행위이건 독자가 소설을 읽는 행위이건 전통적으로 예외 없이 장르에 대한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도 장르를 의식하고 독자도 장르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수백 권의 참고문헌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 실재, 인물, 맥락을 치밀하게 조사하여 구성했으므로 역사서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전쟁 속에서 극도의 허무주의를 초탈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 작중 인물들이 세밀한 윤곽과 풍성한 색채를 통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에서 소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인물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그의 단어, 문구, 문장은 아름답다. 시적 파격(poetic license)을 배격하고 정확하고 냉혹한 필체로 썼음에도 그렇다.

역사 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면서 소설적 언어는 물론이고 비소설적 언어가 많이 표현되긴 하지만 (그건 극히 사소한 문제점에 불과하고), 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소설성과 문학성에 비추어 보면) 삶과 죽음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우주적 자아를 발견한 대단한 인물을 그려낸 대하소설 (민음사의 국내 번역본은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명작소설 또는 역사소설로 인정한다. 누가 감히 그 대작 소설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통솔적 견해는 「전쟁과 평화」를 명작 대하소설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것은 사적인 해석, 재해석이 가능하지만 흥미와 재미를 넘어서 아주 정확하고 진실해야 한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아주 중요하다. 다만 명백히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합리적으로 추론해서 아주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을 훼손 조작 변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은 완전무결한 fiction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는 말했다. …… 역사가로서 나는 늘 문학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편지나 일기 외에 역사 사료는 대체로 사람들의 감정이나, 욕망, 의지 등을 잘 보여주지 않으므로 역사가들은 사료의 흔적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도 결국 그 상상들을 글로 다 풀어내지 못한다. 근거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므로 역사책은 늘 딱딱하고 건조해지기 쉽다. 그에 비해 문학, 특히 소설은 인물 군상들의 섬세한 감정과 욕망, 갈등, 좌절 등이 이야기 속에 면면히 녹아있으니 그야말로 도마 위에 진수성찬을 위한 식자재들이 요리사의 칼질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형국이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역사가도 소설이 탐난다. 당대에 쓰인 소설을 사료로써 요리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소현숙, 「‘문학을 통해 보는 역사’와 ‘역사를 통해 보는 문학’ 사이의 거리」 참조..)〕

역사소설은 엽기적이거나 심심풀이용 역사소설로서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이 불투명하고 장소나 기타 소설적 요소가 불분명한 시대소설과는 정확하게 구분이 되어야 한다. 시대소설은 소설적 허구성을 역사적 진실보다 중시해서 상업적 요구에 부응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장」은 8‧15 해방 이후 해방 공간과 남북 분단의 역사, 6‧25 전쟁과 거제도 포로 수용소와 포로 송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정통 역사소설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역사를 왜곡하여 재구성하는데 강조를 둔 대체 역사소설이나 가상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주안점을 둔 가상 역사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역사소설에는 한계가 있고 경계선이 있다. 소설은 진실해야 한다. 역사소설은 역사를 훼손, 조작, 변조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어느 정도 문학적 세련미를 덧칠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은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너무 열성적으로 소설성에 매몰된 나머지 너무 많이 나아가면 안 된다. 작가는 상상력을 최소한으로 발휘해야 하고 상상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색안경으로만 역사를 보아서는 안 된다. 작가는 역사를 사유화하고 개인적 취향에 맞추거나 감상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 견강부회해서도 안 된다.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가 사용하는 렌즈는 올바르고 타당해야 한다. 그는 역사를 결에 따라 읽지 않고 결을 거슬러 읽고 해석 재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소설은 발표된 이후 60년 동안이나 명작소설로 회자되고 있지만 정통 역사소설의 한계 또는 경계선을 너무 많이 벗어난 것이다.

역사와 역사소설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일구, ‘역사와 허구의 경계: 교실에서 역사소설 혹은 시대소설 가르치기.’, 소현숙, ‘‘문학을 통해 보는 역사’와 ’‘역사를 통해 보는 문학’ 사이의 거리’, 김치수, ‘역사와 역사소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박진, ‘역사 서술의 문학성과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향’, 박상익, ‘이광수 초기 역사소설의 허구성 연구’, 주민재, ‘가상의 역사와 현실의 관계’, 강미정, ‘1930년대 역사문학론의 관점에서 본 사화와 야담, 역사소설의 거리’,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새 민족문학사 강좌」에 나오는 박현수의 ‘1920년대 소설의 등장과 전개’, 채호석의 ‘1930년대 장편소설과 리얼리즘’, 김종욱의 ‘식민지근대성과 모더니즘 문학’, 윤대석의 ‘1940년대 국민문학’, 한수영의 ‘식민지, 전쟁, 그리고 혁명의 도상에 선 문학’ 등 참조.

다만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은 인용 원용을 삼가하겠다. 그 책은 지금부터 거의 백 년 전에 쓰인 것이어서 현재의 역사적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더욱이 저자 게오르그 루카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그 책은 너무나 맑스주의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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