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설득, 전향 轉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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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는 연신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여기저기 흩어지고 독한 술 냄새가 퍼지면서 공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어지간히 술을 마셨는데도 둘 다 술에 취한 기색은 전혀 없다. 그들의 이러저러한 대화는 당초 예상한 것보다 점점 훨씬 깊은 곳까지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은 많이 이야기했지만 정작 중요한 사항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고 있었다. 국장은 크리스털 재떨이에 반쯤 남은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을 스트레이트로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부끄러운 과거 역사이지만 옛날 일이야. 지금은 아니라니까…… 우리는 환골탈태에 가까우리만큼 많이 바뀌었어. 변명은 아니야. 그래도 남쪽은 민주주의이니까 틀린 걸 바꿀 줄 안다니까. 국가적이건 사회적이건 어느 정도는 양심이랄까 정의가 살아 있는 거야. 그게 북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야.”
“시대가 바뀌면 다시 부활하겠죠. 역사는 반복하니까요. 아우슈비츠는 북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아직도 세계 도처에 숨어있을 거라고요.”
“그래도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단 3년 동안만 운영되었던 데 반해 북한의 수용소는 50년째 운영되고 있단 말이지. 정권이 망할 때까지 존속하겠지. 북한에서 탈출한 강철환의「수용소의 노래」, 신동혁의 「세상 밖으로 나오다」, 안명철의 「완전통제구역」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증언을 했으니까 정치범수용소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지.
강철환이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의 독가스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치 독일에 반항하지 못했던 이유와 오늘의 북한 현실은 너무나 똑같다’고 말했어. 그리고 인민군 중령 출신으로 18호 수용소를 탈출했던 김용이나 김혜숙 등이 수용소의 비참한 실정을 낱낱이 증언한 거야.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국장님이 지금 용서해주신다면…… 제가 욕을 한 번 해주고 싶군요.”
“실컷 해 보라고…… 욕을 하면 뭔가 가슴 속에 응어리져서 막혔던 게 풀릴지도 모르지.”
“너희들은 쥐굴에서 대가리를 내민 박멸의 대상이야. 배신자들이라고…… 변절자들이라고.”
“그게 무슨 욕다운 욕이라고 할 수 있겠어?”
“왜곡 과장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돌미륵도 앙천대소할 나발’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자신들의 탈북 동기를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과장이 필요했을 겁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현재 남한에서 떠도는 북쪽 이야기는 너무 과장 왜곡되었거나 잘못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에 대해 많은 오해가 생기고 뿌리 깊은 편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걸 전부 진짜 사실로 알고 있단 말이야. 무조건 믿는단 말이지. 북쪽 이야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 버린다니까.”
“탈북자들은 지독한 거짓말을 하고 있죠. 신동혁이란 자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알려진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탈북자라고 증언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단 말입니다. 그리고 14호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모의하다 들켜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다고 충격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떠할까요?
그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14호가 아니라 18호 수용소에서 생활했습니다. 18호는 일반 범죄의 수용소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동혁은 자신이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수용된 것이고 신동혁의 어머니와 형이 처형된 이유는 탈출 모의가 아니라 살인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했다면 사형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까.
탈북자들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할까요? 그건 순전히 돈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인권단체나 종교단체들이 있습니다. 증언이 잔혹할수록 띄워주는 언론이 그들이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긴단 말입니다.
탈북자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출연료를 받고 방송국에서 준 각본에 따라 증언을 합니다. 탈북자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 시간에 앉아 있기만 해도 돈을 주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신앙 간증을 하면 돈을 더 많이 줍니다. 그래서 남한에 내려온 탈북자들 대부분이 개신교 교회에 나간다고 하죠.
기자나 연구자들에게 북한 관련 증언을 해도 보수가 지불됩니다. 원칙은 하나입니다. 그런 증언이 더욱 끔찍할수록 비싸다는 것입니다. 공포의 무게에 비례하는 금전거래는 극적인 것을 갈구하는 기자들, 그리고 소위 북한 인권 활동에 돈을 대려는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과장이 심했다고? 심한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어.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정찰용 인공위성이 촬영해서 구글 지도에도 나오는데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만천하에 드러났다니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민들에게 어느 정도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사불란한 통치가 불가능합니다.”
“틀림없이……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전향해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약하는 게 어때? 북한 인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활동하고 있지. 그들 중에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진짜 단체도 있으니까.”
“저에게 그런 의지와 용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일이 아닐까?”
“그런 운동에는 인민들의 호응이 중요한데 아직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죠. 북한 주민들은 지금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 이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라고. 악마들을 위해서 귀중한 목숨을 버릴 건가? 생명은 귀중해. 사랑도 귀중하고.
그런데 당신은 소모품에 불과해. 다시 말하면 헌신짝이라니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거야?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협력하지 않으면 젊은 청춘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걸.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라고.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단 말이지.
배가 고파서 쥐를 잡아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라는 말일세.
우리가 그걸 보장해줄 수 있지. 집도 마련해줄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도 시켜줄 거야. 남남북녀라고 했지만 남쪽에도 빵빵한 여자들이 많이 있지. 그리고 의식주 같은 거는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북에서 내려온 어리숙한 촌놈이 어떻게 그런 영리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날라리 아닌가요?”
“모두가 날라리는 아닐걸. 착하고 좋은 여자도 있을걸.”
“인간답게 살라고 말씀하시니까 국장님은 어느 쪽인가요?
진보적인가요? 보수 반동적인가요?”
“정보부 쪽에서 일하면 당연히 보수 반동적이지 않겠어.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만 인간 운운하는 게 아니야.
이건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관한 문제인 거지.”
“공작원이건 간첩이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간첩이란 게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그때부터 생긴 아주 오래된 직업이긴 합니다만. 처음에는 밀정이었을 겁니다. 그게 간첩으로 진화한 것이죠.”
“우리 솔직하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니까……”
“뭘 말씀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스파이는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예민한 감각으로 늑대인지 개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하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는 어둑한 석양 무렵을 가리키는데 그때는 저만큼에서 다가오는 짐승이 우리 편 개인지 적군인 늑대인지 구별이 안 된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스파이가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는 거야. 먼저 의심하고 나서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모든 게 두려워.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 셔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 무슨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밖을 나가면 미행이 두렵단 말이지. 거기다가 임무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서는 예민한 동물적 후각이 필요해. 그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뎌지긴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합신센터에서 충분히 증명했지. 조사관들이 치를 떨 만큼 끝까지 괴롭혔으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야.”
“국장님도 수사관을 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온갖 악독한 짓을 했던 거…… 아닙니까? 합신센터의 그들 모습이 떠오르네요. 거기는 악마의 소굴이에요.”
그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얼굴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고 붉으락푸르락했다가 평온을 되찾았다. 국장이 담배를 빨아들일 때 담뱃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연기를 내뿜고는 바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평정심을 되찾고 생각한다. 나와는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만…… 인생의 대선배니 스파이 세계의 대선배니 하면서 운운할 수는 없다. 무슨 자격으로…… 나는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지금도 여전히 지독한 후유증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말이다. 벌써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모습이다. 나는 지금 그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차가운 침묵으로 대응할 수도 없다. 대화와 설득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건 냉혹한 거래가 아니라니까. 너무 격식을 차릴 수도 없고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도 안된다니까. 하여간에 어려운 상대야.
“그러지 말게…… 나는 그쪽 현장에서 직접 뛰지는 않았어.”
“그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수 없다는……?”
“계통이 완전히 달랐어. 나는 정통 공작원 계열이고 수사나 조사는 별도의 팀이 담당했어. 그들은 법률 전문가로서 특별사법경찰관 자격이 있단 말이지.”
“제가…… 어쨌거나…… 다시 말씀드리면 결국 실패했지요. 제가 그렇게 나약한 인간인지 깨닫고는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계속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내가 말이야……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하자면…… 그 시절 단둥과 연길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에는 남몰래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지. 어쩔 수 없었어. 그런데 술을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점점 우울해져…… 술은 말 그대로 마취제인데…… 그게 시원찮으니까…… 닥치는 대로 돈을 주고 탈북녀들과 잠을 자고 마리화나를 했지. 거기서는 그걸 구하는 게 아주 쉬웠거든.”
“화려한 시절을 보냈군요.”
“그 때문에 본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 전역을 당할 뻔했지.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네. 우리는 중령까지도 현장에 투입되고 대령이 돼서야 일선을 떠나게 되어있는데…… 그쪽에서는 진급할 가망이 없었지.
어떻게 해서…… 운 좋게 이쪽으로 옮겨온 거지.”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지금부터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라니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춘인데. 청춘은 아름다운 거라네. 하지만 청춘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는 오지 않지. 내가 스파이 출신이니까 당신을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지.
나는 스파이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없었어. 그냥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전문직 직업이었을 뿐이야. 그 직업의 특성상 스파이는 언제든지 악과 타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매국노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애국자일 수도 있는 거야.
우리는 본부 조직의 관점에서는 한낱 먼지 같은 하찮은 조직원에 불과하지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장기판의 졸도 아냐. 하지만 우리도 엄연히 인간이야. 누가 인간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니까.
우리도 인간이니까 환하게 웃을줄 안다고. 그렇다고 웃으면서 살인을 할 수 있는 인간도 아니야. 그건 사이코패스같은 전문 킬러가 하는 짓이지.”
“저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도 진정한 공작원 출신이야. 나는 겉으로 보이는 내가 아니었어.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쪽에서 신용 불량자가 되어서 몇 가지 사기행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온 것으로 신분 세탁을 했어. 무대는 단둥과 연길이었어.
거기는 최일선이야. 그때 정보사 소속 대위였는데 공작원들은 식당이나 가라오케, 숙박 시설을 이용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북쪽 정보원을 포섭하는 일을 했어. 그곳에 나와 있는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이나 국경 지역을 들락거리는 보따리 장수들이 대상이었어. 하지만 그런 건 하찮은 거였어.
진짜 내 임무는 아주 위험했단 말이야.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지. 비밀리에 접선할 때의 긴장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지.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 고위급 인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는 거였어. 우리가 오래전에 찍어두었던 인물이었지.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했을 때 탈북을 권유하고 안전한 루트를 제공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두고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지. 그런 후 우리는 손을 끊은 거야. 그 사람과 가족의 안전이 너무나 염려되었단 말이지.”
부모는 모두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었다. 아직도 김해에는 당숙과 그들의 자손이 살고 있고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 있다. 그들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베나 도쿠시마 쪽에서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았지만 종전이 된 후 ‘조선인 부락’이라고 불렸던 오사카 이카이노에 정착했다. 그곳은 일본 속 작은 제주였다.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골목을 걷다보면 오사카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한국말 억양의 오사카 사투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어머니는 쓰루하시역 도매시장에 붙어있는 조선시장에서 내장과 족발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정육점을 했고 아버지는 조총련 오사카 본부에서 간부로 근무했다.
그는 외아들로 늦둥이였다. 조총련계 고등학교인 오사카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니카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가서 ‘조국 방문의 현관’이라고 불렸던 원산항에서 내린 후 평양으로 갔다.
그는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 덕분에 평양의 ‘조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평양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곧바로 노동당 대외연락부에 들어가 처음에는 일본과 조총련을 담당했다. 그는 모종의 임무를 띄고 가끔 단둥으로 출장을 나갔고 어떤 때는 몇 개월씩 머무르기도 했다. 그때가 과장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내 임무는 까딱 잘못하면 그쪽 역공작에 말려들 수도 있었고, 만약 방첩팀에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버리니까 그때부터 내 자신이 놀랄 정도로 변하기 시작하더군. 그랬다니까.”
“연길은 북쪽이건 남쪽이건 모든 정보기관들의 공작 거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불과 일주일 남짓 체류했습니다만 이미 연길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하고 검토했었습니다.”
“거기는 북쪽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어. 중국 공안들과 북쪽 요원들이 쫙 깔려 있단 말이지. 그들의 임무는 그쪽에서 활동하는 남쪽 요원을 잡아서 납치하는 거였어. 여의치 않으면 감쪽같이 죽여서 숲속 빈터에 암매장할 수도 있었지. 그들에게는 공공연히 살인 면허가 있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잠을 잘 때도 옆에 권총이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스파이는 베개 아래 총을 숨기고 잠을 자는 줄로 오해하지만 잠을 잘 때는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아두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상황이 벌어지니까. 권총을 맨날 분해해서 닦고 기름칠을 했다. 손잡이는 원래 촉감이 조금 거칠었지만 닳고 닳아서 매끈해졌다. 분신이나 다름없었는데 규칙이 그러니까 자리를 옮기면서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권총이란 게 묘한 거였다. 성능과 다른 무엇이 반비례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능이 좋으려면 권총의 부피가 커야 하니까 숨기거나 휴대하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 반대이면 성능을 많이 줄여야 하고.
“누구보다도 잘…… 백발백중 명사수 아닙니까. 제가 초보자일 때 조교는 항상 두 손으로 사격하라고 강조합니다. 오른손으로 총을 꽉 잡고 왼손은 탄창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거 헛소리예요. 자세가 잡히지 않아서 속사가 불가능해요.”
“그게 참으로 묘한 일이야. 긴장의 연속인 일선 업무에 애착이 가면서도 은근히 후선으로 가고 싶은 거야. 이중적 감정이 일어나는 거지. 우리 임무는 감정의 배출구가 없으니까 가혹한 정신노동이면서 육체노동인데 말이야. 나이가 들수록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더라고. 난 지금 퇴직 직전이지.
내가 그 험한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 왔는지…… 계급정년을 기다리면서 쓸데없이 버티고 있는 셈이라네.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공무원 연금이 나오니까. 세월이란 게 참 빠르지 않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거든.”
“별 탈 없이 무난히 은퇴하신다고 하니까……”
“당신이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온갖 위험한 일만 시키고 나서 이제는 쓸모가 없으니 그냥 나가라는 게 아닌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데 이 험한 세상 속으로 내던져지는 기분이야.”
“왜 그런 말씀을…… 유도 신문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정통 직업 스파이는 표리부동의 능력을 무한대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은퇴하고 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거니까. 진즉 안 쫓겨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한직에 있으면서 자리나 지키고 있으니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지. 우울하니까 충동적으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니까 더욱 우울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남몰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알코올 의존증이 되었다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진탕 마셨다가 다음 며칠 동안은 술이라면 진저리를 쳤지.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게 밤새 술을 퍼마시고 거리에서 쓰러져 잠들었다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면……. 술을 끊으려고 아니면 조금 줄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려고 노력을 해도 불가능하단 말이야. 그러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어.”
“술 대신 골프를 치시면…… 그게 신선놀음 아닌가요?”
“웬만하면 모두들 골프를 치지만…… 여기서는 골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품이거든. 하지만 한가하게 골프치는 게 탐탁지 않았네. 그건 출세 지향주의자들이나 하는 거야.”
“국장님은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스파이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니까 중독에 빠질 것 같진 않은데요?”
“뭔가 오해하고 있구만…… 우리의 내면은 의외로 허약하지. 우리가 별난 세계에 사는 별종의 인간일까? 보통 사람의 욕망, 생각, 감정을 모르고 사는 현실 도피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삶을 증오하고 삶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을까? 그렇다고…… 무슨 범죄자처럼 이제 과거의 일에서 손을 씻었다고…… 후회하면서 참회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야.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네.”
“저희는 보통 사람들이 겪는 인생역정과는 완전히 다르긴 합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스파이 판타지가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이번 공작을 성공해서 북으로 귀환하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게 되고 영웅 메달과 영웅증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게 되겠지. 그리고 잘하면 대좌로 은퇴할 수도 있겠지.
본부에서 은퇴하고 나면 연금이 나오겠지만 그 연금이 쥐꼬리만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결국 장마당으로 내몰리겠지. 그게 바로 거지 생활 아니겠어.
당신 장마당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이미 실패했지 않은가. 탈북자를 가장했지만 남파 간첩이라는 게 탄로났단 말이야. 김상빈이 아니라 심학무라는 게. 처음에는 가짜 이름을 댔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막다른 궁지에 몰리니까 진짜 이름을 댔단 말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신은 약간 고지식하다고 되어있어.
그런데 그런 성격은 공작원에 어울리지도 않고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정치싸움에서 성공할 수 없는 거야.
당신은 신체 건강하고 공부를 잘했으니까 뽑혔겠지만 본부에서 사람을 잘못 뽑은 거지.”
“북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뽑아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갑산 촌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요.
양강도 군사동원부의 군관이 학교에 왔을 때 저의 운명은 그때 벌써 결정되어 버렸지요.”
“옛날 KGB는 물론이고 CIA도 마찬가지인데 비밀 정보부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겉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것처럼 가장하지.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굳어있어서 웃을 줄을 모르거든. 유머 감각이 아주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지. 엄숙주의자인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긴 해. 군대 이상으로 규칙이 엄격하고 상명하복 관계이니까.
전문 스파이라면 그걸 넘어서야 하는데 당신은 아니었어. 어딘가 단단히 굳어있는 거야. 스파이는 변신하는 데 능수능란해야만 하니까 이럴 때는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럴 때는 저런 사람이 되고, 또 다른 데에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하지. 어려운 일이긴 하지. 즉석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도 잘 해야 하고. 그걸 완전하게 숨길 수 없으니까 만나보면 어딘지 모르게 표시가 나는 거야. 우리는 동업자니까 본능적인 직감에 의해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연습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나이가 들어야 하지. 삶의 여정을 잘 살펴보면 나이가 사십은 넘어야 될걸. 그리고 여자를 알아야만 되지. 여자의 은밀한 마음과 함께 음탕한 육체를 알아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거야.
여자에게 내 거시기가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 여자를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니까.”
“국장님도 지나치시군요. 저를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고 있어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여자는 몸으로 말하는데 그게 무언극이지. 여자는 수십 가지 무언극을 할 수 있다네.”
“저도 남자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거든요. 여자의 미소, 여자의 촉감, 여자의 속삭임, 여자의 향기 등을 모두 알고 있다고요. 여자의 신음소리도…… 여자의 온몸 어디든지 어루만질 수 있단 말입니다. 탐스러운 젖가슴, 아랫배, 엉덩이, 촉촉한 사타구니를……”
“ㅎㅎㅎㅎㅎㅎㅎ”
“왜 웃으십니까? 제 말이 믿어지지…… 비웃는 겁니까?”
“당신 얼굴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한창 젊은 시절 내내 전투원으로 그다음에는 공작원으로 계속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으니까 여자를 만나서 연애할 시간이 나 제대로 있었겠어?
총각 딱지를 뗄 시간도 없었을 거라고?”
“왜 그러세요. 아무렴 연애할 시간마저 없을라구요.
그날 밤 그녀가 말했었지요. ‘당신 벌써 다섯 차례나 제 몸속으로 들어왔단 말이에요. 아직도 모자라세요’”
“정말 그렇단 말이지……. 중국 땅에서 아름다운 평양 여자와…… 황홀한 밤이었군. 그렇다면 벌써 여자 뱃속에서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애정 소설에 쓰여 있는 걸 언젠가 써먹으려고 달달 외운 거 아닌가?
북한 공작원들은 달달 외워야 할 게 참으로 많지 않은가.”
“아무리…… 그런 것까지 외우지는 않습니다.”
“그 여자는 신체검사 결과 임신을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여자가 그랬어요. 탈북하면서 성폭행을 당할 거에 대비해서 몸속에 뭘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랑의 포로가 되거나 비극의 주인공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거야. 미쳤어?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는데…… 그 정도 미인이면 남쪽에서 훨훨 날아다닐 거야.”
“미련을 버리라는……”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궁박한 처지에서 사랑하는 척 하면서…… 쇼를 한 거지.
이제부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본부에서 출세하려면 3층 서기실의 빽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옛날 함경북도 갑산 산골 촌놈 출신이야. 오죽했으면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지금 당신에게는 아무리 찾아봐도 연길에서 중국집 하는 아저씨밖에 없어. 이름이 아마 심한준이 아니었던가? 하여간에 그 양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음식점 주인이 무슨 힘이 있겠어. 호구증이 있으니까 중국 동포 행세를 하면서 중국 쪽 통행증 발급사무소에서 쉽게 국경통행증명서를 발급받은 거지. 그걸 이용해서 북한산 도자기, 냉동 노루고기, 송이버섯 등을 중국에 내다 파는 밀무역에 종사했서 돈을 모았지.
그런데 상당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더라고. 그러고 나서 그쪽에는 깨끗이 손을 털고 중국 식당을 시작했는데 그게 아주 번창한 거야. 우리가 알아보니까 당신 아저씨는 술 좋아하고 원만한 사람이지만 그뿐이지. 그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야.
남한에 여러 번 왔다 갔는데 조사해보니 용의점은 없었어.”
“아저씨는 핏줄이 무엇인지…… 저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염 국장은 같은 공작원 출신이어서 대화가 깊어질수록 연민의 정을 느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너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오래전 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거야.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기어나오고 있는 거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할 것인가. 인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너는 국가에 의해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도 소모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너가 파괴되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 너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화의 숨은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던가. 나는 적군이 아니야. 아무리 어둠 속을 헤매고 있어도 그걸 알아야지. 젊음이 안타까울 뿐이야. 젊음은 찬란한 꿈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없었단 말이야. 인생을 허송세월한 거지. 너의 신념, 의지, 자존심, 그런 거 전부 헛거야. 스스로 자신을 지키라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게 내가 퇴직하기 전 마지막 임무이다. 나에게 부과된 엄숙한 소명이다. 하지만 너는 먼저 전향하고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다. 내곡동 본부는 협상할 권한을 제한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이번 임무에서 이미 완전히 실패했어.
가령 기적적으로 여기를 탈출해서 북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도 말이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물론 전후 사정을 엄중하게 조사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 대접을 받을 수도 있어. 왜, 자결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돌아왔냐고 하면서 배신자 취급을 할 수도 있어. 그냥 불명예 제대를 시킬 수도 있겠지. 아니면 강제수용소가 기다릴 수도 있어. 당신은 수용소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으니까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거야. 다시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걸.
또 다시 가정을 해 보자고. 당신이 이번 임무에서 성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금의환향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런다고 모든 게 술술 풀릴까?
내가 생생한 실례를 들을 수 있어.
이 사건은 아마 본부에서 쉬쉬했으니까 교육 과정에서 틀림없이 빼놓았을 거야. 공작원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지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고첩은 진즉 전향했고 그를 접선하러 간 공작원 역시 전향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까발려서 교육할 수 있었겠어. 그러나 그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북에서 하는 일이 늘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가요?”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김동식이라는 남파 간첩이 있었지. 물론 가명이야, 나는 본명을 모르고 있는데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야.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쪽은 완전히 개방사회니까 쉬쉬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았지.
올해 3월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그는 1990년 1차 침투에서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거물 고정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대동 월북했었지.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어야 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곱 털끝만큼도 없는 자식들이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한테 떠넘기면서 책임을 지길 싫어하지. 남이 공을 세우면 시기 질투하고 실패하면 이리 떼처럼 달라붙는 거야. 그게 바로 관료주의야.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불문하고 관료주의의 병폐란 말이지.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지. 어떤 조직이건 질투를 하거나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야. 물론 사람들은 원래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1995년인가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 간첩 ‘봉화1호’를 접선하고 주사파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그를 접선하기 위해서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무가내로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1호와 접선하려고 부여의 정각사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우리는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교육 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들으면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요할 텐데요.”
“공산주의는 배신자이건 변절자이건 엄청 증오하면서 싫어하지. 복수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지. 물론 복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복수를 꿈꾸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사람의 가슴 속에 숨겨 둔 복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건 없는 거지.
정찰총국장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황장엽을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지금쯤은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태기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영도자이신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을 거 아닌가?”
“국장님께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을 거 같은데요?”
“또다시 옛날얘기를 해야 되겠군……
이수근은 탈북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거물 인사였어. 그 당시 남쪽에서는 그가 판문점을 거쳐 극적으로 귀순하자 영웅 대접을 한 거야. 그러나 남쪽 역시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천국은 아니었거든.
다시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지. 홍콩을 거쳐서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갔는데 거기서 마지막 순간에 붙잡혔어. 아주 아슬아슬했지. 홍콩에서는 실랑이를 벌이다 가발이 벗겨지고 가짜 수염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그렇지 뭐…… 그 당시 중정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난리가 났지. 위장 귀순으로 의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밀착 감시를 했어.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서 내려왔는데 숨이 막혔을 거라고. 그때 감찰실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파면되었어. 그러고 나서 온갖 폭력과 고문을 행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바로 사형시켜 버렸어.
그는 재판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거니까 얼마나 시원했겠어. 북에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는 말로가 그렇게 된다고 선전했어. 남쪽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하늘이 처벌을 내린 거라고 했지. 남조선은 절대로 배신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 당시 그 사건의 총 지휘자는 누구였죠?”
“그때는 정보부장이 김형욱이었어. 그 사람이 이수근을 고문으로 조작해서 사형을 시켰던 장본인이야. 그 역시 나중에 비명횡사했다네.”
“세상은 돌고 도는군요.”
“그렇다네……”
“그건 합법을 가장한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암살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법률이라는 위장막 없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 테러만 있고 백색 테러는 없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지.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세요.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인혁당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건 테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행위 아닌가요? 국정원에 암살팀은 없나요? 최신 독극물인 노비초크를 몰래 들여와 사용하는 독극물팀은 없나요? 특수도청팀이 있지 않나요? 모든 첩보기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직 아닌가요?”
“…… 계속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고 있구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
비밀첩보기관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야. 엄지손가락이나 검지손가락이 하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몰라야 하는 거야.”
“왜 애매한 말씀만 하십니까? 저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습니다만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여섯 개의 건물이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건물 중에서 비밀스러운 장소 또는 별도 안가 어디에서 그 팀은 극비리에 활동하겠지요.”
“우리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야. 자기 방어적인 경우에 한해서 불가피한 수단인 거야. 그쪽은 아주 편리할 거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당을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아전인수격이란 말입니다. 아주 괴상한 논리군요. 이번 암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정보활동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결과만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는 거지. 첩보전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차이가 없어.”
“소련 KGB는 암살을 ‘적극적 조치’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암살이 아니라 처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지요.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인간에게 총을 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수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거 아니겠어. 이스라엘의 ‘모사드’ 이야기로 대신하겠어. 모사드는 세계의 모든 특수기관의 모델이야. 우리 언론은 국정원더러 왜 모사드처럼 하지 못하냐고 해. 그래서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모사드가 나와. 모사드의 작전 부서 중에 ‘메차다’가 있는데 이게 암살, 납치, 폭파 전문이야. 산하에 ‘단검’이라는 의미의 ‘키돈’이라는 암살 전문 조직이 있지.
그들의 표어가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이지. 그렇게 해서 모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2,700번이나 암살 작전을 수행했어. 아랍 측에서는 ‘살인기계’라고 비방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사드는 틀림없이 살인 기계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담하지.”
“공산주의 세계의 배반과 복수라는 위대한 전통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게 더 떳떳한 거 아닐까요?”
“이스라엘과 북한은 반공개적으로 국가가 테러리즘을 주도하고 있고, 당신은 도구로 이용된 테러리스트란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테러는 실패했어.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너무 서두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어.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단 말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조급하게 굴어가지고 수없이 실패한 경험이 있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겠어.
그 당시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의 보고서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종합한 거야. 지금은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네. 어쨌거나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안전핀을 빼서 던지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강민철이가 안전핀을 빼자마자 바로 그 순간 터져버려서 팔 하나를 잃었고 여동생에게 선물하려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바로 터진 거야. 그 순간 강민철은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강민철은 철석같이 믿었던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를 느끼고 절망했기 때문에 모든 걸 불어버린 거야.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야.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를 수도 있겠지. 북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거야.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배신하고 내팽개치면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휴전선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염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도구로 이용당하면 억울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반발심이 생길 거라고. 아무리 공작원이라고 해도 말이야. 공작원도 인간이라니까.”
“……”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반드시 복수가 필요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복수는 인간의 특성이니까 어쩔 수 없어. 죄와 벌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이지.”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심학무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성급하게 술을 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내 남은 일생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지금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결국 완벽한 자백, 밀고, 배신, 적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문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지 말고 허위 자백을 하지 말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하지만 자백과 밀고는 애초에 떼려야 뗼 수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지 혹은 공범자를 밀고하는 것은 자백의 필수 사항이다 (우리 속담에 ‘고자쟁이가 먼저 죽는다’ 고 했지만 말이다). 동지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다.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대남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오면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과 접선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로부터 공작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공작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작원은 본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하고 고첩은 그동안의 공작 내용을 보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 동지이고 공범자이다.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적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해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해서 박사까지 딸 수 있다고.
남한에는 지금 현재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사회학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탈북자 박사가 있단 말이지.
탈북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어.
그게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소원 아니던가?”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죠?”
“먼저…… 합신센터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하자고. 하나원에 입소해서 거기서 외박을 나가 북경과 연락하는 거야. 그런 절차는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조금도 신경쓸 거 없어.
그리고 접선할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북경의 지시에 따라 접선 장소에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고첩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세밀하게 지시할 게 아니겠어. 우리에게는 그 고첩이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는군요. ‘봉화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말이야……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중정의 노련한 요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고첩과 접선하는 순간 덮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진행되겠지.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는 김상빈이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치밀한 정보망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고첩의 정체를 마침내 밝혀내서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단 말이지.
그렇게 언론에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면책이 되는 거지.
본부는 당신을 비난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이군요. 결국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잡기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남쪽에서 말하는 ‘독 안에 든 쥐잡기’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오랫동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북에는 처자식이 엄연히 살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거지.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게 아니야.”
“저에게도 미래가……? 간첩도 인간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까 지쳐있습니다.”
“아직 젊었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국가보안법 제16조는 이런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20조는 공소제기를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작원이건 전투원이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어. 위험한 임무이니까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 일이 너무 다반사로 일어난다니까. 공작원은 오랜 기간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만 하니까 한 사람의 요원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 말이지.”
“그쪽……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적으로 공작원으로는 안 만들지요.”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대남 공작원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어요. 공작원과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교관들과 선배들은 항상 ‘자폭’이니 ‘자결’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두려웠지요. 꿈을 꾸면 악몽을 꾸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무슬림의 지도자들 말이야…… 그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자식은 애지중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사회 밑바닥 출신 어린애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묶어서 자폭 테러를 일삼는단 말이지.
본부는 당신을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황장엽 선생도 남으로 망명하니까 처가 바로 그날 자살했지.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
“그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습니다. 평양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박정아가 무슨 말을 했죠? 합신센터에서는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기소하면 그것만으로도 10년 넘게 살 수 있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서는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여자가 다 불었어. 성관계나 술 마신 거, 마약한 거 말이야.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조사관이 가만두지 않았지. 그게 강간한 거로 돼 버렸어.”
심학무가 얼굴을 찡그렸다. 술잔 속에 반쯤 남은 마지막 술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국장님은 결혼은 하신 겁니까? 애들은 있습니까……?”
“젊은 장교 시절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했었지. 아내는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어. 내가 공작원으로 있으면서 맨날 출장 다니고 연장 근무하고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니까 아내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지. 임무 수행이 불규칙적이니까 인생살이도 점점 불규칙해졌단 말이지.
애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합의 이혼했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외롭겠지만 혼자여야 했지. 벌써 오래전 일…… 재혼은 하지 않았어.
진짜 스파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늘 절대적 사랑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야. 한번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란 게 마취제 비슷해. 스파이에게 진짜 사랑은 무서운 독이야. 그러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니면 배신하거나.”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네. 거의 죽을 뻔한 거지.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인 것인지도 몰라.”
“국장님은…… 진짜 하고 싶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남북분단의 문제이고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우리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남북 모두 파멸이 있을 뿐이야. 평화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법원은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사형을 때릴 수도 있어. 아니면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젊은 청춘을 감옥 속에서 그렇게 썩히면 되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실제 조사해보면 장기수 중에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 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말입니다.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겠지요.”
국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 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거의 없었다니까. 그때 남쪽 경찰관 두 명이 순직했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심학무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맞춤을 피한다. 눈을 감는다.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다. 말을 더듬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결정을 내리기가……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북경은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버스가 떠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네.”
“두렵습니다. 두렵단 말입니다.”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또 다른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유다는 결국 자살했어요.
황장엽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다시 배신자가 된다면……?”
“이건 절대로 배신의 문제가 아니야.”
“저는 또다른 배신자가 되고 싶지는……?”
“북에서는 예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를 극도로 두려워하지. 그래서 함부로 쓸 수가 없지.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할렐루야! 할렐루야!”
심학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웅얼거린다.
“국장님이…… 할렐루야를……”
“난 처음부터 무신론자야.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또다른 신앙이긴 하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대한 불가지론자로 변했지. 아마 제한적인 범신론에 가까울 거야.
가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살면서 신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신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신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생명과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알아야 할 거야. 내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신을 말하는 거니까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거지. 누구도 신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믿어야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어……”
“부끄러운 과거 역사이지만 옛날 일이야. 지금은 아니라니까…… 우리는 환골탈태에 가까우리만큼 많이 바뀌었어. 변명은 아니야. 그래도 남쪽은 민주주의이니까 틀린 걸 바꿀 줄 안다니까. 국가적이건 사회적이건 어느 정도는 양심이랄까 정의가 살아 있는 거야. 그게 북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야.”
“시대가 바뀌면 다시 부활하겠죠. 역사는 반복하니까요. 아우슈비츠는 북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아직도 세계 도처에 숨어있을 거라고요.”
“그래도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단 3년 동안만 운영되었던 데 반해 북한의 수용소는 50년째 운영되고 있단 말이지. 정권이 망할 때까지 존속하겠지. 북한에서 탈출한 강철환의「수용소의 노래」, 신동혁의 「세상 밖으로 나오다」, 안명철의 「완전통제구역」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증언을 했으니까 정치범수용소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지.
강철환이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의 독가스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치 독일에 반항하지 못했던 이유와 오늘의 북한 현실은 너무나 똑같다’고 말했어. 그리고 인민군 중령 출신으로 18호 수용소를 탈출했던 김용이나 김혜숙 등이 수용소의 비참한 실정을 낱낱이 증언한 거야.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국장님이 지금 용서해주신다면…… 제가 욕을 한 번 해주고 싶군요.”
“실컷 해 보라고…… 욕을 하면 뭔가 가슴 속에 응어리져서 막혔던 게 풀릴지도 모르지.”
“너희들은 쥐굴에서 대가리를 내민 박멸의 대상이야. 배신자들이라고…… 변절자들이라고.”
“그게 무슨 욕다운 욕이라고 할 수 있겠어?”
“왜곡 과장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돌미륵도 앙천대소할 나발’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자신들의 탈북 동기를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과장이 필요했을 겁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현재 남한에서 떠도는 북쪽 이야기는 너무 과장 왜곡되었거나 잘못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에 대해 많은 오해가 생기고 뿌리 깊은 편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걸 전부 진짜 사실로 알고 있단 말이야. 무조건 믿는단 말이지. 북쪽 이야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 버린다니까.”
“탈북자들은 지독한 거짓말을 하고 있죠. 신동혁이란 자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알려진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탈북자라고 증언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단 말입니다. 그리고 14호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모의하다 들켜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다고 충격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떠할까요?
그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14호가 아니라 18호 수용소에서 생활했습니다. 18호는 일반 범죄의 수용소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동혁은 자신이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수용된 것이고 신동혁의 어머니와 형이 처형된 이유는 탈출 모의가 아니라 살인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했다면 사형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까.
탈북자들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할까요? 그건 순전히 돈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인권단체나 종교단체들이 있습니다. 증언이 잔혹할수록 띄워주는 언론이 그들이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긴단 말입니다.
탈북자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출연료를 받고 방송국에서 준 각본에 따라 증언을 합니다. 탈북자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 시간에 앉아 있기만 해도 돈을 주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신앙 간증을 하면 돈을 더 많이 줍니다. 그래서 남한에 내려온 탈북자들 대부분이 개신교 교회에 나간다고 하죠.
기자나 연구자들에게 북한 관련 증언을 해도 보수가 지불됩니다. 원칙은 하나입니다. 그런 증언이 더욱 끔찍할수록 비싸다는 것입니다. 공포의 무게에 비례하는 금전거래는 극적인 것을 갈구하는 기자들, 그리고 소위 북한 인권 활동에 돈을 대려는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과장이 심했다고? 심한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어.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정찰용 인공위성이 촬영해서 구글 지도에도 나오는데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만천하에 드러났다니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민들에게 어느 정도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사불란한 통치가 불가능합니다.”
“틀림없이……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전향해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약하는 게 어때? 북한 인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활동하고 있지. 그들 중에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진짜 단체도 있으니까.”
“저에게 그런 의지와 용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일이 아닐까?”
“그런 운동에는 인민들의 호응이 중요한데 아직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죠. 북한 주민들은 지금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 이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라고. 악마들을 위해서 귀중한 목숨을 버릴 건가? 생명은 귀중해. 사랑도 귀중하고.
그런데 당신은 소모품에 불과해. 다시 말하면 헌신짝이라니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거야?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협력하지 않으면 젊은 청춘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걸.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라고.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단 말이지.
배가 고파서 쥐를 잡아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라는 말일세.
우리가 그걸 보장해줄 수 있지. 집도 마련해줄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도 시켜줄 거야. 남남북녀라고 했지만 남쪽에도 빵빵한 여자들이 많이 있지. 그리고 의식주 같은 거는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북에서 내려온 어리숙한 촌놈이 어떻게 그런 영리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날라리 아닌가요?”
“모두가 날라리는 아닐걸. 착하고 좋은 여자도 있을걸.”
“인간답게 살라고 말씀하시니까 국장님은 어느 쪽인가요?
진보적인가요? 보수 반동적인가요?”
“정보부 쪽에서 일하면 당연히 보수 반동적이지 않겠어.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만 인간 운운하는 게 아니야.
이건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관한 문제인 거지.”
“공작원이건 간첩이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간첩이란 게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그때부터 생긴 아주 오래된 직업이긴 합니다만. 처음에는 밀정이었을 겁니다. 그게 간첩으로 진화한 것이죠.”
“우리 솔직하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니까……”
“뭘 말씀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스파이는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예민한 감각으로 늑대인지 개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하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는 어둑한 석양 무렵을 가리키는데 그때는 저만큼에서 다가오는 짐승이 우리 편 개인지 적군인 늑대인지 구별이 안 된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스파이가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는 거야. 먼저 의심하고 나서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모든 게 두려워.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 셔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 무슨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밖을 나가면 미행이 두렵단 말이지. 거기다가 임무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서는 예민한 동물적 후각이 필요해. 그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뎌지긴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합신센터에서 충분히 증명했지. 조사관들이 치를 떨 만큼 끝까지 괴롭혔으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야.”
“국장님도 수사관을 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온갖 악독한 짓을 했던 거…… 아닙니까? 합신센터의 그들 모습이 떠오르네요. 거기는 악마의 소굴이에요.”
그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얼굴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고 붉으락푸르락했다가 평온을 되찾았다. 국장이 담배를 빨아들일 때 담뱃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연기를 내뿜고는 바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평정심을 되찾고 생각한다. 나와는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만…… 인생의 대선배니 스파이 세계의 대선배니 하면서 운운할 수는 없다. 무슨 자격으로…… 나는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지금도 여전히 지독한 후유증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말이다. 벌써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모습이다. 나는 지금 그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차가운 침묵으로 대응할 수도 없다. 대화와 설득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건 냉혹한 거래가 아니라니까. 너무 격식을 차릴 수도 없고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도 안된다니까. 하여간에 어려운 상대야.
“그러지 말게…… 나는 그쪽 현장에서 직접 뛰지는 않았어.”
“그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수 없다는……?”
“계통이 완전히 달랐어. 나는 정통 공작원 계열이고 수사나 조사는 별도의 팀이 담당했어. 그들은 법률 전문가로서 특별사법경찰관 자격이 있단 말이지.”
“제가…… 어쨌거나…… 다시 말씀드리면 결국 실패했지요. 제가 그렇게 나약한 인간인지 깨닫고는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계속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내가 말이야……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하자면…… 그 시절 단둥과 연길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에는 남몰래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지. 어쩔 수 없었어. 그런데 술을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점점 우울해져…… 술은 말 그대로 마취제인데…… 그게 시원찮으니까…… 닥치는 대로 돈을 주고 탈북녀들과 잠을 자고 마리화나를 했지. 거기서는 그걸 구하는 게 아주 쉬웠거든.”
“화려한 시절을 보냈군요.”
“그 때문에 본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 전역을 당할 뻔했지.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네. 우리는 중령까지도 현장에 투입되고 대령이 돼서야 일선을 떠나게 되어있는데…… 그쪽에서는 진급할 가망이 없었지.
어떻게 해서…… 운 좋게 이쪽으로 옮겨온 거지.”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지금부터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라니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춘인데. 청춘은 아름다운 거라네. 하지만 청춘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는 오지 않지. 내가 스파이 출신이니까 당신을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지.
나는 스파이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없었어. 그냥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전문직 직업이었을 뿐이야. 그 직업의 특성상 스파이는 언제든지 악과 타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매국노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애국자일 수도 있는 거야.
우리는 본부 조직의 관점에서는 한낱 먼지 같은 하찮은 조직원에 불과하지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장기판의 졸도 아냐. 하지만 우리도 엄연히 인간이야. 누가 인간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니까.
우리도 인간이니까 환하게 웃을줄 안다고. 그렇다고 웃으면서 살인을 할 수 있는 인간도 아니야. 그건 사이코패스같은 전문 킬러가 하는 짓이지.”
“저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도 진정한 공작원 출신이야. 나는 겉으로 보이는 내가 아니었어.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쪽에서 신용 불량자가 되어서 몇 가지 사기행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온 것으로 신분 세탁을 했어. 무대는 단둥과 연길이었어.
거기는 최일선이야. 그때 정보사 소속 대위였는데 공작원들은 식당이나 가라오케, 숙박 시설을 이용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북쪽 정보원을 포섭하는 일을 했어. 그곳에 나와 있는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이나 국경 지역을 들락거리는 보따리 장수들이 대상이었어. 하지만 그런 건 하찮은 거였어.
진짜 내 임무는 아주 위험했단 말이야.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지. 비밀리에 접선할 때의 긴장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지.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 고위급 인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는 거였어. 우리가 오래전에 찍어두었던 인물이었지.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했을 때 탈북을 권유하고 안전한 루트를 제공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두고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지. 그런 후 우리는 손을 끊은 거야. 그 사람과 가족의 안전이 너무나 염려되었단 말이지.”
부모는 모두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었다. 아직도 김해에는 당숙과 그들의 자손이 살고 있고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 있다. 그들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베나 도쿠시마 쪽에서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았지만 종전이 된 후 ‘조선인 부락’이라고 불렸던 오사카 이카이노에 정착했다. 그곳은 일본 속 작은 제주였다.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골목을 걷다보면 오사카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한국말 억양의 오사카 사투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어머니는 쓰루하시역 도매시장에 붙어있는 조선시장에서 내장과 족발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정육점을 했고 아버지는 조총련 오사카 본부에서 간부로 근무했다.
그는 외아들로 늦둥이였다. 조총련계 고등학교인 오사카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니카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가서 ‘조국 방문의 현관’이라고 불렸던 원산항에서 내린 후 평양으로 갔다.
그는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 덕분에 평양의 ‘조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평양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곧바로 노동당 대외연락부에 들어가 처음에는 일본과 조총련을 담당했다. 그는 모종의 임무를 띄고 가끔 단둥으로 출장을 나갔고 어떤 때는 몇 개월씩 머무르기도 했다. 그때가 과장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내 임무는 까딱 잘못하면 그쪽 역공작에 말려들 수도 있었고, 만약 방첩팀에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버리니까 그때부터 내 자신이 놀랄 정도로 변하기 시작하더군. 그랬다니까.”
“연길은 북쪽이건 남쪽이건 모든 정보기관들의 공작 거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불과 일주일 남짓 체류했습니다만 이미 연길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하고 검토했었습니다.”
“거기는 북쪽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어. 중국 공안들과 북쪽 요원들이 쫙 깔려 있단 말이지. 그들의 임무는 그쪽에서 활동하는 남쪽 요원을 잡아서 납치하는 거였어. 여의치 않으면 감쪽같이 죽여서 숲속 빈터에 암매장할 수도 있었지. 그들에게는 공공연히 살인 면허가 있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잠을 잘 때도 옆에 권총이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스파이는 베개 아래 총을 숨기고 잠을 자는 줄로 오해하지만 잠을 잘 때는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아두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상황이 벌어지니까. 권총을 맨날 분해해서 닦고 기름칠을 했다. 손잡이는 원래 촉감이 조금 거칠었지만 닳고 닳아서 매끈해졌다. 분신이나 다름없었는데 규칙이 그러니까 자리를 옮기면서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권총이란 게 묘한 거였다. 성능과 다른 무엇이 반비례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능이 좋으려면 권총의 부피가 커야 하니까 숨기거나 휴대하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 반대이면 성능을 많이 줄여야 하고.
“누구보다도 잘…… 백발백중 명사수 아닙니까. 제가 초보자일 때 조교는 항상 두 손으로 사격하라고 강조합니다. 오른손으로 총을 꽉 잡고 왼손은 탄창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거 헛소리예요. 자세가 잡히지 않아서 속사가 불가능해요.”
“그게 참으로 묘한 일이야. 긴장의 연속인 일선 업무에 애착이 가면서도 은근히 후선으로 가고 싶은 거야. 이중적 감정이 일어나는 거지. 우리 임무는 감정의 배출구가 없으니까 가혹한 정신노동이면서 육체노동인데 말이야. 나이가 들수록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더라고. 난 지금 퇴직 직전이지.
내가 그 험한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 왔는지…… 계급정년을 기다리면서 쓸데없이 버티고 있는 셈이라네.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공무원 연금이 나오니까. 세월이란 게 참 빠르지 않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거든.”
“별 탈 없이 무난히 은퇴하신다고 하니까……”
“당신이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온갖 위험한 일만 시키고 나서 이제는 쓸모가 없으니 그냥 나가라는 게 아닌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데 이 험한 세상 속으로 내던져지는 기분이야.”
“왜 그런 말씀을…… 유도 신문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정통 직업 스파이는 표리부동의 능력을 무한대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은퇴하고 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거니까. 진즉 안 쫓겨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한직에 있으면서 자리나 지키고 있으니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지. 우울하니까 충동적으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니까 더욱 우울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남몰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알코올 의존증이 되었다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진탕 마셨다가 다음 며칠 동안은 술이라면 진저리를 쳤지.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게 밤새 술을 퍼마시고 거리에서 쓰러져 잠들었다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면……. 술을 끊으려고 아니면 조금 줄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려고 노력을 해도 불가능하단 말이야. 그러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어.”
“술 대신 골프를 치시면…… 그게 신선놀음 아닌가요?”
“웬만하면 모두들 골프를 치지만…… 여기서는 골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품이거든. 하지만 한가하게 골프치는 게 탐탁지 않았네. 그건 출세 지향주의자들이나 하는 거야.”
“국장님은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스파이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니까 중독에 빠질 것 같진 않은데요?”
“뭔가 오해하고 있구만…… 우리의 내면은 의외로 허약하지. 우리가 별난 세계에 사는 별종의 인간일까? 보통 사람의 욕망, 생각, 감정을 모르고 사는 현실 도피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삶을 증오하고 삶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을까? 그렇다고…… 무슨 범죄자처럼 이제 과거의 일에서 손을 씻었다고…… 후회하면서 참회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야.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네.”
“저희는 보통 사람들이 겪는 인생역정과는 완전히 다르긴 합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스파이 판타지가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이번 공작을 성공해서 북으로 귀환하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게 되고 영웅 메달과 영웅증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게 되겠지. 그리고 잘하면 대좌로 은퇴할 수도 있겠지.
본부에서 은퇴하고 나면 연금이 나오겠지만 그 연금이 쥐꼬리만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결국 장마당으로 내몰리겠지. 그게 바로 거지 생활 아니겠어.
당신 장마당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이미 실패했지 않은가. 탈북자를 가장했지만 남파 간첩이라는 게 탄로났단 말이야. 김상빈이 아니라 심학무라는 게. 처음에는 가짜 이름을 댔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막다른 궁지에 몰리니까 진짜 이름을 댔단 말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신은 약간 고지식하다고 되어있어.
그런데 그런 성격은 공작원에 어울리지도 않고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정치싸움에서 성공할 수 없는 거야.
당신은 신체 건강하고 공부를 잘했으니까 뽑혔겠지만 본부에서 사람을 잘못 뽑은 거지.”
“북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뽑아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갑산 촌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요.
양강도 군사동원부의 군관이 학교에 왔을 때 저의 운명은 그때 벌써 결정되어 버렸지요.”
“옛날 KGB는 물론이고 CIA도 마찬가지인데 비밀 정보부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겉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것처럼 가장하지.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굳어있어서 웃을 줄을 모르거든. 유머 감각이 아주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지. 엄숙주의자인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긴 해. 군대 이상으로 규칙이 엄격하고 상명하복 관계이니까.
전문 스파이라면 그걸 넘어서야 하는데 당신은 아니었어. 어딘가 단단히 굳어있는 거야. 스파이는 변신하는 데 능수능란해야만 하니까 이럴 때는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럴 때는 저런 사람이 되고, 또 다른 데에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하지. 어려운 일이긴 하지. 즉석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도 잘 해야 하고. 그걸 완전하게 숨길 수 없으니까 만나보면 어딘지 모르게 표시가 나는 거야. 우리는 동업자니까 본능적인 직감에 의해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연습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나이가 들어야 하지. 삶의 여정을 잘 살펴보면 나이가 사십은 넘어야 될걸. 그리고 여자를 알아야만 되지. 여자의 은밀한 마음과 함께 음탕한 육체를 알아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거야.
여자에게 내 거시기가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 여자를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니까.”
“국장님도 지나치시군요. 저를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고 있어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여자는 몸으로 말하는데 그게 무언극이지. 여자는 수십 가지 무언극을 할 수 있다네.”
“저도 남자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거든요. 여자의 미소, 여자의 촉감, 여자의 속삭임, 여자의 향기 등을 모두 알고 있다고요. 여자의 신음소리도…… 여자의 온몸 어디든지 어루만질 수 있단 말입니다. 탐스러운 젖가슴, 아랫배, 엉덩이, 촉촉한 사타구니를……”
“ㅎㅎㅎㅎㅎㅎㅎ”
“왜 웃으십니까? 제 말이 믿어지지…… 비웃는 겁니까?”
“당신 얼굴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한창 젊은 시절 내내 전투원으로 그다음에는 공작원으로 계속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으니까 여자를 만나서 연애할 시간이 나 제대로 있었겠어?
총각 딱지를 뗄 시간도 없었을 거라고?”
“왜 그러세요. 아무렴 연애할 시간마저 없을라구요.
그날 밤 그녀가 말했었지요. ‘당신 벌써 다섯 차례나 제 몸속으로 들어왔단 말이에요. 아직도 모자라세요’”
“정말 그렇단 말이지……. 중국 땅에서 아름다운 평양 여자와…… 황홀한 밤이었군. 그렇다면 벌써 여자 뱃속에서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애정 소설에 쓰여 있는 걸 언젠가 써먹으려고 달달 외운 거 아닌가?
북한 공작원들은 달달 외워야 할 게 참으로 많지 않은가.”
“아무리…… 그런 것까지 외우지는 않습니다.”
“그 여자는 신체검사 결과 임신을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여자가 그랬어요. 탈북하면서 성폭행을 당할 거에 대비해서 몸속에 뭘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랑의 포로가 되거나 비극의 주인공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거야. 미쳤어?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는데…… 그 정도 미인이면 남쪽에서 훨훨 날아다닐 거야.”
“미련을 버리라는……”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궁박한 처지에서 사랑하는 척 하면서…… 쇼를 한 거지.
이제부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본부에서 출세하려면 3층 서기실의 빽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옛날 함경북도 갑산 산골 촌놈 출신이야. 오죽했으면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지금 당신에게는 아무리 찾아봐도 연길에서 중국집 하는 아저씨밖에 없어. 이름이 아마 심한준이 아니었던가? 하여간에 그 양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음식점 주인이 무슨 힘이 있겠어. 호구증이 있으니까 중국 동포 행세를 하면서 중국 쪽 통행증 발급사무소에서 쉽게 국경통행증명서를 발급받은 거지. 그걸 이용해서 북한산 도자기, 냉동 노루고기, 송이버섯 등을 중국에 내다 파는 밀무역에 종사했서 돈을 모았지.
그런데 상당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더라고. 그러고 나서 그쪽에는 깨끗이 손을 털고 중국 식당을 시작했는데 그게 아주 번창한 거야. 우리가 알아보니까 당신 아저씨는 술 좋아하고 원만한 사람이지만 그뿐이지. 그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야.
남한에 여러 번 왔다 갔는데 조사해보니 용의점은 없었어.”
“아저씨는 핏줄이 무엇인지…… 저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염 국장은 같은 공작원 출신이어서 대화가 깊어질수록 연민의 정을 느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너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오래전 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거야.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기어나오고 있는 거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할 것인가. 인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너는 국가에 의해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그것도 소모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너가 파괴되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 너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화의 숨은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던가. 나는 적군이 아니야. 아무리 어둠 속을 헤매고 있어도 그걸 알아야지. 젊음이 안타까울 뿐이야. 젊음은 찬란한 꿈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없었단 말이야. 인생을 허송세월한 거지. 너의 신념, 의지, 자존심, 그런 거 전부 헛거야. 스스로 자신을 지키라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게 내가 퇴직하기 전 마지막 임무이다. 나에게 부과된 엄숙한 소명이다. 하지만 너는 먼저 전향하고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다. 내곡동 본부는 협상할 권한을 제한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이번 임무에서 이미 완전히 실패했어.
가령 기적적으로 여기를 탈출해서 북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도 말이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물론 전후 사정을 엄중하게 조사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 대접을 받을 수도 있어. 왜, 자결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돌아왔냐고 하면서 배신자 취급을 할 수도 있어. 그냥 불명예 제대를 시킬 수도 있겠지. 아니면 강제수용소가 기다릴 수도 있어. 당신은 수용소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으니까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거야. 다시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걸.
또 다시 가정을 해 보자고. 당신이 이번 임무에서 성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금의환향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런다고 모든 게 술술 풀릴까?
내가 생생한 실례를 들을 수 있어.
이 사건은 아마 본부에서 쉬쉬했으니까 교육 과정에서 틀림없이 빼놓았을 거야. 공작원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지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고첩은 진즉 전향했고 그를 접선하러 간 공작원 역시 전향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까발려서 교육할 수 있었겠어. 그러나 그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북에서 하는 일이 늘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가요?”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김동식이라는 남파 간첩이 있었지. 물론 가명이야, 나는 본명을 모르고 있는데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야.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쪽은 완전히 개방사회니까 쉬쉬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았지.
올해 3월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그는 1990년 1차 침투에서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거물 고정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대동 월북했었지.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어야 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곱 털끝만큼도 없는 자식들이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한테 떠넘기면서 책임을 지길 싫어하지. 남이 공을 세우면 시기 질투하고 실패하면 이리 떼처럼 달라붙는 거야. 그게 바로 관료주의야.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불문하고 관료주의의 병폐란 말이지.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지. 어떤 조직이건 질투를 하거나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야. 물론 사람들은 원래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1995년인가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 간첩 ‘봉화1호’를 접선하고 주사파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그를 접선하기 위해서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무가내로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1호와 접선하려고 부여의 정각사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우리는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교육 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들으면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요할 텐데요.”
“공산주의는 배신자이건 변절자이건 엄청 증오하면서 싫어하지. 복수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지. 물론 복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복수를 꿈꾸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사람의 가슴 속에 숨겨 둔 복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건 없는 거지.
정찰총국장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황장엽을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지금쯤은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태기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영도자이신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을 거 아닌가?”
“국장님께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을 거 같은데요?”
“또다시 옛날얘기를 해야 되겠군……
이수근은 탈북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거물 인사였어. 그 당시 남쪽에서는 그가 판문점을 거쳐 극적으로 귀순하자 영웅 대접을 한 거야. 그러나 남쪽 역시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천국은 아니었거든.
다시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지. 홍콩을 거쳐서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갔는데 거기서 마지막 순간에 붙잡혔어. 아주 아슬아슬했지. 홍콩에서는 실랑이를 벌이다 가발이 벗겨지고 가짜 수염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그렇지 뭐…… 그 당시 중정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난리가 났지. 위장 귀순으로 의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밀착 감시를 했어.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서 내려왔는데 숨이 막혔을 거라고. 그때 감찰실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파면되었어. 그러고 나서 온갖 폭력과 고문을 행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바로 사형시켜 버렸어.
그는 재판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거니까 얼마나 시원했겠어. 북에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는 말로가 그렇게 된다고 선전했어. 남쪽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하늘이 처벌을 내린 거라고 했지. 남조선은 절대로 배신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 당시 그 사건의 총 지휘자는 누구였죠?”
“그때는 정보부장이 김형욱이었어. 그 사람이 이수근을 고문으로 조작해서 사형을 시켰던 장본인이야. 그 역시 나중에 비명횡사했다네.”
“세상은 돌고 도는군요.”
“그렇다네……”
“그건 합법을 가장한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암살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법률이라는 위장막 없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 테러만 있고 백색 테러는 없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지.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세요.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인혁당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건 테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행위 아닌가요? 국정원에 암살팀은 없나요? 최신 독극물인 노비초크를 몰래 들여와 사용하는 독극물팀은 없나요? 특수도청팀이 있지 않나요? 모든 첩보기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직 아닌가요?”
“…… 계속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고 있구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
비밀첩보기관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야. 엄지손가락이나 검지손가락이 하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몰라야 하는 거야.”
“왜 애매한 말씀만 하십니까? 저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습니다만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여섯 개의 건물이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건물 중에서 비밀스러운 장소 또는 별도 안가 어디에서 그 팀은 극비리에 활동하겠지요.”
“우리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야. 자기 방어적인 경우에 한해서 불가피한 수단인 거야. 그쪽은 아주 편리할 거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당을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아전인수격이란 말입니다. 아주 괴상한 논리군요. 이번 암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정보활동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결과만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는 거지. 첩보전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차이가 없어.”
“소련 KGB는 암살을 ‘적극적 조치’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암살이 아니라 처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지요.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인간에게 총을 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수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거 아니겠어. 이스라엘의 ‘모사드’ 이야기로 대신하겠어. 모사드는 세계의 모든 특수기관의 모델이야. 우리 언론은 국정원더러 왜 모사드처럼 하지 못하냐고 해. 그래서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모사드가 나와. 모사드의 작전 부서 중에 ‘메차다’가 있는데 이게 암살, 납치, 폭파 전문이야. 산하에 ‘단검’이라는 의미의 ‘키돈’이라는 암살 전문 조직이 있지.
그들의 표어가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이지. 그렇게 해서 모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2,700번이나 암살 작전을 수행했어. 아랍 측에서는 ‘살인기계’라고 비방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사드는 틀림없이 살인 기계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담하지.”
“공산주의 세계의 배반과 복수라는 위대한 전통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게 더 떳떳한 거 아닐까요?”
“이스라엘과 북한은 반공개적으로 국가가 테러리즘을 주도하고 있고, 당신은 도구로 이용된 테러리스트란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테러는 실패했어.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너무 서두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어.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단 말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조급하게 굴어가지고 수없이 실패한 경험이 있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겠어.
그 당시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의 보고서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종합한 거야. 지금은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네. 어쨌거나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안전핀을 빼서 던지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강민철이가 안전핀을 빼자마자 바로 그 순간 터져버려서 팔 하나를 잃었고 여동생에게 선물하려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바로 터진 거야. 그 순간 강민철은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강민철은 철석같이 믿었던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를 느끼고 절망했기 때문에 모든 걸 불어버린 거야.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야.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를 수도 있겠지. 북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거야.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배신하고 내팽개치면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휴전선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염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도구로 이용당하면 억울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반발심이 생길 거라고. 아무리 공작원이라고 해도 말이야. 공작원도 인간이라니까.”
“……”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반드시 복수가 필요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복수는 인간의 특성이니까 어쩔 수 없어. 죄와 벌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이지.”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심학무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성급하게 술을 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내 남은 일생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지금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결국 완벽한 자백, 밀고, 배신, 적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문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지 말고 허위 자백을 하지 말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하지만 자백과 밀고는 애초에 떼려야 뗼 수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지 혹은 공범자를 밀고하는 것은 자백의 필수 사항이다 (우리 속담에 ‘고자쟁이가 먼저 죽는다’ 고 했지만 말이다). 동지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다.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대남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오면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과 접선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로부터 공작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공작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작원은 본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하고 고첩은 그동안의 공작 내용을 보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 동지이고 공범자이다.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적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해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해서 박사까지 딸 수 있다고.
남한에는 지금 현재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사회학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탈북자 박사가 있단 말이지.
탈북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어.
그게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소원 아니던가?”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죠?”
“먼저…… 합신센터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하자고. 하나원에 입소해서 거기서 외박을 나가 북경과 연락하는 거야. 그런 절차는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조금도 신경쓸 거 없어.
그리고 접선할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북경의 지시에 따라 접선 장소에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고첩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세밀하게 지시할 게 아니겠어. 우리에게는 그 고첩이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는군요. ‘봉화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말이야……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중정의 노련한 요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고첩과 접선하는 순간 덮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진행되겠지.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는 김상빈이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치밀한 정보망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고첩의 정체를 마침내 밝혀내서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단 말이지.
그렇게 언론에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면책이 되는 거지.
본부는 당신을 비난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이군요. 결국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잡기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남쪽에서 말하는 ‘독 안에 든 쥐잡기’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오랫동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북에는 처자식이 엄연히 살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거지.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게 아니야.”
“저에게도 미래가……? 간첩도 인간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까 지쳐있습니다.”
“아직 젊었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국가보안법 제16조는 이런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20조는 공소제기를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작원이건 전투원이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어. 위험한 임무이니까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 일이 너무 다반사로 일어난다니까. 공작원은 오랜 기간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만 하니까 한 사람의 요원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 말이지.”
“그쪽……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적으로 공작원으로는 안 만들지요.”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대남 공작원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어요. 공작원과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교관들과 선배들은 항상 ‘자폭’이니 ‘자결’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두려웠지요. 꿈을 꾸면 악몽을 꾸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무슬림의 지도자들 말이야…… 그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자식은 애지중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사회 밑바닥 출신 어린애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묶어서 자폭 테러를 일삼는단 말이지.
본부는 당신을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황장엽 선생도 남으로 망명하니까 처가 바로 그날 자살했지.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
“그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습니다. 평양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박정아가 무슨 말을 했죠? 합신센터에서는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기소하면 그것만으로도 10년 넘게 살 수 있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서는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여자가 다 불었어. 성관계나 술 마신 거, 마약한 거 말이야.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조사관이 가만두지 않았지. 그게 강간한 거로 돼 버렸어.”
심학무가 얼굴을 찡그렸다. 술잔 속에 반쯤 남은 마지막 술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국장님은 결혼은 하신 겁니까? 애들은 있습니까……?”
“젊은 장교 시절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했었지. 아내는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어. 내가 공작원으로 있으면서 맨날 출장 다니고 연장 근무하고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니까 아내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지. 임무 수행이 불규칙적이니까 인생살이도 점점 불규칙해졌단 말이지.
애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합의 이혼했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외롭겠지만 혼자여야 했지. 벌써 오래전 일…… 재혼은 하지 않았어.
진짜 스파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늘 절대적 사랑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야. 한번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란 게 마취제 비슷해. 스파이에게 진짜 사랑은 무서운 독이야. 그러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니면 배신하거나.”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네. 거의 죽을 뻔한 거지.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인 것인지도 몰라.”
“국장님은…… 진짜 하고 싶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남북분단의 문제이고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우리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남북 모두 파멸이 있을 뿐이야. 평화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법원은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사형을 때릴 수도 있어. 아니면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젊은 청춘을 감옥 속에서 그렇게 썩히면 되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실제 조사해보면 장기수 중에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 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말입니다.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겠지요.”
국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 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거의 없었다니까. 그때 남쪽 경찰관 두 명이 순직했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심학무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맞춤을 피한다. 눈을 감는다.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다. 말을 더듬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결정을 내리기가……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북경은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버스가 떠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네.”
“두렵습니다. 두렵단 말입니다.”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또 다른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유다는 결국 자살했어요.
황장엽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다시 배신자가 된다면……?”
“이건 절대로 배신의 문제가 아니야.”
“저는 또다른 배신자가 되고 싶지는……?”
“북에서는 예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를 극도로 두려워하지. 그래서 함부로 쓸 수가 없지.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할렐루야! 할렐루야!”
심학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웅얼거린다.
“국장님이…… 할렐루야를……”
“난 처음부터 무신론자야.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또다른 신앙이긴 하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대한 불가지론자로 변했지. 아마 제한적인 범신론에 가까울 거야.
가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살면서 신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신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신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생명과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알아야 할 거야. 내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신을 말하는 거니까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거지. 누구도 신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믿어야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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