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설득, 전향 轉向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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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김동식이라는 남파 간첩이 있었지. 물론 가명이야, 나는 본명을 모르고 있는데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야.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쪽은 완전히 개방사회니까 쉬쉬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았지.
올해 3월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그는 1990년 1차 침투에서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거물 고정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대동 월북했었지.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어야 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곱 털끝만큼도 없는 자식들이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한테 떠넘기면서 책임을 지길 싫어하지. 남이 공을 세우면 시기 질투하고 실패하면 이리 떼처럼 달라붙는 거야. 그게 바로 관료주의야.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불문하고 관료주의의 병폐란 말이지.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지. 어떤 조직이건 질투를 하거나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야. 물론 사람들은 원래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1995년인가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 간첩 ‘봉화1호’를 접선하고 주사파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그를 접선하기 위해서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무가내로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1호와 접선하려고 부여의 정각사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우리는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교육 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들으면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요할 텐데요.”
“공산주의는 배신자이건 변절자이건 엄청 증오하면서 싫어하지. 복수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지. 물론 복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복수를 꿈꾸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사람의 가슴 속에 숨겨 둔 복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건 없는 거지.
정찰총국장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황장엽을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지금쯤은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태기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영도자이신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을 거 아닌가?”
“국장님께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을 거 같은데요?”
“또다시 옛날얘기를 해야 되겠군……
이수근은 탈북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거물 인사였어. 그 당시 남쪽에서는 그가 판문점을 거쳐 극적으로 귀순하자 영웅 대접을 한 거야. 그러나 남쪽 역시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천국은 아니었거든.
다시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지. 홍콩을 거쳐서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갔는데 거기서 마지막 순간에 붙잡혔어. 아주 아슬아슬했지. 홍콩에서는 실랑이를 벌이다 가발이 벗겨지고 가짜 수염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그렇지 뭐…… 그 당시 중정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난리가 났지. 위장 귀순으로 의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밀착 감시를 했어.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서 내려왔는데 숨이 막혔을 거라고. 그때 감찰실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파면되었어. 그러고 나서 온갖 폭력과 고문을 행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바로 사형시켜 버렸어.
그는 재판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거니까 얼마나 시원했겠어. 북에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는 말로가 그렇게 된다고 선전했어. 남쪽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하늘이 처벌을 내린 거라고 했지. 남조선은 절대로 배신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 당시 그 사건의 총 지휘자는 누구였죠?”
“그때는 정보부장이 김형욱이었어. 그 사람이 이수근을 고문으로 조작해서 사형을 시켰던 장본인이야. 그 역시 나중에 비명횡사했다네.”
“세상은 돌고 도는군요.”
“그렇다네……”
“그건 합법을 가장한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암살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법률이라는 위장막 없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 테러만 있고 백색 테러는 없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지.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세요.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인혁당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건 테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행위 아닌가요? 국정원에 암살팀은 없나요? 최신 독극물인 노비초크를 몰래 들여와 사용하는 독극물팀은 없나요? 특수도청팀이 있지 않나요? 모든 첩보기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직 아닌가요?”
“…… 계속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고 있구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
비밀첩보기관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야. 엄지손가락이나 검지손가락이 하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몰라야 하는 거야.”
“왜 애매한 말씀만 하십니까? 저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습니다만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여섯 개의 건물이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건물 중에서 비밀스러운 장소 또는 별도 안가 어디에서 그 팀은 극비리에 활동하겠지요.”
“우리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야. 자기 방어적인 경우에 한해서 불가피한 수단인 거야. 그쪽은 아주 편리할 거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당을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아전인수격이란 말입니다. 아주 괴상한 논리군요. 이번 암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정보활동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결과만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는 거지. 첩보전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차이가 없어.”
“소련 KGB는 암살을 ‘적극적 조치’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암살이 아니라 처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지요.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인간에게 총을 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수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거 아니겠어. 이스라엘의 ‘모사드’ 이야기로 대신하겠어. 모사드는 세계의 모든 특수기관의 모델이야. 우리 언론은 국정원더러 왜 모사드처럼 하지 못하냐고 해. 그래서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모사드가 나와. 모사드의 작전 부서 중에 ‘메차다’가 있는데 이게 암살, 납치, 폭파 전문이야. 산하에 ‘단검’이라는 의미의 ‘키돈’이라는 암살 전문 조직이 있지.
그들의 표어가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이지. 그렇게 해서 모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2,700번이나 암살 작전을 수행했어. 아랍 측에서는 ‘살인기계’라고 비방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사드는 틀림없이 살인 기계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담하지.”
“공산주의 세계의 배반과 복수라는 위대한 전통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게 더 떳떳한 거 아닐까요?”
“이스라엘과 북한은 반공개적으로 국가가 테러리즘을 주도하고 있고, 당신은 도구로 이용된 테러리스트란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테러는 실패했어.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너무 서두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어.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단 말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조급하게 굴어가지고 수없이 실패한 경험이 있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겠어.
그 당시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의 보고서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종합한 거야. 지금은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네. 어쨌거나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안전핀을 빼서 던지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강민철이가 안전핀을 빼자마자 바로 그 순간 터져버려서 팔 하나를 잃었고 여동생에게 선물하려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바로 터진 거야. 그 순간 강민철은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강민철은 철석같이 믿었던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를 느끼고 절망했기 때문에 모든 걸 불어버린 거야.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야.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를 수도 있겠지. 북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거야.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배신하고 내팽개치면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휴전선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염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도구로 이용당하면 억울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반발심이 생길 거라고. 아무리 공작원이라고 해도 말이야. 공작원도 인간이라니까.”
“……”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반드시 복수가 필요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복수는 인간의 특성이니까 어쩔 수 없어. 죄와 벌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이지.”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심학무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성급하게 술을 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내 남은 일생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지금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결국 완벽한 자백, 밀고, 배신, 적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문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지 말고 허위 자백을 하지 말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하지만 자백과 밀고는 애초에 떼려야 뗼 수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지 혹은 공범자를 밀고하는 것은 자백의 필수 사항이다 (우리 속담에 ‘고자쟁이가 먼저 죽는다’ 고 했지만 말이다). 동지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다.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대남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오면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과 접선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로부터 공작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공작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작원은 본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하고 고첩은 그동안의 공작 내용을 보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 동지이고 공범자이다.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적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해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해서 박사까지 딸 수 있다고.
남한에는 지금 현재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사회학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탈북자 박사가 있단 말이지.
탈북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어.
그게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소원 아니던가?”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죠?”
“먼저…… 합신센터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하자고. 하나원에 입소해서 거기서 외박을 나가 북경과 연락하는 거야. 그런 절차는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조금도 신경쓸 거 없어.
그리고 접선할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북경의 지시에 따라 접선 장소에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고첩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세밀하게 지시할 게 아니겠어. 우리에게는 그 고첩이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는군요. ‘봉화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말이야……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중정의 노련한 요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고첩과 접선하는 순간 덮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진행되겠지.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는 김상빈이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치밀한 정보망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고첩의 정체를 마침내 밝혀내서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단 말이지.
그렇게 언론에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면책이 되는 거지.
본부는 당신을 비난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이군요. 결국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잡기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남쪽에서 말하는 ‘독 안에 든 쥐잡기’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오랫동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북에는 처자식이 엄연히 살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거지.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게 아니야.”
“저에게도 미래가……? 간첩도 인간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까 지쳐있습니다.”
“아직 젊었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국가보안법 제16조는 이런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20조는 공소제기를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작원이건 전투원이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어. 위험한 임무이니까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 일이 너무 다반사로 일어난다니까. 공작원은 오랜 기간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만 하니까 한 사람의 요원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 말이지.”
“그쪽……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적으로 공작원으로는 안 만들지요.”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대남 공작원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어요. 공작원과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교관들과 선배들은 항상 ‘자폭’이니 ‘자결’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두려웠지요. 꿈을 꾸면 악몽을 꾸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무슬림의 지도자들 말이야…… 그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자식은 애지중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사회 밑바닥 출신 어린애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묶어서 자폭 테러를 일삼는단 말이지.
본부는 당신을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황장엽 선생도 남으로 망명하니까 처가 바로 그날 자살했지.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
“그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습니다. 평양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박정아가 무슨 말을 했죠? 합신센터에서는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기소하면 그것만으로도 10년 넘게 살 수 있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서는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여자가 다 불었어. 성관계나 술 마신 거, 마약한 거 말이야.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조사관이 가만두지 않았지. 그게 강간한 거로 돼 버렸어.”
심학무가 얼굴을 찡그렸다. 술잔 속에 반쯤 남은 마지막 술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국장님은 결혼은 하신 겁니까? 애들은 있습니까……?”
“젊은 장교 시절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했었지. 아내는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어. 내가 공작원으로 있으면서 맨날 출장 다니고 연장 근무하고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니까 아내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지. 임무 수행이 불규칙적이니까 인생살이도 점점 불규칙해졌단 말이지.
애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합의 이혼했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외롭겠지만 혼자여야 했지. 벌써 오래전 일…… 재혼은 하지 않았어.
진짜 스파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늘 절대적 사랑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야. 한번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란 게 마취제 비슷해. 스파이에게 진짜 사랑은 무서운 독이야. 그러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니면 배신하거나.”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네. 거의 죽을 뻔한 거지.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인 것인지도 몰라.”
“국장님은…… 진짜 하고 싶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남북분단의 문제이고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우리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남북 모두 파멸이 있을 뿐이야. 평화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법원은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사형을 때릴 수도 있어. 아니면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젊은 청춘을 감옥 속에서 그렇게 썩히면 되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실제 조사해보면 장기수 중에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 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말입니다.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겠지요.”
국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 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거의 없었다니까. 그때 남쪽 경찰관 두 명이 순직했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심학무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맞춤을 피한다. 눈을 감는다.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다. 말을 더듬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결정을 내리기가……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북경은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버스가 떠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네.”
“두렵습니다. 두렵단 말입니다.”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또 다른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유다는 결국 자살했어요.
황장엽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다시 배신자가 된다면……?”
“이건 절대로 배신의 문제가 아니야.”
“저는 또다른 배신자가 되고 싶지는……?”
“북에서는 예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를 극도로 두려워하지. 그래서 함부로 쓸 수가 없지.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할렐루야! 할렐루야!”
심학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웅얼거린다.
“국장님이…… 할렐루야를……”
“난 처음부터 무신론자야.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또다른 신앙이긴 하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대한 불가지론자로 변했지. 아마 제한적인 범신론에 가까울 거야.
가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살면서 신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신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신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생명과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알아야 할 거야. 내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신을 말하는 거니까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거지. 누구도 신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믿어야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어……”
짧은 여름밤이 꽤 깊어진 것 같다.
보드카는 완전히 비어있다. 그들은 나중에는 입가심으로 각자 알아서 맥주를 병나발로 마셨다. 국장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다. 그는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독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어 얼큰한 기분이 들게 하고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대화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설득에는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태도는 전혀 효과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마주보고 대화하는 사람들도 마음은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라고 했지 않은가.
(특히 말하는 사람이 실제 내뱉는 단어들은 종종 모호하다. 우리는 내면의 느낌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지만 물론 상대에게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설득을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대화 도중 언제 말해야 하는가? 언제 어떻게 말해야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머리로는 이해될지언정 가슴으로는 설득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인생이란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설득 과정이 아닐까? 설득의 사전적 정의는 ‘상대편이 이쪽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심각한 설득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의도를 탐색해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까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우리는 때로 설득은 말 잘하는 사람의 능력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설득의 기술은 상호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내 의도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는가? 그래서 대화와 설득은 고도의 심리전이다.)
통상 남파 간첩은 처음에는 북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대로 완강하게 입을 닫는다. 그래서 간첩을 대화로 설득해서 자백을 받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대화와 설득만으로 심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육체적인 고문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문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자백을 완벽하게 받기 전까지 절대 상대방이 목숨을 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살을 방지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폭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언제 고문을 멈추어야 할지 정확하게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자제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 기회가 찾아온다. 간첩들도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어느 정도 노출되는 순간 당황하고 공포심에 빠져 결국 실토하면서 온갖 유혹에 넘어오기 마련이다.
심학무는 전혀 달랐다. 그는 원래 자기 신념에 충실한 지독한 확신범일 수 있다. 국장은 웃는 얼굴로 조사실로 들어와서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심학무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심학무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말의 효과를 가늠하면서 대화를 주도하고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많이 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양주 한 병씩을 마신 셈이다. 그것도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아무리 담배를 많이 피워대고 술을 연거푸 마셔 얼큰한 기분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도 그들의 대화 속 심연에 깔려있는 긴장감을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술과 담배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국장은 자신이 상대방의 의중이나 반응도 살피지 않은 채 목적도 두서도 없이 무슨 말을 마구 지껄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입을 떠난 말들은 겨눈 표적을 정확하게 맞히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파편이 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게 글이었다면 문장들 위에 박박 줄을 그어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어쩔 수 없다. (프로이트식 말실수란 무엇인가. 아무리 말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해도 결국 똑같은 말실수를 한다는 거 아닌가.)
심학무는 내내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다.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침내 수세에 몰렸고 심학무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 공작 임무였는데 말이다.
그는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생각한다.
‘이런…… 정말 어이없는 일이야. 이런 좋은 기회를 발로 차버리다니.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니까. 처음에는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생각할수록 정말 단단한 인간이야. 짧게 때로는 길게 대답했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빠짐없이 말했단 말이지.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군.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대화를 이끌고 나가야 했으니까. 그를 설득하려면 사무적이어서도 안되고 조용하고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던 거야.
내가 너무 많이 가식적이었던가…… 위선적이었던가…….
하지만 맹세코 나는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실한 대화는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새삼스럽게…… 논쟁에서 상대방을 압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염 국장이 마무리하려는 듯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 것 같구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수사를 잘 받으라고. 당신은 역사적 증언대에 서 있는 셈이야. 올해가 2010년이란 걸 기억해두게.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피곤한 일이야. 그러지 않도록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당신의 운명을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알라고…… 그걸 알라니까……”
염 국장이 마지막으로 작별의 악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심학무는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손길을 뿌리쳤다.
올해 3월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그는 1990년 1차 침투에서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거물 고정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대동 월북했었지.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어야 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곱 털끝만큼도 없는 자식들이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한테 떠넘기면서 책임을 지길 싫어하지. 남이 공을 세우면 시기 질투하고 실패하면 이리 떼처럼 달라붙는 거야. 그게 바로 관료주의야.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불문하고 관료주의의 병폐란 말이지.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지. 어떤 조직이건 질투를 하거나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야. 물론 사람들은 원래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1995년인가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 간첩 ‘봉화1호’를 접선하고 주사파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그를 접선하기 위해서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무가내로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1호와 접선하려고 부여의 정각사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우리는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교육 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들으면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요할 텐데요.”
“공산주의는 배신자이건 변절자이건 엄청 증오하면서 싫어하지. 복수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지. 물론 복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복수를 꿈꾸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사람의 가슴 속에 숨겨 둔 복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건 없는 거지.
정찰총국장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황장엽을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지금쯤은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태기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영도자이신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을 거 아닌가?”
“국장님께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을 거 같은데요?”
“또다시 옛날얘기를 해야 되겠군……
이수근은 탈북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거물 인사였어. 그 당시 남쪽에서는 그가 판문점을 거쳐 극적으로 귀순하자 영웅 대접을 한 거야. 그러나 남쪽 역시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천국은 아니었거든.
다시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지. 홍콩을 거쳐서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갔는데 거기서 마지막 순간에 붙잡혔어. 아주 아슬아슬했지. 홍콩에서는 실랑이를 벌이다 가발이 벗겨지고 가짜 수염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그렇지 뭐…… 그 당시 중정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난리가 났지. 위장 귀순으로 의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밀착 감시를 했어.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서 내려왔는데 숨이 막혔을 거라고. 그때 감찰실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파면되었어. 그러고 나서 온갖 폭력과 고문을 행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바로 사형시켜 버렸어.
그는 재판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거니까 얼마나 시원했겠어. 북에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는 말로가 그렇게 된다고 선전했어. 남쪽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하늘이 처벌을 내린 거라고 했지. 남조선은 절대로 배신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 당시 그 사건의 총 지휘자는 누구였죠?”
“그때는 정보부장이 김형욱이었어. 그 사람이 이수근을 고문으로 조작해서 사형을 시켰던 장본인이야. 그 역시 나중에 비명횡사했다네.”
“세상은 돌고 도는군요.”
“그렇다네……”
“그건 합법을 가장한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암살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법률이라는 위장막 없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 테러만 있고 백색 테러는 없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지.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세요.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인혁당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건 테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행위 아닌가요? 국정원에 암살팀은 없나요? 최신 독극물인 노비초크를 몰래 들여와 사용하는 독극물팀은 없나요? 특수도청팀이 있지 않나요? 모든 첩보기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직 아닌가요?”
“…… 계속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고 있구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
비밀첩보기관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야. 엄지손가락이나 검지손가락이 하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몰라야 하는 거야.”
“왜 애매한 말씀만 하십니까? 저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습니다만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여섯 개의 건물이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건물 중에서 비밀스러운 장소 또는 별도 안가 어디에서 그 팀은 극비리에 활동하겠지요.”
“우리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야. 자기 방어적인 경우에 한해서 불가피한 수단인 거야. 그쪽은 아주 편리할 거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당을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아전인수격이란 말입니다. 아주 괴상한 논리군요. 이번 암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정보활동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결과만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는 거지. 첩보전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차이가 없어.”
“소련 KGB는 암살을 ‘적극적 조치’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암살이 아니라 처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지요.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인간에게 총을 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수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거 아니겠어. 이스라엘의 ‘모사드’ 이야기로 대신하겠어. 모사드는 세계의 모든 특수기관의 모델이야. 우리 언론은 국정원더러 왜 모사드처럼 하지 못하냐고 해. 그래서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모사드가 나와. 모사드의 작전 부서 중에 ‘메차다’가 있는데 이게 암살, 납치, 폭파 전문이야. 산하에 ‘단검’이라는 의미의 ‘키돈’이라는 암살 전문 조직이 있지.
그들의 표어가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이지. 그렇게 해서 모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2,700번이나 암살 작전을 수행했어. 아랍 측에서는 ‘살인기계’라고 비방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사드는 틀림없이 살인 기계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담하지.”
“공산주의 세계의 배반과 복수라는 위대한 전통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게 더 떳떳한 거 아닐까요?”
“이스라엘과 북한은 반공개적으로 국가가 테러리즘을 주도하고 있고, 당신은 도구로 이용된 테러리스트란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테러는 실패했어.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너무 서두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어.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단 말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조급하게 굴어가지고 수없이 실패한 경험이 있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겠어.
그 당시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의 보고서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종합한 거야. 지금은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네. 어쨌거나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안전핀을 빼서 던지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강민철이가 안전핀을 빼자마자 바로 그 순간 터져버려서 팔 하나를 잃었고 여동생에게 선물하려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바로 터진 거야. 그 순간 강민철은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강민철은 철석같이 믿었던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를 느끼고 절망했기 때문에 모든 걸 불어버린 거야.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야.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를 수도 있겠지. 북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거야.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배신하고 내팽개치면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휴전선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염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도구로 이용당하면 억울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반발심이 생길 거라고. 아무리 공작원이라고 해도 말이야. 공작원도 인간이라니까.”
“……”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반드시 복수가 필요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복수는 인간의 특성이니까 어쩔 수 없어. 죄와 벌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이지.”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심학무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성급하게 술을 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내 남은 일생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지금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결국 완벽한 자백, 밀고, 배신, 적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문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지 말고 허위 자백을 하지 말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하지만 자백과 밀고는 애초에 떼려야 뗼 수 없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지 혹은 공범자를 밀고하는 것은 자백의 필수 사항이다 (우리 속담에 ‘고자쟁이가 먼저 죽는다’ 고 했지만 말이다). 동지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다.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대남 공작원은 남한에 내려오면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과 접선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로부터 공작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들어야 하고 공작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공작원은 본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하고 고첩은 그동안의 공작 내용을 보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 동지이고 공범자이다.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적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해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해서 박사까지 딸 수 있다고.
남한에는 지금 현재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사회학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탈북자 박사가 있단 말이지.
탈북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어.
그게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소원 아니던가?”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죠?”
“먼저…… 합신센터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하자고. 하나원에 입소해서 거기서 외박을 나가 북경과 연락하는 거야. 그런 절차는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조금도 신경쓸 거 없어.
그리고 접선할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북경의 지시에 따라 접선 장소에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고첩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세밀하게 지시할 게 아니겠어. 우리에게는 그 고첩이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는군요. ‘봉화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말이야……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중정의 노련한 요원들이 중무장을 하고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고첩과 접선하는 순간 덮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진행되겠지.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는 김상빈이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치밀한 정보망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고첩의 정체를 마침내 밝혀내서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단 말이지.
그렇게 언론에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면책이 되는 거지.
본부는 당신을 비난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이군요. 결국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잡기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남쪽에서 말하는 ‘독 안에 든 쥐잡기’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오랫동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북에는 처자식이 엄연히 살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거지.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게 아니야.”
“저에게도 미래가……? 간첩도 인간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까 지쳐있습니다.”
“아직 젊었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국가보안법 제16조는 이런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20조는 공소제기를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작원이건 전투원이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어. 위험한 임무이니까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 일이 너무 다반사로 일어난다니까. 공작원은 오랜 기간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만 하니까 한 사람의 요원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 말이지.”
“그쪽……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적으로 공작원으로는 안 만들지요.”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대남 공작원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어요. 공작원과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교관들과 선배들은 항상 ‘자폭’이니 ‘자결’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두려웠지요. 꿈을 꾸면 악몽을 꾸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무슬림의 지도자들 말이야…… 그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자식은 애지중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사회 밑바닥 출신 어린애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묶어서 자폭 테러를 일삼는단 말이지.
본부는 당신을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황장엽 선생도 남으로 망명하니까 처가 바로 그날 자살했지.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
“그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습니다. 평양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박정아가 무슨 말을 했죠? 합신센터에서는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기소하면 그것만으로도 10년 넘게 살 수 있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서는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여자가 다 불었어. 성관계나 술 마신 거, 마약한 거 말이야.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조사관이 가만두지 않았지. 그게 강간한 거로 돼 버렸어.”
심학무가 얼굴을 찡그렸다. 술잔 속에 반쯤 남은 마지막 술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국장님은 결혼은 하신 겁니까? 애들은 있습니까……?”
“젊은 장교 시절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했었지. 아내는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어. 내가 공작원으로 있으면서 맨날 출장 다니고 연장 근무하고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니까 아내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지. 임무 수행이 불규칙적이니까 인생살이도 점점 불규칙해졌단 말이지.
애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합의 이혼했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외롭겠지만 혼자여야 했지. 벌써 오래전 일…… 재혼은 하지 않았어.
진짜 스파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늘 절대적 사랑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야. 한번 사랑에 깊이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어떤 경우에는 사랑이란 게 마취제 비슷해. 스파이에게 진짜 사랑은 무서운 독이야. 그러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니면 배신하거나.”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네. 거의 죽을 뻔한 거지.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인 것인지도 몰라.”
“국장님은…… 진짜 하고 싶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남북분단의 문제이고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우리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남북 모두 파멸이 있을 뿐이야. 평화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법원은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사형을 때릴 수도 있어. 아니면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젊은 청춘을 감옥 속에서 그렇게 썩히면 되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실제 조사해보면 장기수 중에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 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말입니다.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겠지요.”
국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 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거의 없었다니까. 그때 남쪽 경찰관 두 명이 순직했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심학무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맞춤을 피한다. 눈을 감는다.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다. 말을 더듬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결정을 내리기가…… 저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북경은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버스가 떠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네.”
“두렵습니다. 두렵단 말입니다.”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또 다른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유다는 결국 자살했어요.
황장엽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다시 배신자가 된다면……?”
“이건 절대로 배신의 문제가 아니야.”
“저는 또다른 배신자가 되고 싶지는……?”
“북에서는 예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를 극도로 두려워하지. 그래서 함부로 쓸 수가 없지.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할렐루야! 할렐루야!”
심학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웅얼거린다.
“국장님이…… 할렐루야를……”
“난 처음부터 무신론자야.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또다른 신앙이긴 하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대한 불가지론자로 변했지. 아마 제한적인 범신론에 가까울 거야.
가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살면서 신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신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신의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생명과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알아야 할 거야. 내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신을 말하는 거니까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거지. 누구도 신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믿어야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어……”
짧은 여름밤이 꽤 깊어진 것 같다.
보드카는 완전히 비어있다. 그들은 나중에는 입가심으로 각자 알아서 맥주를 병나발로 마셨다. 국장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다. 그는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독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어 얼큰한 기분이 들게 하고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대화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설득에는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태도는 전혀 효과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마주보고 대화하는 사람들도 마음은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라고 했지 않은가.
(특히 말하는 사람이 실제 내뱉는 단어들은 종종 모호하다. 우리는 내면의 느낌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지만 물론 상대에게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설득을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대화 도중 언제 말해야 하는가? 언제 어떻게 말해야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머리로는 이해될지언정 가슴으로는 설득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인생이란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설득 과정이 아닐까? 설득의 사전적 정의는 ‘상대편이 이쪽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심각한 설득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의도를 탐색해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까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우리는 때로 설득은 말 잘하는 사람의 능력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설득의 기술은 상호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내 의도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는가? 그래서 대화와 설득은 고도의 심리전이다.)
통상 남파 간첩은 처음에는 북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대로 완강하게 입을 닫는다. 그래서 간첩을 대화로 설득해서 자백을 받는 일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대화와 설득만으로 심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육체적인 고문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문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자백을 완벽하게 받기 전까지 절대 상대방이 목숨을 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살을 방지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폭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언제 고문을 멈추어야 할지 정확하게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자제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 기회가 찾아온다. 간첩들도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어느 정도 노출되는 순간 당황하고 공포심에 빠져 결국 실토하면서 온갖 유혹에 넘어오기 마련이다.
심학무는 전혀 달랐다. 그는 원래 자기 신념에 충실한 지독한 확신범일 수 있다. 국장은 웃는 얼굴로 조사실로 들어와서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심학무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심학무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말의 효과를 가늠하면서 대화를 주도하고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많이 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양주 한 병씩을 마신 셈이다. 그것도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아무리 담배를 많이 피워대고 술을 연거푸 마셔 얼큰한 기분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도 그들의 대화 속 심연에 깔려있는 긴장감을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술과 담배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국장은 자신이 상대방의 의중이나 반응도 살피지 않은 채 목적도 두서도 없이 무슨 말을 마구 지껄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입을 떠난 말들은 겨눈 표적을 정확하게 맞히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파편이 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게 글이었다면 문장들 위에 박박 줄을 그어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어쩔 수 없다. (프로이트식 말실수란 무엇인가. 아무리 말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해도 결국 똑같은 말실수를 한다는 거 아닌가.)
심학무는 내내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다.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침내 수세에 몰렸고 심학무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 공작 임무였는데 말이다.
그는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생각한다.
‘이런…… 정말 어이없는 일이야. 이런 좋은 기회를 발로 차버리다니.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니까. 처음에는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생각할수록 정말 단단한 인간이야. 짧게 때로는 길게 대답했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빠짐없이 말했단 말이지.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군.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대화를 이끌고 나가야 했으니까. 그를 설득하려면 사무적이어서도 안되고 조용하고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던 거야.
내가 너무 많이 가식적이었던가…… 위선적이었던가…….
하지만 맹세코 나는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실한 대화는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새삼스럽게…… 논쟁에서 상대방을 압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염 국장이 마무리하려는 듯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 것 같구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수사를 잘 받으라고. 당신은 역사적 증언대에 서 있는 셈이야. 올해가 2010년이란 걸 기억해두게.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피곤한 일이야. 그러지 않도록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당신의 운명을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알라고…… 그걸 알라니까……”
염 국장이 마지막으로 작별의 악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심학무는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손길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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