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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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3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미국의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1997년 발표한 장편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하며,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중산층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이야기다.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젊은이가 꽤 있었다.
영화나 연극, 소설은 필연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는 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의 사명 중 하나인 이유는
누구나 타인의 무례함에 분노하고, 세상이 공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갈망이 실현되는 방식과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심리를 파헤치다 보면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둡고 이기적인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미국 작가 우르술라 K. 르 귄이 197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오멜라스는 완벽한 행복과 풍요와 평화가 가득한 유토피아 같은 도시다.
시민들은 아무런 결핍 없이 축제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도시의 완벽한 행복에는
어둡고 더러운 독방에 갇힌 한 명의 아이가 굶주림과 학대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이 아이가 겪는 고통이 있어야만 모든 시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이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지만, 점차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타협한다.
한 아이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공리주의적 정당화를 선택하고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거대한 부조리와 위선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오멜라스의 성문을 걸어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진화해서 액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연결고리가 있다.
생존과 시스템의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악을 대하는 태도다.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은 평범한 우리 곁의 중산층 가장이다.
그는 미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멀쩡한 정신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오멜라스의 지하실에 갇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타인을 지하실로 밀어 넣는 능동적 괴물이 된다.
오멜라스의 시민이 완벽한 행복을 위해 한 아이의 비참한 희생을 합리화하고 외면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경쟁자라는 타인을 직접 제거한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화는 오멜라스의 시민들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눈감았던
그 위선적 방어기제의 가장 극단적이고 사적인 형태다.
2006년 상연된 한국 영화 <예의 없는 것들>에서 주인공은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무례한 자들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단죄함으로써 관객의 억압된 분노를 대리 해소해 주었다.
하지만 이 카타르시스의 본질을 가장 지독하고 적나라하게 해부하여
대중에게 불쾌한 거울을 들이민 작품은 2024년 상영된 <조커 2>다.
1편에서 아서 플렉이 시스템의 방치 속에서 광기 어린 ‘조커’로 각성했을 때 전 세계 관객은 열광했다.
그의 폭주는 억압된 그림자의 완벽한 대리 배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편은 그 환상을 잔인하게 부순다.
여주인공 ‘리’와 고담시의 추종자들은 사실상 스크린 밖에서 조커를 연호하던 대중의 투영이다.
그들은 나약한 인간 아서 플렉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조커로 분장하고 세상을 부수는 쇼윈도 속의 괴물만을 요구한다.
아서가 법정에서 조커라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취약함을 고백하는 순간,
대중은 그를 차갑게 외면하고 살해한다.
<조커 2>는 대중이 소비하는 ‘상징’ 뒤에 숨겨진 인간의 피눈물을 똑바로 보라고 일갈하며
관객 스스로가 가학적인 구경꾼임을 폭로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관객들을 향해 너희는 남의 고통을 소비하는 잔인한 구경꾼이라며
직설적으로 뺨을 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의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블랙 유머와 미장센을 통해
평범한 가장이 살인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객이 묘하게 응원하거나 공감하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나도 내 생존을 위해서라면 저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묵직한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한다.
관객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오멜라스의 잔인한 시민과 다름없음을 서서히 깨닫게 만드는 방식이다.
흥행에 실패한 세 영화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평온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방조하거나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 말 없이 성문을 걸어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괴물을 요구하는 사회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다.
<조커 2>가 던진 지독한 불쾌감을 견뎌내고 <어쩔 수가 없다>의 서사 이면에 숨은 견지해야 할 윤리적 태도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부조리한 오멜라스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떠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1997년 발표한 장편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하며,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중산층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이야기다.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젊은이가 꽤 있었다.
영화나 연극, 소설은 필연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는 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의 사명 중 하나인 이유는
누구나 타인의 무례함에 분노하고, 세상이 공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갈망이 실현되는 방식과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심리를 파헤치다 보면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둡고 이기적인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미국 작가 우르술라 K. 르 귄이 197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오멜라스는 완벽한 행복과 풍요와 평화가 가득한 유토피아 같은 도시다.
시민들은 아무런 결핍 없이 축제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도시의 완벽한 행복에는
어둡고 더러운 독방에 갇힌 한 명의 아이가 굶주림과 학대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이 아이가 겪는 고통이 있어야만 모든 시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이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지만, 점차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타협한다.
한 아이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공리주의적 정당화를 선택하고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거대한 부조리와 위선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오멜라스의 성문을 걸어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진화해서 액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연결고리가 있다.
생존과 시스템의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악을 대하는 태도다.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은 평범한 우리 곁의 중산층 가장이다.
그는 미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멀쩡한 정신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오멜라스의 지하실에 갇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타인을 지하실로 밀어 넣는 능동적 괴물이 된다.
오멜라스의 시민이 완벽한 행복을 위해 한 아이의 비참한 희생을 합리화하고 외면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의 주인공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경쟁자라는 타인을 직접 제거한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화는 오멜라스의 시민들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눈감았던
그 위선적 방어기제의 가장 극단적이고 사적인 형태다.
2006년 상연된 한국 영화 <예의 없는 것들>에서 주인공은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무례한 자들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단죄함으로써 관객의 억압된 분노를 대리 해소해 주었다.
하지만 이 카타르시스의 본질을 가장 지독하고 적나라하게 해부하여
대중에게 불쾌한 거울을 들이민 작품은 2024년 상영된 <조커 2>다.
1편에서 아서 플렉이 시스템의 방치 속에서 광기 어린 ‘조커’로 각성했을 때 전 세계 관객은 열광했다.
그의 폭주는 억압된 그림자의 완벽한 대리 배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편은 그 환상을 잔인하게 부순다.
여주인공 ‘리’와 고담시의 추종자들은 사실상 스크린 밖에서 조커를 연호하던 대중의 투영이다.
그들은 나약한 인간 아서 플렉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조커로 분장하고 세상을 부수는 쇼윈도 속의 괴물만을 요구한다.
아서가 법정에서 조커라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취약함을 고백하는 순간,
대중은 그를 차갑게 외면하고 살해한다.
<조커 2>는 대중이 소비하는 ‘상징’ 뒤에 숨겨진 인간의 피눈물을 똑바로 보라고 일갈하며
관객 스스로가 가학적인 구경꾼임을 폭로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관객들을 향해 너희는 남의 고통을 소비하는 잔인한 구경꾼이라며
직설적으로 뺨을 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의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블랙 유머와 미장센을 통해
평범한 가장이 살인마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객이 묘하게 응원하거나 공감하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나도 내 생존을 위해서라면 저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묵직한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한다.
관객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오멜라스의 잔인한 시민과 다름없음을 서서히 깨닫게 만드는 방식이다.
흥행에 실패한 세 영화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평온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방조하거나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 말 없이 성문을 걸어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괴물을 요구하는 사회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다.
<조커 2>가 던진 지독한 불쾌감을 견뎌내고 <어쩔 수가 없다>의 서사 이면에 숨은 견지해야 할 윤리적 태도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부조리한 오멜라스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떠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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