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詩人의 죽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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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詩人의 죽음
위대한 시인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 빅토르 위고
탈북자의 수기
〔제 이름은 김영호입니다. 이 글은 2012년 6월경 북한이탈주민연구학회 주최의 한 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을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아 수기의 형식으로 재정리하여 그 단체 발행의 비정기 간행물에 게재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필자는 그 발표 자체를 꺼려했지만 신세를 많이 진 주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신성한 임무를 부과했던 지하에 계시는 나의 아버님께 우여곡절 끝에 그 임무를 완수했음을 말씀드리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남조선에 와서야 그 시인의 죽음과 관련해서 많은 오해가 있었고, 이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오랜 세월동안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6.25 전쟁 당시 자진 월북했기 때문에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이 찍혀서 그의 작품 모두 정부의 공인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만약 그의 시집을 출간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3월에서야 해금 조치되었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여러 의혹이 해소될 계기가 되었으므로 안도감을 느낍니다.〕
나는 남조선 사회에서 소위 탈북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북조선을 스스로 탈출한 사람이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이전에는 귀순 용사로 제법 대접을 받았으나, 그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와서는 탈북자가 귀순할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다가 지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간단이라도 보도조차 되지 않습니다. 탈북자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빠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조선 사회에서 소수자나 약자들 들먹일 때는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불법체류자, 동남아 출신의 결혼 이주 여성, 다문화 가족의 아이들, 외국인 이주 노동자와 함께 탈북자들이 빠지지 않고 거론됩니다. 가끔은 성적 소수자, 동성애자도 소수자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부가 솔선수범해서 ‘새터민’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탈북자 단체는 ‘자유 북한인’ 아니면 ‘자유 이주민’으로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명칭이 바뀐다고 무어가 달라지겠습니까. 남조선 사람들은 탈북자에 대해 동포애로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가난하고 천덕꾸러기 이웃으로 차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조국에 침을 뱉고 돌아서서 다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방인 신세가 되어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고 한들 누굴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황금만이 최고인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체할 수 없는 자유가 무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전히 심한 외로움과 고독감,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야만 할까요?
나의 탈북 루트 역시 대부분의 탈북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국경을 넘는 과정은 인민군을 매수해서 뇌물을 주고 그가 눈감아주면 강의 여울목을 건너 목숨을 걸고 중국 쪽으로 건너갑니다. 한겨울이면 꽁꽁 언 강을 건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건 첫 단계에 불과하지요.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은 또다시 남조선으로 가기위해 목숨을 걸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몽골의 초원 등을 경유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여정을 밟아야 합니다.
하지만 탈북 과정에는 반드시 탈북 브로커나 선교사, 인신매매조직의 활약이 빠지지 않습니다. 탈북 브로커의 조직은 북조선 땅에서부터 남조선 땅까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그랬습니다.
북한에서는 남자라면 대부분 4년제 인민학교를 거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하전사로 군대에 입대해서 10년을 복무해야 합니다. 나의 경우 시험점수가 좋았기 때문에 3년간의 군사학교를 거쳐 군관학교로 바로 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중대장을 끝으로 군대를 일찍 제대하였으나, 군사학교와 군관학교의 동기동창생인 나의 친한 고향 친구는 소좌까지 진급해서 계속 복무 중에 1995년경 고난의 행군 시절에 제대하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인민군도 밥그릇 수를 줄이기 위해 제대를 반 강요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제대 직후 홍남17호 공장의 직장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공장은 이미 전력이 끊기고 재료가 없어서 대부분 복무원들이 식량을 구하러 농촌으로 떠나버려서 공장은 사실상 문을 닫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철직한 상태에서 몹시 궁핍하였습니다. 지금 그 친구의 이름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탈출을 결심했을 당시 당연히 그와 긴밀히 상의하였고, 그는 탈북 루트를 잘 알고 있다면서 두만강 초소의 인민군을 매수하기 위해 필요한 거금의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형편에서는 엄청난 거금이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넌 순수하지만서두 너무 고디식해서 탈이지. 지금 북조선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루 썩어버렸디 않겠어. 멕이디 않음 되는 게 없는 세상이야. 내가 인민군 후방 사단에 복무할 당시부터 국경 경비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슴매. 잘 멕일테니까 걱정 말라우.”
그래서 나는 마련한 자금 중에서 거의 반을 그에게 주었고 그날을 가슴이 터질듯한 심정으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슥한 밤이어서 그곳 초소 부근의 지리를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늦봄의 밤은 어둠 속에서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기억합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백두산에 가까운 상류이기 때문에 두만강은 강폭도 좁고 강물은 냇물처럼 적게 흐르며 물이 하도 맑고 깨끗하여 강 속의 조약돌이나 모래알이 밝은 낮이면 보일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지를 걷고 걸어서 건너는데 하등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면 바로 중국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였습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말했었지요.
“시름 탁 놓으라. 모든 게 한 오라기 차질 없이 잘 될 테니까.
그쪽 국경 연선 지대는 경계가 아주 허술한 곳이디.”
친구와 나는 함흥에서 기차를 타고 혜산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혜산은 승인번호구역 (여행제한지역)이어서 담배 두 보루를 주고 해산 장마당에 가는 것처럼 하여 여행증명서를 만들어서 갔습니다. 혜산에서 보천, 삼포, 삼지연 등으로 목탄차를 타고 또는 걸어서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은 험한 산악지역이어서 교통이 안 좋고 여전히 나무가 풍부하여 목탄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둑해질 무렵 그 초소의 전방 1킬로미터 갈림길에서 친구와는 헤어졌습니다.
나는 그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쏜살같이 달아났지요. 그때 친구는 헤어지면서 제대로 이별의 말도 못하고 웬일인지 허겁지겁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나는 밤이 더욱 깊어가도록 길섶 늙은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초소로 가서 혼자 경비를 서고 있는 하전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키는 북조선에서는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165센티미터 정도였고 이십대 초반으로 앳돼 보였습니다. 반쯤 눈을 감고 졸고 있었는데 입에는 독하기로 소문난 값싼 중국제 담배가 물려 있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드디어 시간에 맞춰서 오셨구만. 돈은?”
“돈은 진즉 충분히 지불했는데, 무시기 소리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지금 받기루 했다구.”
나는 어렴풋이 사태를 짐작했습니다. 친한 고향 친구의 배신.
나는 분해서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까만 하전사에게 애원조로 말했습니다.
“동무, 난 가야하오. 보내주소.”
“이 새끼. 쌍 간나 새끼. 사람을 뭘루 보구. 널 국경탈출죄로 체포하겠어. 그리구 수용소로 넘길 거라구. 수용소에 가서……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디?”
“동무…… 도와주시오. 이렇게 사정할게.”
“동무라고 했나? 누구 맘대루. 날 헐하게 보고. 이 개간나……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그가 그 즉시 군용 단도를 빼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낡은 AK소총은 탄창이 빠져 있었지요. 아마 탄창이 꽂혀 있어도 녹슨 총은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칼을 들어 찌를 듯이 무섭게 위협하였습니다. 그가 칼을 허공에서 휙휙 휘두르자 날카로운 칼날이 눈앞에서 번쩍거렸지요. 나는 재빨리 그의 오른 손목을 비틀었고 칼이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광석화처럼 집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찔렀습니다. 그는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붉은 피를 쏟으면서 거꾸러졌지요. 그 모습은 마치 비장한 각오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 재빠른 솜씨에 나 자신도 놀라고 말았습니다. 군관학교 시절과 인민군 시절에 배운 극한의 격투기 훈련이 몸에 밴 탓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불가피하게 살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지요. 경비들의 교대시간 전에 어서 빨리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아름다운 밤은 슬프지요. 벌써 새벽녘이어서 두만강으로부터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강은 싱겁도록 짧은 거리였습니다. 문득 연변의 농촌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쇠약해진 얼골이, 흥남시의 낡고 칙칙한 아파트가, 오랫동안 복무했던 공장의 반쯤 허물어진 회색빛 지붕이, 검푸른 동해 바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다행히도 연변에 도착해서 먼 친척뻘이 되는 조교 (중국에서 살고 있는 북조선 사람)를 만나게 되었고, 1년 동안 그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연길시는 남조선식 다방과 음식점, 노래방과 안마시술소, 록상청(비디오 상영실) 그리고 양고기 뀀집 등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 조교 , 공민증이 없어 신분이 극도로 불안한 탈북자들, 인신매매단, 탈북 브로커들, 선교사, 사기꾼, 중국 공안, 북조선 국가안전보위부의 끄나풀, 남조선 관광객들이 들끓는 복잡한 도시였습니다.
날마다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여 밤이면 뒤숭숭한 꿈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거의 1년 동안을 숨어 지내면서 갖고 있던 돈을 대부분 썼습니다.
그 당시 여기저기에 수소문해서 알게 된 사실인즉, 중국을 탈출하는 방법이란, 첫째는 중국에서 외국 공관으로 무작정 쳐들어가서 난민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관에 대한 경비가 삼엄해서 거의 불가능한 방법으로 판명 났습니다.
둘째는 중국 내에서 공민증과 여권 등을 정밀하게 위조해서 밀항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 역시 너무 많은 경비가 들어가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동남아 쪽 주변국, 예컨대 라오스나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태국 등으로 대개 곤명을 거처 국경으로 접근해서 강을 건너고 밀림을 헤치며 걸어서 이동하거나 선양이나 하얼빈을 거쳐 몽골 사막으로 이동해서 몽골 주재 남조선 공관의 협조를 얻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탈북 브로커나 선교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어쨌거나 탈북 브로커는 필요악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암암리에 만나 호상 간에 교섭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선교사인 탈북브로커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는 나이는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고, 말끔하게 검정색 양복을 빼입었고, 얼굴과 손이 희멀건하고, 서울 말씨를 쓰고, 매우 거들먹거렸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교 선교사이지. 전에는 목사였고. 나는 지금 참으로 좋은 사업을 하고 있지. 기획 탈북을 하고 있는 거야. 알겠어.
하느님, 하느님. 절대적으로 절 도와주소서. 아멘! 아멘!!
그런데 탈북자는 70~80퍼센트가 여자들이지. 여자들, 그 중에서 어리고 젊은 여자들은 성폭력, 인신매매와 강제 결혼, 감금과 폭행, 강제 노동이 누워서 떡먹기이니까 악덕 브로커들이 아주 좋아하지. 젊은 여자들을 처리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거든. 그중에서도 새가이가 최고이고 안까이는 별로이지.
그러니까 남자는 별로인 거야. 그래서 브로커에게 전혀 인기가 없어. 연변이나 중국 쪽에 조선족 공장은 별로 없어. 있다 해도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의 감시가 심하니 금방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니까. 그리고 한족 말을 모르는 조선족이 중국 기업소에 들어가면 쉽게 눈에 띄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금세 중국 공안이 알게 되고. 그러면 십중팔구 북한으로 넘겨져 수용소 행이 되는 거지. 수용소는 지옥이야. 지옥 중의 지옥이야. 그런 지옥이 없지.
중국은 탈북자를 비법 월경자로 취급해서 북한 송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야. 중국 측에 난민 신청은 어림없는 개수작이니까 생각지도 마라.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연변의 농촌 구석으로 들어가 조족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평생을 촌구석에서 썩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지. 그러나 말이지. 거기도 이농 현상이 극심하지. 만주 쪽 동북 3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농촌을 떠나고 있어. 여자들이 도시로, 한국으로 떠나 식당이나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니까 남자들도 따라서 도시로 떠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만주 지역 농촌에는 빈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그런데 농촌에 있는 조선족은 믿을 수 없어. 중국 공안이나 북한 끄나풀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북한은 탈북자 체포에 현상금까지 걸었단 말이야. 그것뿐만이 아니지. 지금은 탈북자를 보호하다가 적발되면 고액의 벌금을 물어야 하니까 더더욱 꺼리고 있어. 그래서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거지.”
“선교사님! 목사님!!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대신 돈이 필요하지.”
“제게 무슨 돈이…… 그저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이건 선교사업의 일환이지. 또 어디까지나 자선사업인데 하지만 너희 쪽에서 최소 비용만은 부담해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대가로 받는 돈은 한 푼도 없지. 보통은 선금으로 일만에서 이만 위안을 받도록 돼 있어. 잔금은 정착금 받으면 주고 . 그런데 넌 선금마저 줄 돈이 조금밖에 없단 말이지.
그래서 말이지만…… 남한에 들어가면 우선 통일부가 주관하는 하나원에 들어가서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그 후 정착금을 받아 남한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선금을 조금 받는 대신 그 정착금을 전액 우리에게 넘기는 거야. 그리고 여기 현금차용증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면 되지. 싫으면 관두고…… 우린 아쉬울 게 없으니까. 모두들 이런 식으로 했어. 너만 그런게 아니란 말이야.”
그가 종이를 내밀면서 어서 빨리 지장을 찍을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몇 번이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역성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안 찍어도 상관없지. 넌 우리 손아귀에 이미 들어와 있지. 공민증이나 호구가 없으니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거야. 북한 안전보위부에 넘길 수밖에 없어. 국경 수비는 걔들 관할이거든.
보위부원이 너의 손바닥 아니면 입술에 철사를 끼워 똥개처럼 질질 끌고 갈 거고…… 북한에 가면 수용소에 갇혀서 조국을 배반한 놈이라고 쇠몽둥이로 매일 죽도록 맞다가 결국 얼마 못가서 죽게 될 거란 말이다.”
저는 그때 잔뜩 겁에 질려 있어서 대꾸조차 할 수 없었지요.
“그러니까,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영문도 모른 채 그 종이쪽지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조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죠.
그 자칭 선교사는 비로소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잘했어. 잘했고 말고. 은혜를 잊으면 절대로 안 되겠지. 나도 돈이 있어야 사업을 계속할 거 아냐. 너는 특별히 몽골 사막 쪽이 아니라 새로 개척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보내주겠어. 그쪽이 훨씬 수월하지. 몽골까지는 주로 열차와 도보를 이용해서 탈출하고 있지만 중국이 국경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고 열차 내 검열을 강화하고 있단 말이야. 또 몽골 사막을 가다가 늑대에 물려 죽을 수도 있거든. 여기서 거리도 멀구 말이야. 그러나 연해주 쪽은 아주 가까워. 우리가 그 루트를 비밀리에 찾아냈지.
그걸 우린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거야. 북한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은 두만강 하류 지역이어서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서 직접 도강하기가 어렵지. 하지만 중국 쪽에서 가는 것은 경비가 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훨씬 쉽게 갈 수 있고 거기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을 통해 합법적으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요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제법 많이 오고 있어. 인천 공항까지 직항도 있고. 너는 관광객들 속에 섞이면 되는 거야. 강을 건너면 우리 쪽 사람이 임시 여권을 만들어 줄 거고 항공권도 제공할 거야. 잘 알겠지? 군관 출신이니까……
하늘에 계신 거룩한 주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지금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불쌍한 양을 굽어 살피소서. 어린 양이 무사히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성령이 함께 하도록 하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 (북에서는 6·25전쟁을 그렇게 부릅니다)에도 참전한 참전용사이고 하사관 계급 중에는 제일 높은 특무상사까지 진급해서 복무하다가 60세에 퇴직하였습니다. 그 후 연로보장제에 따라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79세까지 사셨으니까 그런대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정치보위부에 복무할 동안 국가훈장 3급과 공로메달을 받았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생활비와 식량 배급에서 우대를 받았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인민군 복무조례와 부대의 일과표에 따라 충실하게 복무하다 중대장을 끝으로 제대하였지요. 제대 후에는 흥남시당 간부과로부터 직장을 배치 받아 연합기업소에서 부지배인으로 일하였습니다. 조선로동당의 정식 당원증을 가지고 있었고 , 작업반의 세포위원회 위원이었고 , 조선직업총동맹의 고급 조직원이었고 , 생활총화 시간에도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북조선에서 신분 보장이 확실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게까지 궁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열렬한 연애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출신 성분과 집안 배경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우리는 그 시절에 일부러 휴가를 내서 동평양의 문수유희장에서 하루 종일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도 맞혼인 (연애 결혼)은 이제 대세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도록 시대가 변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포기하였고 , 결국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아픈 일이었지만 그 당시 나의 신념은 확고하였습니다.
경제난으로 중앙배급체계가 붕괴되었고 식량이 극도로 부족하였으며 국영기업들이 전력난과 자재난으로 활동을 멈추면서 발생한 실직 등이 유일한 원인이나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계가 확립되면서 수령은 신격화되고 인민과 당은 수령의 일방적 명령과 지시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령의 절대지배체제가 확립된 것입니다. 인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닙니다. 오직 독재자 한 사람을 위해서 북한 인민은 존재합니다.
우리 인민은 김일성 봉건 왕조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정희 소좌가 목숨을 바쳐 애써 꿈꿨던 공산주의 지상낙원은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죠. 조선인민주주의공화국은 악취가 풍기는 썩은 웅덩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버린 썩은 웅덩이에 던져 넣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군관학교와 인민군 대위 출신인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공화국의 뼈저린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쌓여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북조선에서 어디 나뿐이겠습니까. 그리고 200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3년여가 지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탈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10여 년 전에 대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나는 아무런 장애물이나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부터 탈출 계획을 미리 치밀하게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우수리 강을 건너 연해주로 넘어오면서 목숨처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당원증을 갈기갈기 찢어 강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작별하였지요.
그러나 남조선 사회의 편견과 차별행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보면서 이곳에서 내가 끝까지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또다시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내가 인천 공항에 내렸을 때 늦봄의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내 가벼운 여행 짐짝에는 어떤 시인이 놀랄만한 기억력으로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하게 일자별로 쓴 비망록과 아버지가 그 시인을 조사할 당시 먹지를 대고 구식 타자기로 작성한 신문조서 뭉치가 들어있는 색이 누렇게 바란 낡은 봉투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종이 뭉치들을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입국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불과 6개월여 전이었습니다.
1999년 늦가을경에는 아버지의 기력이 너무 쇠하여서 조만간 운명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특별히 어떤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영양실조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 있어서 기침마저 끊이질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 시인의 비망록과 내가 보위부에서 직접 작성했던 신문조서를 여태껏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고 있었구나. 특히 그 조서는 김 중좌가 불태워버리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였지만 태우지 않고 보관하였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 임무를 지금까지 완수하지 못했어. 도저히 방법이 없었지.
이제 그 임무를 늦둥이로 태어난 외아들에게 떠넘기게 되었구나. 그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넌들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나는 아버지처럼, 시나 시인에 대해서는 무식했지만 남조선에 와서 비로소 그 시인이 아주 유명한 시인이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진 월북했다는 꼬리표 때문에 월북작가 명단에 들어 있었고 그래서 그의 시집은 금서라는 딱지가 붙어 오랫동안 출판과 공개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는 감각적 서정시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대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개척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평소 “옥에 티 하나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하나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 서정시에 말 하나 밉게 놓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그 시인의 최후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습니다. 자진 월북설과 납치설, 북으로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미군 폭격에 사망하였다는 설,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가 숙청 또는 탄광행이 되었다는 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 포로 교환 때 월북을 선택했다는 설, 북에 부역한 죄로 오끼나와 미군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되었다는 설, 평양 감옥에 수감 중 미군 폭격에 폭사 또는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미군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설은 황당무계하였습니다. 어떤 아동문학가가 그 군사재판을 우연히 참관하였는데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고 나서 ‘할 말이 없는가?’하고 묻자 그 시인은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시 하나를 읽게 해 달라.’라고 간청하면서 자신의 시를 나직이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자진 월북설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1951년 5월 이후 1953년 9월까지 기간입니다) 어느 여류 시인이 그 수용소로 가서 필사적으로 그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가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기고 북한행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와 침공포로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고, 포로들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남한이나 북한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조선에 막 도착한 나로서는 그 즉시 그 가족을 수소문해서 전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너무나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인천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약간의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건강한 몸으로 무엇이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국가정보원의 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과 군, 경찰로 구성된 조사관으로부터 2개월 동안 북한 내 행적과 탈북 목적에 대해 호된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에는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에서 또 다시 심사를 받았으며, 안성의 하나원에서 다시 3개월여에 걸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남조선 정착 교육을 받은 후 하나원 제58기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우선 입주권을 받았는데 하나원을 졸업하고 나온 바로 그날, 초겨울 날씨는 참으로 온화하였지만 그러나 정문에는 깍두기 머리에 덩치가 크고 손등에까지 뱀 문신을 한 사람들 세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착금과 입주권을 강제로 빼앗아갔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선교사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할 말 있으면 그 선교사를 직접 만나서 해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점잖았지만 위압적이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임시직인 아파트 건설현장의 야간 경비원이나 막노동, 대형 숯불갈비집의 종업원을 하면서 2년여를 보냈습니다. 그 후에는 남양주의 박스공장에서 마음씨 좋은 사장님을 만나서 공장의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잡역부로 일하다가 경비원으로 승진하고 다시 정식 직원이 되어 이제는 물류 담당 과장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을 그 비망록을 몇 번이나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그 비망록에는 몇 번이고 쓰다가 북북 지워버린 몇 줄의 미완성 시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 비망록 본문은 1951년 2월 22일에 끝나 있었습니다. 그 비망록이 2월 22일에 끝난 것은 그 시인이 자신은 당일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몇 시간만 지나면 총살당할 것으로 알았고 (그러므로 그 비망록은 그날 새벽쯤에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따라서 그날 오후쯤이면 이미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로 날아 올라갔을 것이고, 사형선고 이후 잠시 살아있는 육신은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비망록에 나중에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긴 추신(追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 비망록은 다음날에서야 끝난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날은 시인이 오전에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고 그 당시 전시 상황에서는 그 집행은 바로 당일 오후에 있기 마련인데, 어쩐 일인지 이번만은 1주일여나 집행이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그 당시 당의 고위층이 시인의 사형집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그 집행문에 결제를 하지 않고 1주일간이나 미루었을 거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고위층은 시인의 아름다운 시 몇 편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정확히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평양 형무소로 이송된 것은 1951년 1월 24일이었는데 그날은 겨울 날씨가 많이 풀려서 따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사형선고가 있고 나서 3일 후인 2월 25일에 다시 평양 형무소로 갔다고 합니다. 시인이 자신은 북조선에 연고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망 후 유품 수령자로 아버지를 지정했기 때문에 그걸 찾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인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접견은 즉시 허용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 시인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직접 작성한 보위부의 수사관이었기 때문에 접견은 상당한 시간 동안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버지 김유성은 그 당시 정치보위부 소속으로 계급이 특무상사였습니다.)
그때 시인이 말했다고 합니다.
“웬일인지, 집행이 늦어지고 있구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지요. 환영에 불과하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허깨비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지난번에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이 비망록을 잘 간직해서 제 자식들한테 전해주십시오. 들키지 않도록 유품 속에 넣어두었지요. 그 유품이란게 이 소좌가 헤어질 때 남겨준 시집 한 권과 노트 몇 권, 장갑과 양말, 신발, 칫솔, 속옷, 항생제 약 등에 불과하지만……말입니다.
보위부에서 조사 받을 때에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면목이 없구려. 하지만 자식들은 애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요. 그래야만 이 험한 세상에서 누명이라도 쓰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요.”
그때 아버지는 시인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비망록을 몇 번이고 읽어본 후 감탄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 비망록이 천재적 기억력으로 너무나 정확하게 사건과 실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아버지와의 중요한 대화 내용은 거의 빼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약 이 비망록이 어떤 경우 발각된다면 혹여나 아버지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까봐 고의적으로 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북이 영구히 분단되고 전쟁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하사관 출신인 아버지가 시인의 가족들에게 그 비망록을 전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온전한 상태로 잘 보관하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시인은 머뭇머뭇거리면서 이 소좌의 근황이랄까, 안부랄까, 특히 생사 여부에 대해 또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 달여 동안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김 중좌가 상관에서 보고하러 가거나 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우면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라든가, 간단한 먹을거리, 물 등을 주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도 시인은 이 소좌의 안부에 대해 걱정하면서 아버지에게 그 소식을 꼭 알아봐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면회를 하던 그날, 이 소좌의 소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야. 그러나 차마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디. 기래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거디. 그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으니까 시인이 눈치챌 수두 있겠다구 생각하였디. 하여간에 ‘이 소좌님은 중국 의용군사령부에 연락장교로 배속되어 잘 계신답니다.’라고 말해 버렸디.
기랬더니 시인은 더없이 환하게 웃더구만.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말이디. 오히려 내가 눈물을 떨굴 뻔했디.”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보위부에서는 전선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에 관하여 웬만한 정보는 모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51년 1월 중국 의용군의 3차 대공세로 남조선군과 미제국주의 군대는 경기도 오산과 금량장(용인)이 위치한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고, 그 당시 이 소좌는 최근 재편성된 북조선군 2개 군단과 중국 의용군의 연락장교로 배속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미제국주의 군대가 서부전선에서 전개한 선더볼트 작전 당시 그 절망적인 밤에 눈 덮인 황폐한 작은 산등성이에서 앞장서서 돌격하던 중 맹렬히 쏟아지는 기관총 총탄에 전사하였던 것입니다.
사망 일자는 1951년 1월 29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공산주의 여전사답게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그녀의 사후 북조선 최고 훈장인 공화국 영웅훈장이 추서되었지만 북조선에는 그녀의 유품을 수령하거나 그 훈장을 대신 받거나 그 훈장의 혜택을 받을 가족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지요. 그녀는 공산주의 대의를 위해 조국해방전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니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였노라. 그때는 그래도 그 대의가 살아 있었지 않은가. 그녀는 오늘의 북조선 현실을, 그 비극과 참상을 까마득히 모르고 갔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마지막으로, 김규진 중좌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 중좌는 그 후 2년쯤 지나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대좌로 진급했습니다. 아버지가 알기로는 김 중좌는 박헌영의 직계였고 그의 주선으로 유학을 갔다 온 소련 유학파였습니다. 그런데 정전협정 조인 직후인 1953년 7월 말경에는 조국해방전쟁 승리 경축대회가 북조선 곳곳에서 열리면서 동시에 종파주의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계가 몽땅 체포되었습니다. 김 중좌 역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8월 초에 박헌영 일당에 대한 숙청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에 대해 어느 정도 상세한 내용은 8월 10일자 인민일보에 상세히 보도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미제국주의의 고용 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 문헌’에 공식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 김 중좌는 공화국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보위부에서 계속 복무했기 때문에 몇 달 전에 미리 숙청의 낌새를 알아채고 소련 측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의 우수리스크로 재빨리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 후,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인데 중앙아시아의 어떤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농장 일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편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 독한 보드카를 마시면서 회한에 차서 중얼거리듯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김일성에게 완전히 속은 거야. 모두가 속은 거지. 박헌영 동지도 이용만 당하고…… 사형집행을 당하였지.”
나는 얼마 전에 의정부 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소장을 송달받았습니다. 또 그 한 달여 전에는 나의 월급에 대해 가압류 통지서가 회사로 배달되었습니다. 그 소장은 대여금 반환소송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난생 처음 그 소장이라는 것을 받아보고 아연실색하였습니다.
변호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 선교사가 나에게 오천만원을 빌려주었다는 것이고 거기에다 고리의 이자까지 얹어 청구한 것입니다. 그 일자를 살펴보니 내가 연변에서 무슨 종이쪽지에 이름을 쓴 날짜와 일치하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제3자에게 그 채권을 양도하였고 그 채권을 양도받은 양수인이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탈북자들을 돕는 단체에서 만난 분으로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무료로 소송을 맡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송의 승패 여부에 대해서는 미리 예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현재는 8개월째 소송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님이 폭로하여 사기, 폭력 등 전과 12범인 가짜 선교사의 정체도 밝혀졌습니다. 변호사님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자는 대치동의 한 교회 조직과 연결되어 탈북자 돕기 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곧 본색을 드러내고 교회에서 지급한 막대한 업무추진비를 횡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온갖 수단으로 탈북자들을 등쳐먹다가 발각이 돼서, 교회 쪽에서 형사고소를 하고 지명수배가 내리자 바로 그 무렵 중국 쪽으로 달아났고 그의 동업자나 하수인들 역시 달아나서 완전히 잠적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서야 그 변호사님에게 시인의 비망록과 신문조서 등을 넘겨주면서 가족을 찾아 전달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이 비망록과 신문조서를 꿰맞추어 보면 시인의 진실은 정확히 밝혀질 터였습니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을 지키지 못하였고, 시인의 가족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그 유명한 시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알고 그 누명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설득을 하여 소설의 형식으로 시인의 죽음을 재구성하였는데, 나는 변호사님이 작가적 역량이 있어서 직접 재구성한 것인지, 아니면 잘 아는 다른 작가에게 부탁하였고, 그 작가가 대필하면서 재구성한 것인 여부는 잘 알지 못합니다.
* * *
서울, 6‧25 전쟁, 38선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오후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서 ‘육군본부 장교 클럽’ 신축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국군 수뇌부 고위 장교 50여 명과 미군 고문관 다수가 참석했다. (당시 국군은 비상 경계 태세였던 ‘비상경계령’을 개전 직전인 6월 18일 자로 해제했다.) 1차는 저녁 10시쯤에 끝났지만, 2차 3차 술자리는 25일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두 시간 뒤인 오전 4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고 ,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너무 쉽게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일요일, 서울 시민 대부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휴일을 보냈다. 오후 1시,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는 1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3회 ‘전국 대학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고려대와 동국대가 맞붙은 결승전에서 전반전은 0대0으로 끝났다. 하프타임 때 본부석 스피커에서 “국군 장병은 즉시 자대로 복귀하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몇 분 후에는 “경기를 무기 연기한다”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다가 해산했다.
26일 월요일에도 서울 시민 대부분은 정상 출근했다.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렸음에도 중앙방송의 뉴스는 국군이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 하지만 서울 거리에는 벌써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란민들로 가득하였다.
27일 새벽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원은 100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수도 사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신익희 국회의장이 결의안을 전하러 경무대에 갔을 때, 같은 시간 개최됐던 비상 국무회의는 이미 경기도 수원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나서 해산한 뒤였다.
27일 오전 6시, 중앙방송은 정부의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다. 지난밤 마지막 방송까지 마치 국군이 승리하고 38선을 돌파해서 북진할 것처럼 전황을 발표하다가 갑자기 그런 뉴스가 나오자 서울 시민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28일 오전 서울 주요 지역과 기관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11시 30분 북한은 평양 방송을 통해 “영웅적 인민군대가 반격을 개시한 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선언했다. 그때 평양방송 아나운서는 너무 들떠 있었다.
인민군 탱크가 서울 북쪽에 진입했지만 서울 도심에는 아직 들어오지 못했는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먼저 한강철교 3개 지점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 큰 화염이 일었다. 이순간 한강 인도교를 건너가던 트럭들과 사람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한강으로 날라갔다.
마침내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까지 진격해서 들어온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벌였고 인도까지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기세 좋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시인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지도 얼추 두 달이 되었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서대문 녹번리 (지금은 은평구 녹번동) 초당으로 평소 안면이 있던 젊은 시인 몇 명이 느닷없이 찾아왔었다.
그들이 말했다.
“선생님, 지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두문불출하시면, 은거해 계시면 나중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력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출두하셔서 얼굴을 비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협조를 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선생님의 자유입니다만…… 저희 말을 들으세요.”
시인은 그들의 은근한 협박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서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간단한 조사 끝에 저명한 시인이면서 영문학자이기 때문에 적임자라고 추켜세우며 인민군 총사령부 선전 방송에 나가 미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영어 방송을 맡을 것을 종용했다. 그 다음에는 문화 일꾼으로 최전선에 나가 인민군의 용기를 고취하는 역할을 맡을 것을 종용했다.
마지막으로 자진 월북의 형식으로 월북할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동무의 과거 죄과를 씻을 좋은 기회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인의 정신으로 모두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급기야 역시 반동분자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내무서원에 인계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울 본부가 군사위원회의 작전 명령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소위 ‘모시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1950년 7월 김일성이 주재한 군사위원회 합동연석회의에서 ‘모시기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입안되어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은 겉으로는 정중한 모시기 초대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 혼란한 시기에 그는 집에 숨어 있었다기보다는 여전히 그저 칩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고통을 객관화하고 냉정한 태도로 감내하며 죽음마저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면……? 미래의 불확실성과 절망의 늪에 빠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그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며 오직 듣기만 하였다. 침묵하는 신. 응답하지 않는 신. 암흑 같은 검은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신. 무소부재를 그 속성으로 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그를 떠나버린 것일까? 그는 그즈음 더 이상 시를 쓸 수도 없었다.
9월 22일. 그해 여름이 어느덧 다 지나갔다. 여름의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 것이다. 습도가 낮아지고 바람이 잦아들면서 갈수록 전형적인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이 나타났다. …… 뜰이 슬퍼하고 있다. / 비가 꽃 속으로 시원스러히 빠져 들어간다. / 여름이 그 마지막을 향해 / 잠잠히 몸부림친다. / 잎새들이 하나씩 금빛 물방울이 되어 /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굴러 떨어진다. / 죽어가는 정원의 꿈속에서 / 여름이 깜짝 놀라 피로한 웃음을 띤다. / 여름은 지금 잠시 동안 / 장미꽃과 더불어 잠들고 싶어한다. / 이윽고 여름은 서서히 / 피로한 그 큰 눈을 감는다.
이른 새벽부터 인민군들이 램프 불을 켜들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기 시작하였다. “동무들, 모두 형무소 마당으로 집합하라우. 빨리, 빨리 서두라우. 만약 꾸물대면 즉결처분하겠어.”
그들은 수감자들을 4열 종대로 앉혀 수를 세고 서로의 팔에 밧줄을 연결해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금이라도 꾸물대면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마구 두들겨 팼다. 그러고 나서 북쪽을 향해 서둘러 걷게 하였다.
그날 서울 북쪽에서는 아직 미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원과 평택 근방에서는 서울을 탈환하려고 진격하는 미군과 국군, 서울을 사수하려는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부산을 향해 물밀듯이 진격하던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저지되었다. 미군과 국군이 진용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섰고 강이 방벽 역할을 한 것이다. 마침내 인민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퇴각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자신들이 3개월 동안 점령하고 통치했던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서 후퇴하는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무렵 온종일 박격포 소리와 중기관총들이 불을 뿜는 소리, 미군 쌕쌕이 편대들이 저공 비행을 하면서 갈기는 기관총 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따발총과 카빈의 총알이 교차하면서 날아가는 소리, 군인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비명, 온통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폐허로 변한 도시의 모습이 가을의 햇빛 속에 드러났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타오르고 큰길에는 교차로마다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으며, 불타오르는 건물의 잔해에서 벌써 악취가 풍기기 시작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연이어 터지는 대포 소리에 그나마 남아있는 낡은 건물들이 흔들리면서 깨진 유리창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고성능 폭약의 역겨운 냄새가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중앙청 건물이 폭격에 손상된 채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집안에 숨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따발총을 거머쥔 인민군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죄수들을 북으로 호송하고 있었다. 인민군과 내무성 감시원들이 빨리 가자고 다그치자 죄수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발목에 채워진 무거운 쇠사슬이 땅바닥에 끌리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인민군은 부대들이 와해된 가운데 도처에서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이튿날부터는 폭격을 피해 밤에만 행군을 하였다. 가까이서 폭격소리, 대포소리가 들리고 미군 전투기 편대들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끊임없이 기총소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인민군 병사들은 땀에 젖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여전히 작은 무리를 지어 지친 표정으로 북을 향해 퇴각하고 있었다. 일행들 중에는 신발이 너덜너덜한 사람이 많았고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걸어서 우이동에서 의정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민군 군관이 지휘를 하였다.
그런데 우이동 숲속에서 두 사람이 도망치다 붙잡혔다.
인민군 군관이 소리쳤다.
“인민군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어떤 처벌을 받는 지를 똑똑히 보여주겠어. 도망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총살이란 말이야.”
그들은 태연하게 공개 총살을 하였다. 군관이 도망자의 머리통에 대고 주저하지 않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누군가 눈물을 흘렸다. 뺨에 살짝 칼자국 흔적이 있는 그 군관이 다시 소리쳤다.
“당장 그쳐. 그렇지 않으면 너도 총살하겠어.” 그는 총격으로 놀란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똑똑히 보았을 거야.”
시인은 일행이 지금 삼팔선을 넘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행 중에서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개성 여연이요. 삼팔선이 마을을 관통하지요. 그래서 북쪽은 여연 북면이고 남쪽은 여연 남면인데 우리는 이미 북면의 쏘련군 초소 자리를 지났소. 틀림없을 것이요.”
시인은 생각한다. 삼팔선이란 게 뭐란 말인가? 누가 삼팔선을 그었는가? 전범국 일본은 그대로 두고 식민 지배를 당한 우리가 반으로 갈라져야 한단 말인가? 강대국들이 제멋대로 그어버린 것이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대기가 흐려지더니 가을비가 내렸다. 여전히 아득히 먼 곳에서 둔중한 포성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형언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맞서 싸울 적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게 싸울 힘이 남아 있기는 하는가?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지. 그래, 이 참혹한 시대에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밤이 깊어지자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이 말끔히 걷혔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이 총총하였다. 논길이 밭두둑으로 바뀌고 벌써 별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곧 새벽이 올 것이다.
* * *
진정한 공산주의자, 이정희 소좌
그날 아침 동이 트면서 그녀가 나타났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에 중간 키였으며 얼굴은 검게 탄 채 눈만은 밝은 광채와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옷은 매우 낡은 데다 헤지고 보따리를 등에 메고 있었다. 영락없는 피난민 행색이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시인이 처음 이 소좌를 만난 그날은 1950년 10월 8일이었다.)
그녀가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월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문화부 소속 이정희 소좌입니다. 남조선의 위대한 시인을 공화국과 우리 인민들은 절대적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오직 선생님만을 모시기 위해서 특별히 파견되었습니다. 김일성 장군님이 지시한 ‘모시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가 지금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평양까지 갈 것이고 정치보위부에 인계할 것입니다. 그게 당면한 임무입니다. 보위부로부터 갑작스레 지시를 받았지요.”
시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슨 놈의 축하란 말이요. 저 같은 하찮은 사람을 위해 특별히 이 소좌님을 보낼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장식용 황금도끼가 되기에는 턱없이 미흡하지요. 저는 스스로 죽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우리 들판 산천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곧 굶어 죽거나 어디서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죽게 되겠지요. 그게 제 운명일 것입니다.”
이 소좌가 탐탁지 않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시인의 생김새나 한심한 꼬락서니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정치보위부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쓸데없는 오해는 삼가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행동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여자라고 얕보면 큰코다치겠지요.
저에게 총이 있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당분간 부녀간으로 피난민 행세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아시다시피 준엄한 전시상황입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북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이 북으로 진격하고 있고 폭격이 심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저의 지시를 따르는 게 좋을 것입니다.”
“이보십시오. 내 한심한 꼴을 보면 모르겠소. 내가 이 성치 않는 몸으로 어딜 도망갈 수 있겠소. 설령 말이요…… 몸이 성해도 도망갈 만한 위인이 못 되오.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겁쟁이이기 때문이오. 이 소좌에게 내 운명을 맡기겠소.”
위대한 시인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
— 빅토르 위고
탈북자의 수기
〔제 이름은 김영호입니다. 이 글은 2012년 6월경 북한이탈주민연구학회 주최의 한 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을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아 수기의 형식으로 재정리하여 그 단체 발행의 비정기 간행물에 게재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필자는 그 발표 자체를 꺼려했지만 신세를 많이 진 주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신성한 임무를 부과했던 지하에 계시는 나의 아버님께 우여곡절 끝에 그 임무를 완수했음을 말씀드리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남조선에 와서야 그 시인의 죽음과 관련해서 많은 오해가 있었고, 이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오랜 세월동안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6.25 전쟁 당시 자진 월북했기 때문에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이 찍혀서 그의 작품 모두 정부의 공인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만약 그의 시집을 출간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8년 3월에서야 해금 조치되었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여러 의혹이 해소될 계기가 되었으므로 안도감을 느낍니다.〕
나는 남조선 사회에서 소위 탈북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북조선을 스스로 탈출한 사람이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이전에는 귀순 용사로 제법 대접을 받았으나, 그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와서는 탈북자가 귀순할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다가 지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간단이라도 보도조차 되지 않습니다. 탈북자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빠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조선 사회에서 소수자나 약자들 들먹일 때는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불법체류자, 동남아 출신의 결혼 이주 여성, 다문화 가족의 아이들, 외국인 이주 노동자와 함께 탈북자들이 빠지지 않고 거론됩니다. 가끔은 성적 소수자, 동성애자도 소수자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부가 솔선수범해서 ‘새터민’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탈북자 단체는 ‘자유 북한인’ 아니면 ‘자유 이주민’으로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명칭이 바뀐다고 무어가 달라지겠습니까. 남조선 사람들은 탈북자에 대해 동포애로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가난하고 천덕꾸러기 이웃으로 차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조국에 침을 뱉고 돌아서서 다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방인 신세가 되어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고 한들 누굴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황금만이 최고인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체할 수 없는 자유가 무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전히 심한 외로움과 고독감,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야만 할까요?
나의 탈북 루트 역시 대부분의 탈북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국경을 넘는 과정은 인민군을 매수해서 뇌물을 주고 그가 눈감아주면 강의 여울목을 건너 목숨을 걸고 중국 쪽으로 건너갑니다. 한겨울이면 꽁꽁 언 강을 건너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건 첫 단계에 불과하지요.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은 또다시 남조선으로 가기위해 목숨을 걸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몽골의 초원 등을 경유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여정을 밟아야 합니다.
하지만 탈북 과정에는 반드시 탈북 브로커나 선교사, 인신매매조직의 활약이 빠지지 않습니다. 탈북 브로커의 조직은 북조선 땅에서부터 남조선 땅까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그랬습니다.
북한에서는 남자라면 대부분 4년제 인민학교를 거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하전사로 군대에 입대해서 10년을 복무해야 합니다. 나의 경우 시험점수가 좋았기 때문에 3년간의 군사학교를 거쳐 군관학교로 바로 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중대장을 끝으로 군대를 일찍 제대하였으나, 군사학교와 군관학교의 동기동창생인 나의 친한 고향 친구는 소좌까지 진급해서 계속 복무 중에 1995년경 고난의 행군 시절에 제대하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인민군도 밥그릇 수를 줄이기 위해 제대를 반 강요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제대 직후 홍남17호 공장의 직장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공장은 이미 전력이 끊기고 재료가 없어서 대부분 복무원들이 식량을 구하러 농촌으로 떠나버려서 공장은 사실상 문을 닫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철직한 상태에서 몹시 궁핍하였습니다. 지금 그 친구의 이름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탈출을 결심했을 당시 당연히 그와 긴밀히 상의하였고, 그는 탈북 루트를 잘 알고 있다면서 두만강 초소의 인민군을 매수하기 위해 필요한 거금의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형편에서는 엄청난 거금이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넌 순수하지만서두 너무 고디식해서 탈이지. 지금 북조선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루 썩어버렸디 않겠어. 멕이디 않음 되는 게 없는 세상이야. 내가 인민군 후방 사단에 복무할 당시부터 국경 경비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슴매. 잘 멕일테니까 걱정 말라우.”
그래서 나는 마련한 자금 중에서 거의 반을 그에게 주었고 그날을 가슴이 터질듯한 심정으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슥한 밤이어서 그곳 초소 부근의 지리를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늦봄의 밤은 어둠 속에서 아름다웠다는 것만은 기억합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백두산에 가까운 상류이기 때문에 두만강은 강폭도 좁고 강물은 냇물처럼 적게 흐르며 물이 하도 맑고 깨끗하여 강 속의 조약돌이나 모래알이 밝은 낮이면 보일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지를 걷고 걸어서 건너는데 하등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면 바로 중국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였습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말했었지요.
“시름 탁 놓으라. 모든 게 한 오라기 차질 없이 잘 될 테니까.
그쪽 국경 연선 지대는 경계가 아주 허술한 곳이디.”
친구와 나는 함흥에서 기차를 타고 혜산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혜산은 승인번호구역 (여행제한지역)이어서 담배 두 보루를 주고 해산 장마당에 가는 것처럼 하여 여행증명서를 만들어서 갔습니다. 혜산에서 보천, 삼포, 삼지연 등으로 목탄차를 타고 또는 걸어서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은 험한 산악지역이어서 교통이 안 좋고 여전히 나무가 풍부하여 목탄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둑해질 무렵 그 초소의 전방 1킬로미터 갈림길에서 친구와는 헤어졌습니다.
나는 그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쏜살같이 달아났지요. 그때 친구는 헤어지면서 제대로 이별의 말도 못하고 웬일인지 허겁지겁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나는 밤이 더욱 깊어가도록 길섶 늙은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초소로 가서 혼자 경비를 서고 있는 하전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키는 북조선에서는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165센티미터 정도였고 이십대 초반으로 앳돼 보였습니다. 반쯤 눈을 감고 졸고 있었는데 입에는 독하기로 소문난 값싼 중국제 담배가 물려 있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드디어 시간에 맞춰서 오셨구만. 돈은?”
“돈은 진즉 충분히 지불했는데, 무시기 소리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지금 받기루 했다구.”
나는 어렴풋이 사태를 짐작했습니다. 친한 고향 친구의 배신.
나는 분해서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까만 하전사에게 애원조로 말했습니다.
“동무, 난 가야하오. 보내주소.”
“이 새끼. 쌍 간나 새끼. 사람을 뭘루 보구. 널 국경탈출죄로 체포하겠어. 그리구 수용소로 넘길 거라구. 수용소에 가서……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디?”
“동무…… 도와주시오. 이렇게 사정할게.”
“동무라고 했나? 누구 맘대루. 날 헐하게 보고. 이 개간나……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그가 그 즉시 군용 단도를 빼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낡은 AK소총은 탄창이 빠져 있었지요. 아마 탄창이 꽂혀 있어도 녹슨 총은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칼을 들어 찌를 듯이 무섭게 위협하였습니다. 그가 칼을 허공에서 휙휙 휘두르자 날카로운 칼날이 눈앞에서 번쩍거렸지요. 나는 재빨리 그의 오른 손목을 비틀었고 칼이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광석화처럼 집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을 찔렀습니다. 그는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붉은 피를 쏟으면서 거꾸러졌지요. 그 모습은 마치 비장한 각오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 재빠른 솜씨에 나 자신도 놀라고 말았습니다. 군관학교 시절과 인민군 시절에 배운 극한의 격투기 훈련이 몸에 밴 탓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불가피하게 살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지요. 경비들의 교대시간 전에 어서 빨리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아름다운 밤은 슬프지요. 벌써 새벽녘이어서 두만강으로부터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강은 싱겁도록 짧은 거리였습니다. 문득 연변의 농촌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쇠약해진 얼골이, 흥남시의 낡고 칙칙한 아파트가, 오랫동안 복무했던 공장의 반쯤 허물어진 회색빛 지붕이, 검푸른 동해 바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다행히도 연변에 도착해서 먼 친척뻘이 되는 조교 (중국에서 살고 있는 북조선 사람)를 만나게 되었고, 1년 동안 그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연길시는 남조선식 다방과 음식점, 노래방과 안마시술소, 록상청(비디오 상영실) 그리고 양고기 뀀집 등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 조교 , 공민증이 없어 신분이 극도로 불안한 탈북자들, 인신매매단, 탈북 브로커들, 선교사, 사기꾼, 중국 공안, 북조선 국가안전보위부의 끄나풀, 남조선 관광객들이 들끓는 복잡한 도시였습니다.
날마다 불안감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여 밤이면 뒤숭숭한 꿈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거의 1년 동안을 숨어 지내면서 갖고 있던 돈을 대부분 썼습니다.
그 당시 여기저기에 수소문해서 알게 된 사실인즉, 중국을 탈출하는 방법이란, 첫째는 중국에서 외국 공관으로 무작정 쳐들어가서 난민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관에 대한 경비가 삼엄해서 거의 불가능한 방법으로 판명 났습니다.
둘째는 중국 내에서 공민증과 여권 등을 정밀하게 위조해서 밀항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 역시 너무 많은 경비가 들어가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동남아 쪽 주변국, 예컨대 라오스나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태국 등으로 대개 곤명을 거처 국경으로 접근해서 강을 건너고 밀림을 헤치며 걸어서 이동하거나 선양이나 하얼빈을 거쳐 몽골 사막으로 이동해서 몽골 주재 남조선 공관의 협조를 얻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탈북 브로커나 선교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어쨌거나 탈북 브로커는 필요악이지요.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암암리에 만나 호상 간에 교섭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선교사인 탈북브로커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는 나이는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고, 말끔하게 검정색 양복을 빼입었고, 얼굴과 손이 희멀건하고, 서울 말씨를 쓰고, 매우 거들먹거렸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교 선교사이지. 전에는 목사였고. 나는 지금 참으로 좋은 사업을 하고 있지. 기획 탈북을 하고 있는 거야. 알겠어.
하느님, 하느님. 절대적으로 절 도와주소서. 아멘! 아멘!!
그런데 탈북자는 70~80퍼센트가 여자들이지. 여자들, 그 중에서 어리고 젊은 여자들은 성폭력, 인신매매와 강제 결혼, 감금과 폭행, 강제 노동이 누워서 떡먹기이니까 악덕 브로커들이 아주 좋아하지. 젊은 여자들을 처리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거든. 그중에서도 새가이가 최고이고 안까이는 별로이지.
그러니까 남자는 별로인 거야. 그래서 브로커에게 전혀 인기가 없어. 연변이나 중국 쪽에 조선족 공장은 별로 없어. 있다 해도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의 감시가 심하니 금방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니까. 그리고 한족 말을 모르는 조선족이 중국 기업소에 들어가면 쉽게 눈에 띄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금세 중국 공안이 알게 되고. 그러면 십중팔구 북한으로 넘겨져 수용소 행이 되는 거지. 수용소는 지옥이야. 지옥 중의 지옥이야. 그런 지옥이 없지.
중국은 탈북자를 비법 월경자로 취급해서 북한 송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야. 중국 측에 난민 신청은 어림없는 개수작이니까 생각지도 마라.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연변의 농촌 구석으로 들어가 조족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평생을 촌구석에서 썩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지. 그러나 말이지. 거기도 이농 현상이 극심하지. 만주 쪽 동북 3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농촌을 떠나고 있어. 여자들이 도시로, 한국으로 떠나 식당이나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니까 남자들도 따라서 도시로 떠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만주 지역 농촌에는 빈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그런데 농촌에 있는 조선족은 믿을 수 없어. 중국 공안이나 북한 끄나풀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북한은 탈북자 체포에 현상금까지 걸었단 말이야. 그것뿐만이 아니지. 지금은 탈북자를 보호하다가 적발되면 고액의 벌금을 물어야 하니까 더더욱 꺼리고 있어. 그래서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거지.”
“선교사님! 목사님!!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대신 돈이 필요하지.”
“제게 무슨 돈이…… 그저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이건 선교사업의 일환이지. 또 어디까지나 자선사업인데 하지만 너희 쪽에서 최소 비용만은 부담해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대가로 받는 돈은 한 푼도 없지. 보통은 선금으로 일만에서 이만 위안을 받도록 돼 있어. 잔금은 정착금 받으면 주고 . 그런데 넌 선금마저 줄 돈이 조금밖에 없단 말이지.
그래서 말이지만…… 남한에 들어가면 우선 통일부가 주관하는 하나원에 들어가서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그 후 정착금을 받아 남한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선금을 조금 받는 대신 그 정착금을 전액 우리에게 넘기는 거야. 그리고 여기 현금차용증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면 되지. 싫으면 관두고…… 우린 아쉬울 게 없으니까. 모두들 이런 식으로 했어. 너만 그런게 아니란 말이야.”
그가 종이를 내밀면서 어서 빨리 지장을 찍을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몇 번이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역성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안 찍어도 상관없지. 넌 우리 손아귀에 이미 들어와 있지. 공민증이나 호구가 없으니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거야. 북한 안전보위부에 넘길 수밖에 없어. 국경 수비는 걔들 관할이거든.
보위부원이 너의 손바닥 아니면 입술에 철사를 끼워 똥개처럼 질질 끌고 갈 거고…… 북한에 가면 수용소에 갇혀서 조국을 배반한 놈이라고 쇠몽둥이로 매일 죽도록 맞다가 결국 얼마 못가서 죽게 될 거란 말이다.”
저는 그때 잔뜩 겁에 질려 있어서 대꾸조차 할 수 없었지요.
“그러니까,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영문도 모른 채 그 종이쪽지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조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죠.
그 자칭 선교사는 비로소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잘했어. 잘했고 말고. 은혜를 잊으면 절대로 안 되겠지. 나도 돈이 있어야 사업을 계속할 거 아냐. 너는 특별히 몽골 사막 쪽이 아니라 새로 개척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보내주겠어. 그쪽이 훨씬 수월하지. 몽골까지는 주로 열차와 도보를 이용해서 탈출하고 있지만 중국이 국경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고 열차 내 검열을 강화하고 있단 말이야. 또 몽골 사막을 가다가 늑대에 물려 죽을 수도 있거든. 여기서 거리도 멀구 말이야. 그러나 연해주 쪽은 아주 가까워. 우리가 그 루트를 비밀리에 찾아냈지.
그걸 우린 최근에서야 알게 된 거야. 북한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은 두만강 하류 지역이어서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서 직접 도강하기가 어렵지. 하지만 중국 쪽에서 가는 것은 경비가 심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훨씬 쉽게 갈 수 있고 거기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을 통해 합법적으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요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제법 많이 오고 있어. 인천 공항까지 직항도 있고. 너는 관광객들 속에 섞이면 되는 거야. 강을 건너면 우리 쪽 사람이 임시 여권을 만들어 줄 거고 항공권도 제공할 거야. 잘 알겠지? 군관 출신이니까……
하늘에 계신 거룩한 주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지금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불쌍한 양을 굽어 살피소서. 어린 양이 무사히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성령이 함께 하도록 하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 (북에서는 6·25전쟁을 그렇게 부릅니다)에도 참전한 참전용사이고 하사관 계급 중에는 제일 높은 특무상사까지 진급해서 복무하다가 60세에 퇴직하였습니다. 그 후 연로보장제에 따라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79세까지 사셨으니까 그런대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정치보위부에 복무할 동안 국가훈장 3급과 공로메달을 받았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생활비와 식량 배급에서 우대를 받았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인민군 복무조례와 부대의 일과표에 따라 충실하게 복무하다 중대장을 끝으로 제대하였지요. 제대 후에는 흥남시당 간부과로부터 직장을 배치 받아 연합기업소에서 부지배인으로 일하였습니다. 조선로동당의 정식 당원증을 가지고 있었고 , 작업반의 세포위원회 위원이었고 , 조선직업총동맹의 고급 조직원이었고 , 생활총화 시간에도 열심히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북조선에서 신분 보장이 확실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게까지 궁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열렬한 연애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출신 성분과 집안 배경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우리는 그 시절에 일부러 휴가를 내서 동평양의 문수유희장에서 하루 종일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도 맞혼인 (연애 결혼)은 이제 대세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더 이상 만류할 수가 없도록 시대가 변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포기하였고 , 결국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아픈 일이었지만 그 당시 나의 신념은 확고하였습니다.
경제난으로 중앙배급체계가 붕괴되었고 식량이 극도로 부족하였으며 국영기업들이 전력난과 자재난으로 활동을 멈추면서 발생한 실직 등이 유일한 원인이나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계가 확립되면서 수령은 신격화되고 인민과 당은 수령의 일방적 명령과 지시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령의 절대지배체제가 확립된 것입니다. 인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닙니다. 오직 독재자 한 사람을 위해서 북한 인민은 존재합니다.
우리 인민은 김일성 봉건 왕조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정희 소좌가 목숨을 바쳐 애써 꿈꿨던 공산주의 지상낙원은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죠. 조선인민주주의공화국은 악취가 풍기는 썩은 웅덩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버린 썩은 웅덩이에 던져 넣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군관학교와 인민군 대위 출신인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공화국의 뼈저린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쌓여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북조선에서 어디 나뿐이겠습니까. 그리고 200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3년여가 지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탈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10여 년 전에 대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나는 아무런 장애물이나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부터 탈출 계획을 미리 치밀하게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우수리 강을 건너 연해주로 넘어오면서 목숨처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당원증을 갈기갈기 찢어 강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작별하였지요.
그러나 남조선 사회의 편견과 차별행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보면서 이곳에서 내가 끝까지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또다시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내가 인천 공항에 내렸을 때 늦봄의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내 가벼운 여행 짐짝에는 어떤 시인이 놀랄만한 기억력으로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하게 일자별로 쓴 비망록과 아버지가 그 시인을 조사할 당시 먹지를 대고 구식 타자기로 작성한 신문조서 뭉치가 들어있는 색이 누렇게 바란 낡은 봉투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종이 뭉치들을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입국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불과 6개월여 전이었습니다.
1999년 늦가을경에는 아버지의 기력이 너무 쇠하여서 조만간 운명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 때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특별히 어떤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영양실조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 있어서 기침마저 끊이질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 시인의 비망록과 내가 보위부에서 직접 작성했던 신문조서를 여태껏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고 있었구나. 특히 그 조서는 김 중좌가 불태워버리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였지만 태우지 않고 보관하였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 임무를 지금까지 완수하지 못했어. 도저히 방법이 없었지.
이제 그 임무를 늦둥이로 태어난 외아들에게 떠넘기게 되었구나. 그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넌들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나는 아버지처럼, 시나 시인에 대해서는 무식했지만 남조선에 와서 비로소 그 시인이 아주 유명한 시인이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진 월북했다는 꼬리표 때문에 월북작가 명단에 들어 있었고 그래서 그의 시집은 금서라는 딱지가 붙어 오랫동안 출판과 공개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는 감각적 서정시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대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개척자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평소 “옥에 티 하나 미인의 이마에 사마귀 하나야 버리기 아까운 점도 있겠으나 서정시에 말 하나 밉게 놓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쪽에서는 그 시인의 최후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습니다. 자진 월북설과 납치설, 북으로 올라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미군 폭격에 사망하였다는 설,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가 숙청 또는 탄광행이 되었다는 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 포로 교환 때 월북을 선택했다는 설, 북에 부역한 죄로 오끼나와 미군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되었다는 설, 평양 감옥에 수감 중 미군 폭격에 폭사 또는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미군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설은 황당무계하였습니다. 어떤 아동문학가가 그 군사재판을 우연히 참관하였는데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고 나서 ‘할 말이 없는가?’하고 묻자 그 시인은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시 하나를 읽게 해 달라.’라고 간청하면서 자신의 시를 나직이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자진 월북설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1951년 5월 이후 1953년 9월까지 기간입니다) 어느 여류 시인이 그 수용소로 가서 필사적으로 그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가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기고 북한행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와 침공포로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고, 포로들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남한이나 북한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조선에 막 도착한 나로서는 그 즉시 그 가족을 수소문해서 전달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너무나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인천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약간의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건강한 몸으로 무엇이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국가정보원의 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과 군, 경찰로 구성된 조사관으로부터 2개월 동안 북한 내 행적과 탈북 목적에 대해 호된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에는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에서 또 다시 심사를 받았으며, 안성의 하나원에서 다시 3개월여에 걸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남조선 정착 교육을 받은 후 하나원 제58기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우선 입주권을 받았는데 하나원을 졸업하고 나온 바로 그날, 초겨울 날씨는 참으로 온화하였지만 그러나 정문에는 깍두기 머리에 덩치가 크고 손등에까지 뱀 문신을 한 사람들 세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착금과 입주권을 강제로 빼앗아갔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선교사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할 말 있으면 그 선교사를 직접 만나서 해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점잖았지만 위압적이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임시직인 아파트 건설현장의 야간 경비원이나 막노동, 대형 숯불갈비집의 종업원을 하면서 2년여를 보냈습니다. 그 후에는 남양주의 박스공장에서 마음씨 좋은 사장님을 만나서 공장의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잡역부로 일하다가 경비원으로 승진하고 다시 정식 직원이 되어 이제는 물류 담당 과장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을 그 비망록을 몇 번이나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그 비망록에는 몇 번이고 쓰다가 북북 지워버린 몇 줄의 미완성 시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 비망록 본문은 1951년 2월 22일에 끝나 있었습니다. 그 비망록이 2월 22일에 끝난 것은 그 시인이 자신은 당일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몇 시간만 지나면 총살당할 것으로 알았고 (그러므로 그 비망록은 그날 새벽쯤에 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따라서 그날 오후쯤이면 이미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로 날아 올라갔을 것이고, 사형선고 이후 잠시 살아있는 육신은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비망록에 나중에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긴 추신(追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 비망록은 다음날에서야 끝난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날은 시인이 오전에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고 그 당시 전시 상황에서는 그 집행은 바로 당일 오후에 있기 마련인데, 어쩐 일인지 이번만은 1주일여나 집행이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그 당시 당의 고위층이 시인의 사형집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그 집행문에 결제를 하지 않고 1주일간이나 미루었을 거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고위층은 시인의 아름다운 시 몇 편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정확히 그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평양 형무소로 이송된 것은 1951년 1월 24일이었는데 그날은 겨울 날씨가 많이 풀려서 따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사형선고가 있고 나서 3일 후인 2월 25일에 다시 평양 형무소로 갔다고 합니다. 시인이 자신은 북조선에 연고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망 후 유품 수령자로 아버지를 지정했기 때문에 그걸 찾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인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접견은 즉시 허용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 시인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직접 작성한 보위부의 수사관이었기 때문에 접견은 상당한 시간 동안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버지 김유성은 그 당시 정치보위부 소속으로 계급이 특무상사였습니다.)
그때 시인이 말했다고 합니다.
“웬일인지, 집행이 늦어지고 있구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지요. 환영에 불과하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허깨비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지난번에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 이 비망록을 잘 간직해서 제 자식들한테 전해주십시오. 들키지 않도록 유품 속에 넣어두었지요. 그 유품이란게 이 소좌가 헤어질 때 남겨준 시집 한 권과 노트 몇 권, 장갑과 양말, 신발, 칫솔, 속옷, 항생제 약 등에 불과하지만……말입니다.
보위부에서 조사 받을 때에도 신세를 많이 졌는데 면목이 없구려. 하지만 자식들은 애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요. 그래야만 이 험한 세상에서 누명이라도 쓰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요.”
그때 아버지는 시인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비망록을 몇 번이고 읽어본 후 감탄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 비망록이 천재적 기억력으로 너무나 정확하게 사건과 실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아버지와의 중요한 대화 내용은 거의 빼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약 이 비망록이 어떤 경우 발각된다면 혹여나 아버지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까봐 고의적으로 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북이 영구히 분단되고 전쟁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하사관 출신인 아버지가 시인의 가족들에게 그 비망록을 전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온전한 상태로 잘 보관하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시인은 머뭇머뭇거리면서 이 소좌의 근황이랄까, 안부랄까, 특히 생사 여부에 대해 또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 달여 동안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김 중좌가 상관에서 보고하러 가거나 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우면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라든가, 간단한 먹을거리, 물 등을 주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도 시인은 이 소좌의 안부에 대해 걱정하면서 아버지에게 그 소식을 꼭 알아봐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면회를 하던 그날, 이 소좌의 소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야. 그러나 차마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디. 기래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거디. 그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으니까 시인이 눈치챌 수두 있겠다구 생각하였디. 하여간에 ‘이 소좌님은 중국 의용군사령부에 연락장교로 배속되어 잘 계신답니다.’라고 말해 버렸디.
기랬더니 시인은 더없이 환하게 웃더구만.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말이디. 오히려 내가 눈물을 떨굴 뻔했디.”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보위부에서는 전선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에 관하여 웬만한 정보는 모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51년 1월 중국 의용군의 3차 대공세로 남조선군과 미제국주의 군대는 경기도 오산과 금량장(용인)이 위치한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고, 그 당시 이 소좌는 최근 재편성된 북조선군 2개 군단과 중국 의용군의 연락장교로 배속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미제국주의 군대가 서부전선에서 전개한 선더볼트 작전 당시 그 절망적인 밤에 눈 덮인 황폐한 작은 산등성이에서 앞장서서 돌격하던 중 맹렬히 쏟아지는 기관총 총탄에 전사하였던 것입니다.
사망 일자는 1951년 1월 29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공산주의 여전사답게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그녀의 사후 북조선 최고 훈장인 공화국 영웅훈장이 추서되었지만 북조선에는 그녀의 유품을 수령하거나 그 훈장을 대신 받거나 그 훈장의 혜택을 받을 가족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지요. 그녀는 공산주의 대의를 위해 조국해방전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니 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였노라. 그때는 그래도 그 대의가 살아 있었지 않은가. 그녀는 오늘의 북조선 현실을, 그 비극과 참상을 까마득히 모르고 갔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마지막으로, 김규진 중좌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 중좌는 그 후 2년쯤 지나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대좌로 진급했습니다. 아버지가 알기로는 김 중좌는 박헌영의 직계였고 그의 주선으로 유학을 갔다 온 소련 유학파였습니다. 그런데 정전협정 조인 직후인 1953년 7월 말경에는 조국해방전쟁 승리 경축대회가 북조선 곳곳에서 열리면서 동시에 종파주의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계가 몽땅 체포되었습니다. 김 중좌 역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8월 초에 박헌영 일당에 대한 숙청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에 대해 어느 정도 상세한 내용은 8월 10일자 인민일보에 상세히 보도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의 ‘미제국주의의 고용 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 문헌’에 공식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 김 중좌는 공화국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보위부에서 계속 복무했기 때문에 몇 달 전에 미리 숙청의 낌새를 알아채고 소련 측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의 우수리스크로 재빨리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 후, 1990년대 중반 이후 일인데 중앙아시아의 어떤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농장 일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편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 독한 보드카를 마시면서 회한에 차서 중얼거리듯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김일성에게 완전히 속은 거야. 모두가 속은 거지. 박헌영 동지도 이용만 당하고…… 사형집행을 당하였지.”
나는 얼마 전에 의정부 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소장을 송달받았습니다. 또 그 한 달여 전에는 나의 월급에 대해 가압류 통지서가 회사로 배달되었습니다. 그 소장은 대여금 반환소송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난생 처음 그 소장이라는 것을 받아보고 아연실색하였습니다.
변호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 선교사가 나에게 오천만원을 빌려주었다는 것이고 거기에다 고리의 이자까지 얹어 청구한 것입니다. 그 일자를 살펴보니 내가 연변에서 무슨 종이쪽지에 이름을 쓴 날짜와 일치하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제3자에게 그 채권을 양도하였고 그 채권을 양도받은 양수인이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탈북자들을 돕는 단체에서 만난 분으로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무료로 소송을 맡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송의 승패 여부에 대해서는 미리 예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현재는 8개월째 소송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님이 폭로하여 사기, 폭력 등 전과 12범인 가짜 선교사의 정체도 밝혀졌습니다. 변호사님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자는 대치동의 한 교회 조직과 연결되어 탈북자 돕기 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곧 본색을 드러내고 교회에서 지급한 막대한 업무추진비를 횡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온갖 수단으로 탈북자들을 등쳐먹다가 발각이 돼서, 교회 쪽에서 형사고소를 하고 지명수배가 내리자 바로 그 무렵 중국 쪽으로 달아났고 그의 동업자나 하수인들 역시 달아나서 완전히 잠적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서야 그 변호사님에게 시인의 비망록과 신문조서 등을 넘겨주면서 가족을 찾아 전달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이 비망록과 신문조서를 꿰맞추어 보면 시인의 진실은 정확히 밝혀질 터였습니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을 지키지 못하였고, 시인의 가족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그 유명한 시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알고 그 누명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설득을 하여 소설의 형식으로 시인의 죽음을 재구성하였는데, 나는 변호사님이 작가적 역량이 있어서 직접 재구성한 것인지, 아니면 잘 아는 다른 작가에게 부탁하였고, 그 작가가 대필하면서 재구성한 것인 여부는 잘 알지 못합니다.
* * *
서울, 6‧25 전쟁, 38선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오후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서 ‘육군본부 장교 클럽’ 신축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국군 수뇌부 고위 장교 50여 명과 미군 고문관 다수가 참석했다. (당시 국군은 비상 경계 태세였던 ‘비상경계령’을 개전 직전인 6월 18일 자로 해제했다.) 1차는 저녁 10시쯤에 끝났지만, 2차 3차 술자리는 25일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두 시간 뒤인 오전 4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고 ,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너무 쉽게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일요일, 서울 시민 대부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휴일을 보냈다. 오후 1시,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는 1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3회 ‘전국 대학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고려대와 동국대가 맞붙은 결승전에서 전반전은 0대0으로 끝났다. 하프타임 때 본부석 스피커에서 “국군 장병은 즉시 자대로 복귀하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몇 분 후에는 “경기를 무기 연기한다”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다가 해산했다.
26일 월요일에도 서울 시민 대부분은 정상 출근했다.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렸음에도 중앙방송의 뉴스는 국군이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 하지만 서울 거리에는 벌써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란민들로 가득하였다.
27일 새벽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원은 100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수도 사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신익희 국회의장이 결의안을 전하러 경무대에 갔을 때, 같은 시간 개최됐던 비상 국무회의는 이미 경기도 수원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나서 해산한 뒤였다.
27일 오전 6시, 중앙방송은 정부의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다. 지난밤 마지막 방송까지 마치 국군이 승리하고 38선을 돌파해서 북진할 것처럼 전황을 발표하다가 갑자기 그런 뉴스가 나오자 서울 시민들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28일 오전 서울 주요 지역과 기관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11시 30분 북한은 평양 방송을 통해 “영웅적 인민군대가 반격을 개시한 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선언했다. 그때 평양방송 아나운서는 너무 들떠 있었다.
인민군 탱크가 서울 북쪽에 진입했지만 서울 도심에는 아직 들어오지 못했는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먼저 한강철교 3개 지점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 큰 화염이 일었다. 이순간 한강 인도교를 건너가던 트럭들과 사람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한강으로 날라갔다.
마침내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까지 진격해서 들어온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벌였고 인도까지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기세 좋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시인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지도 얼추 두 달이 되었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서대문 녹번리 (지금은 은평구 녹번동) 초당으로 평소 안면이 있던 젊은 시인 몇 명이 느닷없이 찾아왔었다.
그들이 말했다.
“선생님, 지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두문불출하시면, 은거해 계시면 나중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력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출두하셔서 얼굴을 비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협조를 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선생님의 자유입니다만…… 저희 말을 들으세요.”
시인은 그들의 은근한 협박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서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간단한 조사 끝에 저명한 시인이면서 영문학자이기 때문에 적임자라고 추켜세우며 인민군 총사령부 선전 방송에 나가 미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영어 방송을 맡을 것을 종용했다. 그 다음에는 문화 일꾼으로 최전선에 나가 인민군의 용기를 고취하는 역할을 맡을 것을 종용했다.
마지막으로 자진 월북의 형식으로 월북할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동무의 과거 죄과를 씻을 좋은 기회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인의 정신으로 모두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급기야 역시 반동분자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내무서원에 인계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울 본부가 군사위원회의 작전 명령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소위 ‘모시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1950년 7월 김일성이 주재한 군사위원회 합동연석회의에서 ‘모시기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입안되어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은 겉으로는 정중한 모시기 초대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 혼란한 시기에 그는 집에 숨어 있었다기보다는 여전히 그저 칩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고통을 객관화하고 냉정한 태도로 감내하며 죽음마저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면……? 미래의 불확실성과 절망의 늪에 빠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그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며 오직 듣기만 하였다. 침묵하는 신. 응답하지 않는 신. 암흑 같은 검은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신. 무소부재를 그 속성으로 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그를 떠나버린 것일까? 그는 그즈음 더 이상 시를 쓸 수도 없었다.
9월 22일. 그해 여름이 어느덧 다 지나갔다. 여름의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 것이다. 습도가 낮아지고 바람이 잦아들면서 갈수록 전형적인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이 나타났다. …… 뜰이 슬퍼하고 있다. / 비가 꽃 속으로 시원스러히 빠져 들어간다. / 여름이 그 마지막을 향해 / 잠잠히 몸부림친다. / 잎새들이 하나씩 금빛 물방울이 되어 /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굴러 떨어진다. / 죽어가는 정원의 꿈속에서 / 여름이 깜짝 놀라 피로한 웃음을 띤다. / 여름은 지금 잠시 동안 / 장미꽃과 더불어 잠들고 싶어한다. / 이윽고 여름은 서서히 / 피로한 그 큰 눈을 감는다.
이른 새벽부터 인민군들이 램프 불을 켜들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기 시작하였다. “동무들, 모두 형무소 마당으로 집합하라우. 빨리, 빨리 서두라우. 만약 꾸물대면 즉결처분하겠어.”
그들은 수감자들을 4열 종대로 앉혀 수를 세고 서로의 팔에 밧줄을 연결해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금이라도 꾸물대면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마구 두들겨 팼다. 그러고 나서 북쪽을 향해 서둘러 걷게 하였다.
그날 서울 북쪽에서는 아직 미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원과 평택 근방에서는 서울을 탈환하려고 진격하는 미군과 국군, 서울을 사수하려는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부산을 향해 물밀듯이 진격하던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저지되었다. 미군과 국군이 진용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섰고 강이 방벽 역할을 한 것이다. 마침내 인민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퇴각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자신들이 3개월 동안 점령하고 통치했던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서 후퇴하는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무렵 온종일 박격포 소리와 중기관총들이 불을 뿜는 소리, 미군 쌕쌕이 편대들이 저공 비행을 하면서 갈기는 기관총 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따발총과 카빈의 총알이 교차하면서 날아가는 소리, 군인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비명, 온통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폐허로 변한 도시의 모습이 가을의 햇빛 속에 드러났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타오르고 큰길에는 교차로마다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으며, 불타오르는 건물의 잔해에서 벌써 악취가 풍기기 시작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연이어 터지는 대포 소리에 그나마 남아있는 낡은 건물들이 흔들리면서 깨진 유리창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고성능 폭약의 역겨운 냄새가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중앙청 건물이 폭격에 손상된 채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집안에 숨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따발총을 거머쥔 인민군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죄수들을 북으로 호송하고 있었다. 인민군과 내무성 감시원들이 빨리 가자고 다그치자 죄수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발목에 채워진 무거운 쇠사슬이 땅바닥에 끌리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인민군은 부대들이 와해된 가운데 도처에서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이튿날부터는 폭격을 피해 밤에만 행군을 하였다. 가까이서 폭격소리, 대포소리가 들리고 미군 전투기 편대들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끊임없이 기총소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인민군 병사들은 땀에 젖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여전히 작은 무리를 지어 지친 표정으로 북을 향해 퇴각하고 있었다. 일행들 중에는 신발이 너덜너덜한 사람이 많았고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걸어서 우이동에서 의정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민군 군관이 지휘를 하였다.
그런데 우이동 숲속에서 두 사람이 도망치다 붙잡혔다.
인민군 군관이 소리쳤다.
“인민군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어떤 처벌을 받는 지를 똑똑히 보여주겠어. 도망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총살이란 말이야.”
그들은 태연하게 공개 총살을 하였다. 군관이 도망자의 머리통에 대고 주저하지 않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누군가 눈물을 흘렸다. 뺨에 살짝 칼자국 흔적이 있는 그 군관이 다시 소리쳤다.
“당장 그쳐. 그렇지 않으면 너도 총살하겠어.” 그는 총격으로 놀란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똑똑히 보았을 거야.”
시인은 일행이 지금 삼팔선을 넘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행 중에서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개성 여연이요. 삼팔선이 마을을 관통하지요. 그래서 북쪽은 여연 북면이고 남쪽은 여연 남면인데 우리는 이미 북면의 쏘련군 초소 자리를 지났소. 틀림없을 것이요.”
시인은 생각한다. 삼팔선이란 게 뭐란 말인가? 누가 삼팔선을 그었는가? 전범국 일본은 그대로 두고 식민 지배를 당한 우리가 반으로 갈라져야 한단 말인가? 강대국들이 제멋대로 그어버린 것이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대기가 흐려지더니 가을비가 내렸다. 여전히 아득히 먼 곳에서 둔중한 포성 소리가 들렸다. 그는 형언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맞서 싸울 적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게 싸울 힘이 남아 있기는 하는가?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지. 그래, 이 참혹한 시대에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밤이 깊어지자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이 말끔히 걷혔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이 총총하였다. 논길이 밭두둑으로 바뀌고 벌써 별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곧 새벽이 올 것이다.
* * *
진정한 공산주의자, 이정희 소좌
그날 아침 동이 트면서 그녀가 나타났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에 중간 키였으며 얼굴은 검게 탄 채 눈만은 밝은 광채와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옷은 매우 낡은 데다 헤지고 보따리를 등에 메고 있었다. 영락없는 피난민 행색이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시인이 처음 이 소좌를 만난 그날은 1950년 10월 8일이었다.)
그녀가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월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문화부 소속 이정희 소좌입니다. 남조선의 위대한 시인을 공화국과 우리 인민들은 절대적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오직 선생님만을 모시기 위해서 특별히 파견되었습니다. 김일성 장군님이 지시한 ‘모시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가 지금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평양까지 갈 것이고 정치보위부에 인계할 것입니다. 그게 당면한 임무입니다. 보위부로부터 갑작스레 지시를 받았지요.”
시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슨 놈의 축하란 말이요. 저 같은 하찮은 사람을 위해 특별히 이 소좌님을 보낼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장식용 황금도끼가 되기에는 턱없이 미흡하지요. 저는 스스로 죽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우리 들판 산천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곧 굶어 죽거나 어디서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죽게 되겠지요. 그게 제 운명일 것입니다.”
이 소좌가 탐탁지 않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시인의 생김새나 한심한 꼬락서니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정치보위부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쓸데없는 오해는 삼가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행동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여자라고 얕보면 큰코다치겠지요.
저에게 총이 있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당분간 부녀간으로 피난민 행세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아시다시피 준엄한 전시상황입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북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이 북으로 진격하고 있고 폭격이 심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저의 지시를 따르는 게 좋을 것입니다.”
“이보십시오. 내 한심한 꼴을 보면 모르겠소. 내가 이 성치 않는 몸으로 어딜 도망갈 수 있겠소. 설령 말이요…… 몸이 성해도 도망갈 만한 위인이 못 되오.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겁쟁이이기 때문이오. 이 소좌에게 내 운명을 맡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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