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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詩人의 죽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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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중원
댓글 0건 조회 71회 작성일 26-06-22 13:35

본문

작은 키가 비쩍 말라있었다. 몸은 상처투성이이고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입고 있는 옷은 땟국이 흐르고 너덜너덜 하였다. 마치 거지 행색이었다. 이제부터 시인은 그의 생사를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형편이었다.
시인이 말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나와 헤어진 일행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궁금하지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요. 아마 평양 형무소나 아니면 남포의 수용소로 가겠지요.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모두 간단히 즉결처분될 거예요. 저도 즉결처분할 권한이 있지요. 그러나 시인은 제가 보호할 겁니다. 도망치지만 않는다면요. 적어도 굶어 죽을 염려는 안 해도 되겠지요. 북조선 지폐도 많이 남아 있구요.
여차하면 북조선 어딜 가도 저의 신분을 이용할 수 있지요. 지방 인민위원이나 당세포 또는 농민동맹원을 통해 식량 조달이 가능하니까요. 농가에 들어가서 잠을 잘 수도 있구요.”
두 사람은 역시 밤에만 이동하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상당히 추웠다. 때로는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낮에는 공습 때문에 농가 건물에 들어가 숨고 밤이 되면 논둑길이나 좁은 길을 따라 움직였다. 어두울 때만 걸었기 때문에 제대로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는 몸이 몹시 쇠약해지고 발이 퉁퉁 붓고 발바닥에 물집이 흥건했기 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들이 지금 어느 쪽 방향으로 가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개성에서 금천과 신막, 사리원을 거쳐서 평양 쪽으로 가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이 소좌는 가끔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작전지도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선을 멀리 우회하여 걸었다. 넓은 도로에는 미군들이 패튼 전차를 앞세우고 평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가끔 멀리서 예광탄이나 조명탄이 두 발 세 발 연속으로 터지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보이는 텅 빈 마을을 지나쳤다. 무수한 말굽자리와 마차의 수레바퀴, 사람의 발자국 자리가 찍혀 있는 넓은 길을 건너서 인적이 드문 낮은 지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어느 쪽에서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무력감을 느꼈고 때때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엄습하였다. 먼 하늘에서 금속성 굉음이 들려오면서 미군 폭격기들이 율동적인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하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날카로운 폭음 소리가 연속해서 들리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 그들 둘은 이미 열흘 가까이 피난민 행세를 하면서 길을 걷고,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행동하면서 일종의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이제 남쪽 시인과 북쪽 군관은 서로 기꺼이 길동무 겸 말동무가 되었다. 다정한 스승과 제자처럼, 오누이처럼, 부녀지간처럼,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서로에 대한 약간의 경계심마저 완전히 거두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납치자와 인질 간의 긴장관계, 전쟁의 무서운 공포와 전율이 여전히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소좌께서는… 이 전쟁이… 인간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이 망할 놈의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보세요. 그리고 여자의 몸으로 전선에서 무슨 전투를 했는지 이야기해 보세요. 매우 궁금하군요.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평생을 오로지 시를 쓴다고 원고지에 얽매어 살아왔다오.
하지만 전쟁이 터질 무렵에는 구제받지 못할 시인으로 몰락해서 칩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게 무어가 있겠어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지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요.”
밤이 점점 깊어갔다. 부드러운 달빛이 은색의 엷은 천으로 헐벗은 산하를 뒤덮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여 달이 이지러지자 달빛 그림자가 점차 더 멀리 뒷산 너머로 물러갔다. 이제 밤의 색깔은 암청색으로 변하였다.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은하수는 하늘의 이쪽에서 저 건너편으로 강물이 되어 흘렀다. 전쟁이 끝난 것처럼 사위가 죽을 듯이 고요하였다.
그녀가 말했다.
“이 전쟁은, 선생님, 그 진실이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 제국주의자와 이승만 도당이 합작해서 의도적으로 북조선을 침공했다, 이 말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이 소좌는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어요. 그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빗속을 뚫고 북의 전차들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던가요?”
“잘 들어주십시오. 그날 평양 방송은 11시 방송을 통해 매국 역적 놈인 이승만의 지령을 받은 남조선 괴뢰군이 침공한 결과 공화국 정부가 남조선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고 보도했지요.
김일성 장군님은 6월 25일 오후에는 각료와 당 중앙의 정치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38선 전 지역에서 남조선군이 공세에 나섰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고사령관으로서 반격을 명령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민군은 김일성 장군님의 영도 하에 그 침략자들을 일거에 깨부수고, 이 기회에 조국통일을 하기 위해 내려왔단 말입니다. 북침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전쟁은 조국해방전쟁이지요.
그런데 우린 마지막 고비인 낙동강 전투를 승리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때 우리 13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직전 낙동강 교두보에서 왜관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미 제국주의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불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그때 전선을 돌파해서 부산까지 진격하여 남조선이 빨리 해방되었으면 그만큼 더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었겠지요. 그 철천지 원수들 때문에 조국통일을 눈앞에 두고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하였지요.”
“전쟁이 북침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이군요. 북쪽에서 북침이라고 우긴다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말이요…… 이 소좌는 전쟁이 두렵지 않았나요?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낙동강 전선까지?”
“전 두려웠죠. 연약한 인간이거든요. 전쟁은 남자의 몫인데 여자 몸으로 최전선까지 뛰어들었으니까요. 단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알고 싶었습니다.
그걸 전쟁을 통해서 알고 싶었던 거죠. 전 부잣집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규수였죠. 저도 꿈 많은 소녀시절이 있었습니다. 문학소녀였단 말입니다. 그 무렵에 시와 소설을 무척 많이 읽었지요. 닥치는 대로 말이지요. 그때 선생님의 시집에 나오는 시들을 외울 만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지요.
그때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쓰는 분은 백마를 타고 다니는 훤칠한 미남 청년일 거라고 상상했지요. 그런데 많이 실망했네요. 선생님을 실제 만나보니 키도 작고 얼굴은 시커멓고 꾀죄죄하고…….”
“허 허…… 너무 그러지 마오. 키야 원래 그렇지만…… 이 난리 통에 난들 어쩌겠소. 그래도 이화여대 교수할 때 여학생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오.”
“그리고…… 좋은 사람, 돈 많은 미남 청년을 만나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하길 바랐죠. 그게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공산주의를 알고 나서 깨달았지요. 우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전 결혼을 포기했지요. 저는 순수 열정의 대상을 미남 청년에서 공화국으로 바꾼 것이죠. 그런 후 공산주의와 인민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이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이 약해지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죠.”
“전선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듣고 싶소. 도대체 낙동강 전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왜 북조선군이 갑자기 후퇴하게 된 거였소? 그렇게 기세등등 하더니만…….”
“무슨 전쟁이건 전쟁은 인간의 비극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지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사람을 죽여야 하니까요. 더욱이 같은 동족끼리 서로를 죽여야 하는 이 전쟁은 비극 중의 비극이지요.”
시인이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전쟁이 비극이란 말인가요? 어째서 어리석은 인간들은 스스로 전쟁을 일으킬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쟁은 악몽 그 이상이지요. 포탄이 분노한 듯 쉴 새 없이 참호 속까지 날라들어 굉음을 내며 폭발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죽였지요. 주위에는 신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온전한 시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제 옆에 가까이 붙어 있던 병사의 머리가 총탄에 맞아 사라지고 머리가 붙어있었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넘쳐흐르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지요.
전투가 절정에 다다르자 아군과 적군 사이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지요. 이제는 총알보다는 수류탄으로 서로 공격해야 했습니다. 백병전도 벌어졌구요. 전선 이곳저곳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습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그 시신을 방패삼아 싸우고 또 싸웠지요.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지요. 부패한 시체에서 악취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였습니다.
그 무렵 줄기차게 쏟아지는 여름 막바지 비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물웅덩이에서 시체가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코를 틀어 막아야 했지요. 전선에서 같은 말, 같은 핏줄, 똑같이 생긴 민족끼리 서로를 살육하는 비참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병사들의 비명, 고함, 욕설, 분노와 공포의 절규, 아우성이 아직도 귓가에 너무 생생하구요……. 가끔 꿈에도 나타나지요.”
시인이 말했다. “전쟁은 무자비한 폭력이고. 무고한 인간의 학살인 거요. 야만적인 공포이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참히 파괴하지요. 우리 시대가 전쟁의 운명이라면 하루빨리 종식시켜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전쟁은 끝나겠지요.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그녀는 숨을 고르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한쪽 벽과 지붕이 날아가 버린 허물어져 가는 헛간에는 아직 잉걸불이 이글거리고 있다. 얼굴 화장은 색조가 균일하지 않아 어딘가 어색해 보였지만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는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러나 호롱불 불빛 아래서 시인의 얼굴은 창백하고 너무 여위였다. 턱과 뺨에 무성한 잿빛 수염과 깊이 골이 팬 주름살은 그를 더욱 늙어 보이게 한다.
그녀는 그 순간 스스럼없이 시인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신도 피워 물었다. 그녀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마음의 고통을 조금은 진정시켜 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술… 독한 술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그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하지요.”
그들은 부엌에 묻어둔 독에서 기어이 술을 찾아냈다. 쌉쌀하고 독한 탁주였다. 술기운은 그녀를 풀어지게 하였고 곁들여 피운 담배 한 모금 때문에 편안해졌으며 수다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입 안 가득 담배연기를 머금었다가 허공에 내뱉어 동그란 원을 만들면서 마치 꿈을 꾸듯이 계속 말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전투인 다부동 전투를 잊을 순 없겠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꿈속처럼 몽롱하고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지요. 정말 꿈이었다면 좋겠네요.”
시인은 밤이 깊어갈수록 슬픔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차갑게 불던 바람마저 멈췄다. 사그라져 가는 모닥불에서 마지막 회색 연기가 가냘프게 피어올랐다. 잠시 침묵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밤의 무거운 침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므로 계속 이야길 들어야 했다. 어차피 오늘 밤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침을 맞게 될 터이다. 그때는 불면증 때문에 밤이 되어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요. 이 소좌가 열렬한 코뮤니스트가 된 게 이해할 수 없소? 왜, 그렇게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싶었던 거요?
아니면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차고 싶었던 거요?
좋은 집안에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고등 교육도 많이 받았는데…… 굶주림이 뭔지 뼈저리게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인생의 삶이 매우 고달팠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해명을 들어야, 진실한 해명을 들어야겠어요. 진실을 알고 싶단 말입니다.”
“정직하게 말씀 드려야겠지요. 그러나 진실이란 커다란 고통이지요.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그랬습니다……. 그랬어요.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충만한 의지와 양심이 그걸 원하였지요. 칼 맑스는 새로운 메시아였으니까요. 그래서 위대한 공화국 건설에 앞장서고 싶었습니다. 그때 북조선에서는 참으로 정치행사가 많았지요, 인민궐기대회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가했구요. 근무한 학교에서 개최하는 총화 시간에는 열렬히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길게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지요. 역시 출신 성분이 문제였습니다. 그게 저의 앞날을 턱 가로막고 있었죠.
당시 북조선로동당에는 노동자 출신이나 무산계급 출신만 입당이 우선적으로 인정됐거든요. 두 번이나 입당원서를 냈지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척결의 대상이었지요. 아버지는 지주였고 , 그것도 소작농들에게 가혹한 악질 지주였고 , 고리대금업자였고 , 어머닌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거든요. 어머닌 오로지 가족들의 건강과 그 많은 재산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였지요.
그러니까 우리 집은 소련식으로 말하자면 뚜렷한 위치가 없는 모호한 계급, 즉 부르주아, 지식인, 목사, 지주들이 속해 있는 리첸치였습니다. 이 계급은 무산자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고 , 공화국 건설에는 쓸모없는 존재였습니다.”
“……”
“지금 아버지가, 딸을 끔찍이 사랑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생각나는군요. 아버지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겠지요. 아버지 얘기를 하고 나면 당장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아요.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끔찍이 사랑하였지요. 하지만 그건 비인간적인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작인들에게 수전노처럼 한없이 인색하고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에게 가장 귀중한 것들을 빼앗아간 공산주의를 끔찍이 증오했지요. 그 증오심 때문에 심각한 속병까지 났었지요. 하지만 그 딸은 정반대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사랑하지만 아버지를 증오에 가까울 만큼 싫어했습니다. 아버지가 악명 높은 친일파 대지주였기 때문이었지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나서 북조선의 사회 분위기 탓인지…… 그런 사실이 더욱 치명적인 독처럼 느껴졌지요.”
시인이 말했다. “그래도……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렇지요. 그 사람이 뼈저리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는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을 나온 열렬한 혁명 전사였지만…… 낙동강 전선 전투에서 미제 원수의 폭격에 온몸이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갔지요.
딸은 스스로 아버지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인민에게 봉사하고 속죄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아버지와 딸 사이의 관계, 그 검푸른 강물처럼 깊은 간극이, 그게 이율배반인지, 그냥 모순인지, 비극인지 여태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열심히 다녔던…… 어머니는 그때 남쪽으로 내려간 후였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당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계속 기도회를 열고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어머니가 설립했고 그 목사 역시 어머니가 모셔왔었지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고 목사님의 말할 수 없는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족들이 나만 홀로 남겨 놓은 채 남쪽으로 내려간 후 그 교회에는 발을 끊었지요.
그들은 그때 금박을 입힌 예수님 성상 아래 촛불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였지요. 종교는 민중을 현혹하는 아편인데 말이죠. 너무나 달콤한 유혹인 거지요. 공산주의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나 신부는 공화국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악성 종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입만 열면 하느님만 부르짖지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인민위원회에다 고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전 그 일이 상부에 보고되어 당에 대한 충성심이 인정되고 신분의 족쇄가 풀려서 북조선로동당에 입당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며칠 후에는 그 목사와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비밀 교회는 내무서원에 의해 수색을 당한 후 석유가 뿌려지고 불태워졌지요. 그래서 재만 남았지요.”
시인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 소좌는 몹쓸 짓을 한 거요. 잔인하고 비열하지요. 밀고란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거요. 나는 단지 수치심과 끝없는 모멸감을 느낄 뿐이요. 그래 부끄럽지도 않소?”
“어쩔 수 없었지요. 위대한 공화국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단 말입니다. 공산주의 대의 앞에서 그런 건 사소한 일에,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요. 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후회하면 안 되겠지요. 그 무렵 우리 집 전 재산도 , 모든 논밭과 정미소 , 대궐 같았던 집까지 몰수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러니깐 토지개혁 법령이 시행되면서 부친과 모친, 다른 가족들은 감쪽같이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절 남기고 갔지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부터 가족과의 관계가 계속 심각하게 삐걱거렸거든요.”
“그렇다면……? 그 목사와 가족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걸 알고 싶으신가요? 말씀드릴 수 있죠.”

그날 소도시 네거리에는 그 목사에 대한 인민재판이 있었다. 인민재판의 개정, 기소장 낭독, 증거조사가 일사천리로 그저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재판장이 선언했다. “여러분! 어떠시오? 기소 사실은 전부 철저한 증거조사에 의해 입증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흰 손을 보시오. 이놈은 평생을 하느님만 중얼거리면서 놀고먹었단 말입니다. 손에 흙을 한번도. 이런 거머리 같은 목사는 위대한 공화국의 암적 존재입니다. 이 가증스러운 자는 당국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선량한 인민들을 유혹해서 계속 기도회를 열고 예배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누구란 말인가? 하느님은 없습니다. 오직 위대한 인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판사는 이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집행할 것을 선언합니다. 사형을 집행할 자는 스스로 앞으로 나오시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혼자서 마구잡이로 하늘을 향해 악을 썼다. “옳소 , 옳소. 그자에게 사형을, 사형을.” 그제서야 거기 모인 사람들도 마지못해서 “옳소 , 옳소.” 하고 따라 외쳤다.
그 고함소리 속에서 흰 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고 깡마른 한 젊은이가 입을 꽉 다문 채 튀어나와 식칼로 ,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날이 시퍼렇게 선 그 칼로 목사의 배와 가슴을 무자비하게 찌르고 짓이겼다. 그때 따뜻하고 찝찔한 핏방울이 튀었다. 목사는 길바닥으로 허물어지며 겨우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 사형집행자는 마침내 검붉은 피가 흐르는 칼을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그러고 나서 마치 처음으로 보는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재판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자칭 판사는 준엄한 목소리로 그 청년을 한껏 공화국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나서, 공화국 만세를 선창했다.

그 순간 시인은 그녀를 반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서 할 말을 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무언가 통렬하게 반박하려 하였지만 그녀의 광신적인 신념과 집념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리라. 무력감을 느꼈다.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이다.
“선생님은 시인이지요. 그것도 서정 시인이지요.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게 한가한 것인가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야지요.
선생님은 지금 낡아빠진 자본주의 사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인이 아니죠. 공산주의 여전사일 뿐이지요.
그래서인지 직설적이고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열변을 토해내야만 직성이 풀리지요. 그러니까…… 반어법과 은유, 섬세함, 의도적인 모호한 대화 같은 것은 저와는 어울리지 않지요.”
그녀는 시인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안달을 하였다. 그녀는 그 순간 스스로 공산주의라는 언어의 마술적인 힘을 의식했던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광신적이고 초조한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빨간 혀가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본론을 끝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밑바닥 노동자들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참으로 비참하였지요. 자본가들이 그들을 속여먹고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불하고 가혹하게 착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혁명과 계급투쟁이 필요하고 자본가들이 완전히 말살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로 가능할까요? 일찍이 없었던 태평성대 요순시대가…… 지상낙원이 도래한단 말이군요. 그러나 역사의 법칙은 무자비한 것이요. 너무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공산주의자는 전부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자이고 신비주의자인가요?”
“터무니없다고 했습니까? 귀에 몹시 거슬립니다. 아직도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군요. 그게 고지식한 시인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본이 주인이 되는 사회, 돈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계급이 사라지고 결국엔 전쟁이 사라지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사는 아름다운 집을 지을 거예요.”
“그러면 뿌리 깊은 자본주의 폐해가 이 지구상에서 일소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게 정말 가능한 것인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연설을 하는 연사처럼 열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이 소좌가 말한 내용은 그녀가 학교에서 총화 시간이나 공산주의 윤리 시간이면 열렬히 주장했던 내용이다.
시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와 종교는 왜 상극인 거요? 공산주의도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그게 종교를 배척할 이유가 무어란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도 공산주의자 아니겠소?”
“그건 선생님이 유물사관을 오해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느님은 없다는 무신론입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관념적 존재로서 지배계급의 악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인 것입니다. 지금 북조선의 유일한 종교는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의 성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이고 , 이 종교의 위대한 예언자는 레닌이고 , 스탈린이고 , 모택동이고 , 김일성 장군님입니다.”
“이 소좌는 공산주의 귀신에 완전히 홀린 것 같소이다.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소. 나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소. 어쩔 수 없는 일이요.”
“공산주의 사회에 엄청나게 큰 꿈을 갖고 있지요. 장군님이 반드시 그 기초를 닦을 거예요. 어머니가 하느님을 믿듯이 열렬하게 그걸 믿고 있지요.”
“이 소좌는 김일성 장군이 구세주나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군요.”
“그렇지요. 장군님은 또 하나의 새로운 구세주이지요.”
“진정한 구세주가 될지는, 아니면 새로운 사이비 종교의 창시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환상일지도 모르잖소? 그가 우릴 배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요. 하여간에 말씀을 계속하십시오.”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요. 미래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믿어야 하지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철두철미하게 믿어야 하지요. 장군님의 신념과 의지를 믿어야 하지요. 의심하고 회의하고 불신하는 것은 종파 분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선생님, 이제부터 결론을 내리게 해주세요. 공산주의 사회는 지구 최후의 지상낙원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술기운은 진즉 멀리 달아나 버린 후였다. 조금 날카로운 얼굴선과 얇고 단단한 입술을 지닌 진지한 공산주의자의 얼굴에는 단단한 각오와 긴장된 의지가 배어있다. 그녀는 당당했다. 이 소좌는 들뜬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시인에게 쉴 새 없이 얘기를 계속하였고 그는 그녀의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러나 시인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할 말을 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무언가 통렬하게 반박하려 하였지만 그녀의 광신적인 신념과 집념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리라. 무력감을 느꼈다.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이다.

* * *

평양, 폐허가 된 도시.
그들은 평양 인근에 도착하였다.
가을 날씨는 쾌청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평양까지 허허벌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구릉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을 뿐 시야를 가로막는 크고 높은 산은 없다. 마침 추수가 끝나서 마른 볏짚단이 여기저기 서 있는 가을 들녘은 엷은 회색이어서 약간 황량하였다. 그러나 대동교 밑으로는 맑고 푸른 대동강 강물이 느릿느릿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 주변의 길과 언덕에서는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벌써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양은 아비규환이었다. 미군과 국군은 물밀듯이 진격하고 인민군은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으며 연일 쏟아지는 미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시내에는 성한 건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폭격을 당한 건물들은 천장과 벽들이 허물어져 위태롭게 서 있었으며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매일 미군 정찰기가 인민군의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를 평양 시가지에 뿌려댔다.
도시 전체가 잡동사니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하였으며 거리 이곳저곳에는 치우지 못해 썩어가는 시체들이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인민군 병사 시신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누워 있었고 길 아래쪽에는 폭격으로 반 토막이 난 전신주 밑에도 다른 병사의 시신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이곳저곳 전봇대에는 여전히 ‘김일성 만세, 인민군 만세’ 따위의 글을 휘갈겨 쓴 벽보가 나부끼고 있다.
이제 평양은 연합군의 점령이 시간 문제였다. 평양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국군과 연합군이 이미 대동강 남쪽을 점령하고 나서 평양 시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0월 20일 오전 10시 백선엽 장군의 국군 1사단은 평양시를 완전 장악하였고 1사단에 이어 미군 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그 무렵, 매일 쉴 새 없이 포격과 폭격이 이어졌다. 섬뜩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꽃과 함께 떨어진 포탄들로 인해 거리는 회색 연기가 휘감고 있었다. 밤에는 탐조등 불빛이 예리하게 도시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고 , 예광탄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하얀 빛을 그리며 떠돌았고 폭격으로 인한 섬광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고 있었다.
북한 최고 당국과 권력층은 진즉 평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통화로 옮겼다는 확실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상황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수도 ,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정치보위부도 찾을 길이 없었다. 최후까지 평양을 사수하였던 최고사령부 직속 근위여단 역시 북쪽 압록강 부근까지 후퇴한 후였다. 근위여단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평양 형무소의 양쪽에 감방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는 긴 복도에서 포로와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즉결처분한 후 시체도 치우지 않고 마지막으로 철수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평양 진입을 포기하고 동평양 외곽을 우회하여 순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막 넓은 도로를 건너서 논둑길로 접어들 참이었다.
이 소좌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엎드려요.”
그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채로 서 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폭격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한순간이었다.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화염이 일어나고 땅에 구덩이가 파이고 흙먼지가 풀썩이면서 얼굴을 때렸다. 흙먼지가 솟구치는 곳에서 금속성 파편이 튀어 흩어졌다. 잠시 동안 숨을 쉬려고 해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폭탄 하나가 소리도 없이 날아와 바로 근처에서 터진 것이다. 두 번째 폭탄은 땅 속으로 처박히면서 먼지더미가 피어올랐지만 불발탄이었다.
다행히 시인은 코피가 터지고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 이외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시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다. 다리가 눈에 띌 만큼 후들거리며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폭탄 연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였고 계속 가래를 땅에 뱉어냈다. 폭격기 편대가 하늘을 갈라놓을 듯한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높은 고도로 치솟더니 남쪽으로 사라졌다. 폭격기는 멀어져 갔지만 윙윙거리는 금속성 굉음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시인은 아직도 가슴이 찢어질 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 얼굴과 온몸에는 땀이 흘러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시인은 한동안 멍했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순간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지만 다시 모든 것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손에 어느새 쏘련제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유유히 사라져가는 전투기를 향해 권총을 휘두르며 악에 바쳐서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쌍 간나 새끼들! 개x끼들! 미제 개x끼들! 죽일 놈들!”
그리고 다시 핏발이 선 눈빛으로 시인을 쏘아 보았다.
“폭탄에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지 그랬어요. 차라리 그편이 나아요. 그렇게 사실대로 보고를 하면 그만이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이 소좌가 또다시 몹시 재촉했다.
“그것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요. 어서 떠나야 하지요. 몸을 추슬러야 해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들은 논둑을 지나 앙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언덕 밑 좁은 길로 들어서서 계속 걸었다. 소나무들이 우거진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바람이 거세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이런 날은 폭격기도 쉬었다. 잠시 비가 그치자 강에서부터 피어오른 잿빛 안개가 들판과 산허리를 감쌌다. 안개는 다시 비가 되어 내렸다. 바람은 꽤 가라앉아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밤이 빨리 찾아왔다. 밖에는 계속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그저 깜깜한 어둠과 가는 빗줄기만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비어있는 외딴집에서 며칠을 마냥 보냈다. 그들은 녹초가 된 상태에서 온몸이 쑤시고 아팠고 처량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딱한 처지 때문에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10월 하순이 되자 북쪽에서는 날씨가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터벅터벅 걸어서 다시 강계 쪽으로 가야 했다. 이 소좌는 처음에는 후퇴하는 인민군은 영변이나 박천으로 집결하라는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그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그곳도 미군의 공습이 심해 후방 사령부가 있는 강계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북쪽으로 계속 후퇴하는 인민군 낙오병들이 그러한 사정을 이 소좌에게 알려주었다.
이 소좌가 말했다.
“여기는 평안남도 순천입니다. 안주가 바로 위에 있지요. 우린 지금부터 군우리를 지나서 후방 사령부가 있는 자강도 강계 쪽으로 가야만 합니다. 거리가 여기서 300킬로미터쯤 되겠지요.”
“강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녀가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였다.
“저도 알 수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모든 게 불확실해요!
저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임무를 완수하는 게 중요하지요. 마음이 약해져서 어딘가에서 그냥 주저앉고 싶은 거지요. 도망치고 싶은 거겠지요. 그건 안 되지요. 안전한 곳은 없어요.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우린 가야만 하지요. 끝까지 걸어야 하지요. 강계로. 그것만은 분명하지요.”
“지금도 북조선의 승리를 믿고 있소?”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시라요! 전쟁이란 승리 아니면 패배이지요. 하지만 이 전쟁에서 진다면 혁명의 대의도, 공화국도, 저도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지금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어요. 이 소좌는 잡히면 어떻게 할 생각이요?”
“난 잡히지 않아요. 절대로. 그러나 잡히는 찰나에는 총을 쏴 죽여야겠지요. 아시겠어요? 권총과 탄알 20개가 들어 있는 탄창이 있단 말입니다. 다 써야지요.”
“왜? 그때는 목사를 직접 집행하지 아니하였소?”
“매우 비꼬시는군요. 그때는 제게 총이 없었지. 만약 총이 있었다면 단번에 가슴에다 대고 쏘았겠지. 그러면 목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겠지. 그리고 그 인간의 머리통에 대고 최후의 한 발을 쏘았겠지. 확인사살이 필요하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혁명전사이니까.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순천을 지나서 강계로 가는 도로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미군의 공습을 당한 인민군 트럭들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불에 타고 있었고 인간의 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길바닥에는 팔다리가 끊어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버려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살려 달라”고 허공에 대고 울부짖었다.
이 소좌는 시인을 이끌고 도로를 건너고 폐광촌을 지나서 깊은 산속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지만 다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면서 갈색 솔잎으로 뒤덮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소나무의 제일 위쪽 가지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찍찍거렸다. 다람쥐는 납작하게 엎드려서 작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재빠르게 휘젓고 있었다. 그들은 숲속에서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꾸준히 천천히 길을 걸었지만, 이젠 지칠 대로 지쳐서 길을 걷는 게 너무너무 지긋지긋하였다.
다음날 밤은 하늘은 아주 맑았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높은 산들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쪽에는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갔다. 계곡에서는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구슬픈 올빼미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산속 좁은 길은 계속해서 올라가거나 내려가며 그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밤길을 더듬어 찾아가 보니 다 쓰러져가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늙은 할머니와 반벙어리인 할아버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여긴 일 년 내내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디요. 그저…… 산삼 캐러 다니는 심마니들이 가끔……. 그런디 행색이 심마니 같디는 않구먼. 이 밤중에 무슨 일루다?”
“할머니…… 전쟁이 일어났어요.” 시인이 말했다.
“뭐라구 했수?”
“전쟁이…….”
“우리네는 그런 것 도재 모르디.”
할머니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디…… 그런디…… 배가 고프디는……?”
“할머니…… 먹을 게 좀 있나요?”
“드려야디요. 귀한 손님인디…… 근디 쌀밥은 없디요. 우리도 쌀밥은 일 년에 한 번씩…… 설날에만 구경하디요. 보리죽이나 강냉이죽만 먹디요.”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왜 그런 행색으로 도망을 다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동치미 국물에 꿀맛 같은 강냉이 죽을 배불리 먹었다. 그날 밤 모처럼 숙면을 할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족히 일주일은 먹을 수 있는 강냉이 가루를 얻어서 다시 길을 나섰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높은 산 위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한가하게 떠 있었고 숲속의 대기는 상쾌하고 따뜻하였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들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고 기운이 넘쳤다.
이제 전쟁은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소풍이나 나온 것처럼 주변 경치를 음미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나먼 강계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이 소좌가 말했다. “우린, 별세계를 왔다가 가는군요.”
시인이 말했다. “그런 것 같소이다.”

그 시인은 삼팔선을 넘을 무렵부터 벌써 다리의 부종 때문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걸으면서 다리가 심하게 부었고 그 부분에서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 무릎을 제대로 구부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신발 속으로 부어오른 발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난 발은 늘 젖어 있다. 그러나 이 소좌가 응급 구호조치를 취하고 비상용 항생제를 투여해서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이제는 겨울이 닥쳐왔다. 그들은 때 이른 거친 눈보라와 씨름해야 했다. 처음에는 눈발이 조금씩 흩날렸다. 눈은 땅에 닿기를 주저하기라도 하듯 줄곧 머뭇거리다 춤을 추듯 내려왔다. 그러나 늦은 오후가 되면서 눈보라는 강풍을 동반하였다. 대기는 휘날리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찼다. 대지도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소좌가 징발한 두툼한 솜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견딜 만했다. 다만 발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다.
중공군의 참전과 기습공격, 인해전술로 인해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도로마다 남으로 철수하는 군용 트럭과 온갖 종류의 차량들,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트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트럭에 타고 있는 병사들의 표정이 피로에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그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가 중공군에 밀려서 남으로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다. 초라한 행색의 피난민들이 그들의 모든 재산을 실은 수레를 끌고 내려갔다. 혼란은 시작도 끝도 없었다.
이제는 중공군이 전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말쯤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미군 제10군단을 기습공격했다. 혹독한 겨울에 잔혹한 전투가 17일간이나 벌어졌다. 그리고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이 개시되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월 말쯤 6‧25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운산과 군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중공군은 평양을 회복하고자 남으로 대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밤이면 밤의 정적을 뒤흔드는 중공군의 꽹과리와 피리소리 , 호루라기 소리와 나팔소리가 숲속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깊은 밤 무당집에서 들려오는 굿판의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그것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격 개시 신호였다. 그리고 나서 중공군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자주 고류노프 중기관총을 끌고 남으로 밀고 내려가는 인민군과 중공군의 혼성부대와 격자무늬로 두툼하게 누빈 방한복을 입고 수류탄과 따발총으로 무장한 인민군 수색대와 조우하였다.
그들이 험악한 얼굴로 총을 겨누고 위협하였다. 금방 방아쇠를 당길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이 소좌의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통과시켜 주었다. 이 소좌는 민족보위성 최고사령부가 발급한 군관 신분증과 비밀경찰인 정치보위부의 신분증, 당원증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둘 다 몹시 피곤해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중강진에서 다시 평양 외각 북쪽의 원장리로 이동한 후였다. 그들이 처음 목표로 삼았던 강계 역시 미군의 심한 공습에 견디지 못하고 후방사령부가 통화로 옮겨간 것을 알고 강계 근처에서 다시 양강도의 중강진 방면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심한 산악지역으로 여전히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리 마을은 농가 대부분이 심한 폭격으로 지붕들이 무너져 있었고, 골목의 나무들마저 폭탄 파편에 나무껍질이 깎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피난 가고 없는 빈 농가의 천장이 허물어진 헛간에 누워버렸다.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잠을 자려고 애쓸수록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새 밤의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그날 밤에는 폭격기의 굉음이나 폭격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달빛이 은색의 엷은 천으로 찢겨진 산천을 뒤덮고 있었고, 달이 이지러지면서 달그림자가 점차 더 멀리 산 너머로 물러났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암청색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대동강에서부터 피어오른,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지고 흩어지면서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밤안개가 어느새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 시들은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렇지요. 감상은 혁명에 금물인데 시인을 만나니 어쩔 수 없이 감상주의에 빠져 버렸네요.”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그녀의 검게 탄 긴 목이 감각적이었다. 그녀가 구리 반지를 낀 가는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 맺혀있는 이슬 같은 눈물이 여린 달빛 속에서 보였다.
“곧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삼팔선에서부터 시작하여 두 달 반 동안을 함께 이 산천을 헤맸군요. 평양에서 순천, 강계를 거쳐서, 청천강을 건너서 중강진까지, 중강진에서 다시 평양까지는 근 두 달 동안 천릿길을 걸었지요. 드디어 빙빙 돌아 평양에 도착하였네요.
선생님은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때로는 화도 내고 신경질도 부렸지요. 위협하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하고. 저는 잔인한 납치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였으니까요. 저도 무척 힘들었답니다. 그러나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천우신조로 우린 살아남았지요. 가끔 밤이면 농가의 헛간에서 불을 활활 지펴 놓고 앉아 많은 얘기, 심각한 얘기, 열띤 얘기를 주고받았지요. 때론 밤을 하얗게 새기도 하였지요. 그땐 선생님이 그랬죠. ‘벌써 날이 밝았군.’ 영영 이별하는 느낌이 드는군요. 건강하시게 오래오래 사시라요.
글쎄 말입니다. 저를 잊어버리시라요.
그리고 말입니다. 정치보위부는 험한 곳이에요. 조사를 잘 받으시고 풀려나세요. 그들의 심문에……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그녀가 계속 말했다.
“시인을 호송하는 임무는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요. 그것도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맨몸으로. 저는 재편성되는 부대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전선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지요. 부대 재편성도 불가능했고, 모두들 북쪽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지요. 어쩔 수 없었던 거지요.”
시인이 말했다. “어쨌거나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까요. 제가 은혜를 갚을 기회는 없을 거 같습니다만…… ”
그녀가 멈칫거리며 계속 말했다.
“이런 밤에는…… 이별의 밤에는 이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목이 마르군요. 한 잔의 술이 간절하지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날이 밝으면 떠날 것입니다. 정치보위부가 인수할 거예요.
저는 새로 편성되는 부대로 가서 다시 전선에 배치되겠지요……. 전선에는 총알이 핑핑 소리 내며 막 날아오지요……. 총알이 가슴에 박히면 죽겠죠……. 폭탄에 맞아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하지만 혁명의 대의를 위해 죽는다면 영광이죠. 그래도…… 어쩐 일인지…… 울고 싶군요.”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달빛 속에서 그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가 우리 천우신조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인의 육체는 왜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그녀는 틈나는 대로 가끔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에 살짝 분을 바르지 않았던가. 지금 풀어헤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 여체의 달콤한 체취와 함께 여인의 짙은 향기를 맡으리라. 나는 도취되어 온몸으로 환희를 느끼리라. 따스한 체온을 느끼리라. 그러면 그 열기 같은 따스함이 내 가슴 속으로 전해지고 내 영혼 전체에 나른하게 퍼지리라.
시인은 그 순간 고달팠던 지난 나날들이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났다. 그것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명멸하다가 언젠가는 먼 과거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시인은 그만 목이 꽉 메었다. 그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눈을 살포시 감고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그 험난한 여정에서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어머니였고, 사철 발 벗은 아내였고, 누나였고,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였고, 그녀의 아련한 눈빛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연인이었다.
시인은 목이 쉰 것처럼 목구멍 깊은 곳에서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래 너무 고마워.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부디 살아남아라! 살다보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더욱 짙어진 안개 위로 검은 실루엣 같은 산봉우리와 하늘이 먼 풍경처럼 아득히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안개가 흩어지고 있었다. 곧 새벽이 열리리라. 하늘은 높고 태양은 대지 위에 뜨거운 빛을 쏟으리라. 이 얼어붙은 침묵의 대지는 봄이 오면 다시 만물의 생명을 회생시킬 것이다. 고사목에도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하고 초록의 세계가 싱그럽게 펼쳐질 것이다. 아무리 잔인한 전쟁도 대지의 생명력을 짓밟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부활과 순환. 그러면 인간들의 찢겨진 영혼은 진정되고 육체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

* * *

정치보위부, 김규진 중좌
평양 시내는 여전히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폭격기 편대가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와서 폭탄을 이곳저곳에 쏟아붓고 사라졌다. 거의 파괴된 시가지에서 연기와 불길이 타오르고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평양 곳곳에 세워졌던 미군 보급소에서는 퇴각하면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막대한 양의 군수품과 기름들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검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무렵 평양 방송국과 조선 로동당보에서는 용맹한 중국 의용군 전사들과 북조선 인민군들이 합세해서 남한의 전 지역으로 다시 물밀듯이 내려가고 있으므로 이제 조국통일은 시간문제라고 끊임없이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 평양은 북조선 당국과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남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물론이고 북한 전 지역이 폭격과 식량난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가 발생하여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있었지만 평양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서 가두 검문과 가택 수색이 심하였다.
하늘에는 음산하게 보이는 시커먼 구름이 떠다녔다. 그 둔탁한 납빛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자꾸만 모습을 바꾸었다. 구름들이 달아나고, 다시 만나서 뭉치고, 또다시 갈라졌다. 춥고 스산한 겨울바람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도시를 휩쓸었다. 하늘이 점점 내려앉았다. 어느새 하늘은 완전히 먹구름이 끼었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1950년 겨울은 잔인한 겨울이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시인이 보위부에 정식 인계된 날짜는 12월 20일이다.
정치보위부 건물은 옛날 일본 헌병대가 평양 분실로 쓰던 낡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그나마 본관 건물은 끝없는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그 잔해만 남아있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별관과 그 주위 지하실 등은 철저하게 위장을 한 덕분에 미군 폭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둘레에는 덤불 속에 숨겨진 채로 이중삼중으로 철조망을 쳐 놓았다. 건물은 낡고 칙칙하였다. 그 건물의 지하실 좁은 독방에 그는 임시로 감금되었다. 두 팔을 쫙 벌리면 양쪽 손가락이 벽에 닿을 만큼의 폭이었고, 바닥에 드러누워 팔을 위로 올리면 손끝이 닿을 정도의 길이였다.
그 독방은 어둡고 우울했다.
벽은 습기에 차 있고 사람의 손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의해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12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벌써 한겨울이어서 난방이 되지 않은 지하실 방은 지독히 추웠다.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낡은 매트리스 밑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고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였으며 비현실적이었다.
시인은 가슴이 고통스러울 만큼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한 갈증과 폐쇄공포증이 그를 덮친 것이다. 그는 축축한 냉기가 감도는 유치장에서 밤을 지내다가 낮이 되면 그 건물 2층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방은 북쪽으로 작은 창이 나 있었고 늘 그늘이 져 있어서 벌써 창에는 두껍게 성에가 끼어 희뿌옇게 보였다. 초겨울 내내 햇빛은 오전 잠깐 동안만 비스듬히 비추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처음에는 하급 군관이 매일 비슷비슷한 질문을 하고 그 역시 건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전투기의 폭음 소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렸다. 새로운 군관이 와서 심문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였다. 그는 고위 간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턱이 각진 얼굴은 검은 편이고 살이 쪄서 통통하고, 행동은 유들유들하고 거들먹거리고, 그리고 말쑥하게 인민군 정복을 입었으며 중좌 계급장이 어깨에서 번쩍거렸다. 그가 계속 시인의 얼굴을 날카롭게 뜯어본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한 것처럼 들리지만 벌써부터 날이 서 있었다.
“지금부터 본관이 직접 조사할 것이오. 진실만을 말하시오. 그리고 반드시 존칭어를 쓰기 바라오. 공화국 고급 군관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바라오. 나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이겠지.
나는 정치보위부 문화부 소속 김규진 중좌요. 동무를 조사키 위해 특별히 선발되었지. 본인은 로동당 선전선동부에서 남조선의 저명한 문화예술인들을 북으로 초대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전쟁 통에 이곳으로 차출되었소. 하여간에 그렇게 되었소.
그러니 말입니다, 협조적으로 우리 잘해 봅시다. 내가 오기 전에 하사관들이나 하급 군관들이 동무에게 지나친 행동을 했다면 용서하시오. 그건 공화국의 뜻이 절대 아니었소. 나는 동무에 관한 기록을 샅샅이 훑어보았고 지금 북에는 남조선에서 올라온 문인들이 부지기수요. 그들이 이미 많은 증언을 하였소. 단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조사하는 것이지.”
시인이 말했다. “저는 거대한 음모자가 아닙니다. 제가 숨길 게 무어가 있겠습니까. 오직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겠지. 동문서답을 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내가 마구 화를 낼 것이요. 동무 담배 한 개비 피우시라요. 그리고 커피도. 이 커피가 이 난리 통에 얼마나 귀한지를 동무도 잘 아시겠지요.
커피는 역시 미제가 최고이지요. 동무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지. 그러니 우리 잘 협조해서 조사를 끝마치기로 합시다.
동무! 동무!! 동무!!! 안 그렇습니까?”
그들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얼마 만인가. 뜨거운 커피는 진한 회색빛이었고 달콤하고 쓰디쓴 향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 씁쓸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긴 여운을 남겼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겁을 먹고 있는 건가? 이 미증유의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인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가 있을 것인가? 피조사자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스탈린식 조사가 시작되고 있는 거야.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지금부터 상상의 죄를, 자신의 죄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해야만 하는 거야. 오, 하느님, 전지전능한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모든 걸 보고 계시고 모든 걸 듣고 계시고 모든 걸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당신을 애타게 부르고 싶습니다. 부르고 또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왜 지금 듣지 못하시는 겁니까? 들어도 못 들은 척 혹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동무의 친일 행적부터 시작하지. 우리는 충분히 사전 조사를 했으니까 허튼 소리는 하지 않기요. 그런데 조선 민족으로서 어찌하여 그런 자에게 빌붙었단 말이요. 동무는 양심도 없었소.
동무는 당초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기타하라 하쿠슈로부터 시를 배웠단 말입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러니까 동지사대학 시절을 말하는 거요. 동무는 특히 하쿠슈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사숙까지 했었지. 그가 동무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단 말이지요.”
시인이 대꾸하였다. “정치보위부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나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동무, 쓸데없는 말을 삼가시오. 그 무렵에 동무는 무어라고 말했소. 일본의 피리나 빌려서 연습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피리꾼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하쿠슈더러 들으라 한 것 아니었소.
그리고 하쿠슈가 애용했던 어휘나 시어, 이미지를 은근슬쩍 빌려서 시를 쓰니 동무의 초기 시에서는 하쿠슈의 냄새가 물씬 풍겼단 말이지. 그런데 하쿠슈가 누구인가요? 그자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성전을 찬미하며 일본의 민족의식을 고취해서 국민시인이 된 자가 아닙니까. 수많은 전쟁협력시를 발표했어요.
그런데도 동무는 배알도 없이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저버리고 그런 자에게 빌붙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겠습니다. 예술가는 처음 시작할 때는, 다시 말씀드리면 습작기에는 모방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모든 예술가의 숙명일 겁니다. 저의 경우에도 그 시절에는 거의 모방했습니다. 훔치기도 했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요.
그 과정에서 참된 시인으로 성숙했어요. 성숙하면 할수록 변화를 합니다. 몇 번의 변화 과정이 있었지요. 다른 사람의 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정수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념이니 사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건 알맹이가 없는 언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저는 時를 씁니다.”
“자기 변명이 도를 넘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모독하고 있지!”
시인은 내내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했다. 옆 책상에서는 새로 온 하사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구식 타이프라이터로 신문조서를 사무적으로 작성하고 있다.
김 중좌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가 처음으로 말했다.
“나는 김유성 특무상사요. ‘김 특무’라고 부르디요. 난두 무식해서인지 시를 도통 모르디요. 그러나 동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만은 알 수 있디요. 동무가 그런 시 좀 썼다고 한들 그게 무슨 죄가 되갔시요. 동무는 지금 잘 하고 있디요. 기래요, 흥분하지 마시라요.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성질이 몹시 급하시거든요. 괜히 고생할 거야 없디 않가서요.
그분이 힘이 센 사람입네다. 공화국의 높은 분들과는 두루 잘 통하디요. 내가 전방 전투사단의 사단본부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두 그분이 끌어주신 거라요. 여기는 평양에서도 제일 안전한 곳이예요. 기래니까 반드시 시키는 대루 하시라요. 기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디요. 그분이야말로 동무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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