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백과 엄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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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극 <플리백>을 보았다.
여자 극작가 Phoebe Waller-Bridge(피비 월러브리지)가 직접 쓰고 직접 연기한 1인극이 원작이다.
관객의 80%가 젊은 여자였다. 나는 연극 자체보다 관객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플리백은 여배우 한 명이 90분 동안 관객을 이끈다. 나머지 출연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맡는다.
무대 장식도 없고 배우의 움직임도 없다. 의자에 앉아서 독백을 쏟아낸다.
주인공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독백과 연기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코미디와 비극을 섞는 방식은 2013년 영국의 에든버러 프린지 초연 당시 매우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2016년 TV 시리즈 시즌 1, 2019년 시즌 2가 방영되며 세계적인 성공과 함께 각종 시상식을 석권했다.
플리백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시종일관 플리백으로 묘사되는데 플리백은 벼룩투성이 동물, 지저분한 사람, 허름한 장소, 싸구려 숙소를 의미한다.
작품 속 다른 인물들도 이름 없이 그냥 아버지, 형부, 대모, 신부로 불린다.
지나친 성적 일탈과 묘사가 많아서 주인공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한 아가씨가 친구들에게 섹스를 다른 것으로 치환하면(쇼핑이나 게임 등)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성에 관한 문제에도 정반합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가족 단위가 일처다부에서 일부다처로, 그리고 일부일처가 되기까지 변화한 것처럼
성 역시 완전한 개방에서 완전한 억압을 거쳐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소크라테스 시절 성은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당시의 성은 자기 수양과 쾌락의 절제라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였다.
단순히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로 나아가는 철학적 사다리이고(정),
관계는 소유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과정이기에 ‘쿨함’보다는 지속적인 배려와 교육적 책임이 동반되고(반),
사랑은 원나잇 스탠드와 같은 단기적 소모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깎아 타인을 빛나게 하는 무거운 관계였다(합).
지금 이 시대에 쿨함이 미덕이 된 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상처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플리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날카로운 변증법적 모순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은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척하며 섹스를 가벼운 유희로 소비하지만,
이면에는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고 싶다는 처절한 결핍이 있다.
변증법적으로 보면, 현대의 쿨함은 고대의 정신적 에로스에 대한 부정이다.
너무 무겁고 구속적인 고대의 사랑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볍고 자유로운 사랑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버렸다는 점이 문제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통합하여, 자유로우면서도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누는 ‘제3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쿨함이라는 얕은 수면 위를 맴돌고 있다.
현재의 불완전한 합(자유롭지만 공허한 섹스)이 무너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섹스에 대한 근원적인 무관심과 사유의 종말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카톡 방을 열면 헌신이나 인간의 도리와 관련한 에피소드, 문구, 카드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와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에서는 아주 아주 이기적이다. 작은 책임도 나누려 하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을 바보로 여긴다.
나는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기쁜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들은 현실에서 헌신과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시간과 에너지 절약과 편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이 가져오는 불쾌감을 인지하는 존재다.
아침마다 타인의 미담을 퍼 나름으로써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라는 심리적 면죄부를 얻으려고 한다.
요즘 Z세대 사이에서 ‘엄마새’ 라는 말이 유행인데, 자발적으로 엄마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단어라고 한다.
삶에서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에 관해 물었더니 애인, 연인이 상위에 꼽혔다.
이는 불완전한 합의 실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다.
Z세대가 자발적으로 ‘엄마새’가 되어 효심을 전시하는 것은 실패 없는 안전한 관계'를 향한 퇴행적 선택이다.
타인(애인, 연인)은 언제든 나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고, 나의 이기심과 충돌하며, 복잡한 사유를 요구한다.
반면, 엄마라는 존재는 내 욕망을 가장 잘 알아주고 수용해 준다.
외부 세계의 관계가 너무나 피로하고, 쿨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에 가장 근원적이고 안전한 대상인 엄마에게로 숨어드는 것이다.
즉, 엄마새는 성숙한 주체로서의 독립과 사유를 포기하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해 주는 대상과의 합일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정-반-합-불완전한 합을 넘어 관계의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Z세대는 현대의 연애가 가져야 할 사유와 고통의 총량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이제 연애는 낭만이 아니라 비용이다.
상대의 감정을 살피고, 갈등을 조정하고, 나의 시간을 할애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큰 손실로 계산된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거부하고 엄마의 품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Z세대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기에 가장 좁은 세계에 갇혀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해답을 찾기 위해 극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플리백에 젊은 관객이 모이는 것 아닐까.
여자 극작가 Phoebe Waller-Bridge(피비 월러브리지)가 직접 쓰고 직접 연기한 1인극이 원작이다.
관객의 80%가 젊은 여자였다. 나는 연극 자체보다 관객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플리백은 여배우 한 명이 90분 동안 관객을 이끈다. 나머지 출연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맡는다.
무대 장식도 없고 배우의 움직임도 없다. 의자에 앉아서 독백을 쏟아낸다.
주인공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독백과 연기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코미디와 비극을 섞는 방식은 2013년 영국의 에든버러 프린지 초연 당시 매우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2016년 TV 시리즈 시즌 1, 2019년 시즌 2가 방영되며 세계적인 성공과 함께 각종 시상식을 석권했다.
플리백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시종일관 플리백으로 묘사되는데 플리백은 벼룩투성이 동물, 지저분한 사람, 허름한 장소, 싸구려 숙소를 의미한다.
작품 속 다른 인물들도 이름 없이 그냥 아버지, 형부, 대모, 신부로 불린다.
지나친 성적 일탈과 묘사가 많아서 주인공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한 아가씨가 친구들에게 섹스를 다른 것으로 치환하면(쇼핑이나 게임 등)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성에 관한 문제에도 정반합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가족 단위가 일처다부에서 일부다처로, 그리고 일부일처가 되기까지 변화한 것처럼
성 역시 완전한 개방에서 완전한 억압을 거쳐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소크라테스 시절 성은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당시의 성은 자기 수양과 쾌락의 절제라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였다.
단순히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로 나아가는 철학적 사다리이고(정),
관계는 소유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과정이기에 ‘쿨함’보다는 지속적인 배려와 교육적 책임이 동반되고(반),
사랑은 원나잇 스탠드와 같은 단기적 소모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깎아 타인을 빛나게 하는 무거운 관계였다(합).
지금 이 시대에 쿨함이 미덕이 된 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상처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플리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날카로운 변증법적 모순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은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척하며 섹스를 가벼운 유희로 소비하지만,
이면에는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고 싶다는 처절한 결핍이 있다.
변증법적으로 보면, 현대의 쿨함은 고대의 정신적 에로스에 대한 부정이다.
너무 무겁고 구속적인 고대의 사랑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볍고 자유로운 사랑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버렸다는 점이 문제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통합하여, 자유로우면서도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누는 ‘제3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쿨함이라는 얕은 수면 위를 맴돌고 있다.
현재의 불완전한 합(자유롭지만 공허한 섹스)이 무너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섹스에 대한 근원적인 무관심과 사유의 종말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카톡 방을 열면 헌신이나 인간의 도리와 관련한 에피소드, 문구, 카드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와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에서는 아주 아주 이기적이다. 작은 책임도 나누려 하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을 바보로 여긴다.
나는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기쁜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들은 현실에서 헌신과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시간과 에너지 절약과 편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이 가져오는 불쾌감을 인지하는 존재다.
아침마다 타인의 미담을 퍼 나름으로써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라는 심리적 면죄부를 얻으려고 한다.
요즘 Z세대 사이에서 ‘엄마새’ 라는 말이 유행인데, 자발적으로 엄마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단어라고 한다.
삶에서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에 관해 물었더니 애인, 연인이 상위에 꼽혔다.
이는 불완전한 합의 실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다.
Z세대가 자발적으로 ‘엄마새’가 되어 효심을 전시하는 것은 실패 없는 안전한 관계'를 향한 퇴행적 선택이다.
타인(애인, 연인)은 언제든 나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고, 나의 이기심과 충돌하며, 복잡한 사유를 요구한다.
반면, 엄마라는 존재는 내 욕망을 가장 잘 알아주고 수용해 준다.
외부 세계의 관계가 너무나 피로하고, 쿨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에 가장 근원적이고 안전한 대상인 엄마에게로 숨어드는 것이다.
즉, 엄마새는 성숙한 주체로서의 독립과 사유를 포기하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해 주는 대상과의 합일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정-반-합-불완전한 합을 넘어 관계의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Z세대는 현대의 연애가 가져야 할 사유와 고통의 총량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이제 연애는 낭만이 아니라 비용이다.
상대의 감정을 살피고, 갈등을 조정하고, 나의 시간을 할애하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큰 손실로 계산된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거부하고 엄마의 품이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Z세대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했기에 가장 좁은 세계에 갇혀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해답을 찾기 위해 극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플리백에 젊은 관객이 모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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