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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Hacksaw 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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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현신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6-09-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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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이 감독하고 앤드루 가필드가 주연을 맡아 2016년 제작된 핵소 고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했다.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인데 어린 시절 동생과 싸우다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뻔했고, 부부 싸움 도중 엄마를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아버지에게 겨누었던 경험을 통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에 자원하는데, 군수공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었다. 훈련소에서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동료들에게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고, 상관에게도 괴롭힘을 당하며 군사재판까지 받게 된다. 도스 같은 사람을 우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고 부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의무병이 되어 오키나와의 핵소 고지 탈환전에 배치된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데스몬드는 후퇴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버려진 부상자를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어 절벽 아래로 내려보낸다. 한 명을 구한 뒤 다시 돌아가고, 또 한 명을 구한 뒤 다시 돌아간다. 그가 “한 명만 더”라고 신에게 기도하며 구조를 반복하는 모습이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날 밤 그는 75명의 생명을 구했다.

서울시 노원구에 있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과 삼육부산병원을 세운 교단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다. 하느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7일째에 쉬었는데 그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쉰다. 주 5일 근무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이 문제로 직장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영화에서 도스가 마지막으로 참전하는 날도 토요일이다. 안식일에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켜왔으나 도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라며 참전을 결정한다. 그리고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기도가 끝난 뒤 절벽 위로 올라간다.

<핵소 고지>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영화관에서만 재개봉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재상영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2017년 개봉 당시 관람객 17만 8천 명으로 흥행 참패를 기록한 영화인데 재상영 이틀 만에 18만명을 넘어섰다. 재개봉하자마자 2017년 전체 관객 수를 넘어섰다는 건 배급사와 상영관의 결정이 옳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2026년 2월 8일 미국이 이란을 전격 공습해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폭사시키며 미국·이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9월 1일 미국은 이란 남부와 호르무즈 해협 일대의 군사 목표 100곳을 6시간 동안 맹폭했다. 이란도 요르단 미군 기지 등을 탄도미사일로 공격하고 무인기를 격추하는 등 보복에 나섬으로써 6월에 체결되었던 임시 휴전 체제의 완전 파기 및 전면전으로의 확대와 장기화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북한이 전투 병력을 파병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4년이 지나도록 어느 한쪽도 압도적인 승기를 잡지 못한 채 고강도 소모전과 장기전 양상이 지속되고 있다. 동아시아는? 북한은 핵 무기 약 60기를 보유하고 있고, 일본은 평화헌법 제9조 제1항(전쟁 포기)과 제2항(전력 보유와 교전권 부인)을 개정하려고 하고, 중국은 대만을 편입시키려고 한다. 동아시아 전체가 분단 → 군사적 대립 → 핵무기 → 재무장 → 집단안보라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전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이틀 만에 2017년 총 관람객을 넘어섰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불안정한 이 시점에 영화 <핵소 고지>는 우리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진다. 비록 전쟁이 불가피하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전쟁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전쟁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계층·성별·세대 간의 파편화가 급속하게 진행 중이다. 20·30 남성은 우편향 중이고, 여성은 좌편향 중이다. 결과의 평등보다 경쟁과 기회의 평등을 원하는 건 남녀 공히 같으나 남자의 경우 군 복무에 대한 보상 부재, 취업 난 속에서 기존의 여가부 정책이나 여성 할당제 등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런데 과거 군복무 가산제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던, 이제는 중년이 된 페미니스트 후배가 과거 자신들의 행태를 후회한다고 말했다. 군대가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젊음과 시간을 바치는 의미를 몰랐다는 것이다. 중년이 된 페미니스트 후배의 자기 고백과, 도스의 모순된 선택(전쟁에 참여하되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다.

신념이란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다. 이러한 신념은 삶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소중한 동력이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지 않으면 극단주의로 빠지게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처단해야 할 악이나 적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논쟁 파트너로 인정하고, 믿고 싶은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확증 편향을 경계하며, 아무리 숭고한 목표나 신념이라 할지라도 폭력, 선동, 불법, 인권 침해 등 부당한 수단을 정당화하면 안 된다.

도스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그는 전쟁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다. 참여하되 다만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도 몇 명이나 절벽 아래로 내려보낸다. 올바른 신념이란 이런 것이다. 멜 깁슨 감독이 이 영화를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라고 한 이유는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 살리는 능력으로 증명되는 영웅주의를 구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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