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02-703-9837
회원가입 로그인
회원가입 로그인

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 소설창작실

자유게시판

영산강변에 흐르는 '금남 표해록'의 선율 / 최문경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한국소설가협회 (119.♡.172.10)
댓글 0건 조회 158회 작성일 24-10-21 11:25

본문

             영산강변에 흐르는 ‘금남 표해록’의 선율


영산강에 깃든 역사와 인물을 찾아,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강변도로을 따라 달린다. 지명에 담긴 뜻이 그 역사와 내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무안 지역 영산강은 몽탄강으로 불린다. 한글로 풀어 쓰면 ‘꿈여울’이다. 잔잔하게 휘돌아가는 ‘꿈여울’을 내려다보 곳에 자리 잡은, 꿈결 같은 풍광이 먼저 떠오르지만, 크고작은 전란을 피해갈 수 없었던 곳이 어찌 꿈여울 뿐이랴. 여러 지명에 얽힌 유래는 다급하고도 절박함이......

왕건이 꿈 속에서 살 길을 찾은 강이라는 전설이 서려 있는, 그러나 

창밖으로 바라보는 영산강 물결은 푸르기만 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영산강변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가 있고, 중국을 표류했던 금남 최부가 있었다. 

조선사대부의 절대지촌으로 불렸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최부의 ‘ 금남 표해록’  문학과 유학 사상을 탁인석 [최부 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세미나 좌장으로 진행되었다.

저명 문인 및 학자 특히 광주.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함으로써 심도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기대하며, 조선의 문인이며, 시대를 풍미했던 나주가 낳은 금남 최부 선생의 문학과 유학사상을 분석하였다.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쓴 “금남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역사서인 :“동국통감”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최부를 말하 때는 역시 “표해록” 꼽는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부[1454-1504] 선생은 나주 동강면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합격해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서 근무할 때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오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멀리 중국 땅까지 표류하게 된다. 

 해적을 만나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끝까지 상복을 입고 있었던  최부였다. 

최부 선생은 조선 시대의 표본이며, 지극한 효심을 지녔으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골이라 강조했다. 


제1 주제 ‘금남 최부의 탐라시 35절에 대한 이해’를 현행복[한학자] 주제를 김종[전 조선대 교수. 시인]께서는, 토론자로 질의 하였으며, 

제2 주제 ‘금남 최부선생의 유학사상 고찰’에 대해 기세규[ 유학대학 교수]의 주제를 이흥수[ 전남대학교 교수]가 질의 하였으며,

제3 주제 “표해록”을 통한 관광 진흥 방안“을 김성후[동신대 교수]의주제를 지형원[문화통 발행] 주제자와 토론자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토론 질의를 하였다.

 탁인석 이사장의 좌장으로 진행되는 학술세미나는 오후 1시쯤 성황리에 끝나고, 점심을 마친 일행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금남 최부 선생의 흔적을 찾아 영산강 강변도로을 달리고 달렸다. 

전숙 시인의  

‘별은 무엇으로 빛나는가’-금남공 최부선생을 기르며, 축시를 김향미 시낭송가의, 낭송의 울림이 영산강 강물을 따라 흐른다.

 

영산강의 이름은 ‘영산포’에서 왔다. ‘영산’란 이름은, 본래 전남 신안의 흑산도 인근의 ‘섬’ 이름이다. 흑산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 영산도다.

고려 말 영산도에 살던 주민들이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섬을 아예 비우고, ‘조정의 공도 정책’에 따라 그곳 섬 사람들이 육지로 이주해 나주 인근 포구에 정착하였고, 그들이 정착한 포구라해서 영산포란 이름이 붙었고, 영산포의 이름을 따서 영산강의 이름을 얻었다.

                   

영산강 강변을 따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많은 정자를 만나게 된다. 정자 중에서도 안 보고 가면 아쉬울 것들을 뽑아서 보여준다.

 도로에서 버스가 멈춰섰다. 강이 s자로 크게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감상한다. 


최부가 태어난 곳은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이다. 그런데 최부는, 강 건너 영산강이 휘돌아 감고 있는 늘어지,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 산 125에 묻혀있다.

몽탄 이산 마을에는 그를 추모하는 재각인 경모재와 최부의 묘가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이 호위하듯 서 있고, 오래된 여러 개의 묘비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쪽에는 아버지 최택의 묘가 있다. 본래는 해남 마산면 모목동에 있었는데, 1947년 후손들에 의해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로 옮겨졌다고 했다.

경모재 담벽에는 그가 쓴 ‘표해록’의 장면들을 묘사한 여러 그림들이 있었다.중국 저장성 닝보에 표류해 황저우,베이징,요동지방,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귀한까지 약 6개월간 최부의 이동 경로가 민화처럼 그려져 있어서,전체적인 윤곽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골목 벽화처럼 색이 바랬고, 바래져 가는 것이 안타 깝다는 설명이다.



과거에 급제 후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한 자를 쫓는, ‘추쇄경차관’ 벼슬에 임명돼 제주로 부임한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돌아오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바다를 떠돌다가 중국 남부 저장성 닝보에 도착, 해적에 붙들려 왜구로 오인되는 중에도, 그는 내내 의연한 선비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고, 상복을 갈아입지 않았다. 

제주에서 함깨 배에 올랐던 일행 43명을 모두 무사했다.

최부는 귀국 후 성종의 명으로 당나라 기행 견문 표해록’ 썼다. ‘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하나로 평가 되고 있다.

 

극한의 표류 과정과 위태로운 모험을 견디면서 살아남았던 그였다. 제법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초시를 거쳐 25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김종직과 사제관을 맺었고, 김굉필과 공부하였다. 그는 연산군조의 무오사화[1498년]로 훈구파의 세력에 밀려 사림파의 거두들과 함께 유형을 당하게 되었고,

갑자사화[1504]로 함경도 단천에서10월 24일 참수되어 생을 마감하였고.그때 그의 가족은 해남 마산면 버드나무골[상등리]에 살았다고 했다.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탁인석 이사장님께서 ‘5.18 44주년 기념 소설’ 최문경 작가의 대하장편 소설 ” 불어오는 바람“9권을 쓴 작가를 소개해 주셨고, 쓰면서 작가로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꼈으며, 그 위대한 명작소설의 출간을 축하하신다면서, 마이크가 제게 넘어왔을 때 가슴이 뜨거웠으며, 나는 벅차오르는 뜨거움으로 나는 왜곡된 5.18을 소설로 교정. 복원하고 싶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탁인석 이사장님 감사합니다.

금남 최부 선생 학술세미나성황리에 마친 것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그날 뜻을 함께해주신 이민주 이사님, 박인순 선생님과 참석하신 모든 선생님들의 평온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소설가 최문경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업무시간 : 오전 10시 ~ 오후 4시

사단법인 한국소설가 협회
주소 : 04175)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2, 한신빌딩 1113
전화번호 : 02-703-9837 FAX : 02-703-7055
이메일 : novel2010@naver.com

Copyright © K-novel All Rights Reserved

계좌안내

국민은행 827-01-0340-303 (사)한국소설가협회

농협 069-01-257808 (사)한국소설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