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장편소설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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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새로운 상황과 기억을 다룬 분단문학의 좌표
판형 135/195, 420쪽
가격 15,000원
ISBN 979-11-92828-19-0*03810
발행일 2023년 7월 15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한국전쟁 한복판에서 청춘과 정열을 다 바친 주인공 천인화의 기억을 변주해가면서 살아온 시간을 담아낸 일종의 전쟁소설이다. 전쟁의 구체적인 상황과 전후의 섬세한 기억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작가의 치밀한 문헌 섭렵과 사실 고증 그리고 독창적인 시선과 문장으로 그려낸 전쟁소설의 백미로 읽히면서, 새로운 상황과 기억을 다룬 분단문학의 한 좌표로 우뚝 선 작품이다.
정연하고 꼼꼼한 실증성을 바탕으로 한 전쟁소설
『함성』은 총 17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첫 장 ‘침묵의 바다’에서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어디론가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느낌이 연쇄적으로 펼쳐지는 긴박한 전쟁의 정황이 천인화의 꿈속에서 재현된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악몽 속에서 지내는 천인화는 한국전쟁에서 유격대원으로 활약하던 지난 시간에 대한 자긍과 기억으로 한세월을 건너온 인물이다. 꿈에서 깨어난 천인화는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바다를 떠도는 동료들의 혼령뿐이다. 안개비만 내리면 그런 트라우마는 증폭되어 천인화는 피울음을 쏟아내는 수많은 사람의 ‘함성’에 시달린다. 소설의 제목 ‘함성’은 그렇게 죽은 이들의 피울음과 함께 독자들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운 동료들의 얼굴이 고개를 들고 다가오는 바다에서 천인화는 자신이 ‘왕년에 유격대장을 하던 구월산 호랑이 천 대위’임을 새삼 떠올린다. 2장 ‘갈등과 혼란의 세월’부터 소설은 전쟁 당시로 돌아가 천인화의 전쟁 체험이 소상하게 서술되고 있다. 정연하고 꼼꼼한 실증성을 바탕으로 전쟁 직후부터 휴전 때까지의 흐름을 날짜 단위로 따라가면서 인물들의 행동과 상호관계를 긴박하게 그린다.
원래 육군정보부 소속 첩보공작 대원이었던 천인화는 특수 임무를 띠고 장연과 해주 등 황해도를 무대로 활약했는데, 단신으로 평양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쟁이 나자 부모님이 계신 사리원으로 가지 못하고 구월산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 대열 속에서 여동생 설화를 만나 부모님과 막내동생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천인화는 젊은이들을 모아 ‘구월산 유격부대’를 만들고 대위가 되어 반공의 보루역할을 수행한다. 유격대원 중에는 전통 무예를 하는 대원들이 있었는데 천인화는 그들로 하여금 대원들에게 무예를 숙달하게끔 한다. 특별히 ‘전통 무예’를 중요한 싸움의 형식으로 택한 것은 우리의 순연한 맥락으로부터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출하고 보편화하려는 작가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이 무예를 배우면서 구월산 유격대들이 내지른 ‘함성’이 시간의 한 축을 지탱하면서 서사는 이어진다.
심원한 인간과 역사와 평화에 대한 가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함성』은 단순한 반공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가장 심원한 인간과 역사와 평화에 대한 가치론적 도약 과정을 그려간다. 5장 ‘소리 없는 함성을 품은 민초들’부터는 그런 역사적 의미가 배가된다. 천인화는 수색 중 골짜기 외딴집에서 잔인한 전쟁 때문에 전사가 된 열다섯 살 인민군 정순의 목숨을 구하고 그녀는 천인화의 동생 설화와 마음의 동지가 된다. 소설은 유엔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의 흐름 속에서 인간 본연의 자유와 권리를 찾으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민초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흥남에서 벌어진 대규모 철수 작전 과정과, 이어지는 1‧4후퇴 때 구월산 유격부대가 황해도 일대에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상황을 정확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대원들의 의지와 주민들의 협조 장면이 실감을 더하면서 전쟁의 잔혹함 너머 인간 본래의 사랑이 숨 쉬는 장면을 독자들은 호흡할 수 있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죽는 날까지 흙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민초들의 소원을 역행하는 전쟁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음을 작가는 실감 나는 현장 묘사를 통해 증언한다. 목숨 건 혈투를 이어가는 구월산 부대는 1951년 1월 10일 총병력을 용포리 능선에 집결시키고, 수십 명 대원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고향을 지키려 애썼지만 무기와 전략 부족으로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천인화는 감쪽같이 적을 따돌리고 웅도로 철수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소설은 전쟁 가운데 일어난 인간적인 시간과 가장 비인간적인 시간을 비대칭적으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심부를 거듭 질문하고 있다.
1951년 봄기운이 감도는 웅도를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인 천인화는 부관으로 섬에 온 미군의 제랄드 하베이 소위를 만난다. 20대 초반의 해맑은 미군 청년의 등장은 미군의 지원을 정식으로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고, 유격대원들에게 한없는 힘과 용기를 주는 순간이었다. 대원들이 모두 나와 군무를 추며 질러대는 ‘함성’이 웅도에 퍼지면서 소설은 구월산 부대의 사기 충전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 ‘함성’ 이면의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초토화시키고 빼앗아간 전쟁에 대한 본원적 비판도 잊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이 통째로 훼손당하는 마당에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는 한탄은 이 소설의 주제를 집약한다.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진행되면서 모든 군대는 전투 상황을 종료한다. 그러나 한반도 곳곳에서 지역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천인화가 이끄는 구월산 부대에도 인민군의 박격포 공격이 시작되었다. 잠시 웅도를 떠나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온 천인화는 널브러진 시체, 전소된 동네, 파괴된 토막, 부상병들의 울부짖음과 넋을 잃은 주민들, 해변으로 떠밀려온 어린아이, 동물들의 시체를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 마을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미군 당국에 의해 부대장에서 파면된 천인화는 무장해제 되어 백령도로 송환된다. 그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석도라는 섬에 닿아 그곳 촌장의 호의로 간신히 백령도에 도착하지만 동생 설화가 탄 미군 함정은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었고, 운양호에 승선한 134명의 구월산 유격대 동료 가운데 네 사람만 구출되고 130명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구월산 부대원들은 전원 포로 취급을 받으며 1951년 8월 5일 인천 수용소로 압송되었다가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닿은 곳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이다. 이 거대한 수용소에서 천인화와 부대원들은 또 다른 지옥을 경험한다. 10월 12월까지 수많은 포로가 서로 살상하고 살상당하는 비극이 그 안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 수용소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손을 부상당한 천인화는 그곳에서 정순과 다시 해후한다. 정순은 천인화의 손 역할을 해주겠다며 한없이 따뜻한 온기를 그에게 전해준다. 저간의 사정을 소명한 천인화는 대구 육군병원으로 이송당해 치료를 받으면서 대원들 신원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마침내 구월산 부대가 석방되고 천인화는 지위가 원상 복귀되어 수용소를 등지고 대한민국 품에 다시 안긴다.
선명한 전쟁의 기억과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
8월 22일 구월산 부대가 인천으로 출발하는 날 천인화와 정순도 동행한다. 인천에 도착한 천인화는 ‘소리 없는 처절한 함성이 그의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더이상 군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으며 구월산 유격대원들과 헤어진다. 정작 갈 곳이 없는 구월산 부대원들은 대부분 국방부의 후속 조치를 청원하여 인천에 남았고, 천인화는 그들이 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동안 천인화와 정순은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다. “정순은 검은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 대원들이 꺾어온 들꽃을 머리에 꽂고, 꽃다발을 한아름 묶어서 들었다.” 검은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정순은 전쟁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천인화와 정순의 사랑은 대원들이 꺾어온 들꽃처럼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 부분은 소설 『함성』의 또 다른 지향점인 ‘사랑의 서사’를 완결하는 장면이자, 그들의 애끓는 함성을 담은 상징적 장치이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변하여 이북 땅과 섬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이 되고, 유격대원들이 쌓아 올린 ‘충혼탑’처럼 그렇게 추념과 기억의 시간은 쌓여간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타결되었고 천인화는 인천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고향인 황해와 구월산에서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오고 있었다.
소설 『함성』에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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