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현 장편소설 『단진자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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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뜨겁고도 붉은 현장
판형 152/225, 260쪽
가격 15,000원
ISBN 979-11-92828-17-6*03810
발행일 2023년 6월 20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박규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로 지역 간, 계층 간, 이념 간으로 첨예했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전투경찰 전위부대 흑골단원과 공장 노조원 노동자, 그 둘을 아들로 둔 어머니 순창댁의 애끓는 통한의 울부짖음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정치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입하다가 다쳐 결국 다리를 하나 잃게 되는 동석, 독점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 투쟁 선봉에 나섰다가 최루탄에 얼굴을 다쳐 코와 눈이 뭉개진 동생 동철, 그 둘을 지켜야 했던 동반자로서의 어머니 순창댁, 그 둘 삶의 증언자, 목격자로 눈을 부릅뜨야 했던 어머니 순청댁, 그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뜨거운 시대의 서사이다.
박규현 장편소설 『단진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순창댁, 동석, 동철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건들을 통해 시대적 문제 상황이 서서히 드러나게 한다. 하지만 어떤 비약적 해결보다는 그것에 대응하는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사실을 그대로 나타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 그들을 둘러싼 삶의 다양성이 폭넓게 수용된 일상의 현장에 대한 대중적 공감이 그만큼 핍진하도록 서사를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순창댁과 동석, 동철의 삶과 내력을 줄기차게 이야기 하지만 결코 사적인 소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시대와 현실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이처럼 삶의 중층적인 구조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의 인물들은 시대와 현장 중심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진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한 가족이 서서히 부서져 내리는 과정과 그 가족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사실이 과장 없이 무서우리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어 시대 고발이나 증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관통하는 지독한 무거움은 가벼운 의식이 시대정신이 되다시피 한 요즘 세상에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시대의 비극성을 섬뜩하게 이야기하는 현장이다.
목차
작가의 말
1~7 / 9
참고 문헌
본문 속으로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빗발이 국숫발 모양으로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차의 속도가 많이 줄었다. 앞차와 넉넉한 거리를 두고 헐떡거리며 빗길을 질주해 갔다. 순창댁은 와이퍼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차창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선영은 젖버듬히 몸을 누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차창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그때마다 석별의 씁쓸한 맛을 안겨주었다.
‘태인댁, 나는 시방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디 그대는 뭐 허고 있소. 지금쯤 집 구석구석 청소를 허고 있을 것 같소. 집은 잘 산 것이요. 내가 헐값으로 넘긴 것을 알고나 있으시오잉. 아, 거저 준 거나 다름없다 그 말이요. 우리 집을 샀다고 혀서가 아니라 나는 태인댁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소. 지일 가깝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소. 새로 산 집에서 태인양반허고 니롱내롱허면서 행복허게 사시오잉.’
학생들은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하며 정문 가까이 이동해 왔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한 몸이 되어 어깨동무하고 물밀듯 이동해 왔다. 그들은 가슴 속과 뒷주머니에 화염병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깨동무하고 전경들을 몸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때 그대로 두면 몸싸움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하기 십상이었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문 주위가 뿌연 연기 속에 휩싸였다. 학생들이 코를 싸잡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학생이 재채기를 토해내면서도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정문 주위는 최루가스와 깨진 화염병에서 나온 불덩이의 물결로 어지러웠다. 전경들이 정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 흩어져 가는 학생들 뒤에다 계속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지면 빨리 시위대를 해산시켜야 한다. 그것이 전경들의 중요한 행동 강령이다.
순창댁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어질러진 채소를 만지작거려 가지런하게 정돈하였다. 손님들은 유독 덕장댁에게로만 몰렸다. 소복하게 쌓아놓은 순창댁네 좌판에 비하면 덕장댁네 좌판은 많이 축나 있었다. 채소를 쌓아놓은 수심 어린 표정의 순창댁과 많이 팔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연신 방긋거리는 덕장댁과는 대조적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더위가 한풀 꺾였다. 간혹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안면을 때렸다. 물건을 다 팔고 좌판을 정리한 덕장댁이 옷을 툭툭 털더니 아랫배에 찬 주머니의 지퍼를 열고 돈은 꺼내었다. 꼬깃꼬깃 접힌 지폐가 한 움큼 손에 쥐여 있었다. 덕장댁은 한 장씩 가지런하게 각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침을 뱉어가며 돈을 세었다. 그러한 덕장댁의 몸뻬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동철이 11번 버스를 타고 가서 약속 장소에 나타났을 때 벌써 많은 동지들이 나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농성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다들 조금은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거리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임시 노조 집행부 표일영 위원장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준비물을 점검했다. 징^꽹과리^장고^북을 든 대원들이 표일영 위원장과 밀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대원들이 인도를 점거하고 앉아 있는 바로 뒤에는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 현수막에는 “대제전선 허만기 사장 물러가라!”는 표어가 빨간 글씨로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소영구 동지와 정만철 동지는 인쇄물을 준비하여 길 가는 사람들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의 요구라고 명명된 인쇄물은 노조 측 요구 사항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고 회사 간부들의 부당성과 착취 행위가 기술되어 있었다. 마이크 시설까지 끝내자 10시 30분이었다. 김기홍 임시 노조 집행부 부위원장이 마이크를 들고 선창하는 것을 시작으로 농성 모임의 포문을 열었다.
‘동석아, 이놈아 말해보거라잉. 워쩌다가 고렇코롬 다쳤냐. 학생들이 무서운 것이여, 이놈아! 내가 뭐라고 혔냐. 학생들을 조심혀야 헌다고 허지 않았느냐. 공산당을 때려잡다 다쳤으면 훈장이나 타는디 학생들에게 다쳤으니 워디다가 하소연 헐 수가 있겄냐잉.’
“학생들을 체포하는 전위부대(흑골단)로 활동했었지요. 중앙호텔 광장에서 가까운 골목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데모하던 주동자를 체포해 오다 학생 특공대원들에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저희들은 처음 최동석 이경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온몸에 몽둥이세례를 받았으니까요.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어났습니다.”
병실 복도에서 동석의 동료 대원이 들려주던 말을 순창댁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으스스한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센 폭음이 연달아 터지며 대지를 흔들었다. 도로 중앙을 점거하고 있던 대제전선 노조원들 주위에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깔렸다. 펑펑 터지는 폭음이 계속 꼬리를 물었다. 길을 가던 시민들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빠르게 뛰었다. 연신 재채기를 토하면서. 눈물^콧물을 흘리며 재채기를 토하기는 노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최루탄은 노조원들이 모여 있는 도로 중앙에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다. 노조원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렇지만 동철과 몇몇 대원들은 도로 중앙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수건으로 코를 싸맨 채 계속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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