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영 소설집 『다듬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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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 초월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소리
판형 140/210, 228쪽
가격 13,000원
ISBN 979-11-92828-15-2*03810
발행일 2023년 6월 15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첫 소설에서 욕망의 다양한 현장과 그 너머의 진실을 집요하게 파고든 한보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로 여러 영역에서 표출되는 죽음과 삶 그리고 노년의 근본적이고 복잡한 정황을 세월의 시계추에 얹어 종의 여운과도 같이 은은하게 들려주고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다듬이소리」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바탕으로 생동감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밤마다 죽은 여자가 부르는 환청을 듣고 달려나가는 삼촌, 무당의 말에 무작정 고향을 떠나 삶의 터전을 옮기는 아버지, 다듬이소리 때문에 시름시름 앓아누운 큰누나, 이유 없이 하혈하는 아내와 같은 주변 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묵도하면서 불안감에 시달리는 화자의 일반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극한의 굴레를 체험하는 내면을 첨예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화자로 하여금 생득적 숙명에 관해서는 숨거나 회피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정면으로 강단있게 마주 서게 만든다. 이 대립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며, 실존의 무게로 소설의 긴장과 구조를 지탱해준다.
「그림자의 배신」은 ‘주인님은 죽는다’는 말을 뱉어내는 자신의 그림자와 겪은 갈등을 그린 작품으로, 화자의 죽음을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박수무당의 그림자이다. 어느 날부터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화자의 심리를 평면적인 그림자와 입체적인 사람으로 병렬시켜 행동 및 사건 전개에 호소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정은 삶과 죽음의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 과제를 종합적으로 투시하려는 작가의 원숙한 시선에서 기인한다.
「깨어있는 밤」은 지하철 안에서 만난 소매치기 소녀를 가족으로 거두려는 사내의 이야기이다. 사내의 간청에 못이겨 그의 집에 들어와 살던 소녀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사내는 밤마다 뜬 눈으로 그녀를 기다리다가 성당 고해성사실로 달려가 답답한 심정을 신부님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소녀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고, 화자는 자꾸 잠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우리들의 삶이 그 본래의 다가성을 상실하면서 유실된, 인간애를 되찾기 위한 사명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마리의 아베 마리아」는 사랑해서 결혼을 약속한 기섭이 ‘나무인간 증후군’이라는 병에 걸려 이별을 통보하자 마리는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이 힘들다. 마리는 ‘기섭은 해괴망측한 병에 걸린 걸 알자 거역할 수 없는 절망과 맞닥뜨렸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죽고 싶었던 건 물론, 키에르케고르가 레기네와 약혼을 파기하듯 입술을 깨물고’ 자신과 결별을 결심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고통스럽다. 마리는 절망에 빠진 기섭의 눈물과 고통을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는지 후회하며 들어간 술집에서 구노의 ‘아베 마리아’를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성모송을 중얼대고 기섭이 보고 싶어 술집에서 뛰쳐나온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그 존엄성을 증거하는 유다른 체험의 공간으로도 읽힌다.
「빚나간 헤로이즘」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돌주먹 복싱선수 최갑돌이 중요한 타이틀전을 앞두고 노조 간부 애인을 만나느라 연습을 게을리하고, 시위 현장을 들락거린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김 코치는 ‘사귀는 여자의 영향이 그토록 크게 작용했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작 손을 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등 뒤에 달려오는 기차처럼 경각의 위험과 팍팍한 밑바닥 삶의 어려움을 주먹 한 방으로 해소하려는 간절함과, 그 어려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연애는 삶의 끝을 막아서는 벽을 뚫는 불씨로 작용해 앞으로 나아가는 응전의 힘이 되고 결국 큰 불길로 발화되는 것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서울의 봄’이 누구에게는 이렇게도 적용되었구나 하는 현장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입체적인 작품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에게 결단코 자신의 임종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지와, 부끄러움으로 연결되는 핏줄의 영역에 점차 무너지는 복잡한 노년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심리를 심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핏줄이라는 인과의 연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노년 삶의 정서와,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죽음이 하나의 종착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지속시키고 있으며,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초월적인 공간을 통해 오히려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작품이다.
「잔염(殘炎) 해변에서」는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남자는 아내와 함께 결혼 전 여름 휴가를 보냈던 경포대해수욕장을 찾아온다. 저녁에 먼저 잠든 아내를 호텔에 두고 밖으로 나와 바닷가를 거닐던 남자는 이성을 성적 상대로만 접근하는 게 고민인 청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동정을 잃은 시절을 회상한다. 남자는 사랑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청년이 행복하냐고 묻자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그래, 하고 대답하기엔 지나온 삶이 너무 공허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한 치의 후회도 없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었다는 그 자부심이 어느샌가 꼬리를 감추어버리는 것을 새삼 느낀다.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사실적으로 서술하면서 지나온 시간은 삶의 영역에서 차단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 속에 흡수되고 용해된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현실에 얽매여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컴온 까미」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딸애와 함께 사는 할애비와 그들이 키우는 까미라는 개 사이의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까미와 소통하려는 절실한 의식을 통해 화자는 삶의 교감을 말하고 있다. 상징적인 몇 개의 장면 제시를 통하여 할애비와 개의 관점이 동화되는 지점을 확인시키고, 둘의 사이를 그동안 누려온 일상의 시공을 초극하고 상승하는 관계로 변화시킨다. 굳이 어떤 논리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가시적 한계 그 너머의 동반자와 묶인 정신적 감응의 현장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할애비의 ‘어서 내게 안기라’는 외침은 살아오면서 이미 망각하거나 심연 저쪽에 묻혀 있는 사소하고 경미한 잘못까지 겸허하게 회고하는 뉘우침으로 다가오면서 까닭 모를 서글픔을 느끼게 만든다.
중편 「내가 왜 역적인가」는 황사용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그린 작품으로 화자의 내면 의식을 추적하는 작가는 삶의 도의와 종교라는 교차점, 그 두 개체의 마음이 하나로 체득되면서 발현하는 이해와 용서의 미학을 그리고 있다. 집요하게 응축되어 있는 한 인간이 남겨놓은 치열한 발걸음을 묘사한 이 작품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죽음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만 두려움의 위력을 가질 뿐이다. 삶과 죽음을 같은 존재 양식으로 보아내는 장엄한 종교의 외경스러움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한보영 작가의 소설 『다듬이소리』는 세상을 오랫동안 보아온 관조적인 시선으로 삶의 여러 대목을 조망하면서 노년기의 작가에게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원숙한 분위기의 이야기를 절제되고 간결한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작가의 구구한 전지적 설명 없이도 인물의 깊이 있는 형상화를 통해 감동의 바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어떤 과학이론이나 지식을 넘어서는 죽음이라는 생명 현상에 대한 작가의 수준 높은 성찰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가장 고통스럽고 비우호적인 환경 조건 가운데서도 생존에 깊은 애착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시각으로 생명의 외경스러움을 존중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작가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명료하게 각인할 수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인간의 생명 또는 죽음이라는 명제가 어떻게 대척점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현상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굴곡진 인생에서의 한없는 분노를 청량하게 녹여낼 수 있는 현장을 지루한 어투의 훈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대가로 체득한 용서로 승화되는 형상을 서술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내면적 품격을 갖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진실의 축적을 통해 아득하게 먼 듯 보이는 우리들의 삶과 죽음 사이가 실상은 「그림자의 배신」에 나오는 나와 나의 그림자처럼 불현듯 지척으로 좁혀짐을 느끼게 만드는 것 또한 이 소설이 가진 큰 덕목이다.
목차
다듬이소리 / 7
그림자의 배신 / 27
깨어있는 밤 / 49
마리의 아베 마리아 / 67
빗나간 헤로이즘 / 89
아버지와 아들 사이 / 109
잔염 해변에서 / 127
컴온 까미 / 145
내가 왜 역적인가 / 163
해설 _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초월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다듬이소리 / 209
책을 내면서
본문 속으로
“그래, 나도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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