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일곱 개 병실이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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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 병실이 있는 집
책 소개
최영희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우리 문학 풍토에서 비교적 소홀하게 참여하였던 돌봄의 아이콘인 간호사의 관점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들은 질병으로 와해되어 가는 환자들의 삶에서 인간의 한계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일곱 개 병실이 있는 집』 에 실린 「이상한 날」, 「연소증후군」, 「즐거운 부고」, 「온누리에 축복을」, 「검은 새」, 「유턴」, 「환절기」 7편의 작품들은 간호사의 눈을 통해 병원이라는 세계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질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곁에서 만날 수 있는 구체적 사람들의 내면과 외면의 드라마를 아주 실감 나게 엮어놓았다. 또한 공통적으로 기존의 돌봄 윤리가 지니는 관념성과 억압성을 비판하면서 이와 공모하는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작가의 말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에 내가 걸어온 길이 보여 마음이 찡했다. 그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삶의 현장에서 함께 했던 이들은 고단한 일상을 묵묵히 견디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걸 경험하고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나는 겸손함을 배웠다. 좀처럼 넘을 수 없는 문턱을 만나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다른 길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감사하다. 글을 쓰고 싶은 욕심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추천사
101호에서 107호까지 일곱 개 병실이 들어서 있고, 병실마다 환자들과 의료진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책을 펼쳐 든 독자들은 병문안하러 들른 방문객 또는 외래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환자를 돌보며 환자가 되어가는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이므로, 같은 환자들끼리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 척박한 세상을 건너가야 한다고 속삭이는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잔잔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한 지방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인지상정’의 부조리를 다룬 「즐거운 부고」는 ‘사회적 병실’의 풍경을 수채화풍으로 그려낸 듯한 작품이다. 작가는 소도시의 일상 깊숙이 뿌리내린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대신, 그 부조리한 인간 사의 복마전이 오히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역설적 상황을 ‘즐거운’ 장례식 장면으로 펼쳐 보인다. 최영희 소설가가 그동안 묵묵히 다져온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최영희의 「일곱 개 병실이 있는 집」은 우리 문학 풍토에서 비교적 소홀하게 참여하였던 돌봄의 아이콘인 간호사의 관점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작품집이다. 병원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문학의 보고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간호사들은 질병으로 와해되어 가는 환자들의 삶에서 인간의 한계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고통과 슬픔을 한 축에 두고 치유와 회복을 다른 한 축에 두면서 이루어지는 간호 행위는 문학의 속성과 닮아있다. 간호사의 일이란 분명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 인권 존중의 돌봄 행위일 것이다.
본문 속으로
성샘이 미안해서 못 가고 미적거리고 있는 걸 눈치챈 박샘이 얼른 등을 밀어 퇴근시키고 접수실과 대기실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소독약을 뿌리고 알코올 솜으로 성샘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모두 닦은 후에야 자리에 앉는다. 네 시와 다섯 시 사이에 백신 예약한 사람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접수실과 주사실을 오가며 두 곳 다 봐야만 할 상황이다. 성샘만 믿고 설렁설렁 일하던 박샘이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다. 접수, 혈당 체크, 바이탈 사인 기록에 환자들의 요구 사항까지 정신이 없는데, 박샘 손이 저렇게 빨랐나 싶게 일을 척척 잘한다. 접종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알코올 솜 통을 가득 채우고 스티커도 미리 떼어놓는다. 성샘은 코로나 검사를 받았을까?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이 요즘 부쩍 잦아졌다. 내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이 떨림은 불안감의 파장으로 다가온다. 손바닥을 비벼 따뜻한 온기로 눈을 덮는다. 곤두선 신경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이상한 날」 중에서)
진수는 본드를 마신 상태에서 사고를 치고 약물 병동에 수감되었다. 병원 생활 착실히 잘하다 퇴원하면 얼마 안 가 또 들어오곤 했다. 그는 철물점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빨리 가서 본드를 사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 더 설렌다니 할 말이 없었다.
지난번 진수가 입원했을 때는 병원 생활이 예전과 달랐다.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기특해서 참고서와 필기구를 사다 주었다. 수감된 환자들의 특성상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는 간호사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환자들의 소소한 부탁을 일절 들어주지 않았다. 부탁했다 거절당했던 경험이 있는 환자들은 진수만 챙긴다고 불만이 많았다. 진수는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나의 응원에 힘을 실어주었다. 퇴원하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라고 했다. 요양병원이 많아 일자리 찾기가 쉬울 것 같아서였다. 병원을 나서는 진수의 뒷모습이 단단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진수가 떠나고 난 뒤 그냥 두어도 잘 자라는 식물을 사다 놓으려다 말았다. 환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다. 환자들 몇 명이 뻔질나게 감기약을 타간 적이 있었다. 그 약들을 섞어 환각제 비슷하게 만들어 신이 나서 나누어 먹다가 적발되어 혼이 났었다. (「연소증후군」 중에서)
가을의 끝자락에 초상이 났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는데. 형님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청장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D시에 사는 동생이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인상을 남길지 계획을 세우며 수선을 떨었다. 형님은 원래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 그렇다 치고 찬찬한 동생까지 장단을 맞춰 의기투합하는 것이 진급이 절실해서 저러나 싶다가도 이해가 안 돼 마음이 불편했다. (「즐거운 부고」 중에서)
내내 칭얼대다 잠이 든 축복이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샘이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고 투덜대며 나가자마자 축복이가 앵앵 소리를 지른다. 빨리 안아주지 않으면 톤이 올라가 사나워진다. 개수대에 가득 쌓인 젖병을 씻다 말고 축복이를 다시 안았다. 짜증이 올라오는 걸 꾹꾹 눌렀다. 근무자가 세 명이어도 한 사람은 축복이를 전담해야 하니까 일손이 부족하다. 분유 먹일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유 수유 때문에 산모에게 아기를 보내고 다시 받는 것도 일이다. 칭얼대던 아기들도 엄마 품에 안기면 마음이 편안한지 모유는 먹지도 않고 잠만 자다 들어온다. 배가 차지 않으니 눕혀놓으면 또 칭얼대고 소득도 없이 들락날락하다 아기도 지치고 우리도 기운이 빠진다. (「온누리에 축복을」 중에서)
밖이 어두워졌다. 바람이 부는지 눈발이 이리저리 날린다. 아들을 빨리 재우려고 밥 먹으라고 채근해도 늦장을 부린다. 지금쯤 남편이 올 시간인데, 자꾸 시계를 쳐다본다. 밖이 캄캄해서 그렇지 아직 이른 저녁이다.
아들을 윽박질러 반강제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맛보라고 떠준 알탕은 손도 대지 않고 한쪽으로 밀치다가 찌개그릇을 바닥에 쏟았다. 주방 바닥에 붉은 국물이 질펀하고 자잘한 알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화가 치밀어 기어이 아들 등짝을 세게 때렸다. 걸레로 바닥을 훔치다가 손을 벌벌 떨고 있는 아들을 보니 속이 상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잘 참고 살았는데 이제 한계치에 달한 모양이다. 나까지 이러면 안 된다는 마음 한편으로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무방비로 휩쓸리게 된다.
‘미치겠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저 자식 뛰어내린다고 난리 칠 때 그냥 둘 걸.’
한참 동안 아무 말이나 막 쏟아내고 나니 솟구쳤던 감정이 가라앉는다. (「검은 새」 중에서)
예방접종 때문에 정신없이 며칠이 흘러갔다. 그녀는 문득 얌전이 할머니가 생각나서 수신자명에 이름을 쳐본다. ‘의료보험 자격상실’이란 글자가 화면에 뜬다. 그녀는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다시 눌러본다. 식은땀을 흘리던 얌전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대기실 빈 의자를 쳐다볼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한 발짝 내디디면 간단하게 넘을 수 있는 선처럼 느껴진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얌전이 할머니가 유독 마음에 걸렸던 건 세상을 향해 제 목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서였다. 그림자처럼 쓸쓸하게 살다 간 할머니의 인생이 그녀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환절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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