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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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작가 임경숙의 시선은 우선 투명하고 따뜻하다. 빈틈없이 정확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개연성이 미리 확보된 탄탄한 구성에 의해 빚어진 그의 소설들은,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잘 벼리고 학습된 습작과 인생 경험치의 씨줄날줄이, 종횡으로 곰비임비 엮이고 쌓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벌써 세 권 이상의 아름다운 시집을 낸 주목 받는 기성시인이어서 더욱 그렇다.
-김상렬·소설가
이 소설은
임경숙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사물을 아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원만한 관용과 포용의 가슴으로 감싸 안는 7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그 작품 대부분이 인간의 본질적 소외문제를 섬세한 사회의식으로 접목시키며, 그 인간의 새로운 삶을 찾아 탐사하고 가능성을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곧잘 인물들의 오해와 착각이 빚어내는 과거를 소환해 창작의 기제로 삼는데 그것이 이 소설의 특이성이기도 하며 읽는 맛을 느끼도록 만든다. 가령 몇십 년 만의 학교 동창회라든가 칠순잔치, 또는 불의에 떠난 옛친구의 장례식장 참석을 통해, 까맣게 잊고 살았던 갖가지 추억을 뼈아프게, 또는 가슴 시리게 재생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여 독자들을 자신도 모르게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염소 도둑」의 화자인 ‘나’는 교실 난로에 불을 피우고도 엉뚱한 거짓 모함을 한 김영모 때문에 담임으로부터 엄청난 체벌을 받았고, 그 순간은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수십 년 만에 친구 장례식장에서 그를 다시 만나지만,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 견딜 수가 없다. 대학 졸업 후 고향 근처 첫 근무지에서 퇴근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나는 김영모가 염소 도둑질하는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런 나의 모습을 영모 또한 훔쳐보게 되면서 둘의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나중에 그 염소 도둑질이 죽어가는 자기 어머니 약으로 쓰였다는 절뚝발이 영모의 고백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 허탈해진다.
「바람의 얼굴」 주인공인 나는 회삿돈을 횡령해 외국으로 자취를 감춘 남편 때문에 어디든 상관없이 한국을 떠나자며 탈출한 곳이 계림(桂林)이 있는 중국이다. 나는 경상도에서 온 아홉 쌍의 부부와 옆에 앉은 검은 파카의 남자와 일행이다. 버스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던 일행은 계림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 만취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검은 파카는 쓸쓸한 얼굴이다. 얼마 전 아내를 폐암으로 잃었다는 그는 취기가 오르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꺼이꺼이 울었다. 나는 그를 보며 술에 절어 삶을 마감한 아버지를 떠올린다. 나는 엄마가 결혼식을 서너 달 남겨놓고 정체 모를 남자에게 몸을 더럽혀 생겨난 아이였다. 나에게 이혼서류를 내만 남편은 전처에게 돌아가 싶다고 했다. 매달 양육비를 꼬박꼬박 보내며 치를 떨던 남편이었는데 다시 그녀에게 간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계림의 낭떠러지에서 정면으로 마주치는 바람이 더는 두렵지 않는 나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빠른 전개와 주제의 무게가 균형을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장면 전개가 소설을 잘 읽히도록 만든다.
「폭우」는 아내와 연인의 중간지대에서 ‘두 사랑’의 갈등을 그린 작품인데 매우 유려하고 정확한 문장력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애증이 소설적 얼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나’의 번민이나 고뇌 어린 사념과 독백이 그 상황을 단단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남성의 불안과 환란, 포용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포착력이 뛰어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갈 곳 없는 자신의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여 끝나지 않을 시련을 예감토록 하는 작의가 돋보인다. 그런 면에서 제목 ‘폭우’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 뼈아프도록 경험하게 되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잔잔하면서도 속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사랑은 벌집이다’라는 말에 걸맞게 호된 홍역을 치른 작품 속 화자인 ‘나’는 마흔을 넘기기 전, 나와 엇비슷한 남자를 만나 첫 만남 이후 6개월 만에 결혼했다. 결혼을 서둘러 했듯 아이들도 연이어 태어났다. 자식들 재롱과 남편의 든든함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게 시간은 또 화살처럼 흘러갔다. ‘세상에 흐르는 것은 강물을 따라 바다에 이른다’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설파하지만, 그러나 그 첫사랑의 시간은 아직도 여전히 흐르는 강물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거리두기 연인」은 바람기 많은 어느 화가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진정성에 늘 회의를 품고 사는 노처녀의 번민과 정신적 방황이 그림처럼 잘 묘사되어 있다. 화자는 그림 전시회에 갔다가 우연히 남자와 안면을 튼 사이이다. 전시실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즈음 그녀는 명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중이었다. 24년 몸담아 온 직장을 떠나기란 칼로 무 베듯 쉽게 내리치는 결단이 아니었다. 해가 바뀔수록 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날이 갈수록 힘겹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억세고 교사들은 위축되었다. 교사란 직업은 초라하다 못해 비겁해지고 있었다. 예전에 가졌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만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그녀는 두렵다. 그런데 사귀는 나이든 사내까지 전혀 진정성이 없고 무례한 불성실로 일관한다. 바로 앞의 작품인 「첫사랑」과는 대조적이면서도 뭔가 우울한 해학이 숨어있는 ‘끝사랑’ 풍경이다.
「나는 걷는다」는 빌려 입은 옷과 구두, 명품 백으로 치장하고 고교 동창회에 참석한 후, 뒤풀이 노래방에서 오롯이 오해와 상처로 얼룩진 옛사랑을 해후한 이혼녀의 이야기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솔직담백하게 잘 그려져 있다. 아직 어린 아들을 홀로 데리고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좀체 풀리지 않는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을망정, 그녀는 결코 암울한 현실에 꺾이거나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막 0시를 지나고 있었다’는, 곧 새로운 하루의 출발을 암시한다.
「샹그릴라」의 ‘나’는 병든 아버지와 닭모가지 칼질하며 식당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혼란을 안고 자립을 도모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땅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이상향의 상징으로 여기는 중국 샹그릴라에의 여행으로 그 탈출구를 모색한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이상향으로 손짓하는 샹그릴라는 다만 허상의 신기루일 뿐, 결코 소외와 결핍으로 얼룩진 내 인생을 마땅히 갈무리해 주진 않는다.
「손가락이 아프다」는 가족관계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온 사랑으로 피와 살 섞고 사는 부부도 언제든 원수 같은 남남으로 갈라설 수가 있고, 깨물지 않아도 안 아픈 데가 없는 부모자식 사이에도 애증 어린 갈등문제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형제자매들 사이로 번져간다거나 그 아래 자식 대에 까지도 영향이 미치는 문제임을 감안할 때, 모든 가족관계의 갈등만큼 큰 공감대는 따로 없을 것이다. 시집을 가서도 여전히 철없는 애엄마인 딸을 돌봐야 하는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주인공 화자인 ‘나’는 결국 딸네 집을 나와 남쪽 바닷가로의 여행을 떠나지만, 그 여행 끝의 파도와 바람소리에 따라 온 결론은 매번 ‘손가락이 아프다’는 쪽으로 돌아온다. 가족은 그렇게 언제 어디서나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깨우침만을 안겨 줄 뿐이다.
임경숙 작가의 소설 『나는 걷는다』는 인생의 모든 것을 함의하는 사랑과 가족에 대해서 어느 땐 명쾌하고 단순하면서도 어느 땐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슬픈 애증의 관계를 매우 날카롭고 섬세한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관계의 명제를 여러 작품을 통해 다각도로 탐색하며 각 작품마다, 마치 끌로 조각할 때와 같은 숨결이 문장의 골마다에서 느껴지고 감지된다. 적지 않은 연륜의 원숙한 시각과 필력으로 시와 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수많은 경험과 식견으로 살아온 번뜩이는 예지를 발휘하고 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원숙한 눈을 가진 원숙한 작가는 온몸으로 수행하듯 실천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거기에는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야 저 넓은 원융의 바다로 우리가 함께 노 저어 나갈 수 있다는 암시까지도, 독자들이 체화할 수 있는 소설이다.
목차
염소 도둑 / 7
바람의 얼굴 / 45
폭우 / 81
첫사랑 / 117
거리두기 연인 / 153
나는 걷는다 / 187
샹그릴라 / 219
손가락이 아프다 / 247
발문
소외와 결핍에서 원융의 바다로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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