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괜찮아,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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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수고했어
박종휘 소설집
삶의 폐허를 넘어서는 사랑의
역설을 보여주는 단편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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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벅철벅 젖은 신발 소리를 내면서 걷고 있는데 물 건너 안산 숲속에서 과수댁 하소연 같은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퍼뜩 날아드는 생각에 웃음이 새 나왔다.
“저 산비둘기가 지금 뭐라며 우는 줄 아냐?”
생각에 잠겨 있던 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좋아 사는 남자, 인연대로 살게 두소.”
나는 그럴싸하게 가사를 붙여 산비둘기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채화는 그제야 “저 우짖는 소리도 영락없는 선화네.” 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작전을 훌훌 팽개치고 가는데 앞쪽에 젖은 옷을 걸치고 팔자걸음으로 선화를 부축하며 가는 ‘버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채화도 어머니도 함박웃음을 터뜨렸다.(「두 남자」)
“당신은 직업이 뭐야?”
“저는 사다리차 기사였습니다. 삼 년 전에 이삿짐 일을 하다가 강풍으로 사다리가 꺾여 넘어졌는데 밑에서 짐 꾸리는 걸 도와주던 어머니는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저는 화공약품이 든 병에 머리를 맞아 두 눈을 잃을 뻔하다가 간신히 사물을 구별하는 시각 장애인이 되었어요.”
파란 하늘의 모진 태양 빛이 남자의 검붉은 얼굴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고 움켜쥔 성재의 손아귀가 맥없이 풀렸다.
“죽지 못해 버티고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쏟아졌다. 성재가 맞은편에 있는 H은행을 쳐다보며 영옥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어느 화요일 오후」)
나는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끝마친 듯 묵묵히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산바람이 나를 따라 휘청거린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는 봄이라 천만다행이다. 내 몸뚱이도 무엇이든 저 생명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꽃비가 내리고 물오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초록빛을 흩뿌린다. 정말 죽기 좋은 계절이다. 딱 하나, 엄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뻐근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인데 효도 한번 못하고 사라지는 게 너무나 한스럽지만, 이 길이 그나마 불효를 덜 하는 것이리라. 온 세상이 짙어가는 녹음으로 가득하지만, 바닥에는 가랑잎이 수북하다.(「오래된 기억」)
나는 신발장에 올려놓은 신발을 꺼내다가 움찔 놀랐다. 내 운동화 속에 작은 조약돌이 한 짝에 하나씩 들어 있는 것이었다. 뜨거운 여름 바람에 맞선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얼른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신발을 신었다. 왁자지껄하며 뒤따라 나오는 사람들 속 명준을 슬쩍 봤으나 그는 어떤 표정도 눈길도 없었다.(중략)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닌, 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일상이라는 명준의 말이 다시 귓전에서 맴돌았다. 우주에서 볼 때 나는 비록 한 점도 되지 못하지만 내가 없는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발걸음이 빨라져 어느 틈엔지 휴대전화 1번을 꾹 누르고 있었다.(「괜찮아, 수고했어」)
이후 밀림은 평화가 다시 찾아왔으며 용감한 코비네 가족 이야기는 넓고 넓은 셀루스 동물보호구역 전역에 바람을 타고 날 듯 퍼져나갔다. 가족들은 모든 동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아빠 코끼리의 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코비는 슬픔을 딛고 씩씩하게 성장해 두 번 다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해결하는 멋진 코끼리가 되었다. 허물을 벗은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코비의 마음」)
그 순간에 왜 남편 생각이 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 그는 민정이 거라면서 만들고 있던 의자를 들어 보였다. 한때 남편을 정신장애자로까지 몰았던 마음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렸다. 곰보가 예쁘다는 사람도 있다.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강박관념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마음이 분명한데, 나와 같지 않다고 장애인으로 몬다면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편견과 정의」)
추천의 글
박종휘는 등단 10년 차에 이르는 중견 작가다. 그는 소설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것은 독자 친화의 재미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삶에 절실한 각성을 촉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첫 작품인 3부작 역사 장편소설 『태양의 그늘』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으며, 두 번째의 연작소설 『주먹 망원경』 또한 우리 시대의 순정한 사랑 이야기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에 새롭게 내놓는 『괜찮아, 수고했어』는 그동안 축적된 단편소설들을 한데 모아, 인간애와 가족애를 중심으로 따뜻한 세상살이의 문법을 보여주는 소설집이다. 이 소설적 ‘마디’를 통해 그는 더욱 치열하고 활달한 작가의 길을 갈 것이다. 앞으로 박종휘의 작품세계가 그려 갈 지형도를 큰 기대와 더불어 지켜보는 이유다.
-김종회(문학평론가·한국디지털문인협회 회장)
우리가 천천히 읽어온 것처럼, 박종휘 단편 10편은 삶을 징후적으로 알게 해주는 살아 있는 언어적 보고이다.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도정의 첨예한 증좌가 되어주면서 작가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대표 주자로 나아가게끔 해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소설은 인간 존재의 축도로서의 서사를 탁월한 개성과 예술성으로 담아낸 내밀하고도 광활한 세계라 할 것이다. 그렇게 주변적 존재자들을 향한 섬세하고도 진중한 작가의 시선과 필력이 앞으로 우리 소설사에 더욱 좋은 문장과 사유로 한없이 이어져가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폐허를 넘어서는 사랑의 역설 속에서 박종휘 작가의 그러한 소설적 개화와 진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작가의 말
장편소설만 써오다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단편소설을 조금씩 써서 발표했습니다. 외면할 수 없는 가족애와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자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그동안 여러 문학지에 실었던 작품들을 한 묶음의 소설집 『괜찮아, 수고했어』로 발간합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만의 가슴앓이를 안고 발버둥을 치며 사는 사람, 신의와 배신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 삶의 어려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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