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반야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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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135/195, 286쪽 가격 17,000원 ISBN 979-11-92828-56-5*03810 발행일 2024년 6월 10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안중익 소설가의 첫 작품집으로 표제작 「반야용선」을 비롯한 여덟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여덟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고립’과 ‘단절’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의 배를 타고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의 현장이기도 하다.
「도어록」은 택배 물건을 두고 벌어지는 옆집 여자와의 갈등 속 고립과 치매 걸린 엄마의 고립, 그 시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희주는 옆집 택배가 잘못 배송되었는데도 달걀과 포도 같은 품목이 자신이 주문한 품목이어서 별 의심 없이 자신의 집으로 가져온다. 그 결과 옆집 여자로부터 수취인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택배 물품을 먹어버린 무식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 희주는 사과의 의미로 옆집 문 앞에 달걀과 포도를 놓아두지만 옆집 여자는 그대로 방치한 채 희주를 무시한다. 그런 갈등이 지속되면서 희주는 한번도 보지 못한 옆집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이르고, 고립은 서서히 희주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버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하게 쾅쾅거리며 계속 움직이고, 급기야 옆집으로 배달된 택배 상자를 열고 그 속의 원피스까지 입어보기에 이른다. 요양원에 있는 치매 걸린 엄마는 집에 보내 달라고, 가고 싶다며 매일매일 울부짖다가,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되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엄마와 함께 살려고 준비한 25층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된 희주는 자존심 강한 엄마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을 좀 봐달라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택배를 훔쳐 간다는 옆집 여자 신고로 자신의 집에 경찰관이 찾아온 날, 희주는 옆집 여자 집 앞으로 가서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진즉 알았어야 해. 너를 만나지 않고도 소통할 방법이 있었다”며 현관문을 걷어찬다. 희주가 소통에의 간절함을 이렇게라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엄마가 들려준 삼십삼 천의 이야기 때문이다. “삼십삼 천에는 인드라망이란 넓고 큰 그물이 있는데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 있어,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추며 영롱하게 빛나지. 그건 이 세상이 독론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이웃하고 의지하면서 존재한다는 거야.” 이웃들과 마주 보며 대화하기 어려운 요즘 삼십삼 천 인드라망을 떠올리게 만드는 엄마의 목소리는 공동체에 관한 근원적인 재성찰로 나아가게 만들도록 여운이 길다.
「문턱」은 아흔세 살 정미소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겪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40년을 살아온 내 집 화장실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무엇에 걸려 넘어져 치골이 부서진 나는 3주간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들은 너무 낡아 집 안에 둘 수 없는 가구 버리듯, 나를 요양병원으로 실어갔다. 나는 그곳 312호실에서 만난 ‘오지랖할매’와 ‘잠자는 공주’들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타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나와 함께 하지 않은 시절이 있던 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순간도 만들어본다. 하루는 밤중에 너무 심한 갈증에 시달리면서도 혼자서 물을 마시지 못하고 힘겨워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의 도움을 받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남자의 도움으로 갈증을 푼 나는 이튿날 아침, 간병인이 미소 할매가 또 정신을 놓은 모양이라면서 물이 고스란히 남은 물병을 들이밀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분명히 그 밤에 남자가 내민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깊이 잠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를 보기 드물게 직절 하게 풀어낸 이 작품은 ‘KBS라디오 문학관’ 노인의 날 드라마로 제작되어 전국 노인들을 찾아갔고, ‘겨울 베롱나무 꽃 피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연극 무대에 올려져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표제작인 「반야용선」은 몸이 온전치 못한 딸을 키우며 살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낸 여자인 ‘나’의 입관 체험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병든 몸으로 19년을 살다가 먼저 떠난 딸의 죽음은 생각만큼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별이 아니다. 나는 반야용선을 타고 떠난 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 관에 들어가 누운 것이다. 관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이불처럼 전신을 감싸고, 관 뚜껑을 두드리는 해머 소리가 들리고 얼굴 위로 흙이 쏟아지는 소리와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들리는 그때, 흐느끼며 애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꺼내주세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절집 마당에서 본 빨강 색 긴 머리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와서 봉사자의 부축까지 받았던 여자라는 것을 아는 순간 십 분도 참지 못할 걸 왜 왔지 싶어 심사가 뒤틀린다. 네 살에 성장이 멈춘 채 시각과 청각을 잃고 열아홉 살까지 살다 죽은 내 딸이 그렇게 살고 싶어 애쓴 세상을 그 여자가 오염시키는가 싶어 화가 난다. 하지만 그때 홀연히 떠오른 것이 낡고 편안한 내 신발이다. 그 신발이 이끄는 대로 나는 세상 이곳저곳 떠다녔고, 그게 내 삶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면서 좁은 구두 속에서 벌겋게 부르터 있을 빨강 머리 여자의 발에 생각이 미친다. 관에서 나온 나는 구두 한쪽을 벗고 아픈 발을 주무르고 있는 빨강 머리 여자 곁으로 다가가 스카프를 풀어 그의 엉덩이 아래에 깔아준다. 돌아오는 길, 전동차 내 옆에 앉은 빨강 머리 여자는 휴대폰으로 아르바이트 시간을 확인하며 불안해하더니 어느새 내 어깨에 기대고 잠든다. 나는 여자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여주면서 내 딸도 살았으면 빨강 머리를 하고 싶었겠지 생각하며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다. 240센티미터 신발이 나를 태우고 이승의 바다를 부유하는 반야용선이었다는 것을 풍부한 현실 인식의 능력과 종교적인 묘사의 능력으로 무게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용머리를 한 지혜의 배를 타고 삼도천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건너간, 평생 온몸으로 자식을 지켜 준 아버지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소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울림이 더욱 짙고 크다.
「색의 우화」는 하경이 경주 남산의 열암곡 마애불의 미소를 화폭에 담으면서, 마애불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토록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긴 세월을 견디고 있는 것인가? 묻는 소설이다. ‘감은 듯 내리뜬 눈, 차가운 돌 속에 숨어든 미소’의 열암곡 마애불을 그리는 하경의 형상을 통해 마치 알을 깨지 않고는 날 수 없는 새처럼 무엇인가를 버려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부단히 열어나가고 끊임없이 혁신시키는 것이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라는 것을 뜨겁게 인식시키는 소설이다.
「커튼」은 병원 침대에서 살아가는 여자의 마음을 아주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발목 수술을 앞둔 55세 장경주는 코로나로 보호자도 없이 혼자 커튼 하나로 경계가 그어지는 병실에 입원한다. 수술 뒤에도 남편은 보이지 않고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은 이따금 옥신각신하던 커튼 밖의 창가 노인뿐이다. 그사이 새로 온 옆 침상의 환자는 걸걸한 목소리로 사방에 전화하고, 밤이면 코를 심하게 골지만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을 쌓는다. 퇴원하는 날, 남편은 코로나 PCR 검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미간을 찡그린다. 퇴원 수속 후 1층으로 내려오자 풍겨오는 커피 향에 경주는 직접 커피를 사 들고 오다 넘어진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서라는 남편의 손을 뿌리친 경주는 목발을 짚으며 내 힘으로 서고 걸을 거라고 중얼거린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병실의 커튼 하나로 나뉘는 작은 세계에서 만난 환자들의 모습, 경주가 고립을 벗어나 자립하는 순간을 입체적이면서도 심층 깊게 형상화하고 있다.
「엄마의 섬 산티아고」는 ‘나 산티아고를 다녀올께’라는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엄마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딸의 이야기이다. 동생 건우가 산티아고 보도 여행을 떠났다가 탈수와 심장마비로 죽은 후 엄마는 섬망 속에서 건우만 찾는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요즘은 죽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던데……?’ 그런 엄마의 소원을 가상현실을 이용해 죽은 자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 제작사 대표가 들어주기로 했는데, 엄마가 느닷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일주일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은 엄마를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실종신고를 하고 직접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아빠의 전화번호가 바뀌었고, 학교에 사표를 내고 사라진 것을 알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건우의 위패를 안치한 용궁사로 달려가지만 엄마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고, 스님은 산티아고는 엄마가 마음속에 품은 섬이라고 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엄마의 절친인 수지 아줌마인데, 그 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줌마는 계속 엄마의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가상현실 프로그램 제작사 대표로부터 수지 아줌마가 마음 병을 심하게 앓는 사람을 치료하는 디딤수련원 원장이라는 사실을 안 나는 급히 수련원으로 달려간다. 원장 아줌마를 만나 엄마가 그곳 수련원에서 환자가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로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내가 당장 엄마를 만나보려고 하자 원장 아줌마는 “모르겠니? 여기가 엄마의 산티아고야. 죽기 전 건우가 머물렀고 꿈을 찾으며 걷던 선티아고라”고 하면서 제지한다. 엄마의 몸은 현실 너머의 산티아고에 가닿아 있고, 그것은 삶의 초점 혹은 중심의 변화로 이어져 어떤 피안의 세상을 향한 조짐을 보여주고 있어 시사점이 깊다.
「4번 타자 김말순」은 누군가의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힘겹게 살아가는 말순의 하루를 세태소설로 그리면서도, 가족이 개인이라는 우주에 어떤 가학성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를 잘 보여준다.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고통이 될 수도 있는데, 무작정 아름답고 풍요롭게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통시성에 기반한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역동적이고도 맵다.
「능을 박차고」 는 딸 둘을 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희수의 삶을 그린다. 5년 넘게 병상에 누운 남편과 그런 아버지의 상황은 전혀 아랑곳없이 돈만 노리는 두 딸의 형상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린 이 소설은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이 땅의 남편을 향한 위로와 위무로 읽힌다.
안중익 작가의 『반야용선』은 현실의 서사와 내세의 종교를 선량하면서도 원숙한 시선과 현실 너머의 피안의 세계를 염원하는 발원, 그 두 축으로 융숭 깊게 펼치고 있다. 선량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선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고, 원숙하다는 것은 인간을 어떤 상황 속 인물로 파악할 줄 안다는 것이다. 피안의 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염원은 색에 갇히는 것을 부정하고, 공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진지하고도 깊게 이어진다.
소설 『반야용선』은 삶의 진실과 종교의 초월을 아우르는 이채로운 독창 세계의 시발점에 서 있다. 삶은 현실에, 몸은 부처에, 정신은 피안의 세계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반야용선을 타고 가닿은 세계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모습을 보이는 소설 『반야용선』의 인물들은 독자들이 앞으로 눈여겨 지켜보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값지게 읽힌다.
목차
작가의 말
도어록
문턱
반야용선
색의 우화
커튼
엄마의 섬 산티아고
4번 타자 김말순
능을 박차고
추천사
한 번도 소설을 써본 적이 없다는 말 /하성란
본문 속으로
엄마는 희주에게 서른세 개의 궁전이 있다는 삼십삼 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수미산 정상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천인들이 사는 각각 여덟 개씩의 성이 있어. 그 중앙에 제석천의 궁전 선견성이 있는데 그곳을 삼십삼 천이라고 해. 그곳이 인간계와 가장 가까운 하늘이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어?”
“그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고. 그곳 선법당에 신들이 모여서 땅 위에 사는 중생들이 행하는 선과 악을 다 기록하고 평하는 거지.”
엄마 말에 의하면 인간이 평면적인 삶을 사는 동안은 그 하늘을 볼 수 없지만, 죽으면 서른세 개의 하늘 중 자신이 지은 업에 맞는 수평적인 하늘을 찾아가게 된다는 거였다. 그러나 생목숨을 끊은 자는 어느 하늘에도 갈 수 없고, 하늘과는 반대인 무간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죽지 못하고 펄펄 끓는 유황불 속에서 몸이 타는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엄마가 생목숨을 끊었다. 그 말대로라면 엄마는 지금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서 응보를 받고 있을 거였다. 그 생각을 하면, 희주는 자신의 몸이 유황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도어록」 중에서)
잠들었던 것들이 툭툭 어깨를 털고 일어서는 순간, 어둠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일어선 자들의 투쟁, 그것들이 질긴 인내와 각오를 요구하며 문턱을 넘는 순간, 아침은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전선으로 바뀐다. 꼼짝 못 하고 병실 침대에 누워만 있는 나에게도 삶은 투쟁이다. 사느냐, 죽느냐. 나는 오늘도 질긴 운명과 싸운다. 생명의 녹슨 칼을 갈고, 뜯어진 운명 주머니를 한 땀 한 땀 기워 목숨을 이어간다. (「문턱」 중에서)
관 뚜껑이 열렸다. 관 속에 누웠던 시간은 10분, 그동안 살아온 삶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다가왔다 사라졌다. 어쩌면 인생이란 게 ‘10분의 꿈’ 같은 게 아닐까. 아이가 살다 간 19년과 내 수십 년 인생이 뭐가 다를까? 봉사자가 다가와 손발의 결박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제 손 잡고 나오세요.”나는 망설였다. 더는 제크의 콩나무를 타고 딸과 하늘을 오르는 꿈을 꿀 수 없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딸이 있나요?” 봉사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서 나오세요. 제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내 딸은 스무 살이에요. 대학교 1학년, 딸이 이번 수련회 신청을 해줬어요.”
“제 딸도 그런 효녀로 자라줬으면 좋겠네요.”
벗어 놓은 신발 속에 달빛이 소복했다. 신발의 찬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딸이 결혼했다고 말할 걸 그랬나. 손자도 있다고 말할걸. 텅 빈 관을 돌아봤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사자가 찾아오면 다시 들어가 누울 자리가 너무 넓게 느껴졌다. (「반야용선」 중에서)
경주는 자신의 커피 향을 찾고 싶었다. 캐리어를 들고 되돌아서 절뚝절뚝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커피가 출렁였다. 저만치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이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경주를 보고 웃었다.
“조심해.”
경주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조심하라고.”
남편이 소리쳤다. 순간 미끈하며 천장이 발밑으로 추락했다. 남편 목소리가 달려왔다. 저만큼 튕겨 나간 목발, 허우적대는 손, 커피가 바닥을 적셨다. 이게 뭐야. 나 잘 걸을 수 있는데, 나 걸을 수 있다고……. 붉은 캐리어가 동심원을 그리며 이리저리 굴렀다. 일어서야 한다. 유연하고 아름답게. 경주는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느러미가 찢긴 물고기처럼 다리가 허우적댔다. 그때, 남편이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 잡고 일어나. 어서.”
경주는 남편 손을 뿌리쳤다. 커피가 엎질러진 바닥에서 짙은 향이 피어올랐다. 경주는 목발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내 힘으로 서고 걸을 거라고.” (「커튼」 중에서)
나는 주저하다 물었다.
“스님, 엄마가 간다고 한 산티아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권도 없이 집을 나갔는데.”
멀리 서 있는 등대의 유리가 햇빛을 받아 유성처럼 빛났다.
“산티아고가 스페인에만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산티아고라고 생각하면 거기가 산티아고지요. 그곳은 아마 어머니 마음속에 품은 섬일 겁니다.”
“섬요?”
“네, 부처님께서는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이라는 섬이라고 하셨지요.” (「엄마의 섬 산티아고」 중에서)
매일 한 시간씩 뛰던 아침 운동을 30분으로 접고 들어오며, 희수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갈증을 식혀줄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지만, 점심 약속을 생각하며 샤워실로 들어섰다. 땀에 전 셔츠와 바지, 속옷을 벗어 바구니에 담고 욕조에 입욕제를 풀었다. 하얀 거품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구름 속에 몸을 담그듯, 천천히 발끝부터 거품 속으로 미끄러졌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거품이 몸 구석구석을 핥는 느낌이 좋았다. 희수는 눈을 감았다. 문득, 숨을 쉬지 않고 물에 잠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다. 한번 3분만 참아 볼까? 그러나 잠수 후 1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무너뜨릴 것 같은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숨을 참는 고통은 가슴보다 머리로 먼저 왔다. 쾅, 쾅…… 무언가 터져 나가는 굉음이 두개골을 쪼갤 것 같았다. 희수는 꿀꺽꿀꺽 비눗물을 들이키면서도 머리를 들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버릴까. 이 지겨운 삶을.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희수를 불렀다. 희수야……. 엄마였다. 엄마 목소리는 아지랑이처럼 나른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더는 숨을 참지 못하고 벌떡 고개를 들었다. 캑캑, 밭은기침이 쏟아졌다. 희수는 연신 기침을 토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얼굴을 핥았다. 희수는 다시 물속에 몸을 담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눈두덩과 입술을, 뛰는 가슴을 적셨다. 희수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거품을 닦아 냈다. (「능을 박차고」 중에서)
추천의 글
반야용선은 한 권의 소설집이기에 앞서 나에게는 자애 명상이다. 흔히 생로병사라는 삶의 커다란 짐 중에 대부분은 제 잘났다는 어리석음이다. 아직도 탐욕에 불타고 있는 나는 연민으로 외친다.
“이 중생을 가엽게 여기시어 긍휼의 손길로 남은 목숨이나마 스스로 열반의 길을 찾아가게 하소서.”
반야용선의 안중익이야말로, 내 이승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잡아보는 보살행의 아름다운 눈길이며 목소리이리라.
-송기원(소설가)
선생에게 소설은 ‘쓰고 읽는’것이 아닌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듣고 보고 기록하는 일, 그 누군가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 네 곁에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 결국은 그게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하성란(소설가) 추천사 중에서
안중익의 서랍 안엔 낡은 것과 새것이 사이좋고 조화롭다.
그 안에서 어머니와 언니, 여동생과 조카가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섣달 그믐밤 밤양갱을 먹듯 한 입 한 입 아껴 읽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장이다.
-강지영(소설가)
저자소개
출판사 편집부장으로 일하며 번역서와 불교 서적을 출간하는 일을 해오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시와 소설 공부를 시작, 2020년 [한국소설] 신인상에 단편소설 「반야용선」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차기작으로 쓴 「문턱」 이 KBS 라디오 문학관 드라마로 선정되었고, 그 후 「문턱」을 극본으로 각색하여 제7회 <늘 푸른 연극제>에 참여 <겨울배롱나무 꽃 피는 날>로 국립정동극장 세실 무대에 올렸다.
공저로 [아스팔트 위의 민달팽이], [돈 워리 비 해피], [비밀번호 0517]. 짧은 소설 [칠십이 시간의 랜트],[여덟 번째 겨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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