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그래도 남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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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135/195, 289쪽 가격 13,000원 ISBN 979-11-92828-52-7*03810 발행일 2024년 4월 27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황수연 소설가가 처음으로 펴내는 작품집으로 삶의 굴곡을 들여다보는 아홉 편의 개성적인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소설 『그래도 남는 마음』의 서사는 화자를 둘러싼 기억의 저장고에서 오래되거나 가까운 기억을 묘사로 풀어가는데, 그 세밀한 묘사의 기술은 정확하고 치밀해 소설의 주제에 활력과 윤기를 더하면서 소설이 지닌 역동성의 능란함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표제작이면서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그래도 남는 마음」(응모작 제목은 ‘체’)은 어머니가 사용하던 ‘체’를 통해 정성 들여 기워 올린 기억의 풍경이 시대의 풍속화로 읽히면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황혼의 블루스」는 집에서 꽤 먼 거리의 시립청소년회관 수영장에 등록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집을 나서야 하는 주인공의 일상과 그 주변 인생 황혼의 모습을 다채롭게 그리고 있다. 마지막까지 독자가 서사의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소설적 장치는 인간 성찰의 순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만년필」의 화자는 오래된 만년필 하나를 줍게 되는데, 그것이 환기하는 기억 속 사랑을 붙잡고 풀어가는 감정의 선이 애잔하고 안타까우면서도 새삼 인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의 절규를 도리어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 두 사람의 비극성을 배가시키는 소설이다. 「두 여자」는 집안의 올케와 시누이 두 여자의 삶을 통해 인생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운명으로부터 당하는 봉변을 통해 여자의 진짜 얼굴을 정직하게 보여주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그들에 관한 연민과 공감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저수지 가는 길」은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 인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남편을 둔 영란의 심리와 처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작가는 비극적 생을 견뎌야 하는 영란의 남루한 일상에 저수지를 소환해 그 일상에 굴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저수지 둑이 터져 마을을 뒤덮고,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은 꿈으로 마무리하는 결말은 어쩐지 독자들을 아득한 슬픔으로 잠겨 들게 한다. 「이웃들」은 우연히 지방선거 유세를 듣고 있던 화자는 서울 외곽지대에 살던 신혼 시절과 욕쟁이 여자를 떠올린다. 그곳은 군사정권 시절 언론인들에게 정부에서 국립공원 한 귀퉁이를 떼어줘서 만든 최초의 조합택지 단지라는, 일명 기자촌이었다. 뒤늦게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 화자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이웃들의 모습과 성격을 마치 한편의 흑백 다큐 느낌으로 들려준다. 이웃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을 들여보는 주요한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둥지」는 계를 만들어 여행을 떠나는 오 남매의 모습과 양태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형제나 가족은 과연 따뜻한 둥지일까 아니면 이제는 그런 따뜻함과 안온함을 바라볼 수 없는 시절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은 가족을 생각보다 애틋하면서도 연약하고 균열이 일어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그려 이 시대의 보편적 풍경을 보여준다. 「시험 감독하는 날」은 이란성 쌍둥이를 둔 여자가 딸아이 학교 시험감독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과 단상들, 시골에서 태어난 여자가 학교에 다니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가로세로 엮은 이야기로 공부에의 애환을 불러오고 있다. 여자와 그 주변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선의 깊이가 삶의 정체성 탐색으로 이어진다. 「나에게도 할말은 있어요」는 남편의 퇴직금과 자신의 퇴직금에다 모아둔 모든 자금을 탈탈 털어 어렵게 상가 주인이 된 화자가 세입자 때문에 겪은 어려움을 담백하게 그려 독자들이 세상살이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분노하지만 격해지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긴장과 객관적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소설의 서사가 값지다.
황수연 작가의 소설 『그래도 남는 마음』에 등장하는 어머니, 남편, 딸, 아들, 형제, 자매, 올케같은 인물들은 언제나 ‘나’의 자화상으로 읽히면서, 소설은 그 자화상들이 모여 만든 다양한 우리들의 풍속화로 세상을 비춘다. 자화상과 풍속화 사이에서 흐르는 숨막히는 긴장은 독자들이 기억의 재현을 넘어서서 우리와 나를 비추어주는 성찰적 세계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목차
작가의 말
그래도 남는 마음 / 9
황혼의 블루스 / 37
만년필 / 65
두 여자 / 93
저수지 가는 길 / 121
이웃들 / 151
둥지 / 181
시험 감독하는 날 / 209
나에게도 할말은 있어요 / 239
발문
힘과 거리로 빚어낸 나와 우리의 구리거울_구효서 / 268
본문 속으로
엄마의 부엌에는 고추를 빻아 가루를 내는 체가 별도로 있었다. 고추를 빻는 체는 시간이 지나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데 쓰는 체는 명절 때 기계로 쌀을 빻아 떡을 만들 때 등, 큰일을 제외하곤 꾸준히 부엌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빻을 양이 적을 때는 언제나 절구로 빻아 손쉽게 가루를 만드는 체를 이용했다. 빵을 만들 때 가루를 치는 일, 콩을 볶아 가루를 만들어 아이들의 밥을 비벼 줄 때, 나물 무칠 때, 채소에 생콩가루를 입혀 끓는 물에 넣어 국을 끓이는 일 등,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일은 일일이 정미소에 갈 필요 없이 차고 넘쳤다. 주방에는 내가 사다 준 커터나 분쇄기가 있었지만 엄마는 늘 절구와 체를 사용했다. 나이가 들어 손목 힘이 약해졌을 때도 절구와 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는 마음」 중에서)
영, 지금 나는 동해의 최북단 바닷가 막사 안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얀 물보라가 검은 바위를 세차게 때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 부서지는 파도에 떠밀려 영이 있는 그곳으로 흘러가고 싶습니다. 이곳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석처럼 포말을 일으키는 물보라와 쉼 없이 넓게 퍼진 짙푸른 바다뿐입니다. 혈기 넘치는 사내아이들을 몰아쳐 정신없이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보이는 건 끝없는 적막과 발가락 냄새나는 군인, 사람이라 칭하지도 않는 ‘군인’들 천지입니다.
문득 ‘나는 왜 여기 있을까’번쩍 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고많은 직업 중 하필이면 군인이 되어야만 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집안의 보이지 않는 관례대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순차적으로 장교가 되었습니다. 나의 형들도 모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의심 없이 장교로 입대해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부산의 사립고등학교 이사장이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아버지는 우리 삼 형제를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던 육사에 입학하는 걸 강력하게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파도치는 한겨울 밤이면 인간사회에서 감성이 풍부하고 말이 통하는 여린 여자와 오손도손 책 이야기를 하며 평화롭게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싹터 오릅니다. (-「만년필」 중에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올케가 곡괭이로 본채에 붙은 뒷방 벽을 부수고 있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을 읍내에 출타 중이었고 어머니는 장에 간 후였다. 나는 깜짝 놀라
“형님아, 벽은 와 부수노?”
하고 물었지만 올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해준 올케의 방은 안채의 큰방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겹집이었는데, 그건 어머니가 올케의 들고 남을 밤에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올케가 무서웠다.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하던 올케가 오빠가 입대를 한 지 6개월이 겨우 지나자, 어머니에게 반기를 들고 쪽문에서 바로 들어가는 비워 둔 뒷방 벽을 부수다니. 올케는 비워 둔 뒷방 벽을 헐어 아궁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방은 쪽문을 통해 정미소와 바로 연결이 되는 방이지만 직접 불을 넣는 아궁이가 없어 추웠다. (-「두 여자」 중에서)
저수지에는 올여름 지독한 가뭄으로 녹조가 파랗게 끼어 물밑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쏟아진 폭우로 물은 갈라진 바닥을 메우고 차올라 수문 반쯤 올라와 있었다. 물 한복판에 있는 깊이를 가늠하는 막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새는 그림처럼 한가롭게 막대에 앉아 고여 있는 물 위에 내려앉은 녹조를 바라보다가 언뜻 사람의 기척을 느꼈는지 휙 날아 산을 향해 날아갔다. 저수지 반대편 입구에는 쓸려 내려온 모래로 언제부턴가 모래밭이 생겼다. 제법 넓은 면적의 밭에는 비닐하우스가 몇 동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인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꼭두새벽 일하며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오래전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둑을 따라 간밤에 활짝 피었을 달맞이꽃이 노란 꽃망울을 닫고 손가락처럼 비죽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지난여름 지인의 전원주택에 갔을 때 빈 땅에 끝도 없이 피어 있던 꽃이었다. 이름처럼 달이 뜨는 밤에 잠깐 피었다가 아침이면 꽃잎을 오므린다는 꽃. 함께 간 여자 셋이 비닐에 거의 5㎏ 정도 꽃잎을 땄었다. 그녀들은 몸이 약한 영란에게 달맞이꽃 술을 담가 조금씩 먹으라며 몰아줬다. (-「저수지 가는 길」 중에서)
욕쟁이 아줌마는 키가 작았다. 옆으로 퍼진 몸매는 작은 키에 더욱 풍성해, 흡사 호박을 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검붉은 피부의 그녀는 외모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취미생활이 유별났다. 손톱만 한 피규어나 액세서리를 모아 붉은색 자개장에 넣어 장식하는 걸 즐겼다. 그런 자개장이 여러 개였다. 아줌마는 틈만 나면 언제나 작은 인형이나 장난감, 피규어, 등의 먼지를 가재 수건으로 일일이 닦았다. 평소의 거친 입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포복절도할 욕으로 좌중을 휘어잡던 배짱이 두둑한 여자. 그런 그녀가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 손톱만 한 인형을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정성스레 닦는 모습이라니. 평소의 행동으론 상상이 안 되었다. 피규어를 닦는 손길은 정갈하고 조심스러웠다. 거침없고 매사 직선적인 성격의 그녀가 어떻게 저런 섬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장신구 수집에 열을 올리는지…. (-「이웃들」 중에서)
남동생이 말했다.
-우리 아부지, 일본서 돈 벌어와 대구 땅을 사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독 안에 넣고 묻어 못 샀다고 하더구만.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내용은 점점 부풀려졌다. 올케가 곁다리를 꼈다.
-그럼 그 많던 돈을 다 어떻게 했대요.
―독에 묻어놓고 있는 사이에 화폐개혁이 된 거래. 그래서 휴지가 되어버린 게지. 그 돈으로 땅을 샀으면 군 전체를 몽땅 사고도 남는 돈이었대.
수연이 기억하기론 당시 고향마을의 온천을 사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일본 놈들이 다시 들어와 빼앗아 갈 거라고 못 사게 했다며, 죽을 때까지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아버지를 보긴 했다.
―내가 들은 건 온천을 못 산 것까지다.
수연이 말했다. 남동생은 누구에게서 독 안에 묻은 지폐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렇게 신화는 만들어지는가 보다. (-「둥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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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연의 소설 거울은 거기에 비추어보는 작가나 독자로 하여금 ‘과연 나구나!’라고 감탄하게 하기보다는 ‘이게 나라고?’라며 당황하게 한다. 그게 나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를 메타인지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낯설게 비추어 보는 것. 자기를 낯설게 비추어보는 거울로서의 소설 자화상.
작품 속 인물들인 ‘우리’를 대상으로 이름할 때는 풍속화일 테지만, 작품 속 인물 중에서도 특히 ‘나’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면 자화상이(autobiography fiction)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황수연의 소설들에는 무수히 동일한 ‘나’가 등장한다. 나의 어머니는 늘 그 어머니고 나의 남편은 언제나 그 남편이며 나의 자식들은 어느 이야기에서든 늦둥이 이란성 쌍둥이이니 당연히 딸이며 아내며 엄마라는 인물은 언제나 ‘나’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풍속화에서 ‘우리’를 그렇게 비추었던 것처럼 새로운 자화상에서도 그런 ‘나’를 낯설게 비춘다.
-구효서(소설가)
작가의 말
그동안 틈틈이 써놓았던 이웃, 혹은 내 인생의 독백 같은 이야기들을 나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누구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보라는 생각에, 서툴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지금도 나처럼 글쓰기가 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너그럽게 보아주기를 기도하며….
저자소개
2017년 동국대학교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21년 제68회 한국소설신인상 (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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