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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김호운 장편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전2권)』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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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소설가협회
댓글 0건 조회 137회 작성일 24-05-14 16:18

본문

1권 979-11-92828-46-6*03810 2권 979-11-92828-47-3*03810 세트 979-11-92828-45-9*04810    발행일 2024년 3월 8일    도화 각 권 17,000원



김호운 장편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기존의 만해 한용운 평전과는 달리 인물들의 성격 부각과 사건의 디테일한 묘사, 대화의 감칠맛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대한제국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합친 50년 정도의 역사를 알게 될 것이다. 만해평전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우리 소설문학사의 자랑이자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승하·문학평론가)


이 소설은

승려, 학자, 시인, 독립투사 만해 한용운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젊은 시절 그에게 도대체 어떤 생의 궤적이 있었기에 이런 1인 다역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해 한용운의 불가 귀의 이전의 편력과 귀의 이후의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서사를 그리고 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가던 한유천(한용운)은 머리가 비상해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서상기』를 독파했고 『통감』을 읽고 뜻을 다 파악했으며, 『서경』을 거듭 읽어서 기삼백주朞三百註를 통달한다. 1896년 17세에 서당의 훈장이 병석에 눕자 스승의 뒤를 이어 학동들을 가르치던 유천은 의병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난다. 나라를 구하고자 참가한 창의군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고향에 가면 옥살이를 할 처지에 놓인 유천은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한다.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절밥을 얻어먹고 있던 유천은 7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녹슨 호미와 아내이다. 집에서 몇 달 머무는 동안 아내가 임신을 하자 계속 있다가는 농사꾼으로 생을 마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집을 나와 떠돌던 유천은 오세암에서 만난 지우스님 인도로 백담사에서 불가에 귀의한다. 이때가 26살이었고 계명은 봉완이다. 봉완은 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편력을 하다가 강대용의 누이동생 강연실과 인연을 맺는데, 둘의 관계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봉완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견문을 넓히는 와중에 일진회 중으로 오인 받아 죽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귀국길에 오른다. 조선으로 돌아온 봉완은 석왕사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국내 불교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망국의 길로 걸어가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눈을 뜬다. 이 무렵 한영스님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시의 묘미를 알게 된다.

다시 백담사로 간 봉완은 학암스님에게서 『기신론』을 배우고 원효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원각경』과 『능엄경』도 배우며 용맹정진하면서 법력이 깊어진다. 1907년 봉완은 건봉사의 만화스님에 의해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로 다시 태어난다. 1907년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해이기도 하다. 일본에 가서 제국의 실체를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한성으로 간 만해는 강연실이 일진회 회원이자 통감부 직원인 이용범의 후처가 된 것을 알게 된다. 지피지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간 만해는 시모노세키, 미야지마, 교토 등지를 순유하면서 신문물과 일본 불교를 시찰한다. 도쿄의 고마자와 학림대학에서는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며 견문을 넓힌다. 조종동의 대표 승려 히로쓰 다케조와, 아사다 오노야마 교수, 일본 유학 중인 최린 등과의 다양한 대화를 통해서 한일관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확립하게 되고, 일본에 정신적으로 예속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일본 여행 중에 일본이 곧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토지사업을 하리라 예측한 만해는 이에 맞서고자 측량기계를 구입하고 귀국 후에는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해 소장으로 취임한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토지 측량을 치밀하게 하고 토지문서를 잘 챙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만해의 예측대로 일본은 1908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토지사업을 실시하고, 토지문서에 없는 땅은 일본의 귀속 영토로 만들어 버린다.

30대에 접어든 만해는 강원도 표훈사에 불교 강사로 취임하지만 한일합병 소식에 절망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개혁운동을 동궤에 놓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 체결 조짐이 보이자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분산하고, 범어사에 조선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해 관장에 취임한다. 1911년 만주로 쫓겨나지만 이때다 싶어 만주지방 독립군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망명 중이던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 독립지사들과 만나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한다. 1913년 박한영 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고 다음 해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한다. 1914년에는 뷸교 경전을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불교대전』을 발행하고, 1917년에는 『정선 강의 체근담을』 발행하고, 1918년 월간 『유심』을 창간한다. 비록 조국 산천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만 만해는 불교계의 핵심인물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만해는 1919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 독립을 천명해 세상에 알리는 일에 목숨을 내놓기로 한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설득해 앞장세우고 문장력이 뛰어난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초안이 넘어오자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 삼장을 추가한다. 소설은 사실상 만해의 주도로 진행되는 기미년 3월 1일의 대한독립운동 과정의 상황을 시종일관 긴박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3월 1일, 탑골공원 옆 태화관에서 모여 독립을 선포하다가 투옥된 만해는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독립운동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1922년 5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창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그해 9월에는 조선학생회 주최로 천도교회관에서 ‘욱바라밀’이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을 한다. 일본이 만해를 다시 구속하지 못한 것은 그랬다가는 무슨 소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6년에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을 발간하고, 다음 해에 항일 단체인 신간회를 발기한 만해는 조선불교총동맹을 발족하고 일제의 불교탄압에 정면으로 맞선다.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민중대회를 열어 장거를 지지한다. ‘심우장’을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고 지을 수 없다고 북향으로 지은 것은 만해의 대꼬챙이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만해는 광복운동의 선구자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셔와 오일장을 지내기도 한다.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조선인 학병 출정을 반대하기도 한 만해는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신경통이 악화 되어 심우장에서 입적하는데, 예순다섯이었다. 

김호운의 장편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이처럼 만해 한용운 일대기의 활동상을 치밀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놓친 부분이나 각종 재미있는 일화들을 발굴하여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입체감 있게 보여주면서 만해를 생생한 인물로 재현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용범의 개심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친일로 돌아선 인물들에 대한 심판조의 비난도 가슴을 후련하게 만든다. 일진회에 몸담았던 친일 부역자들이 마음을 바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시작한 ‘대동단’ 사건은 우리 역사에 묻혀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때 친일분자였던 것만으로 지금까지 역사의 정면에 서지 못한 그들의 활약상을 잘 보여준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 하면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덧붙이면서도, 그 외의 것은 잘 떠오르지 않은 독자들에게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집대성해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소설이다. 


목차

1권

작가의 말


출향   ·10

한성에 나부끼는 열강의 깃발   ·14

인연 따라 가는 길   ·44

해 뜨는 동쪽으로   ·71

바람은 허공에 머무는데   ·95

무명초를 자르고   ·109

병 속을 빠져나온 새   ·132

인연의 끝을 떨치며   ·150

무상은 바람을 타고   ·184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하여   ·223

쓸쓸한 귀국길   ·259

석왕사 쇠북 소리   ·288

다시 병 안에 들어간 새   ·298

배는 기울고   ·323

구름 위를 나는 용   ·351

먼 땅, 가까운 숨결   ·361

동경 하늘에 비는 내리고   ·385

꽃을 찾는 벌과 나비   ·420

외로운 선각자   ·446


2권

고마자와 학림駒澤學林에 들어가다    ·8

설악의 단풍을 그리며    ·30

기우는 대한제국    ·45

불교유신론    ·74

만주로 향하다    ·91

바람처럼 구름처럼    ·125

중생 속으로    ·137

푸른 산빛으로 피어나는 화엄    ·144

폭풍 전야    ·170

풍전등화의 위기를 넘기고    ·226

기미년 독립선언    ·240

철창 안에 빛나는 별    ·266

달아 달아 밝은 달아    ·311

마중받는 자 되라    ·338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369

그칠 줄 모르고 타는 가슴    ·391

심우장에 풍기는 매화 향기    ·402

떨어진 북간도의 별    ·421

혼아, 돌아오소서    ·434


해설

왜 만해 한용운이 우리에게 크나큰 자랑인가_이승하    ·445


본문 속으로

-1권-

유천은 입을 다문 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다. 벌써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학 봉기 때 토벌군으로 나간 아버지가 비명에 세상을 떠난 일을 떠올렸다. 이제 자기마저 쫓기는 몸이 되어 집안이 이미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빛나던 별들이 모두 사라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거듭 생각을 고쳐먹어도 고향으로 내려가 살기는 이미 틀린 몸이다. 의병 활동한 것만도 문제지만, 그보다 그는 더 큰 중죄를 지었다. 홍주 의병은 관찰사 이승우가 의병군에 체포된 뒤 도리어 의병 창의대장이 되어 관권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고향에서 숙사 노릇하던 유천은 그 바람에 의병에 불려 나왔다. 얼마 못 가 이승우가 배반하고 다시 관군으로 돌아서면서 의병 조직이 무너져 버렸다. 내막을 속속들이 잘 아는 관찰사 이승우가 건재하는 한 의병에 참가한 사람을 색출해 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흩어진 의병들을 모으고, 우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홍주 호방의 금고를 털어 국고 1천 량을 훔쳤다. 이미 홍주에는 일본 헌병과 관군, 그리고 일본 앞잡이인 조선인 밀정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의병에 참가한 사람들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의기만으로 모인 의병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5년 전 수구암에서 광덕스님을 만난 뒤 백담사로 갈 때도 유천은 승려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곳까지 가는 동안 그는 마음이 변했다. 차마 머리까지 깎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족과 인연을 끊는 용기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백담사에서 탁발승과 함께 동냥을 나가고 땔나무를 하는 등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기만 했었다. 스님을 생각하면서 몇 번인가 머리를 깎고 싶은 유혹이 일었지만, 그는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그는 곧 백담사를 나왔다. 그곳에서 더 머물면 정말 머리를 깎게 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길로 유천은 승복을 입은 그대로 목탁 하나를 들고 전국을 여행했다. 득도는 하지 않았지만, 절에서 들은 풍월로 염불은 할 줄 알았다. 염불만 하면 먹고 자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광덕 스님을 만나 얻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먹고 자고 똥 누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튿날 일행은 원산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탔다. 지우와 박영근이 부두에 나와 일행을 전송해 주었다.

배를 타는 순간부터 봉완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한 충격에 잠시 얼이 빠졌다. 그가 탄 배는 500톤 정도의 작은 증기선이다. 지금까지 나룻배나 재래식 목선밖에 타 보지 못한 그로서는 이건 대단히 큰 배였다. 더구나 동력으로 움직이는 배는 난생처음 보았다. 그는 혼자서 배 안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조타실 앞에서 방향키를 돌리는 조타수를 한참 동안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사방 검푸른 물밖에 보이지 않는데 열심히 키를 잡고 돌리는 그가 신기해 보였다. 그 옆에서 한 선원이 망원경을 들고 바다 저쪽을 열심히 살펴본다.

그 모습을 보던 봉완은 문득 저 망원경으로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그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은 바로 자기 뒤통수였다. 거울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 뒤통수를 영원히 볼 수가 없다. 거울은 대상을 비추기만 할 뿐 멀리 보는 물건이 아니다. 거울이 아니면서, 앞을 보면서 자기 뒤통수를 볼 수 있는 물건은 딱 한 가지다.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다. 망원경은 멀리 보는 기계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둥근 지구의 지표를 따라 굴절되게 볼 수 있는,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면 자기 뒤통수가 보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타당한 생각인지 어떤지 증명할 길은 없었지만, 가장 멀리 보는 게 결국 자기 자신을 보는 일이다. 불교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멀리 보는 망원경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자기 자신의 모든 걸 볼 수만 있다면, 그건 곧 우주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일이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용운은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질투하고 있다고 한 자기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정말 그녀를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어둠 속에서 웃었다. 이지룡의 소개로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그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가족과 홀로 떨어져 살고 있어서만 아니었다. 그녀는 자태가 아름답고 청순했다. 지금까지 무명 한복에 쪽진머리를 한 시골 여자들만 보아온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관세음보살을 계속 염송했다. 지난번에 새벽같이 그 집을 떠난 것도 이지룡의 호의에 대한 부담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요릿집에 있으면 그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쓰리기도 했다. 마치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누군가에 의해 꺾이는 듯한 안타까움이었다. ‘離苦得樂(이고득락)’을 준 의미는 그러한 어려움을 이기라는 뜻이었다. 염려한 대로 그 꽃이 꺾였다. 이순덕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마자 그의 가슴엔 뜨거운 질투심이 솟구쳤었다. 그것도 친일배가 그녀를 꺾어 간 것이다. 그는 어두운 허공을 향해 합장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허공을 스치는 바람을 보지 않았던가. 그는 이제 와 아녀자 때문에 잠시 허공을 붙잡은 자신의 미혹을 꾸짖었다.


-2권-

한용운은 그제야 잡힐 듯 말 듯 화엄의 실체가 보였다. 신라 불교가 호국 불교가 되었던 이유도 드러났다. 통일신라는 소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계룡산 갑사, 비슬산 옥천사 등 화엄 10찰을 건립하여 외곽을 둘러싸고 안으로 화엄의 향기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탈이 난다. 아름다움에 너무 취한 인간들이 사치와 권력층을 형성하면서 화엄도 무너져 버렸다. 그 원인은 화엄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승가와 귀족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신라 불상이 대부분 금동불이고 규모가 작은 것도 이런 데 연유한다. 불상이 작고 고급스럽다는 건 불교가 귀족 중심의 소수 특권층에만 머무른 흔적이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에는 화엄이 대중 속에서 꽃 피웠다. 동대사에 화엄 대불을 조성하고 대중 법회를 연 것도 바로 같은 의미다.

신라의 귀족불교는 고려 때 와서 비로소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불상이 커지고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대중 법회가 열린다. 불상이 커지는 것은 많은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게 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화엄은 산속에 똬리를 틀고 처박혀 앉은 채 나오지 않고 있을 때였다.


아침 공양을 마친 한용운은 곧장 오세암으로 올라가 버렸다. 오세암 장경각에는 아직 못다 읽은 경전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들어요. 스님은 날 내쫓고, 난 스님을 찾아다니네요.” 강연실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피하고자 하는 건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이러나는 거다. 요석공주로 말미암아 파계한 원효는 요석공주를 탐하지 않았다. 살아 오르는 마음[生心]을 잡은 것뿐이다. 그것이 곧 멸심 아니던가. 살아 오르는 마음을 참고 억누르면 그 마음은 오히려 살아남으려고 더욱 발버둥이 친다.

아무나 원효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대중이 피나는 수행을 하지만, 쉬 마음을 찾지 못한다. 한용운은 읽고 있던 경전을 덮어 버렸다. 항일 지사인 오라버니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그녀가 어쩌면 더 인간적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뒤엉켰다. 별안간 길이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 속에 묻혀 버렸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들었다.


밖에는 무장한 경찰들이 태화관을 물 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경찰은 대표들을 도보로 연행하려고 하였다. 한용운이 소리 질렀다.

“트럭을 가지고 오너라! 걸어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

경찰 지휘자가 연락하여 곧 트럭이 도착했다. 대표들은 차례로 그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에 탄 한용운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3월 하늘이 에메랄드처럼 파랬다. 흰 구름이 그 파란 하늘 위에 한가로이 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슴에는 환희의 감동이 출렁거렸다. 고통받는 2천만 동포를 따뜻하게 가슴에 안고 싶었다. 그들을 태우고 물을 건너는 나룻배가 되고 싶었다. 한용운은 이 아름다운 하늘과 가슴에 일렁이는 환희에 찬 감정을 그냥 두기가 아까웠다. 이 급박한 순간에 그는 한가로이 시상에 잠겼다.


님이여 오셔요. 오시지 아니하려면 차라리 가셔요. 가려다 오고, 오려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죽음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려거든,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셔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아니 보려거든, 차라리 눈을 돌려서 감으셔요. 흐르는 곁눈으로 흘겨보지 마셔요. 곁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사랑의 보에 가시의 선물을 싸서 주는 것입니다.


[님의 침묵]이 발표되자 문단을 비롯한 각계가 깜짝 놀랐다. 그가 시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깜짝 놀란 것이다. 웅변을 잘하고 한시와 시조에 능하며,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주옥같은 현대시를 쓰고 있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또 이 많은 시편 하나하나가 모두 뛰어난 문학성을 지니고 있었다. 문학으로서도 빼어날 뿐만 아니라, 민중을 사랑하는 그의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특히 사람들은 ‘님의 침묵’에 관심을 모았다. ‘님’을 잃어버린 조국으로 비유하며, 그의 확고한 항일의지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단에서는 최남선이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이후, 기미독립선언이 있던 해에 주요한이 ????창조???? 창간호에 발표한 「불놀이」를 자유시의 시초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이들에 비해 공식 발표는 늦었지만, 시의 형태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더구나 그는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발표하였다. 이 많은 시가 한꺼번에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한용운의 병세가 위중할 무렵, 선학원에 있는 김적음 스님은 매일 삼청동 뒷산을 넘어 심우장으로 달려와 침을 놓았다. 그는 가끔 귀한 쌀을 구해 허리에 차고 왔다. 다솔사 최범술이 약을 구해 올라오기도 했지만 이미 한용운의 병세는 한쪽으로 깊이 기울고 있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독립을 한 해 앞둔 1944년 6월 29일, 몹시 무덥던 날 오후였다. 석양이 심우장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던 그 시각에 한용운은 고요히 마하열반에 들었다. 세수 66세, 법랍 40세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김관호가 놀라 한용운을 불렀다.

“선생님!”

대답이 없었다. 김관호는 유씨 부인을 불렀다. 입적을 확인한 유씨 부인과 딸 영숙이 시신 앞에서 통곡했다. 김관호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한용운의 시신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게 화기가 돌았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듯 평화롭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김관호는 혹시 깊이 잠든 게 아닐까 싶어 한 번씩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에는 숨이 끊어지면 시신이 금방 부패한다.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2, 3시에 일어나 손을 닦고 향을 사르고 나서 집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노력을 맑은 정신으로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용운 선사가 추구하려 했던 그 사상의 실체를 복원하여 재현하는 작업이라 미진한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대한 ‘만해 사상’에 얼마나 접근했는지 두렵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업은 누군가 한 번은 시도해야 할 숙제고, 그것을 먼저 했다는 데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이제 만해 선사의 사상이 제 모양을 갖추고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에게 평화의 빛을 비추리라 기대해 봅니다.


저자소개 

소설가, 수필가

1978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단편소설 「유리벽 저편」이 당선되어 등단. 장편소설 [표해록(漂海錄)][바이칼, 단군의 태양을 품다] 등, 소설집[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청소부] [사라예보의 장미]등, 콩트집 [궁합이 맞습니다](전2권) 등, 에세이집[ 연꽃,미소], 칼럼집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 인문학 저서 [소설학림] 등 작품집 30여 권 출간.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녹색문학상. PEN문학상, 둔촌이집문학상, 대한민국 예술문화대상, 리더스에세이문학 대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역임. 현재 국립한국문학관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이사, 산림문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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