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영 자전소설집 『이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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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내면에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
판형 140/210, 422쪽
가격 13,000원
ISBN 979-11-92828-25-1*03810
발행일 2023년 9월 27일
도서출판 도화
이 소설은
정건영 작가가 40여 년 동안 써온 소설에서 11편의 중·단편을 선정해 엮은 자선집으로,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동어반복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작가가 강박관념을 떨치기에 충분한 새로움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양선異樣船』에 수록된 소설은 작가의 경험과 관심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뭉쳐진 총화라고 불릴만하다. 일제 말엽에 태어나 태평양전쟁과 식민지 치하, 해방과 분단, 동족상잔의 6·25동란, 군사정권시대, 월남전 참전, 산업화의 갈등, 국제구제금융시대 를 살아온 작가에게 역사란 끊임없는 질곡의 반복이었다.
소설 『이양선異樣船』에 수록된 「낯선 시간 위에서」 「후에에는 눈이 내린다」 「베트남의 혼령」 「이양선異樣船」 「승계」 「물」 「골패」 「임진강」 「어머니의 눈썹 문신」 「空과 色의 그림자」 「호아글레이·호아글레이」 11편의 소설은 역사적 상황이 시대 혹은 개인과 괴리를 가지면서도 끊임없이 개인을 지배하는 존재임을 완벽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양선異樣船』은 시대나 개인의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드리운 역사의 그림자를 추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순응하거나 극복하거나, 대립하여 저항하고, 파탄하고 고립되며, 살고자 타협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는 그것이 결국은 온전히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식으로 인식하면서, 그것을 개인에게 던져진 역사의 돌팔매가 일으킨 파문으로 묘사하여 깊은 감동을 남기고 있다.
소설이 아무리 독자들이 경원하는 고답적 위치에 남게 되더라도,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생애를 바쳐야 할 대상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작가는 오늘도 동시대를 살아온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의 내면에 드리운 시대의 그림자를 잔잔히 들여다보며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작품의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목차
작가의 말
■단편소설
낯선 시간 위에서
후에에는 눈이 내린다
베트남의 혼령
이양선異樣船
승계
물
골패
임진강
어머니의 눈썹 문신
■중편소설
空과 色의 그림자
호아글레이^호아글레이
본문 속으로
구찌 터널의 숲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위로 저녁놀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와 김시운을 깔아뭉개고 저 멀리 달아나고 있다. 그는 사선 아래 모래밭에 피투성이로 으깨져 누워있다. 아, 거기에 내가, 데이빗이 또한 피투성이로 누워있다. 그러자 문득, 이 낯선 여행길을 언젠가 내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버스와 승객들도 그때의 그 사람들로 신기하게 낯이 익었다. 그때 김시운의 자살도 내 눈으로 보았었고 이제야 동일한 장면이 현실로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시감, 버스에 앉아 구찌의 저녁놀을 보는 내 모습도 과거에 보았던 기억의 재현이었다.
이 낯선 시간이 전혀 낯설지 않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낯선 시간 위에서」)
한 주일을 치른 화마이 데불람 작전 이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은 중대는 기진맥진하고, 침울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장태산의 증세는 더욱 심했다. 대개 점심식사는 상황실에 모여 장교들끼리 하건만 장태산은 전령을 통해 몸이 불편하다는 전갈 한마디를 던지고 며칠째 상황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대에서 날아오는 정보나 잠복초의 배치 문제로 그를 부르면 그는 마지못한 듯 상황실로 왔는데, 권총탄띠나 철모도 없고 정글화는 끈을 매지 않고 질질 끌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암울하게 희번덕거렸고, 볼은 꺼졌고, 입술은 꺼멓게 말라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맑고 선홍빛이 돌던 피부는 어디로 갔는가. 그의 얼굴은 잿빛 어둠이 깔려 칙칙해 보였다.(「후에에는 눈이 내린다」)
본관 계단을 내려서며 문과대학 쪽을 쳐다보았다. 녹물 흘러내린 갈색 석벽에 앙상한 담쟁이 줄기가 깡마른 늙은이의 혈관처럼 불거져 늘어붙어 있다. 그 지하실, 과 연구실에 모여 문예사조를 정리한다고 졸라의 ‘목로주점’을 가지고 끝도 없을 듯 언성을 높여 토론하던 기억이 났다. 어둠이 내리고, 추위와 허기에 쫓겨 껌껌한 복도를 걸어 나올 때의 구두 발짝 소리의 울림, 달콤하게 느껴지던 피곤과 무언가 학문적 형체가 잡혀가고 있다는 즐거움, 교정을 일시에 바닷속의 신비로 몰아넣던 푸른 달빛……. 이런 감상적 분위기를 왈칵 뒤집으며 대장 격인 김일근 선배는 늘 소리 높여 고함질렀다. “배고픈 드라큘라들아! 오늘은 무얼 잡아먹는다? 생과부년? 생피 뚝뚝 흘리는 아다라시?” 그리곤 곧장 빈대떡집으로 가 막걸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었다.(「이양선異樣船」)
“자 봐라. 골패의 요 구멍을 통이라 해. 두 통짜린 통코, 네 구멍짜린 지나, 여기 열두 통짜리 있지, 이건 줄육…….”
할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골패놀이를 가르쳤다. 32쪽 골패가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놀이를 하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사실 할머니의 말을 듣는 체만 했지, 결코 민속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골패를 배울 의도는 없었다.
“야, 잘 봐. 요렇게 짝 맞춰 나가다 보면 요렇게 떨어지지. 요게 홀쌍소다. 이건 활개 치고 나다녀도 걸리는 것마다 재수다. 요렇게 떨어지면 쌍소…….”
“할머니, 옹녀, 춘향이, 심청이, 장화 하던데 그건 뭐야?”
“요망한 것. 별걸 다 귀담아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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