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미결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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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결인간
미결수 시간의 기록과 실존에 대한 증언
-김성달 연작소설 『미결인간』 출간
<목차>
미결인간 K / 9
미결인간 N / 77
미결인간 O / 103
미결인간 S / 133
미결인간 U / 165
미결인간 Y / 193
미결인간 P / 223
해설
미결정 존재자의 어둑한 실존에 대한 증언 / 유성호 / 251
<본문 보기>
K는 어둠이 단단하게 박혀있는 구치소의 벽모서리마다 떠돌던 원형의 새카만 눈알이 기억났다. 그것이 구치소 곳곳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감시카메라의 깊고 검은 눈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한순간도 K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K는 포승줄에 묶인 아침이면 복도에서 매번 그 형상을 만났다. 납빛의 유령처럼 동그란 눈알이 좀처럼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눈알은 오늘도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K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미결수들이 내뱉은 단순한 말이나 짧은 한숨 사이를 배회하며 소름끼치도록 짙고 까만 눈알을 굴리고 다녔다. 그 속에서 불현듯 푸르른 빛을 발견한 K는 그 빛을 쫓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덜렁거리던 교도관의 손이 어느새 묵직한 실체감으로 K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미결인간 K」)
N은 잠을 자다가도 놀라서 벌떡 일어난 것이 한두 번 아니다. N은 영원한 미결인간이 되어 온 우주를 떠돌았다. 확정된 것이 하나 없고 결정된 것은 전혀 없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그런 상태로 무중력의 우주를 빙빙 떠돌았다. N 주위에는 13방 동료들이 같이 떠돌았다. 그들 역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상태로 무중력의 허공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줄곧 답답하고 고요한 무중력 공간을 헤매다가 놀라 눈을 뜨면 새벽이었고, 방 식구들은 모두 곤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N은 그때마다 씁쓰레한 입안을 찬물로 헹구고 자리에 눕지만 떠나버린 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미결인간N」)
O는 ‘가족’이 던져준 여러 가지 생각을 거추장스럽게 매달고 교도관이 열어준 철문을 나와 13방을 향해 걸었다. 문 안의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선 O는 그제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용지물로 붙어있던 손에 무엇인가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방문 앞에 서서 양쪽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서 꼼지락거리며 형체를 잡고 있는 것은 그동안 망각 속에 봉인하고 살아온 자신의 가족이었다. 가족들이 허연 반죽 덩어리 같은 유기물이 되어 손바닥에 잡히며 서서히 형상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미결인간 O」)
얇은 관용 담요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S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 사장이 덮고 있는 담요를 살그머니 잡아당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자신의 것이었던 담요는 펼치면 세 사람도 너끈히 잘 수 있는 크기이다. 이 사장 혼자 칭칭 감고 있는 담요는 미동도 않는다. S는 거친 숨을 속으로 몰아쉬며 담요 한 자락을 덮어볼 요량으로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없다. 이 사장의 몸에 갑옷처럼 단단하게 둘러붙은 이불은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맥이 풀려 담요에서 손을 놓은 S의 이마에 굵은 땀이 맺혔지만 이 사장은 미미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S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다른 사람들도 너무 웃어서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한다.(「미결인간 S」)
40년 만에 다시 수갑을 차고 앉아있는 U는 그때 느꼈던 배고픔과 외로움이 오롯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상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배고픔과 외로움이었다. 그 배고픔과 외로움이 몸을 옥죄고 뚜렷이 표현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자꾸 억울했다. 조서를 꾸미는 형사가 지금이라도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해결하고 합의를 하라고 했지만 억울한 감정에 사로잡힌 U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배고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녀석들에게는 십 원 한 푼 주기가 싫었다.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이 떨어져 구치소로 넘어오면서도 U는 배고픔의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미결인간 U」)
그 순간에야 Y는 비로소 눈물이 난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마음 한구석에 어렴풋이 떠오르다가 지워진다. Y는 앞으로 한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젯밤처럼 앞으로의 시간이나 자신의 무엇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작정이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어쩐지 새로운 길의 시작으로 느껴지는 13방 식구들을 위해서만 기도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응당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갈 용기가 필요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일어난 Y는 머리를 높이 쳐들고 등을 꼿꼿이 세워 힘차게 걷는다. 정말 긴 하루였다.(「미결인간 Y」)
춥고 투명한 겨울 아침이었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눈부시게 투명한 아침 대기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 밥상을 두고 P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었다. 겨울 바다에서 막 돌아온 아버지의 몸은 짜고 푸른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축축했다. (…) 아버지는 뜨거운 명탯국을 입속에 넣으며 마치 성스러운 제례의식의 주문처럼 ‘아, 이제 살 것 같다’는 말만 자꾸 뱉었다. 아침을 먹는 동안 그 소리 밖에 하지 않았다. P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다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버지를 보며 안도하는 얼굴이었고, 아버지는 오늘도 식구들과 둘러앉아 시원한 명탯국을 먹을 수 있어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P에게는 모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곁에 있어 좋은 아침이었다.
P는 어머니가 끓여주는 명탯국을 먹으며 그런 아침을 다시 맞고 싶었다. 여전히 미결인간인 P에게 명탯국 한 그릇이 간절한 아침이었다.(「미결인간 P」)
<추천의 글>
『미결인간』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확정판결을 앞둔 재소자들의 특별한 이야기보다 더 특별한 것은 작가 김성달이 보여주는 인간을 향한 시선의 깊이와 절제된 문장이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이면서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연결되어, 끝내 미결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뒷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실체를 종잡을 수 없는 디지털 문명이 주도하는 초연결 시대에 미결상태로 떠도는 인간의 정처는 대체 어디일까? 작가가 던지는 이 질문의 여운이, 책을 덮고 나서 여러 날 지나도록 가시지 않는다.
-방현석(소설가/중앙대학교 교수)
김성달 연작소설 『미결인간』의 ‘미결인간’은 미해결의 인간이기도 하고, 미결정의 인간이기도 하고, 항구적으로 우리가 해석해가야 할 미답未踏의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 점에서 ‘미결인간’의 소설 시학은 우리 삶을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음각陰刻한 사실적 도록圖錄이자,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끝없이 질문하는 심리적 법정이기도 하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교수)
‘갇힌 인간’에 대한 관찰은 소설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인간이란 무엇이냐?’를 두고, 소설가는 빛과 그림자의 입체를 ‘갇힘’으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작업은 참으로 깊고 넓다. 가령 『죽음 집의 기록』이나, 『이반제니소비치의 하루』 등은 이 일을 가장 잘 해낸 결과물이다. 사실과 사태의 해부, 마음의 그늘로 이어지는 통찰, 해탈한 듯한 익살, 등등 소설적 풍미가 좋은 대표작들이다. 이제 여기 김성달의 작품이 있다. 우리는 앞의 명작들과 또 다른 개성을 만나게 된다. 꿈과 기억으로 고인 감각적인 정서! 요컨대 시적 세계다. 김성달의 『미결인간』은 가장 탁월한 산문 형식 속을 파고든 시적 형상들이다.
-이성준(소설가)
<작가의 말>
이 소설집을 펴내려고 해설까지 준비하고도 5년을 미루다 이제야 세상에 내보낸다. 연작소설 『미결인간』은 애처로운 사람들의 애처로운 이야기이다. 이전에 펴낸 소설 『이사 간다』 역시 애처로운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뜻 이 소설을 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사이 시간은 흘렀고, 출판사 책과 문예지 발행 일을 하는 틈틈이 장편소설 집필에 매달리면서, ‘미결인간’들에게 자꾸 미안했다. 봄이 가기 전에 꼭…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어느덧 한 갑자의 세월을 살았다. 그런데도 세상살이의 문리나 궁리가 여전히 어렵다. 소설은 더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많다. 카프카는 “작가는 인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질문한다”고 했고, 쿤데라는 “소설은 질문하는 예술”이라고 했으며, 박경리 선생은 “문학은 인간의 운명을 묻는 질문이다”라고 했다.
앞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저자 소개>
경북 영덕 출생.
『한국문학』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환풍기와 달』 『낙타의 시간』 『이사 간다』 연작소설 『미결인간』,
평론집 『한국소설을 읽다』 등.
조연현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한국문인협회작가상, 아시아문학상 우수상,
제39회 대한민국예술문화 대상(서울시 의장상) 수상.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이사.
문학저널, 소설앤소설가 편집주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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