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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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
관계의 미학,
그 겹겹의 언어 질감과
색채로 빚은 소설!
이 책은
김호운 소설가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최근에 발표한 신작과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 등단작 등 6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표제작인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는 소설가 오민주를 화자로 내세우면서 피카소와 그의 그림을 소재로 하는 액자형식 소설이다. 피카소의 그림 <맹인의 식사>는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색깔로 여인의 누드를 지운 자리에 맹인남자를 앉힌 그림인데 이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의 심리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르누아르 특별전에서 음울한 분위기인 <맹인의 식사>를 보면서 느끼는 오민주의 심리가 교차하는 이야기이다. 오민주를 이 공간으로 끌어들인 ‘오늘은 소설가 장하진 님의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세요’라는 페이스북 메시지가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다단해진다. 장하진은 코로나19펜데믹으로 세상을 떠난 소설가이다. 이 소설은 피카소의 청색시대, 맹인남자, 외롭게 웅크린 누드, 피카소가 그리다 지워버린 개, 코로나19펜데믹 등의 이미지를 통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하고 진지하게 묻는다. 작가의 지극히 개별적인 감각적 체험이 소설의 수사학적 색채 변환을 통해 독자의 감각 속으로 환기되는 말의 질감이 아름다운 소설이다.
「마제파(Mazeppa)를 위하여」는 장편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겹겹의 사연과 언어로 중첩된 묵직한 작품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헝가리 출신 음악가 리스트 페렌체의 <마제파(Mazeppa> 연주를 처음으로 듣던 과거를 떠올린다. 피아노 연주곡 <마제파>를 중심으로 소설의 시공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마제파>를 들려주던 기억 속의 그녀와 <흰담비를 안은 여인>속 담비의 대조를 통해 독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사랑에의 열정과 역사의 격동기을 그려낸 교향곡 <마제파>의 서사성이 소설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그것을 매개하는 미적 주체와 정치적 인간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있다. 음악을 통해 절대적 세계를 찾아 떠나는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인간에 대한 폭넓은 공감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운동권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인간이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영향력보다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는데 주력해서 더욱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의 녹슨 철모」는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족서사와 ‘철모’가 상징하는 전쟁서사가 ‘녹슨’으로 나타나는 시간서사와 삼각축을 이루면서 존재론적 사유의 들꽃을 피우고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전쟁 중에 아버지가 쓰고 있다가 삼촌 손으로 집에 돌아온 녹슨 철모는 오랜 세월 할아버지의 화로로 뜨거운 불덩이를 담고 있다가 오랜 시간을 지나 고향 집의 화분으로 거듭난다.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은 나는 개국화를 소담하게 피우고 있는 녹슨 철모를 발견하는 순간 정수리가 움푹 들어간, 할아버지가 긴 담뱃대의 불을 붙이던 화롯불 화로로 사용하던 아버지의 철모라는 것을 바로 느낀다. 그리고 “이게 네 애비다”라고 하던 할아버지의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 녹이 많이 슬어 이미 한쪽 귀퉁이가 삭아 부서지고 있는 철모 화분을 신문지로 조심스럽게 싸서 가슴에 안고 고향 집을 떠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버지 부재의 상처와 전쟁이라는 어두운 무게를 꽃으로 피워내 치유하면서, 관계에 대한 성찰로 시선을 넓혀가는 작품이다.
「자주색 감자꽃」은 작가의 시선이 존재론적 성찰에서 사회적 관계로까지 그 지평을 확대하는 작품이다. 북쪽에서 온 실향민 경호 아버지는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민통선 안쪽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가족을 이끌고 재건촌으로 이주하지만 지뢰를 밟아 오른쪽 다리를 잃는다. 목발을 짚으면서도 자주색 감자 농사를 지으며 결코 재건촌을 떠나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경호는 몰래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다. 그 후 서울 구청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해 영월 주천면으로 귀농하면서 그때까지도 민북마을에 살며 아버지 묘를 돌보느라 나오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설득해 모시고 나온다. 농사라고 아는 게 감자밖에 없는 경호는 천여 평의 밭에 감자를 심는다.
감자밭을 하얗게 뒤덮은 감자꽃을 따주어야 하는데 경호는 수확을 위해 꽃을 따야 하는 게 마땅찮아 머뭇거린다. 그러던 참에 자주색 감자꽃을 발견하고 감자를 뿌리째 뽑아서 집으로 가져온다. 아버지가 심던 자주색 감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자꽃을 따지 않기로 한다. 감자꽃이 상징하는 아버지를 통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운명을 의미 있게 증언하는 작품이다. 숙명을 절대화한 닫힌 세계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던 아버지와 그런 그를 경원해 떠나온 내 마음의 경계를 자주색 감자꽃으로 극복하는 지점이 값지게 읽힌다.
「유리벽壁 저편」은 저자의 등단작으로 석이라는 아이의 시선에 비친 두 다리를 잃고 손으로 걸어다니는 삼촌과 동네 길목 산등성이 곳간에서 숨어 사는 미친 여자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삼촌은 걷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먹던 음식을 남겨 곳간의 여자에게 전해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데, 석이는 그런 삼촌이 우러러 존경스럽다. 어느 날 미친 여자가 임신했다고 동네 사람에게 치도곤당하는 현장에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려고 몸부림치던 삼촌은 그날 밤 동네에서 사라졌고, 미친 여자도 함께 보이지 않는다. 석이는 삼촌과 미친 여자가 멀리멀리 도망가주기를 빈다. 소외 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기술해나가는 작가의 문장은 따뜻하면서도 서정적이다. 소설 인물들이 현실에서의 상황은 주어지는 것이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소외를 견디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객관적인 풍경을 단순하게 옮긴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의 정서 그 자국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탁본서설拓本序說」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8년간 복역한 뒤 감형으로 석방된 ‘그’가 신륵사에서 나옹선사비를 탁본 하려다가 만난 탁 노인과의 사연을 그리고 있다. 전보를 받고 달려간 그에게 죽음을 앞둔 탁 노인은 탁본 한 점을 건네면서 탁본 글씨가 김시습의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영웅이 되려고 하면 소인배가 되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하는 자는 역적이 될 것이며 참 임금은 백성 가운데 묻혀서 나타난다”는 내용이라고 알려준다. 그는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든 탁본에서 그런 내용을 읽어낸 탁 노인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그에게 탁 노인은 편지를 내밀며 꼭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편지를 전해 받은 여인은 자신이 탁 노인의 딸이라면서 탁 노인이 자유당 정권 때 이름을 날리던 정객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체포되어 복역하고는 세상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다는 사연을 듣게 된다. 그가 여인과 함께 탁 노인이 살던 곳을 찾아가지만 집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문제를 촘촘한 문장으로 잘 조탁하고 있는 이 작품은 탁본의 서사를 통해 인간과 이념의 다층적인 성찰을 사유하고 있다.
김호운 작가는 그동안 우리 소설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시대 변화의 흐름을 자신만의 언어 속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쉬지 않았다,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 역시 그런 방향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소리와 색채에 상응하는 미학적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소리이든 색채이든 홀로 존재하는 게 없이 언제나 외부조건의 변화에 따라 늘 바뀐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작가의 태도는 인간 존재나 이념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에서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 혹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특유의 긴장을 느낄 수 있는데 그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매개의 관계 미학을 겹겹의 언어 질감과 색깔로 그려내어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폭넓은 공감이 어우러진 소설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 는 사회 속 존재 관계를 탐구하는데도 주력하고 있어 더욱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목차
작가의 말
아버지의 녹슨 철모 / 11
인디고블루와 코발트블루, 사라진 개 / 49
마제파(Mazeppa)를 위하여 / 81
자주색 감자꽃 / 105
유리벽 저편 / 131
탁본서설 / 171
작가의 말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무심코 작품을 썼는데, 우연하게도 사건 하나가 다가와 내 작품 속으로 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마치 신기가 있는 듯 나를 착각에 빠지게 한다. 기시감인지 미시감인지 모를 그런 모호한 개념에 갇힐 때가 있다.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울수록 이런 현상이 더 잦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다. 참보다는 거짓이 진실처럼 난무하는 세상에 서면 이런 혼란과 착각에 빠진다. 이런 세상이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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