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고요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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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코끼리
세상의 고요함을 진동시키는 역동적인 이야기들
김동숙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고요의 코끼리』가 푸른사상 소설선 69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반듯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환대와 적의, 상실감, 고독 등 삶의 한 국면에서 마주하는 감정들을 예리하고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상의 고요함을 진동시키는 역동적인 이야기들이 따뜻하기만 하다.
목차
작가의 말
가장 최근에 만난 사람
고요의 코끼리
노란색 삼선 슬리퍼
짠바람이 불고 있다
불편한 쪽으로 앉으세요
눈부처
낙원 다푸르로 가는 밤
작품 해설 : 정동의 관계론 혹은 감응의 사회학 _ 임정연
작가의 말 중에서
경적 소리에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든 동안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차량의 물결을 눈으로만 좇으며 머뭇거렸다. 알 수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지.
헤드라이트가 뿜어내는 불빛들은 또렷하게 눈부시었지만, 어둠에 잠긴 주변 풍경들은 흐릿하게 낯설었다. 신호대기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시공간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들었던 스스로는 더욱 낯설었다.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고단한 하루를 마쳤을 차량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경적 소리에 떠밀려 무작정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핸들을 꽉 붙들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나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을 조금 흘린 것도 같았다.
오롯이 글을 쓸 수 없는 나날이었다.
백미러에 불안한 눈길을 무연히 던지다 뒷좌석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누군가는 차 안의 소리 없는 혼란을 무름하게 감싸며 고요히앉아 있었다. 고요의 코끼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알 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중략)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긴 터널 앞에서 내게로 와주었던 고요의 코끼리. 이 책을 읽는 분들도 자신 안의 고요의 코끼리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천히, 조금씩.
혹 고요 지역을 여행하다가 코끼리를 만나면 그 행운을 즐겁게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고요의 코끼리가 잠시 당신에게로 왔습니다.
추천의 글
오래전부터 김동숙 작가의 소설을 읽어봐 왔다. 김동숙의 소설에는 아주 낯선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낯선 일들이 가상공간의 일처럼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잘 아는 바로 이웃과 같은 현실공간의 일처럼 벌어진다. 표제작이기도 한 「고요의 코끼리」에 등장하는 ‘고요 코끼리’의 얘기도 소설 속 다큐멘터리의 내용처럼 성장한 다음엔 저마다 독립하여 단독 생활을 하는 ‘고요 코끼리’종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검색해보게 된다.
그보다 더 가상의 현실을 그린 「낙원 다푸르로 가는 밤」도 그렇다. 가상낙원을 그린 소설은 많지만, 그것이 가상인 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현실을 떠나 가상의 세계로 떠나고 싶게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소설은 많지 않다. ‘낙원 다푸르’는 결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감시의 눈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개인의 생활과 마음속의 생각까지 지배해 나가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결국엔 가상의 코끼리 얘기거나 가상의 낙원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의 얘기로 돌아온다. 작품의 얼개를 짜는 것도 얼개 내용을 채우는 것도 반듯한 문장과 치밀한 묘사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김동숙만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고요의 코끼리가 세상의 고요함을 진동시키기 바란다.
― 이순원(소설가)
작품 속으로
누군가 창문을 두들겼다. 고개를 들자 그제야 경적 소리가 멈췄다. 정장 위에 패딩을 입은 남자가 다마스 안을 살피더니 다시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보호자에게 유희 씨가 사라졌다고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고양이는 다시 길거리로 돌아간 걸까. 유희 씨는 어딘가에 또 다른 코끼리를 그리러 간 걸까. 내리는 눈 사이로 하늘을 나는 연에 눈을 떼지 못하던 고양이와 유희 씨가 떠올랐다. 고양이도 유희 씨도 없는 다마스 안의 한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고양이와 유희 씨가 짧은 시간이나마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몸을 떨었다. (「고요의 코끼리」, 57~58쪽)
그날 이후 여자의 기억력은 어떤 부분에서는 아스라이 흐릿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분홍색 방울에 씨처럼 박힌 하얀 점들, 똑같은 방울을 다시 사주려고 시내에 나가다가 만났던 한동네 사람들, 엄마가 자신의 머리를 때려서 머리방울이 부서졌다고 떠벌리던 소라의 작은 입, 그 입을 막았던 여자의 부끄러운 손바닥. 하나를 자책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여자를 끝까지 벌하려는 것인지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과 장소는 소라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소한 말과 행동까지 떠오르게 했다. 소라를 다시 만난다면,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용서를 구할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치매라도 걸렸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베어지고 갈라진 속마음을 털어놓고는 했다. (「노란색 삼선 슬리퍼」, 77쪽)
한때 인터넷에 늪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가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사를 작성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덕성에 심각한 결함이 밝혀져 기사까지 가짜 취급을 받았다. 그중 몇몇은 죽음으로 결백을 호소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인터넷에서 늪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기사까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연고자들이 생체 실험을 위해 늪으로 실려 간다는 소이 노숙자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소문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노숙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뜬소문으로 치부해버리기 일쑤였다. 간혹 어떤 이들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러나 아까시나무 숲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비명횡사를 면치 못한다는 금기가 알음알음 전해져 근접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낙원 다푸르로 가는 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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