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부서진 세월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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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 소설집
부서진 세월의 흔적
<부서진 세월의 흔적>은 빛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기치 않은 ‘부서진 세월’을 겪는다. 2020년도 코로나는 불확실한 지구의 앞날을 예시하는 암울한 부서진 세월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귀향하듯, 자신만의 낯선 밀실로 들어갔다. 앞날은 어둡고, 서로 악수하는 것조차 꺼리는 불안한 상태에서, 확실하게 열리는 길은 하늘을 향한 광대한 시공간. 이 소설은 서로를 갈망하는 두 영혼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시공간을 초월해 만나는 이야기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여자는 집 뒤의 관악산 쪽으로 급히 발길을 돌린다. 그 시간에 자유의 표상 같은 남자도 대개 산책을 나온다. 두 사람은 늘 우연히 만나 눈에 보이는 어떤 세계보다 깊고 오묘한 정신의 집을 지어나간다. 지하방에서 사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그림자 같은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삶을 한 단계 높은 지상, 빛 쪽으로 옮겨놓는다. 결국 부서진 세월의 흔적은 빛과 사랑의 이야기다.
이 소설집의 모든 진술은 구도의 언어 혹은 고백의 언어로 쓰인 담백하고 정갈한 묵상(默想)과도 같다. 동시에 이 이야기들은 정교하게 세공된 문학의 언어로 자기 몫의 생을 완성해가는 모든 존재의 고통과 절망, 그 ‘생명 있음’에 보내는 찬가(讚歌)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처를 교집합으로 한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미묘하고 내밀한 마음의 파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삶이 다른 삶의 응달진 구석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기적같은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의 관계에는 거침없이 요동치는 마음의 격랑이나 세속적인 욕망이 소거되어 있다. 이를 대신해 정서적 교감과 정신적 유대가 고요한 물결처럼 번지고 미풍처럼 감싸면서 서로를 물들여간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은 생기 넘치는 지성과 감성으로 가득차고, 희미하게 잊혀 가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예민하게 일깨운다.
결국 『부서진 세월의 흔적』에 담긴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충동과 방랑의 시절을 통과하고, 고독과 불안의 시간을 견딘 끝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으로 마침내 ‘생명 있음’의 감각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장대한 한 편의 서사와도 같다. 이 길고 고단한 ‘망명’의 여정을 통해 소설은 ‘고통’이 왜 생의 감각이자 생명 있음의 증거인지, 이것이 어떻게 ‘구원’의 조건이 되는지를 탐문해간다.
소설집 『부서진 세월의 흔적』은 ‘부서진’ 세월에도 잔존하던 ‘빛’을 기억하기 위한, ‘문학적 구원’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부서짐 속에 소생하는 빛을 좇던 적막한 시절의 기도이자 부서진 시간의 마디마다 존재하던 빛을 향한 순정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재연
목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장편소설
『황혼 무렵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간다』,
소설집으로 『무채색 여자』 『부서진 세월의 빛』이, 산문집으로
『누군가 나를 부른다』와 『바람의 항구』 (2020년 문학나눔 선정)가 있다. 율목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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